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7화 〉하비천의 숨겨진 능력
수업이 끝난 후, 승지가 알바하는 곳으로 이동하는 지하철 안.
오후 4시.
사람들이 제법 붐볐다.
승지에게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고, 나는 서서 가고 있는 중이었다.
“야, 종철”
“왜?”
“이알바 같이 하자.”
“너 혼자 해.”
―퍽
내 정강이를 걷어차는 그녀의 구두 끝이 맵다.
오만상을 다 찡그렸다.
“제발 좀 말로 하자고.”
“싫어. 야, 이 알바 같이 하자.”
“이건 협박인거지?”
“잘 아네.”
안하무인인 여자.
정말 해도 해도 너무 한다.
너무 하긴 한데, 마음 한구석에는 그런 제의를 한 승지가 슬쩍 고마워 진다.
“수입 배분은?”
“8대 2”
“넌 날 바보로 아냐?”
“어. 적어도 나한테는.”
저번, 이 여자와의 해커 내기에서 지는 바람에 아직까지 이 고생이다.
그때부터 내가 머슴이 되어 버린 거다.
“하는 걸로 알겠다.”
“알겠다고. 내가 언젠가 네 만행을 다 적어서 노동부에 고발할거야.”
“지렁이가 꿈틀댄다고 뱀장어 되지 않거든. 한 번 해봐.”
그 짧은 시간에 나에 대한 파악이 다 끝난 듯 했다.
승지는 이미 나를 허약체질의 허세덩어리로 범주화시켜 놓은 것이다.
그래도 경영학과 출신인 내가 콘트라베이스를 폼으로 들고 다니는 승지보다는 똑똑한데.
내가 궁시렁대고 있는데, 나를 흘끔 보며 말을 꺼낸다.
“오늘 밤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소개팅이 있어.”
“그래, 잘 하고 와.”
“내가 그거 억지로 하는 거라, 금방 파토내고 올 거야.”
“그래? 그럼 대충 하고 와.”
“내가 그거 끝나고 놀아 줄 테니까, 소개팅 장소 근방에서 대기하고 있어.”
이 여자가 오늘 밤까지 책임을 지겠단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제안에 좋아해야 하는 건가?
“그거 그래도 되는 자리야?”
“그럼. 특별히 널 위해서 소개팅 대충 하고 오는 거니까 영광으로 알아.”
그녀가 말은 대충 했지만, 그 대충 한 말에 나는 심쿵했다.
이 여자가 왜 굳이 나랑 놀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준다면 나야 고맙지.
그녀가 잠깐 어디엔가 전화를 걸고 있었다.
무슨 하씨를 소환하여 통화하는 것 같은데, 소개팅 장소까지 자기가 직접 가겠다고 말한 듯 싶었다.
오늘 승지가 알바하러 간 곳은 개인집이었다.
내가 그 고객이랑 통화하고 그 고객의 집 벨을 누르고 우리가 왔노라 소리 질렀다.
분명히 알바는 승지가 하는데, 내가 바람을 잡았다.
문을 열고 보니, 한 아저씨가 떡 진 머리에, ‘I’m Crazy’ 써져있는 검은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티셔츠가 체구보다 훨씬 작아 배꼽을 드러내는 추한 몰골을 하고 있는 아저씨가 배를 북북 긁으며 나왔다.
“안녕하세요.”
내 뒤의 승지가 그를 보고 인사하자, 깜짝 놀란 아재가 자기 배꼽을 손가락으로 급히 가린다.
연탄을 헤집고 왔는지, 때 낀 검은 손톱이 인상적이었다.
배꼽이나 손톱이나 둘 다 썩 과히 보기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 아재가 나를 보고 ‘이쪽입니다’라고 안내했다.
“제가 할 게 아니라, 제 뒤의 이 여자가 복구할 건데요?”
그 말을 듣자마자, 아재가 부리나케 자기 방으로 달려갔다.
아마도 침대위에 팬티 몇 개는 널려 놨나 싶었다.
아니면, 컴퓨터 각 폴더마다 야동 체크를 하고 있던가.
방에 여자가 오면, 번거롭게 할 일이 한 두 개가 아닐 것이다.
얼굴이 벌겋게 되어 가지고 한참 만에 나타난 아저씨, 자기 방문을 열어 입장 시켰다.
파일복원과정이 시작되고, 이 아저씨, 승지 옆에서 계면쩍게 서 있었다.
야동 걸릴까봐 마음 쫄리기도 할 것이고, 생전 이렇게 어여쁜 여인네 옆에 있어 본적이 없어 설레서 그런 것이기도 할 것이고, 자기 파일이 제대로 복원이 될 수 있을까 걱정되기도 할 것이고.
총각 냄새 풀풀 풍기는 방에, 승지의 향이 제대로 중화시켰다.
“다 되었습니다. 손님. 손님이 마음 졸였던 데이터 다 복구 되었습니다.”
승지가 사뭇 고운 소리로 말했다.
진짜로 15분 만에 작업이 끝났다.
석사논문 데이터 파일 복구하고 승지가 서비스라며 실수로 삭제된 게임 데이타까지 살려 주었다.
이 아저씨 꾸깃꾸깃 접은 돈을 내밀며 “감사합니다, 또 오세요”라며 감격해 했다.
왜 또 와야 하지?
이 미친 아재, 일부러 데이터 지우고 또 승지를 부를 것 같았다.
이런 사람들때문에, 승지가 나보고 같이 오자고 한 지도 모르겠다.
시간은 저녁 6시.
점차 길거리에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
승지의 알바 작업이 끝나고, 승지와 나는 서교동으로 이동했다.
승지가 소개팅하는 곳이 서교동 인근 호텔이라던가.
제법 좋은 곳에서 소개팅하는 것을 보니 돈 많은 남자라도 물은 모양이었다.
“내가 소개팅하는 동안, 여기 PC방에서 할 거 하고 있어.”
서교동의 한 허름한 PC방 앞에서 승지가 나한테 데이터복구용 노트북을 맡기면서 말했다.
“식사는?”
“기다려. 혼자 먹지 말고.”
“소개팅 자리에서 먹을 거 아냐?”
“그냥 밥 안 먹고 올 것이니 기다리라고.”
승지가 다시 말하기 귀찮아하는 눈치였다.
그냥 승지의 말을 따라야지 별 수 있나.
나는 저 토굴과 같은 PC방에서, 어미를 기다리는 고슴도치 새끼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저녁도 못 먹고 오돌 오돌 떨어야 하는 가련한 신세가 된 것이지.
“웬만한 남자라면 대충 차고 빨리 와.”
“흐흐흐. 나도 그럴 생각이다.”
“그럼 잘 다녀와라.”
내가 그녀에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가 개구진 미소를 내게 선사하더니, 나한테서 등을 돌려 사라져갔다.
사라진 그녀를 보며, 마음 한편에 질투의 감정이 시나브로 올라오고 있었다.
오늘 소개팅 자리에 나오는 사람이 상위 1프로 존잘남이아닐까?
승지는 남자에 관심이 전혀 없다고 했으니까, 어떻게든 자리를 박차고 나오려나?
아이고, 내가 이런 생각을 하다니.
이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에 대해 놀랐다.
저 악귀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인데, 스스로를 저 여자의 속박에 굴러들어갈 생각을 하다니.
정신 차려. 종철.
너는 사바세계의 불쌍한 중생이고, 저 여자는 그 중생을 먹거리로 삼는 시바신이여.
절대 저 악귀에 혹하면 안 되는 것이지.
나는 마음을 다잡으며 PC방으로 들어갔다.
승지와 다시 한 번 겨룰 때를 대비하여, LOL이나 열심히 연습해야겠다.
그녀와 다시 붙으면, 결코 지지 않으리라.
***************
“아가씨, 오셨습니까?”
하비천은 차에 올라탄 승지를 룸미러로 흘끔 쳐다보았다.
승지가 조수석에 앉으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제 가요, 아저씨. 1분이면 가죠?”
“네. 바로 여기 근방입니다.”
“굳이 1분 갈 거, 왜 차를 끌고 오셨데?”
“저희도 상대에 맞추어 예를 갖춘 것 뿐 입니다.”
“치, 그놈의 예..”
하비천은 투덜거리는 승지를 뒤로 하고, 인이어를 꼈다.
그 인이어를 통해서 누군가의 지시를 듣고 있는 듯하였다.
그 지시에 따라, 하비천의 표정은 시시각각 변하고 있었다.
물론, 그 표정의 차이는 사람의 눈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었지만.
하비천이 운전하는 세단은 어느덧 식당 주차장으로 들어선 후,
빈 공간을 찾아 주차하였다.
“도착했습니다. 아가씨.”
“한정식 집? 호텔이 아니네요?”
잠시 어리둥절해 하는 승지를 보며, 하비천은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는, 진중한 어조로 승지에게 사실을 밝히기 시작했다.
“아가씨. 오늘 만나는 상대가 새안그룹 셋째 아들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네? 그 인간이 날 만나길 싫어 한데요?”
“그것보다는 승지씨를 만나보고 싶어 하는 어떤 사람을 위해서, 그 분이 양보하신 거지요.”
“뭔 소리야? 그럼 난 기분 나쁘다고 이 자리 박차고 나와도 되겠네?”
“그건 쉽지 않을 겁니다.”
말투와 태도가 갑자기 변한 하비천에게 승지는 불안감을 느꼈다.
그리고 무엇인가 끔찍한 예감이 머릿속에 파고들기 시작하였다.
“에이, 하비서님. 상대가 싫으면 그냥 박차고 나와도 된다고 말했잖아요.”
“그건 상대가 새안그룹 아들일 때 해당되는 것이지요.”
“오늘 만나는 상대가 누구길래? 아.. 아저씨.. 설마?”
“맥킨코리아 파이낸스 차희석 본부장입니다.”
승지는 그 이름을 듣자마자 발작적으로 차문을 열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잠김 장치가 되어버린 조수석문을 열기에는 승지의 힘이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온 몸을 떨며 하비천에게 소리를 질렀다.
“문.. 문열어. 이 새끼야. 나 갈 거야. 문 열라구!!!!”
“아가씨, 나를 보십시오. 나를.”
“너, 하비천.. 죽여버리기 전에 빨랑 문 열어. 이 개새끼야.”
“박승지! 날 보지 않으면 넌 죽는다.”
하비천의 벼락같은 협박은 승지를 말그대로 얼어붙게 만들어 버렸다.
모든 행동과 말을 멈추어 버린 승지의 눈에 두려움이 가득 올라오기 시작하였다.
하비천은 천천히 몸을 승지에게로 기울이더니,
사시나무 떨 듯 떨고 있던 승지의 머리를 양손으로 강하게 붙잡았다.
“박승지, 내가 다 해결해 줄 텐데 걱정하지 말고.”
“............”
“나를 봐. 박승지. 넌 이제편안한 아이와 같은 거야.”
하비천의 주문에, 두려움이 가득 찼던 승지의 눈빛이 서서히 달라지고 있었다.
하비천이 박승지의 귀에 자신의 입술을 가까이 대어, 주문을 읊고 있었다.
“아저씨...”
“박승지, 넌 누구지?”
“SH그룹 막내딸, 박승지.”
“아니지, 그건 너의 껍데기이고. 진짜, 넌 누구지?”
하비천의 눈빛이 점차 강렬한 회색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그의 형형한 안광에 완전히 눌러 버린 박승지가 점차 자신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나.. 하비천님을 따르는 종입니다.”
“뭐가 두렵지? 차희석이 두렵나?”
“아.. 아닙니다. 하비천님이.. 날 버리는 게 두렵습니다.”
“그럼, 승지. 내말을 들어.”
“알겠습니다. 주인님.”
하비천은 이죽이며, 한마디 한마디를 또박또박 발음하였다.
“그럼, 차희석에게 오늘 네 몸과 마음을바쳐라.”
“.......”
“차희석이 원하는 대로,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네.. 주인님.”
표정이 사라져 버린 승지의 귀에 하비천은 추가로 몇 가지를 더 주문하였다.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는 승지는 무심하게 하비천을 쳐다보았다.
“잘 할 수 있겠지? 우리 승지.”
“네. 잘 할 수 있습니다.”
“자, 이제 가자.”
하비천은 조수석의 문을 열고, 승지의 손을 잡았다.
따뜻한 온기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승지는 그렇게 하비천에게 이끌리어, 차희석이 대기하고 있는 룸으로 걸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