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1화 〉내가 왜 이러지? (41/68)



〈 41화 〉내가 왜 이러지?

얼이는 은은한 앵두빛으로 볼을 채우고서, 거친 숨소리와 함께 잠에 빠져 있었다.
머리카락 하나가 그녀의 콧등을 지나 입술까지 뻗어서 흔들리고 있었다.
지혁의 심장 소리는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살포시 떨리는 그녀의 입술가로 그의 입술을 포개고 싶은 욕망이 그의 가슴을 채웠다.
하지만 그는 애써 고개를 흔들었다.

―오늘 얼이는 뭔가 힘든 일을 당했을 텐데, 이럴 때 내 욕심 채우자는 것은 안 되지..

그는 속으로 갖은 유혹을 누르며, 계속 그녀의 머리만 쓰다듬어 주었다.
그녀의 샐룩이는 숨소리에 따라서 얼이의 가슴에 약간의 미동이 보였다.

―휴우~ 미치겠네..

그는 싱숭생숭해지는 마음을 붙잡으며,
 그녀가 SH그룹 근처에 와 있게 되었는지를 곰곰이 따져보았다.
그녀는 박광혁을 잡기 위한 자료를 찾기 위해 SH사옥에 잠입하려 했거나,
혹은 박광혁을 직접 만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울면서 빨리 와달라고 전화했던 것은,
분명히 거친 일을 당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박광혁,  새끼가 혹시....”

그는 수업시작 전, 그녀에게 어디로 가냐고 더 자세히 캐묻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중요한 건, 그녀가 자기 몰래 위험한 소굴로 홀로 걸어 들어갔었다는 것이고, 지금은 그의 품에서 그녀가 편안하게 자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의 상태가 생각보다 괜찮아 보여 다행이지만, 만의 하나라도 그런 일을 당했다면..

―형이고 뭐고 죽여버린다.

그의 눈에는 살기가 가득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그는 분노로 바짝 타오르는 마음을 붙잡기 위하여, 노래방 곡집을 집었다.
자신의 마음의 분노를 식힐  노래나 부를 심산이었다.
그는 얼이를 무릎에 뉘인 채로, 마이크를 들고 홀로 노래를 불렀다.

지혁은 사랑 노래도 불러보고, 신나는 곡도 불러보고, 동요에 팝송까지 모든 장르의 곡을 얼이에게 무릎을 내어준 채 열창하였다.

그렇게 1시간이 지났을 때였을까..

뱅크의 ‘가질수 없는 너’를 부르고 있는 도중,지혁은 목 밑으로부터 따가운 시선을 느꼈다.
지혁은 그의 무릎에 가지런히 얹혀 있던 얼이의 얼굴을 보았다.
그리고 눈을 딱 뜨고 있는 얼이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

귀신 보듯 놀란 지혁에게 얼은 힘 빠진 미소를 건네주었다.

“계속 불러 봐요, 오빠. 노래 잘 부르시네요.”
“언제  거야?”
“방금요. 근데, 오빠 턱을 밑에서 보니까 재미있네요.”
“내 턱은 아킬레스건인데..쩝.”

지혁은 깨어난 한얼이 반가우면서도, 한얼이 괴고 있는 무릎이 저려오기 시작했다.
눈을 떴으면 일어나라고도 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녀가 계속 머리를 괴고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다.
그런 복잡한 마음을 아는  모르는 지, 한얼은 머리를 괸 채 일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괜찮아? 얼?”

말없이 끄덕이는 얼.
‘문제 없어요’라고 중얼거리는 듯싶었다.

“오빠, 이 노래, 좋다.계속 불러줘.”
“그.. 그래. 그러지 머. 내가 음치라도 이해해.”
“아냐. 멋져요.”

지혁은 여전히 기묘한 자세로 노래를 불렀다.
얼이는 지혁의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기댄 채로, 멍하게 화면에 띄어지는 가사를 바라보았다.
노래가 다 끝나자, 그녀가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왜 여기에 있어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무것도 모르는 얼굴로 지혁에게 물었다.

“그건, 네가 여기 와달라고 급하게 전화를 해서..”
“제가요? 제가 그랬어요?”
“얼, 무슨 일이 있었던지 기억이 안나는 거야?”

한얼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리고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지를 필사적으로 떠올려 보는 듯,
눈썹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아..”

그 말에 가슴이 덜컥한 지혁이 급하게 이름을 물어 본다.

“혹시.. 네 이름은 알아? 내 이름은?”
“저 바보 아닙니다. 한얼이 지혁을 몰라서야 말이 되나요?”
“휴, 다행이군.”
“근데, 후계자 모임 갖다  이후가 전혀 생각이 안나요.”

지혁은 그녀의 얼이 빠진 표정을 보며, 복잡한 감정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아파 보이거나, 감정적으로 문제가 있어 보이지도 않았다.
다만 힘이 없어 보일 뿐.
그러나  사라진 기억에 어떤 일을 당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여기는 어디예요?”
“노래방..”
“노래방인 거는 알거든요. 정확히 어디냐고요..”
“SH그룹 본사 근처”

그녀는 짧은 감탄사를 냈다.

“이제 기억이 돌아온 거야?”
“아뇨.. 그건 아닌데. 아무래도내가 SH그룹 건물에서 뭔가 한  있는 모양이네요?”
“지금은 그게 비밀로 쌓였지. 네가 기억이 안 난다고 하니.”
“내가 오빠를 전화로 급하게 찾았다고 했죠?  목소리가 그때 어땠죠?”

지혁은 얼이의 급하게 울먹이는 목소리를 떠올렸다.
그리고 동시에 그녀의 손에 묻어 있었던 피의 흔적이 그의 머리를 강하게 스쳤다.
지혁은 사실을 말해야 될지를 잠시 고민하였다.

“음.. 단순히 빨리 오라고만 했어. 무엇인지 모르지만 흥분된 목소리로.”
“흥분?”
“무..무엇인가를 발견했을 때 내는 그 흥분된 목소리..”
“아.. 네. 그래서 와보니까  여기서 쓰러져 있었다?”

그녀는 좀 더 골몰히 생각하다가, 도저히 실마리가 잡히지 않는지
자신의 머리를 쥐어 뜯었다.

“치.. 대체  여기서 무엇을 한거야!!”
“그건 천천히 생각해 보자. 얼아.”
“내가 전화하니 오빠가 부리나케 달려왔다는 건 맞죠?”
“네가 날 찾았으니까..”

갑자기 그녀의 얼굴에서 붉게 상기된 표정이 드러났다.
그리고 수줍게 웃으며 하는 말.

“오빠의 그 표현에 심쿵했네. 이런.”
“아니.. 그게.. 뭘.”
“고마워요. 오빠.”

지혁은 문득 그녀가 평소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말투나 행동이 예전의 한얼이 아니었다.
완전히 여성스러워진 그런 느낌.
호칭도 전처럼 형이나 격식있는 호칭을 붙이는  아닌
또박또박 오빠라고 부르고 있었고.

한얼은 지혁이에게 한걸음씩 다가왔다.

“제가 여기서 별일 없었던 것 맞겠죠?”
“으..음. 어떤 사내둘이 잠자고 있던 너를 납치하려는  내가 막았지.”
“와..  생명의 은인이시네. 형이.”

지혁은 그녀가 자신을 형이라고 부른 것에 대하여 일종의 안도감(?)을 느꼈다.
평소의 이한얼이라는 것이니까..

“날 살려주신 분, 안아봅시다. 형님.”

한얼이 지혁을 향해 두 팔을 쭉 폈다.
한얼의 새로운 모습에 갸우뚱하면서도,지혁은 기꺼이 그녀를 안아주었다.

“!”

뭔가가 이상했다.
그녀가 유래 없이 강하게 그를 안고 있었다.
그녀 가슴의 고동소리가 지혁의 심장에 맞닿았고, 그녀의 거친 숨소리가 그의 귓가에 크게 들려왔다.
아무 말 없이 그렇게 감싸 안고 있는데, 얼이가갑자기 자신의 볼을 그의 볼에 갖다 대었다. 지나치게 뜨거운 그녀의 숨결이 그의 볼을 간질이고 있었다.

“얼..얼아.”

놀란 지혁은 잠시 그녀를 그의 폼에서 떼어 냈다.
빨간 앵두처럼 잔뜩 상기된 그녀의 모습.
그녀의 길게 흘겨보는 눈빛에는 짙은 애련의 감정이 꿀처럼 흐르고 있었다.
거친 호흡 속에서 살짝 잠긴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귀에 녹기 시작했다.

“오빠.. 키스해 줄래요?”

지혁은 그녀의 지금 감정이 그녀의 것이 아님을 직감했다.
정말로 이상했다.
말투와 행동,  모든 것이 이상했다.

“얼, 너, 지금 괜찮아?”

지혁의 말에 정신을 차린 듯, 얼이가 고개를 흔들어 대었다.

“나..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왜 이러지 내가? 이건 내가 아냐”

그녀가 팔로 힘껏 지혁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바닥에 쪼그리고 앉았다.
 손으로 두 눈을 콕콕 눌러가며, 코가 먹먹한 소리로 말하였다.

“지혁씨를 보면 안 될 거 같아요. 미치겠어.”
“한얼, 도대체 왜 그래?”
“가만히, 이렇게 얼마동안 가만히 주저앉아 있을 게.”

그렇게 그녀와 지혁 사이에는 얼마간 고요한 정적이 흘렀다.
그녀는 미동조차 하지 않은 채로, 여전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지혁은 그녀가 왜 저리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는지 짐작을 할 수 없어서, 마음이 한없이 무거웠다.
그러나 그녀에게 묻지도, 가까이 다가가지도 않은 채, 묵묵히 10여분의 시간을 흘러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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