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38화 〉불안한 저녁 식사 (38/68)



〈 38화 〉불안한 저녁 식사

약속시각 30분 전, 나는 SH그룹 사옥에 도착하였다.
SH의 사명이 한 눈에 들어오는 50층짜리 건물은 점차 저어가는 노을빛으로 노랗게 반짝이고 있었다.
황금을  몸에 두르고 서있는 자본주의의 괴물처럼, 세상을 오만하게 바라보는 건물의 모습이 마치 박광혁을 닮았다고 할까.
나는 그 건물을 향해 살포시 뻑큐를 날려주면서, 서서히 그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약속장소인 도도일식이  건물 지하에 초라하게 둥지를 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메씨안(메씨카움 전원 ON), 하피안(하피카움 전원 ON)

나의 나지막한 소리에 메씨카움(특수전자렌즈)와 하피카움(초고성능 인이어)이 조용한 저주파 소리를 내며 작동하기 시작하였다.
오늘 이 친구들은 큰일을 할 것이다.
박광혁을 보자마자 그의 숨겨진 정체를 알려줄 것이니.

―자, 이제부터 시작이다. 적당하게 긴장하자. 한돌.

나는 스스로를 북돋으면서, 구두로  있게 바닥을 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도도일식.
제법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기는 음식점이었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니, 주방장의 행색을 한 40대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를 하였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6시 30분에 예약이 잡혀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아, 혹시 예약자  존함이 박광혁 실장님이신지요?”
“네. 맞습니다.”

고개를 더 깊게 숙이는 주방장.
그가 직접 나를 예약된 룸으로 안내하였다.
그는 계속 구석진 곳을 찾아 들어가더니,
가장 한적한 곳에 위치한 4인실 룸을 안내해 주었다.

 룸에서  홀로 기다리는 동안, 오늘 내가 할 일을 다시 되새겨 보았다.
만약, 박광혁이 바퀠라가 아니라면,
그가 나한테 보여주려고 한다는 그 선물만 확인하고,
지체하지 않고 바로 집에 갈 것이다.
하지만, 바퀠라(변종외계인)라면...
오늘 손에 처음으로 피를 묻히는 날이 되겠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하겠군.

대략 룸에서 기다린 지 10분후,
가게문을 열고 들어오는 발걸음이 들렀다.
그와 함께, 하피카움으로부터 들려오는 주인과 손님의 대화 소리.
그리고 그 손님의 음성은 다름 아닌 바로 박광혁이었다.
나는 나지막히 중얼거렸다.

―라테노뷰(탐색기능의 활성화)

나의 주문에 은은한 금색으로 변한 가발.
메씨카움의 상태창에 그 금색의 가발에서 레이더가 발산중임을 표시해 주고 있었다.
그의 발걸음이 가까워질수록, 고조되는 긴장감.
박광혁이 바로 룸의 문 앞에 섰다.
그리고..

―스르륵

문 여는 소리와 함께, 금테안경을 두른 그의 얼굴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고,
동시에 메씨카움(전자렌즈)에서는 메시지 하나를 보여주었다.

『네거티브. 백퍼센트 인간의 두뇌임. 다만..』

 메시지와 함께 갑자기 풀린 긴장.
박광혁은 변형 외계인이 아니었다.
다행하게도, 오늘은 피를 묻힐 필요는 없게 되었다.
그러나, 다만...
그에게 감마족 약물의 흔적이 추출되었다는 메시지가 신경 쓰인다.

“오래간만입니다. 5일 만에 뵙는군요. 이한얼씨.”

선이 날카로운 얼굴형, 각 잡힌 양복.
포마드를 써서 올백으로 넘긴 머리.
그렇게 형상을 하고 온 그가 손을 내밀었다.
나는 그 손을 맞잡으며, 응대했다.

“오랜만은 아닌 것 같네요. 그리고 선물이 없었다면 오지 않았을 겁니다. 

따스한 말 한마디 교환 없이 악수만 오고가는 다소 이상한 인사치례.
 가운데서 박광혁은 날카로운 눈초리로 나를 관찰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한숨을 쉬며 거친 목소리를 냈다.

“선물 때문에 만나는 거라 하시다니, 이거 섭섭한데요?
저는 이한얼씨 같은 천상의 미모를 가지신 분을 만난다 해서 설렜는데..”
“동생의 여자친구 되는 사람에게 하실 말씀은 아닌 듯합니다.”
“동생의 여자친구라? 허허. 이거 원. 이한얼씨를 만날 때마다 그 사실을 잊어 먹는군요.”
“설마, 그걸 잊어버리실 수가 있나요?”

이 작자가 내게 작업을 거는 단 하나의 이유는, 내가 지혁의 애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둘 사이의 관계를 잊었다고 말하는 건, 가증스러운 거짓말이지.

“지혁과 이한얼씨 사이가 그리 가까워 보이지 않아서, 제가 자꾸 착각을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시죠?”
“가끔은 계약 연애, 그런 것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 커플도 많아서 혹시나 해서 말이죠..”

역시 박광혁이 우리 사이를제대로 짐작하고 있었다.
저 정도의 눈치를 가진 이 사내와의 저녁식사 자리가 쉽지 않을 것도 같다.

“자, 우리가 언제까지 이렇게 서있을 수는 없겠죠? 앉아서, 식사 주문을 하도록 하죠.”

나는 그의 제의에 좌식 테이블에 앉았다.
내 부주의로, 스커트가 테이블에 걸쳐져 살짝 올라가 버렸다.
 작자 앞에서 하얀 종아리를 보이는 것이 별로 좋은 일은 아닌데.
 자식이 아마 이럴 의도로 정장 치마를 입고 오라고 했는지도 모르겠군.

그가 테이블의 버튼을 눌러,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이 들어오자, 그가 명료하게 주문하였다.

“내가 미리 예약했던 특선요리 들여오세요.”
“네. 오마카세(주방장 특선 요리) 코스 디너로 바로 준비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제 맞은편미인 분께서 불편해 하시니, 무릎담요 하나 부탁드립니다.”
“네. 알겠습니다.”

박광혁이 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정확히 읽어 냈다.
그만큼 나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다는 것이기도 하겠지.

“아, 잠시만요. 이모.”

그가 종업원을 불러 세우더니 뻣뻣한  2만원을 종업원에게 챙겨준다.

“오늘 귀한 손님이 오셔서 특별히  좀 부탁합니다.”
”감사합니다.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종업원이 허리를 90도 각도로 굽혀 인사한다.
광혁이 손짓으로 까닥하며,  인사를 받았다.
종업원이 허리를 굽혀 룸에서 퇴장한 후,
광혁이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물손수건으로 손을 닦는다.

“여기 일식집이 아마타이(옥돔)와 오도리(생새우) 구이로 유명하지요.
귀한 손님이 와야 대접한다는 고노와다(해삼내장)도 맛볼 수 있어 여기로 예약을 잡았습니다.”
“실장님께서 일본어로 말씀하시니까 어떤 요리인 줄 잘 모르겠네요.”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자주 와서 먹다보니 메뉴 이름이 익숙해서 그만.”

일본어를 사용한 것, 광혁의 고의일 것이다.
권력은 조금이라도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쏠리는 법.
광혁은 지금 이 순간에도 권력을 잡고 싶어 하고,
그것 때문에 상대가 모르는 자신만의 용어를 자신 있게 꺼내어 말한다.
나의 기를 꺾고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겠다는 그의 의도가 불순하다.
그럼 나의 대응은?

“그 메뉴이름이 저한테는 듣보잡 요리로 들리네요.”
“아..”
“죄송합니다. 그냥 실없이 농담을 던져 봤네요.”

‘듣도 보지도 못할 잡스러운’ 메뉴라고 말하며,
상대방의 기를 깎아내리는 것.
광혁이의 안색이 변한다.
불쾌하겠지..

“듣보잡이라고  앞에서 과감하게 말씀하신 분은 한얼씨가 처음이네요.”
“듣도 보지도 못한 참신한 메뉴라는 말이 잘못 나왔어요.
나름대로 재미있는 표현을 쓰려다 보니 무리 좀 했네요.”
“아뇨. 무리하시긴. 한얼씨는 여러 가지 창의적인 표현들을 많이 만들어 내시네요.”
“그냥 실없는 소리 하고 노는 게 제 취미네요. 제가 그래서 바느질을 못해요.”
“네?”

그냥 의미 없는 농담을 던져 보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내 농담이 이해가   혼란스러울 것이다.
그가 대화의 주도권을 가지지 못하도록 자연스럽게 방해를 놓고 있는 것이지.

“실이 없으니까 바느질 못 한다고요. 아재개그죠.
광혁씨가 이해를 못했으니 개그가 망한 거죠.”
“아,이제 이해했습니다.”
“광혁씨가 개그를 망친 것이고요. 그러니, 실장님이 당연히 저녁을 사셔야 하고,
저는 아무 부담 없이 맛있게 먹겠습니다.”
“음... 하하. 재미있는 논리시군요. 오늘 식사시간이 기대 됩니다.”

보통의 남자들은 이런 경우, 유쾌한 감정으로 웃게 되지.
아니면 농담이 이해가 안가서 어색해하거나.
그러나, 이 사람은 다르다.
자신이 놀림을 당한  같다는 불쾌한 감정이
금테 안경에 비친 그의 눈빛을 따라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너무 기대마세요. 광혁씨 개그 센스에 따라 어색하고 끔찍한 시간이 될 수 있어요.
지금도 한 템포 늦잖아요.”
“후후.. 어색하고 끔찍한 시간이라... 그런 시간이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요리들이 나오기 시작하였다.
주방장이 엄청나게 신경을 썼는지, 다양하고 먹음직한 요리들이 연이어 나왔다.
내 일생에 이런 요리를 먹을 기회가 거의 없을 진대,
열심히 접시에 코를 박고 하나도 남기지 않고  먹었다.
상대에 대해 신경 쓰고 싶지 않는 마음도 있었긴 했지만.

식사 도중 광혁은 자기가 지금까지 이룬 성과에 대하여 자랑스럽게 소개 하였다.
사업현황에 대하여 갖은 경제 용어를 대며 설명하였는데, 그가 벌려 놓았던 일들은 이미 내가 다 아는지라 별 의미도 없이 한 귀로 흘러 보냈다.

그가 대화하는 것을 무심히 듣다 보니, 박광혁이라는 사람은 자기 자존감이 지나치게 높고,
지나치게 당당한 성격이며, 사람을 은근히 무시하는 성향이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를 쳐다보는 눈빛이 사갈(蛇蝎)의 그것을 떠올리게 하였다.
이제 거진 밥도 다 먹어가니, 대충 선물 보고 자리를 뜨고 싶었다.

그가 갑자기 말을 멈췄다.
그리곤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탁탁 치기 시작했다.
그의 안색이 서서히 벌게지고 있었다.

“한얼씨는  말을 제대로 듣고 있지 않군요.”
“솔직히 전 광혁씨가 주시겠다는 선물에만 관심이 있어서요.”
“선물... 드려야죠. 단, 선물은 여기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경영기획실에 있으니, 거기서 보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선물이 중요한 것이라  자리에 가지고 올 수 없었다는 그의 말이 변명처럼 들린다.
선물이고 뭐고 그냥 가버릴까?
자꾸 자기 아지트로 끌고 가려는  작자의 의도가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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