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6화 〉승지와 종철
[종철이의 관점]
나는 카페를 겸한 음식점에서 승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벌써 시간은 1시를 넘어서고 있었고, 아침도 먹지 못하고 지금까지 굶주렸던 나는 내 손가락만 쭉쭉 빨고 있었다.
그래도, 초인적인 인내로 여태껏 견딘 것은, 승지의 승냥이같은 협박때문이었다.
<내가 올 때까지 기다려. 혼자 쳐 먹으면 가만 안 놔둬!>
그렇게 나에게 전화로 협박질을 해놓고서는, 본인이 늦는다.
도대체 이 여자는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그녀의 괴팍한 성미를풀어줄 대상이 왜 한필 나인가?
요즘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자괴감이 든다.
그리고 그럴 때면 언제나 그렇듯 그녀와의 첫 만남을 떠올려 본다.
*
경영대 정문 본관 앞에서, 금발로 염색한 단발머리의 그녀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키가 160즈음 될까? 생긴 건 귀엽게 이쁜 얼굴인데, 옷 입는 게 거친 톰보이 스타일이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녀를 한번 슬며시 보고 지나가는데, 그녀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기요..”
“왜요?”
“경영학과 학생이세요?”
“그런데요?”
“박지혁이라고 알아요?”
알지, 잘 알지. 요즘 나 말고 딴 놈한테 일거리를 주려는 그 얍삽한 새끼.
“내 선배라서 알기는 압니다.”
“그럼, 그 놈한테 나 여기 있다고 전해줄래요? 승지라고 하면 알거여요.”
그놈? 지혁이에게 무슨 악감정이 있나?
이 여자의 부탁을 들어주는 게 귀찮아, 살짝 짜증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폰 놔둬서 뭐해요? 가지고 있는 폰으로 메시지 보내세요.”
“폰을 집에 놔두고 와서 그런 건데... 근데, 무슨 불만 있으세요?”
“아닌데요?”
“근데 왜 나한테 성질부리세요?”
이 여자가 눈을 길게 흘기며 나한테 따진다.
내 말투 속에 감추어진 귀찮음과 짜증을 기막히게 끌어내어 버렸다.
“아..알겠다구요. 거.. 기다리세요. 지혁 선배에게 전달해 줄게요.”
나를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그녀를 뒤로 하고, 얼른 강의실로 뛰어 들어갔다.
때마침, 지혁 선배가 홀로 앉아 있었다.
아직, 얼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저, 형. 어떤 여자가 형 찾는데?”
“여자?”
“승지라고 하던데.. 근데 형이 그녀에게 뭐 잘 못 했어? 형보고 그놈이라 하데?”
“아! 승지....”
지혁이 형이 뭘 잊었다는 듯 탄성을 지르다가, 주머니를 뒤진다.
그리고는 USB하나를 꺼내 나한테 주었다.
“이거, 승지에게 갖다 줄래?”
“아니, 형이 직접 주면 되잖아?”
“노노. 난 승지를 보면 안 돼. 절대로. 그녀가 날 미친 듯이좋다고 쫓아다니고 있거든.”
지혁이 형이 씩 웃으며 USB 전달을 부탁했다.
어째 저 웃음이 껄적지근했지만, 이번 부탁은 들어주기로 했다.
그래도 지혁이 형이 내 물주인데, 지금 잘 해 두면 나중에 내게 돈 되는 일을 물어다 줄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그 USB를 주머니에 넣고, 승지라는 여자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저, 이거 지혁이 형이 전달해 주라는데요?”
USB를 주머니에서 꺼냈다.
승지가 재빨리 그 USB를 한 손으로 낚아챘다.
“내가 여기까지 왔는데, 그 인간은 코빼기도 안보이네.”
그녀가 차갑게 투덜거리는 소리에, 난 드디어 하지 말아야할 소리를 지껄였다.
아무래도 지혁 선배에 대한 감정이 안 좋았던 때라, 그를 씹고 싶어서 미친 소리를 지껄인 것이다.
“지혁이 형 좋아하세요?”
“네에?”
승지가 이게 웬 개소리냐 듯 나를 쳐다보았다.
“원래 재벌 집 아들이 싸가지가 없어요. 잊어버리세요. 그런 놈 쫓아다녀봐야 정신건강에 안좋아요.”
“............”
“원래 부족함 없이 과하게 잘 사는 인간들이 그렇죠, 뭐. 남 무시하고.”
어이가 없던지, 승지가 씩하고 웃었다.
난 진심으로 말해 준 건데, 비꼬듯이 웃으니 기분이 슬 나빴다.
“충고 고맙게 받죠.”
“고마우실 것 까지 없죠. 저도 당해봐서 아니까 말씀드린 거여요.”
“그럼 저도 충고 한 마디 할께요.”
“네?”
“주제넘게 나서지 좀 마, 새꺄.”
나는 승지의 급작스러운 반말 공격에 눈이 동그래지며 당황했고,
승지는 비웃음을 날리며, 등을 돌려 사라져갔다.
만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반말을 던지다니, 예의장머리라고는 없는 여자였다.
저런 여자와는 상종을 하지 말아야지.
난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와의 인연은 별 일 없이 끝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운명의 신은 나와 그녀를 억지로 엮어주었다.
난 그날 밤, USB가 바뀌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한필 내 주머니에 한얼이에게 줘야 할 USB가 들어 있었고, 지혁에게서 받은 USB를 같은 주머니 속에 섞어 놨으며, 그 두 개의 USB 외양이 똑같았던 것이다.
나는 한얼이에게돌려줘야 할 USB를 승지에게 줘 버린 것이다.
더 놀라운 건, USB안에들어있는 내용이 똑같았다는 것이지.
그 다음 날, 어쩌다 그녀를 또 만났고, 대화 끝에 서로가 해커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지혁이 형이 날 배신하고 고용했던 해커가 바로그녀임을 알게 되었다.
*
거기까지 생각에 잠기던 중이었다.
나의 생각은 누군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면서 멈추었다.
카페를 막 들어 온 여자는 승지 비슷하게는 생겼는데, 승지는 아니었다.
머리를 단정히 묶고 다소 짙은 화장에 핑크빛 스커트를 입은 귀여운 여인이었다.
숨이 가쁜 듯이 몰아쉬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의 양 볼이 유달리 빨개보였다.
맑은 그 큰 눈빛으로 사방으로 쳐다보며, 손으로 덥다는 듯이 손부채를 부치는 게 제법 귀여웠다.
―헐. 오늘 미모의 여인들 두 번 보는군.
한 번은 바로 좀 전에 본 이한얼. 또 한 번은 지금 눈앞의 이 여자.
오늘은 참 운이 좋은 날이다.
복권이라도 사야 하나?
순간,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이럴 때 보통 졸도라는 표현을 쓰지.
가슴이 터져 죽는 줄 알았다.
다행히, 정신줄 붙잡고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을 회피했다.
누군가는 그랬다.
어떤 미인은 근처에만 가도 그 주위 공기가 다르다고.
그 미녀가 공기를 다 빨아들여서,근처에 있는 사람들은 산소가 부족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내가 딱 그 짝이다.
설레임이라는 바이러스가 폐에 들어와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답답해졌다.
근데 저 여자 어딘가 얼굴 모양새가 매우 익숙했다.
어디서 봤더라?
그 찰나에 TV속 연애인들을 모두 머릿속에서 스캔해 보았다.
그녀가 구두를 신고 왔는지 바닥을 지긋이 누르며 또각 또각 내게로 왔다.
과일과 꽃 향이 은은히 함께 어울려 저 여자의 구두 소리를 타고 같이왔다.
이 모든 것들이 나에게로 와서 멈추었고, 저 여자의 입에서 아름다운 향기가 들렀다.
“뭐하냐?”
“제가 뭐하고 있는 걸까요?”
저도 모르게 왜 이 말이 나왔을까?
이 여자가 깔깔 웃는다. 그런데 웃음소리도 그렇고 목소리도 매우 익숙하였다.
“알면서 그러는거냐? 아님 진짜 바보인거냐?”
갑자기 반말 모드이다.
가만, 그러고 보니.
“승지?”
“그래. 승지. 놀랐냐?”
“네 머리, 머리가 언제 자랐어?”
“이거 붙임머리 한 거야. 감쪽같냐?”
다소 긴 흑발의 머리카락이 그녀의 뒷목을 감싸고 어깨에까지 내려앉았다.
“그럼 너 지금까지?”
“누구한테 잡혀서 미용실에 있었다.”
“안경은?”
“너 바보니? 나 렌즈 꼈잖아.”
“그런데 너 오늘 왜 이렇게 꾸며서 온 거야?”
“이따 밤에 사내새끼 하나 만나야 한다.”
그럼 소개팅 복장이로군.
역시 여자는 변신의 귀재임에 틀림없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얼굴이 이렇게 환골탈태하다니!
“그럼 좋은 기회다.”
“뭐?”
“다리 좀 보자.”
“이 새끼 죽을래!”
승지가 예의 그 익숙한 욕설을 퍼붓는다.
그 덕에 한 대 세게 머리통 두들겨 맞았다.
졸라 아팠다.
그래도, 나는 승지의 스커트위에 드러난 하얀 다리를 보았다.
이 정도면 큰 소득이지.
“이거 들고 오는 게 무겁다.”
승지가 낡은 군청색 가방을 테이블에올려두었다.
승지의 현재의 복장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 떨어진 그 천가방이 나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승지가 가방에서 노트북을 주섬주섬 꺼냈다.
노트북 떼깔이 제법 좋아 보였다.
“승지야, 이거 못 보던 건데? 꽤 좋아 보인다.”
“어. 우리 하비서.. 아니 대장이 사줬어.”
“대장?”
“아빠라고 해두지 모. 이걸로 출장알바도 할거야.”
출장알바? 어감이 좀 거시기 하다.
내가 묘한 눈치로 그녀를 쳐다보니, 그녀가 성질을 낸다.
“뭘 상상하는 건데? 하긴, 살색으로 도배한 동영상만 보는 놈이 그러긴 할 거야.”
“승지야, 목소리 좀 낮춰.”
“네가 자꾸 목소리 높이게 만들잖아.”
주위 시선이 따갑게 느껴진다.
정말, 주먹도 세고 소리도 큰 뇬.
자기 전공이 음대라 그런지, 소리를 묵직하게 멀리 보낼 줄 아는 발성법을 배운 모양이다.
참, 이 여자 콘트라베이스가 전공이지.
평소의 행실로 보면, 당췌 이 여자의 전공을 추측할 수가 없다.
“출장알바가 뭔데?”
“찾아가는 데이터복구 서비스. 이외로 이게 수요가 좀 있는데, 사람들이 무거운 컴퓨터를 매장까지 들고 오려면 좀 힘들잖아? 직접 내가 이 녀석을 갖고 다니며 고객의 집이나 직장에 있는컴퓨터의 데이터를 복구해주는 거지.”
오, 승지에게 이런 장사머리가 있다니?
“데이타 복구 하는 게 쉽지는 않을 텐데?”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실은 아주 간단하거든. 그러니까 우선 고객들한테 개드립을 좀 쳐야 해. 알아듣기 힘든 용어 쫙 말해놓고 ‘아 시간 오래 걸린다, 데이터 복구 어려운거다’라고 몇 번 튕겨주어 고객들에게 불안감을 잔뜩 증폭시켜. 그래야 지들이 내는 수리비 아깝다는 생각을 안 하지. 그다음에 이 노트북을 컴퓨터에 연결하고, 이 안의 프로그램을 딱 실행해주면 바로 지워진 데이터가 10분 안에 쫙~~. 그냥 10분간 고객과 노다리까면 끝.”
“데이타 복원이 그리 쉽게 된다고? 깨진 파일이나 그런 것들 다 바이너리 코드를 일일이 손봐줘야..”
그녀가 내 말을 막고, 자신의 노트북을 자랑스럽게 내게 보여준다.
“지금 이 노트북이 말이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거든. 완벽하고 깔끔하며 신속하게 일처리해주지. 네가 말한 구석기적 방식이 아닌 최첨단 방식으로다가. 얘가 다 알아서 해준다고.”
“손님은 많아?”
“아직. 열심히 인터넷에 홍보 중. 근데 생각보다 데이터 복구 신청이 많아. 오늘도 예약이 한 건 잡혔다.”
“오오.. ”
그녀가 갑자기 눈빛을 반짝이며 내게 다가와 진지하게 말했다.
저럴 때마다 승지가 무슨 말 할지, 난 무섭다.
“너도 복구 필요할걸? 너 아오이소라 언니보다가 엄마한테 걸려서 질질 짜며 동영상 지웠다며? 파티션 분할만 안 한 포맷이면 말끔 복원 가능하다. 어때, 싸게 해주랴?”
“그걸 어떻게 알았..?”
“진짜 그랬던 거야?”
그녀가 놓은 덫에 걸렸다.
난 한 번도 그걸 누구한테 말한 적이 없었는데, 이 사악한 여자의 낚시질에 걸려 버린 것이다.
옆에 혼자 공부하던 아가씨, 손으로 입 가리며 웃고 있었다.
다 들었네, 다 들었어!
“지혁아, 이제 곧 수업이라 한가롭게 노닥거릴 시간 없어. 빨리 점심 먹고 숙제 좀 베끼자.”
“좋아. 그럼 점심은 네가 쏘는 거다.”
“콜. 단, 과제의 퀄러티가 좋지 않으면 네가 쏴.”
베끼는 주제에, 과제의 품질 따지고 있지는 승지가 어처구니없었다.
이런 정말 구제받지 못할 여자 같으니라고.
“승지야. 이 집은 시그내쳐 돈가스가 맛있다. 그거 먹자.”
“그거 비싼 거냐?”
“이 집의 돈가스는 싸기 때문에 시그내쳐야.”
“좋아, 그거 시켜”
끝까지 독한 뇬.
어찌 보면, 이한얼이랑 판박이이다.
“야, 우리 커피 주문도 할까. 뭐 마실래?”
“내가 싸게데이터 복원 해주는 댓가로 네가 쏘는 거지? 아이스카페모카로 부탁해요.”
난 복원하겠다 이야기도 하지 않았는데 승지가 자기 마음대로 싸게 해주겠단다.
하지도 않을 데이터 복원을싸게 해주는 대가로 내가 커피를 산다?
이게 무슨 시츄에이션일까?
내가 호구 짓을 하는 게 아닌가 중얼거리며 주문 데스크로 나아갔다.
데스크에서 언뜻 바라본, 항상 보던 여자지만 지금은 낯선 이 아가씨.
내 과제를 꺼내어 열심히 베껴 쓰고 있는 저 가증한 아가씨의 입가로 햇빛이 비추는 것을 바라보면서, 그래도 마음이 설레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 설레는 마음으로, 나는 사이좋게(?) 그녀와 점심식사를 마쳤다.
승지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과제 베껴 쓰기를 다 끝내고 나한테 물었다.
“지혁아, 이따 수업 끝나고너 뭐해?”
“왜? 데이트하자고?”
“또 김치국 마신다. 나 알바하는데 따라가 줘!”
알바까지 따라가 달라니?
나 오늘 과제 좀 해야 하는데.
못 이기는 척 가줄까?
“남 영업하는 데 왜 가?”
“밤에 놀아주고, 소라 언니 다시 보게 해줄게. 공짜로.”
“아 씨. 파티션 포맷해버렸단 말야.”
좀 창피했다.
남들 다 들으라고 큰소리로 그런 대화 해놓고,둘이 서로를 재촉하여 카페를 나갔다.
그래도 나보다는 승지가 더 창피할 것이다.
그 어여쁜 꼬라지로 거친 말을 주고받았으니, 얘가 더 창피한 거면 된 거지.
수업시작 10분전, 학교 안까지 가는 버스를 타기위하여 급히 정류장으로 이동했다.
가는 길이 불편한지, 그녀는 궁시렁거리며 움직였다.
그녀에게는 치마도 불편하고 구두도 불편하고, 꽉 쪼이는 옷도 불편할 것이다.
길을 가며 몇 분의 남성분들이 다 한 번씩 이 변신한 마녀를 입 벌리며 쳐다보았다.
아마 승지는 그 눈빛도 매우 불편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