〈 35화 〉폭풍 이전의 고요
모든 장비를 착용하고 나온 나는 순결하고 청순한 아가씨의 모습 그 자체였다.
허리근처까지 오는 찰랑이는 생머리(물론, 라테카움이라는 가발이지만)에 라피카움(전자파 은폐 위장 물질)을 발라 더 빛이 나는 얼굴의 광택.
말 그대로, 순백의 엘프가 윤기나는 머리를 휘날리며 사뿐사뿐 세상을 산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집 밖을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많은 사람들이 내게 관심을 보이며 소곤대기 시작했다.
하피카움(인이어)을 통해서 들어오는 대부분의 소리는 ‘와, 쟤 뭐냐?’, ‘사귀고 싶다’, 그런 것들.
가끔은 참기 힘들 정도로 저속한 ‘벗겨보고 싶다’ 등의 표현들.
나는 셀리카움(초정밀 보호막. 다른 인물로 변신을 가능케 하는 홀로그램의 일종임)을 사용하고픈 욕구를 느꼈다.
—안 돼. 지금 쓸 수는 없어. 혹시 모를 변고를 대비하여 아껴둬야 해.
나는 한숨을 쉬며, 내가 왜 이렇게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것을 싫어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그것은 무엇보다 내가 고아로 자라났기 때문이겠지.
나는 남들이 나의 배경을 아는 것이 두려웠다.
사람들이 내 출생의 비밀을 알고 나면, 동정 아니면 경멸적인 눈초리로 나를 쳐다보았고,
그런 시선에 꿋꿋이 맞선다는 건 정말이지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이런저런 이유로, 나는 사람들로부터 지나친 관심을 받으면 자신감이 더 위축되고 자신이 쪼그라드는 그런 압박을 받는다.
그냥 남들 눈에 띄지 않는 보통의 모습이 내게 편하다. 지나치게 잘 나 보이면 결국 다치는 것은 나니까.
지하철을 타고 가는 도중, 맞은편 젊은 남자 한명이 노골적으로 날 훑어보고 있는 것을 느꼈다.
나는 그로부터 이상한 소리를 듣는 것이 내키지 않아, 하피카움을 껐다.
그리고는 마스크와 전공책으로 얼굴을 가렸다.
—미치겠네. 진짜.
5일 전 이 복장으로 후계자모임을 갔을 때는 종철이가 자기 차로 에스코트를 해 주어서 이렇게 많은 주목을 받지는 않았는데,
대중교통을 타고 가니 사람들이 보여주는 시선의 압박이 생각보다 컸다.
나는 문득 헤프 박사가 내게 준 캡슐을 생각하고, 캡슐을 꺼내어 입에 넣고 삼켰다.
이걸 먹으면 심리적으로 편안해 지며 과도한 스트레스가 완화된다고 했지?
알약을 삼킨 후, 눈을 감으며 빨리 지하철에서 내릴 때를 기다렸다. 저 사내의 시선으로부터 얼른 자유로워지기를 바랬다.
지하철역에서 내린 후, 학교를 향하여 걸어갔다.
따스한 바람이 불어 내 앞 머리카락(자세히는 전자가발의 돌기)이 이마를 간질이고 있었고,
펄렁이는 치마 밑으로 또박또박 걷고 있는 구두 소리가 명쾌하게 들렀다.
복용한 캡슐이 효과가 있었던지, 한결 심리적으로 편안한 상태가 되었다.
그런데, 바람이 너무 심하게 불어서 머리카락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거기에 눈까지 덮어버렸다.
—후~ 머리를 좀 정리해야겠어.
난 악세사리 가게로 총총히 걸어갔고, 그 가게에서 처음으로 머리줄과 핀이라는 것을 샀다.
생각했던 것보다 다양한 용품이 많았는데, 대충 예쁘다 싶은 거 집어다가 계산대에 섰다.
어여쁘신 점원 분께서 계산을 받는다.
“얼마예요?”
“아, 이 리본헤어핀은 5천원, 머리끈은 3천원이네요.”
“비싸네요. 8천냥이면 점심 한 끼인데.”
“딴 데서는 이 헤어핀과 머리끈을 이 가격에 못 사요.”
“네. 그럼 주세요. 점심 한 끼 정도야 친구에게 얻어먹죠. 뭐.”
악세사리를 사기는 샀는데, 중요한 걸 잊었다.
난 머리를 묶을 줄 모른다.
당연히 핀도 처음 꽂는다.
어떻게 머리를 묶는지 몰라 멀뚱멀뚱 젊은 여자점원을 바라보았다.
점원은 왜 안 나가냐고 눈치를 준다.
주눅이 들어, 목소리가 기어간다.
“저기요.. 죄송한데.. 머리 좀 묶어주세요.”
“네?”
“머리는 혼자 잘 감는데, 머리 묶는 건 혼자 잘 못합니다.”
점원이 한숨을 쉰다.
다행히 뒤에서 계산을 기다리는 손님이 없었다.
“어떤 머리를 원하세요?”
어떤 머리? 내가 아는 머리라고는 떡진 머리, 안떡진 머리, 스포츠머리, 올백, 대머리 이게 다인데?
여기서 입을 열면 무식하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뒤에서 악세사리를 보고 있던 아무 여자 한명을 가리켰다.
“저 여자분 머리로 해주세요.”
“포니테일 스타일이면 이 리본헤어핀은 필요 없어요.”
“제가 리본헤어핀 그냥 언니께 드릴 테니까, 머리끈으로 잘 묶어주세요.”
점원이 어이가 없는지 웃는다.
여성용 악세사리 점원답게 머리 묶는 솜씨가 대단했다.
머리를 쓱싹 돌리고 꼬고 하더니 머리끈으로 단정하게 묶었다.
훨씬 시야가 탁 트인 느낌이다.
“와. 신기하다. 이렇게 하는 거군요”
“손님, 리본헤어핀 가져 가시구요, 대신 우리 가게 많이 찾아와 주세요.”
“네. 종종 배우러 올 게요. 여자 되기 쉽지 않네요.”
점원이 이상하게 나를 보더니 또 웃는다.
내가 이걸 배워봤어야 알지.
가게 시계를 보니 수업시간이 거의 다 됐음을 알았다.
나는 학교로 부리나케 뛰어갔다.
구두도 신었는데, 이렇게 뛰어가면 발목이 나가겠는걸.
대학교 정문에서부터 강의실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열심히 뛰어 경영대 건물 정문까지 도달했는데, 경영학과 4학년 소찬배 선배가 눈에 보였다.
아는 얼굴이라고 반가워하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평소엔 항상 진지한 성격의 찬배 선배가, 나의 인사를 받고 놀라며 묻는다.
“안녕하세요. 근데 누구세요? 이런 누추한 곳에 왜?”
작년에 신축한 우람한 공대 건물이 순식간에 누추한 곳이 되어버렸다.
예쁜 여자는 이런데 오면 안 되는가 보지?
선배의 놀란 얼굴이 재미있어서 한번 장난을 쳐보고 싶었다.
“찬배오빠. 수업 들으러 오셨네요?”
“아니, 오빠라니? 나를 아세요? 나를 왜 아세요?”
알아줘서 불만인가 보다.
자기의 이름이 불려지는 것에 대한 감격이 표정에서 읽혀지는데, 말투는 따지고 있었다.
푸하하하 호탕하게 웃어주고, 목소리를 저음으로 깔았다.
“찬배형, 정신차려! 나라고. 이한얼. 진짜 웃겨서 이 짓 못해먹겠다.”
찬배형이 ‘말도 안 돼’를 몇 번이나 반복하더니 제 정신이 아닌 채로 퇴장하였다.
나는 그렇게 선배 한명을 얼빠지게 만들어 버렸다.
그러다 경영대 정문을 막 뛰어 나가려는 종철이를 만났다. 종철이가 나를 보더니 놀라며 한마디 한다.
“너... 왜 옷과 얼굴이 그따구야?”
“이게 뭐 어때서?”
“공부하러 온 자세가 아니잖아. 드디어 어장관리에 뜻을 세운거야?”
그 녀석의 복부를 가볍게 주먹으로 강타했다.
화를 버럭내는 종철
“아프다고, 이 뇬아!”
“조용히 햇! 쪽팔리게.”
“하렘물 찍으러 왔으면 남자나 꼬셔. 남자 팰 생각 말고.”
다시 주먹을 쥐어 보였다.
종철이 조용히 궁시렁 거린다.
“진짜 내 팔자 서럽다. 내 주위엔 억센 뇬들 밖에 없어.”
“뭐? 나랑 승지?”
“게다가 내 등꼴 빼먹는 것들.”
“그만 궁시렁대지.”
후후, 종철이의 궁시렁은 항상 생활의 즐거움을 준다.
그래서 그 궁시렁 때문에 이 녀석을 놀려 먹기 일쑤지.
“종철아, 근데 너 어디 가냐?”
“억센 뇬 1 만나러. 너는 억센 뇬 2고.”
그 뒷말까지 굳이 할 필요는 없었는데.
뒤 끝이 강한 녀석이다.
“승지는 왜?”
“등꼴 빼주러 간다.”
이 녀석이 승지의 집안 배경을 알고 나면 저렇게 툴툴댈까?
승지의 집안 내력을 알려주려다가 말았다.
그럼 아무래도 둘 사이가 어색해지겠지.
종철이 녀석이 스스로 알아내는 게 좋겠다.
“그래, 잘 만나고 오렴.”
“씨바. 생각해 보니 열받네. 과제는 혼자 힘으로 해야 하는 거 아냐? 그뇬은 왜 항상 내껄 베껴?”
승지와 종철은 수업 하나를 같이 듣고 있다.
둘 다 해커라 그런지, 컴퓨터를 부전공하는 걸로 아는데.
네트워크 설계라던가, 그 과목을 같이 듣고 있지.
오늘이 그 수업이 있는 날이구나.
“참, 안에서 지혁이 형이 너 기다리는 거 같던데?”
“지혁 선배가?”
“그 형이랑 제법 잘 되어 가냐? 그러고 보니, 네가 오늘 이렇게 차려 입은 게 님보고 뽕딸려고..”
“시끄럽! 꺼져.”
종철이는 내말대로 꺼져 주었다.
승지에 대해 툴툴대고 있지만, 저 녀석 마음에 제법 승지가 들어가 있다.
종철이 본인은 몰라도, 좋아하는 마음은 티가 나게 마련이지.
지혁 선배가 강의실 앞에서 서성이고 있었다.
왜 강의실 안에 들어가지 앉고 저러고 있는 거지?
고개를 꺄우뚱하고 있는데, 지혁 선배가 나를 봤다.
그의 안색이 살짝 변했다.
“너, 무슨 일 있어? 오늘?”
“알바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입고 왔어요.”
“아, 알바...”
“왜 강의실에 안 들어가고?”
그가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기다렸다가 같이 들어가 앉으려고. 상의할 것도 있고 해서.”
어째 점점 바보가 되어가는 것 같은 지혁 선배.
그의 모습이 종철과 연상되어서 피식 웃었다.
뒷머리를 북북 긁는 건 종철이가 잘 하는 버릇이라고요.
강의실 안에 들어가니, 구석에 두 자리가 비어 있었다.
나와 지혁은 나란히 앉았다.
몇 몇 학생들의 시선이 우리 쪽에 와서 꽂혔다.
아마 내 옆에 앉은 지혁이에게 부러운 눈치를 보내는 것이겠지.
지혁이 약간 나의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다.
“얼아, 조만간 누님을 만나자, 우리 둘이 같이.”
“지혁선배의 누님이라면 박하영 SH E&M 사장님이요?”
고개를 끄덕이는 박지혁.
“송준수 측에서 곧 액션을 취할 것 같다. 큰 누나한테.”
“진짜요? 드디어 박광혁의 축출을 위한 계획이 시작되었군요.”
“다음 달 주주총회가 있어. 이제 본격적으로 액션에 나서야 할 때인 거지.”
하지만, 저는 벌써 오늘 액션을 취합니다.
오늘 그 당사자를 만나러 가니까요.
“예전에 네가 프리젠테이션할 때 언급했던 것처럼, 네 오빠가 전달자의 역할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돌에게 미리 언질을 해 놔.”
“네. 그럴 게요.”
지혁이가 잠시 말을 끊고 말꼬리를 길게 늘어뜨렸다.
“얼, 오늘 알바 안 갔으면 좋겠는데...”
“제 밥줄입니다. 절대로 빠질 순 없지요.”
“너, 지난번에 나한테 돈 많이 뜯어갔는데? 굳이 알바할 필요가 없잖아?”
“그건 그거구요. 돈 열심히 벌어야 잘 살죠.”
“그럼 어쩔 수 없고.”
지혁이 약산 서운해 하는 눈치이다.
어디 데이트라도 할 생각이었나?
여튼, 나는 박지혁에게 오늘 박광혁과 만나는 사실을 이야기할 지 살짝 고민해 봤다.
결론은 지혁이 모르게 박광혁을 만나야 한다는 것.
박광현을 만나 그의 정체를 확실하게 알기 전까지는 오늘 미팅을 지혁에게 알려서는 안 된다.
그래도 오늘 광혁과의 개별 모임이 끝나면, 만난 내용을 보고할 수는 있겠지?
“지혁 선배, 대신 밤에 전화 드릴 게요. 그때 꼭 받으세요.”
“나를 설레게 해주는 말, 꼭 부탁할게. 오빠 보고 싶다거나 어서 와달라고 하거나.”
“우씨. 웃기고 있네.”
나는 바로 반말로 그를 타박했다.
치. 말도 안 되는 소리!
나는 이때까지는 그의 농담이 정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로 치부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