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화 〉기억을 삭제당한 오늘을 삭제하고 싶다
광혁으로부터 그 봉변을 당하고,
노래방에서 깨어난 이후부터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었다.
당시에,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지 않은 상황에서,
심리적으로 매우 불안한 상태였었다.
더군다나, 정체성 분열 현상까지 겪고 있었다.
자아가 붕괴되는 것 같은 극심한 혼란이 나한테 일어났었던 것이지.
따지고 보면, 광혁이 그 새끼가 내게 투여한 흥분제 겸 미혼약 때문인데,
그것을 기억 못한 나는 내 스스로의 자괴감에 깊이 빠져들었다.
놀랍게도, 나는 남성이 아닌, 온전히 여성으로서, 지혁을 보고 있었다.
그가 나를 구했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 웃으면서 말했을 때,
난 정말 바보같이 흥분되고 떨리는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왜 한필 그의 체온을 그렇게 갈구했을까?
―안고 싶어..
나는 내 마음을 따라 그를 포옹했고, 그의 얼굴을 만졌고,
그의 뜨거운 호흡을 느꼈다.
그리고, 난 이성의 끈을 놓아버렸다.
“오빠.. 키스해 줄래요?”
지혁이에게 했던 그 말.
정말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되지 않는 수치스러운 표현인데,
그때는 정말로 절박했었다.
심장박동수가 비정상일 정도로 뛰고 있었고,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고,
마음속 깊이 울려 퍼지는 강한 정욕의 욕구가 나를 지배했다.
“얼, 너, 지금 괜찮아?”
그러나, 지혁의 갑작스러운 외침이
무의식의 정욕에 빠져있던 나를 끄집어냈다.
나는 흥분제의 자극을 떨쳐내고자 고개를 격렬히 가로 지었고,
황급히 지혁이를 밀어내며, 그대로 주저앉다시피 앉았다.
그리고는, 지혁이를 볼 수 없도록, 두 눈을 양 손으로 완전히 가려 버렸다.
머릿속에 가득한 불순한 생각들을 몰아내고자,
양 손가락으로 두 눈과 머리를 콕콕 눌러대면서.
그렇게 10분의 시간동안필사적으로 약기운과 싸우며 조용히 주저앉아 있었다.
지혁 선배 역시 그 10분 동안 조용히 나를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적막하고 어색한 분위기가 그렇게 흘러갔다.
“음료수 사 가지고 올게.”
지혁 선배가 결국 침묵을 깨고 그렇게 밖에 나갔다.
지혁이의 존재가 눈앞에서 잠시 사라지자,
난 두 눈을 떴고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나, 이마를 만졌다.
―내가 이러는 건 뭔가 이유가 있어. 그걸 알아야 해. 내가 이럴 리가 없어.
나는 결사적으로 내 몸의 이상상태의 원인을 규명하고자 하였으나,
그럴수록 복잡해진 내 머리는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때 나는 약물로 인하여 철저히 돌머리가 되어 있었다.
라테카움과 메씨카움같은 감마족 장비를 차고 있다는 사실마저
까맣게 잊고 있었고,
당연히 그 장비들을 이용할 생각을 추호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생각의 방향을 바꾸어,
지금의 흥분상태를 정상적으로 되돌릴 궁리를 하였고,
그 때 내 시야에 노래방 마이크와 노래방 곡집이 보였다.
―노래하며 신나게 온 몸을 흔들어대고 땀을 흘리면 괜찮지 않을까..
내 자신을 진정시키며, 한손으로는 마이크를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노래방 곡 카탈로그를 찾아보고 있었다.
“얼, 너 이제 괜찮은 거야?”
때마침, 지혁선배가 음료수를 사가지고 들어 왔다.
나는 카탈로그에 시선을 고정시키며 말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노래는 부르고 가야지. 아깝잖아, 선배.”
“선배? 그래 그렇게 부르는 거 보니, 정상으로 돌아왔구나.”
“거의! 노래 부르고 방방 뛰면 훨씬 나아질 거 같아.”
나는 신나는 곡들만 선곡하여, 미친 듯이 그 곡들을 불러 재꼈다.
거북이의 ‘비행기’, 크라잉넛의 ‘말달리자’, 노라조의 ‘슈퍼맨’까지.
나는 정말 열심히 춤을 추었고, 땀을 뻘뻘 흘렸다.
옆에서 지혁선배가 장단을 맞춰 주는 듯 했지만,
그가 실제로 어떻게 했는지는 보지 못했다.
내 시선은 그를 철저히 외면하고,
오직 화면만 주시하고 있었기에.
호흡이 가빠올 정도로 춤을 추고 나니, 훨씬 기분이 나아진 듯하였다.
‘그래, 이제 괜찮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살짝 지혁을 보았다.
나는 그에게 젖은 머리카락과 동그란 땀이 몽글몽글 맺혀 있는 이마를 보여주었고,
그는 멍한 표정을 내게 선사했다.
―힛. 귀엽네, 저 선배.
그 생각과 함께 또 올라오는 불편한 감정의 편린.
나는 시선을 그에게서 황급히 뗐다.
“지혁선배, 그만 가요. 몸치가 춤추는 거 보느냐고 선배 눈이 고생했네요.”
“얼이야, 그 노래실력에 그 춤이 뭐냐? 앞으로 절대 춤은 추지 마라.”
“그런가. 히잇. 오늘 춤 춘거 다 잊어주세요.”
노래방을 나서니, 거의 밤 12시가 다 되어 갔다.
밤의 차고 신선한 공기를 맡으니 한결 나아진 기분이었다.
“얼아, 내가 집까지 바래다줄게.”
“아니. 진짜 그러지마요. 그냥 여기서 헤어져.”
“밤이 너무 늦었잖아.”
“그냥 가시라고요.”
나도 모르게 내 목소리에 살짝 짜증을 묻혔다.
지혁 선배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그에게 따스한 말 한마디를 던져줄 여유가 내게 없었다.
지혁 선배가 약간 처연한 웃음을 짓는다.
그런 웃음 짓지 말지..
“그럼 지하철까지만 같이 타고 가자.”
전철 막차를 놓칠까 둘이 역까지 뛰어갔다.
그리고, 그 와중에 지혁 선배가 은근슬쩍 손을 잡았다.
손을 뿌리칠까 하다가, 오늘 나 때문에 고생한 그를 생각하니 마음이 약해졌다.
그냥 내버려두었다.
그 손마저 뿌리치기에는 충분한 냉정함이 내게는 없었으니까..
전철역을 향해 뛰고 있는 지혁이의 옆모습을 봤다.
지혁 선배가 자신에게 귓속말 하는 게 웃겼다.
‘아씨, 전철을 놓쳐야 하는데’라고 중얼거리며,
발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겁나 빠르게 뛰어 가고 있었다.
자기가 중얼거리는 걸 내가 못 듣고 있다고 생각했나 보다.
내 귀에 인이어가 있다는 걸 모르겠지.
지혁이가 또 중얼거린다.
―아냐, 아냐, 이러면 안돼. 오늘 얼이는 일찍 가서 쉬어야 해
후후. 지혁선배의 중얼거림이 어찌 이리 재밌으면서 마음이 따뜻해지는지 모르겠다.
지혁이의 말 자체로 은근히 배려받는 느낌에 마음이 포근해졌다.
젠장. 또 가슴이 뛴다.
그에 대해 어떤 생각도 하지 말아야 겠다.
불행히도 내 집까지 가는 막차를 간발의 차로 놓치지 않았다.
저기 기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둘이 탔다.
그 순간까지도 그는 내 손을 잡고 있었다.
나는 곧 그 손을 뿌리쳤고, 동시에 그를 전철 안으로 밀었다.
그리고, 문이 바로 닫히기 직전 그가 탄 전철에서 내려버렸다.
―미안하지만, 너는 타고 나는 내릴 거다.
전철 창 너머로 그에게 혀를 내밀고 바이바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지혁선배가 벙 쪄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너 이러기야?>
“미안. 내일 학교에서 봐요.”
<너 진짜 괜찮아?>
“진짜 괜찮아요. 내일 봐요.”
<평소의 너 답지 않게 오늘 행동이 이상해서 걱정되었거든. 진짜 괜찮은 거지?>
“걱정하지 말라고요. 내일 봐요.”
<자꾸 내일 보자고 하지 마. 난 오늘이 중요하다고.>
지혁선배가 마지막에 성질을 내며 전화를 팍 끊어 버렸다.
아마 지혁 선배는 내가 야속할 것이다.
좀 물어보려하면 애꿎은 내일만 계속 언급하며 전화를 끊으려 하기에,
오늘의 시간을 단절시키고 아직 오지도 않은 내일만 내가 허무하게 외쳐대기에,
그 사실이 뿔이 나서 전화를 끊은 것이겠지.
하지만, 나에게 오늘은 너무 괴로운 시간이었고,
기억을 삭제당한 오늘을 삭제하고 싶었다.
그에게는 나와 함께 했었던 오늘이 중요했겠지만,
나는 뭔가 험한 일을 당했던 오늘을 증오했으니까.
쩝.
근데 전철을 못 탔으니 집에 어떻게 가지?
돈도 없는데..
내가 미쳤구나...
뭔 배짱으로 막차를 그렇게 보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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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철이는 서교동 피씨방에서 열심히 LOL을 하고 있었다.
종철이는 박승지를 따라서 왔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리고
‘딜탱 다 되는 만능정글 세트’ 구축에 정신을 팔린 상태.
그가 신나게 양학을 하고 있는 도중, 그에게로 걸려온 한 통의 전화.
종철은 무심하게 전화를 받는다.
“여보세요”
종철의 눈은 여전히 모니터를 주시중인 상태였다.
“네가 승지의 친구, 서종철인가?”
“네?”
“서종철 맞지?”
“맞습니다만...”
의문의 사내의 갈라진 목소리에서 심상치 않은 기운을 감지한 종철은
잠시 게임을 진행하는 손을 멈추었다.
“대체 누구신지?”
“내가 누구인지를 아는 것보다, 승지가 어떤지 아는 게 중요한 게 아닌가?”
“그게 무슨 말입니까?”
“승지를 구해야 하지 않겠나? 오늘 죽을 수도 있는데.”
종철은 바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당신.. 대체 누구야?”
“그걸 묻는 시간에 나 같으면 그녀를 구하러 가겠네.”
“십알.. 당신 누구냐고?”
“승지의 운명이 너한테 달렸다는 것만 알아두게.”
그리고 끊어진 전화.
종철은 바로 승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들려오는 것은 전화 신호음일 뿐.
종철이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괴롭게 고민하는 동안,
문자 메시지 하나가 그의 스마트폰으로 전송되었다.
[서교동 한정식 청운. 10분내 도착 못하면 승지는 죽는다.]
종철은 그 문자메세지를 받자 마자, 바로 PC방을 뛰쳐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