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화 〉끔찍한 악몽
가끔은, 나에게 닥친 사건을 기억하지 않고 사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나는 한달 만에 생각난 갑작스러운 이날의 사건으로 한동안 악몽을 꾸기도 하였다.
지금이야 생생하게 아무렇지도 않는 듯 그날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과거의 악몽을 기억하는 순간만큼은 몸서리가 쳐졌다.
정말로, 그날의 시간은 내게 존재하지 말았어야 할 순간들이었다.
바퀠라에게 싸우다가 거의 죽음에 이를 순간만큼이나 끔찍한 순간..
박광혁, 아무리 생각해봐도 그는 나한테 정말 저주와 같은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헉, 헉
나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대로 난 어떻게 되는 것이지?
진짜, 이 새끼에게 모든 걸 바치게 되는 건가?
나는 깊은 좌절감에 아무 미동도 없이,
내 앞에 닥쳐 올 상황만 비참하게 그리고 있었다.
박광혁이 그의 몸을 내게로 밀착시켰다.
아마도 내가 의식이 끊어졌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리고는 그의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만지더니,
피아노 선반을 치 듯, 가슴을 타고 내려왔다.
그리고 천천히 스커트 밑으로 파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낯선 촉감이 아래에서부터 느껴졌다.
그리고 오히려 그것이 껴져 가던 나의 의식을 기적같이 되살렸다.
―머리를 써야 해. 한돌.
머리를.. 쓴다?
머리..
가발?
드디어 내가 지금 머리에 쓰고 있는 라테카움이 생각났다.
그리고라테카움으로부터 연상된 싸이킥 에너지..
싸이킥를 쓰자..
에너지를 활성화시키는 명령문이 뭐지?
내가 필사적으로 명령문을 생각하는 동안,
그의 손길은 더욱 나의 중심부를 강하게 터치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그를 힘없이 바라보며, 입술을 떨며 중얼거렸다.
라..테..안 (라테카움 전원 온)
그 주문과 함께 라테카움(레이더 전자가발)이 금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순수한 에너지의 강력한 파동이 내 두뇌 곳곳을 헤집고 다니는 느낌이 들면서,
나는 완전한 의식을 되찾았다.
황금빛으로 변해가는 나의 모습에 경악해 하는 박광혁이 보였고,
나는 손바닥에 피가 나도록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싸이킥 에너지으로 충만한 주먹이 더 이상 나의 분노를 참아내지못했다.
그리고...
“야, 쌍놈의 개***야”
―으헉~~~
나는 그의 대가리를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한방 날렸고,
그가 정통으로 얻어맞고 바닥에 뒹굴었다.
“이새끼, 죽여버릴 거야.”
나는 완전 이성을 잃은 상태였고, 누워있던 그를 정신없이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 신발새끼야...으...흑. 흑흑.. 흑”
“허..헉.. 살려..줘.”
―퍽, 퍽, 퍽
나는 북받쳐 오르는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흐느끼며,
박광혁을 완전 떡이 되도록 패고 있었다.
그가 뭐라고 계속 중얼거렸으나 내 귀에는 전혀 들려오지 않았다.
곧, 그의 입가에서 진한 피가 보였고 그의 몸은 축 늘어졌다.
그의 반응이 전혀 느껴지지 않을 때서야, 나는 제정신이 들었다.
피를 흘리며 죽은 듯 누워있던 그를 증오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 자식.. 죽을 수도 있어. 그래. 죽으면 어때. 이런 새끼는 죽어야 해.
나는 미친 듯 중얼거리다가,
이 싸이킥 에너지가 곧 사라지면 난 의식을 잃고 쓰러질 것임을 직감했다.
나는 가방을 챙겨 문을 박차고 뛰어 나갔다.
점차 가발의 금빛이 빠지며 흑발머리로 돌아오는 것을 본 나는 전속력으로 빌딩 밖을 빠져나갔다.
가슴의 가빠짐이 더욱 심해지고, 세상이 조금씩 돌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뛰다가, 노래방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생각할 필요 없이 그곳으로 뛰어 들어갔다.
노래방 주인이 비틀거리며 걸어 들어온 나를 보더니,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빈 룸으로 안내하였다.
나는 그곳에 들어가자마자 급히 전화를 걸었다.
반사적으로 생각난 것은 지혁이 전화번호였고, 내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으로 지혁이밖에 생각이 나지 않았다.
‘지혁씨, 제발.. 제발.. 제발.’
뚝.
<여보세요.>
정말로 세상 반가운 지혁이의 목소리.
그 짧은 순간에 나는 구원을 받은 느낌이었었다.
“형... 아니.. 오빠.. 제발.. 히꾹.. 흑.. 지금.. SH 그룹 사옥 옆 노래방에.. 와... 죠.”
간신히 말을 마치자마자 의식이 소멸됨을 느끼며 폰을 떨어드렸다.
지혁이가 오기를 간절히 기다리면서 그렇게 잠에 빠져들기 시작한 것이다.
*
한얼로부터 전화를 갑작스럽게 받았을 때,
지혁이는 학교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던 중이었다.
발신자가 이한얼임을 확인하고는, 지혁이는 씩 웃었다.
“이 시간에 만나서 데이트하자는 건가?”
그는 전화를 장난스럽게 받았다.
“여보시오. 웬 일로 전화를 다 주셨나?”
<형... 아니.. 오빠.. 제발.. 히꾹.. 흑.. 지금.. SH 그룹 사옥 옆 노래방에.. 와... 죠.>
전화상으로 들려오는 그녀의 다급하고도 울먹이는 목소리.
처음 들어보는 그녀의 목소리에 담긴 공포.
지혁은 그녀에게서 심상치 않은 일들이 벌어졌음을 깨닫고, 바로 뛰쳐나갔다.
한필 그는 차를 가져오지 못했고, 대신 택시를 타기 위해서 정신없이 차도로 뛰었다.
달려가는 택시 안에서 박지혁은 이한얼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으나,
신호음밖에 들리는 것이 없었다.
조급한 마음에 그는 친구가 죽어가고 있다고,
기사 아저씨에게 더 빨리 가달라고 재촉하였다.
택시기사가 전속력으로 차를 몰았고,
다행히 SH그룹 사옥은 학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20분 만에 SH그룹 건물에 도착하여, 그는 근처 가장 가까운 노래방을 검색하였다.
박지혁이 SH그룹 사옥에서 가장 가까운 노래연습장에 도달했을 때,
그 근처가 뭔가 시비가 붙은 듯 시끄러웠다.
내려가 보니, 한덩치 하는 노래방 주인이 젊은 남자 2명을 제지하고 있고,
젊은 남자 2명이 거친 말로 노래방 주인을 위협 중이었다.
그리고 그 한 녀석의 등에 눈에 익은 실루엣이 보였다.
바로, 얼이었다.
얼이가 그 남자 중 한명의 등에 업혀져, 정신을 잃고 자고 있었다.
지혁은 순간 차오르는 분노를 누를 수가 없었다.
“당신들 뭐하는 새끼들이야?”
지혁이가 빽 소리를 지르니, 두 사내가 움찔하였다.
머리를 짧게 짜른 깍두기 한 명이 목소리를 낮게 깔며 위협했다.
“뭐야. 이 새꺄? 우리 일에 상관하지 말고 꺼져.”
“네 등에 업힌 그 여자 당장 내려놔.”
“우리가 직장동료 데리고 가겠다는데 왜 막아들? 죽고 싶냐?”
그 깍두기가 지혁에게 주먹을 흔들어 보였다.
지혁은 착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째려 보았다.
그 눈빛에 다소 기가 꺽인 깍두기가 주먹을 조용히 내려 놓았다.
“내가 그 여자랑 통화해서 온 거다. 그 여자는..”
“뭐야, 이 여자랑 어떤 관계라고?”
“내 애인이다. 내 여자다.”
지혁이의 말에 당황하는 두 사내, 눈짓으로 도망가자는 뜻을 교환하는 듯 했다.
“119랑 경찰까지 불렀으니 어디 가지 마, 새끼들아!”
그말에 두 사내가 그대로 얼이를 내려놓고 도망쳐 갔다.
옆에 서 있던 체격이 우람한 노래방 주인이 지혁이를 의심의 눈초리로 보고 있었다.
“손님이 이 여자분 애인 맞아요?”
지혁은 한얼의 번호로 연락했다.
곧, 자고 있는 얼이의 주머니에서 폰 전화음이 들려왔다.
그것을 본 노래방 주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댁이 남자친구 맞군요.”
“그렇습니다. 내가 얘한테 전화 받고 지금 뛰쳐나온 겁니다. 근데 얘가 왜 이러죠?”
“여기 노래방에 올 때부터 비틀거리며 왔어요. 그리고 룸에서 쓰러졌고. 저 두 놈이 자기 동료라며 이 여자 분을 업고 가더라구요. 제가 행색이 이상해서 막기는 했는데.”
“고맙습니다. 아저씨. 정말 생명의 은인이십니다. 고맙습니다.”
박지혁은 그 노래방 주인에게 감사의 인사로 지갑에서 50만원을 꺼내 주었다.
노래방 주인의 눈알이 동그래지며, 그 돈을 감사하게 받았다.
“지금 이 노래방에 아무도 없죠? 그럼, 아무도 들이지 말아주시겠습니까?”
“어차피 오늘 손님도 없으니 일찍 닫으려고 했는데. 그렇게 하세요.”
“제가 이 여자 깰 때까지 여기 노래방에 같이 있겠습니다. 룸 문을 열어둘 수 있을까요?”
“그러시죠. 허허.”
오늘 갑자기 생긴 소득에 기뻐하며 노래방 주인이 흔쾌히 허락했다.
지혁이는 재빨리 얼이의 상태를 살펴보았다.
피 흘린 곳 없고, 별다른 상처나 멍이 없었으며,
다행히 옷도 흐트러지지도 않았다.
다만, 그녀의 주먹에 피가 묻어 있었고, 발뒤꿈치가 구두에 까졌는지 혈흔이 살짝 보였다.
그리고 이한얼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씩씩 거리며 자고 있었다.
지혁은 그녀를 번쩍 안아 들고 빈 방에 들어갔다.
그녀의 입가에서 살짝 알콜 냄새가 풍겨 오고 있었고,
아울러 그녀의 화장품 냄새가 그의 코를 두들겼다.
그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자리에 눕힌 다음, 그녀의 머리를 그의 무릎에 베개 하였다.
지혁은 무릎위에서 자고 있는 얼이의 얼굴을 보며, 그제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문득 그녀가 위급할 때 지혁에게 전화를 했다는 사실이 기뻤고,
문득 왜 오늘 이런 험한 일을 당할 뻔 했는지 걱정되며 궁금했다.
그는 얼이를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된 채로 설레고 그립게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