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5화 〉또다른 적, 모습을 드러내다
밤 9시가 넘어가는 시간.
된장찌개의 구수한 냄새로 가득한 식탁에서, 종철 어머니 주여사가 승지가 밥 먹는 것을 지켜보고 있었다.
주여사는 옆에서 같이 먹는 아들에게는 한 번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채,
오직 자상하고 따사로운 눈길을 승지에게만 허락하고 있었다.
그 주여사 앞에서, 승지는 오물오물 거리며 복스럽기 이를 데 없이 잘 먹고 있었다.
주여사, 잘 구은 고등어의 가죽 밑에 숨겨진 하얀 살들을 정성껏 발라내어 승지의 밥그릇위에 살포시 올려 둔다.
“이거 먹어 봐요.”
“네?.. 네... (우물우물)”
“먹는 모습이 어쩜 이렇게 예쁠까?”
“네... 감사합니다.”
“이렇게 예쁜 딸이 있었으면 좋겠네.”
다행히 그 순간엔, 주여사의 친딸 지혜는 없었다.
종철은 먹다가 사래가 걸린 듯 음식 걸린 기침을 해댔다.
그리고, 지금 눈앞의 중년여성이 자신의 엄마임을 확인한 후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주여사는 주위 눈치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이것저것 승지를 챙겨주었다.
승지는 고맙다면서 잘 받아먹었다.
보통 여자라면 꺼려질 수도 있는 자리에서, 승지는 겉으로는 전혀 불편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중년 여성분을 흘릴 수 있는 스킬 장착까지 선보인다.
“어머니, 김치 국물이 튀었어요..”
“아니 어디?”
“여기요.”
승지가 자기 소매로 재빠르게 침을 묻혀가며 어머니 옷에 묻은 김치 국물을 열심히 닦아내었다.
주여사가 승지 손목을 잡으며, 아까운 옷 더럽힌다고 만류하더니, 기특한 마음에 승지 등을 쓰다듬어 준다.
둘 사이의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보던 종철이 조심스럽게 말한다.
“엄마. 오늘 승지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될까?”
먹던 손길과 먹이던 손길을 동시에 멈추게 한 그의 말.
어머니는 눈으로는 종철을 쬐려보며, 어이가 없이 터져 나오는 웃음을 자상한 웃음으로 가장한다.
“음.. 그래. 괜찮으면 우리 집에서 자고 가도 돼요. 근데 부모님께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은데?”
“....”
승지는 순간 고민하고 있었다.
집안에 꼬빼기도 보이지 않다가 어쩌다 한번 오면 무서운 회초리만 드는 아버지 박덕성 회장, 맨날 술에 취해 사는 어머니, 자신을 뱀의 자식으로 훑어보는 큰 오빠, 그리고 하비서를 생각하면 집에는 들어가기도 싫었다.
적어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여기가 집보다 더 편한 기분이 들었다고 할까.
“말씀은 고맙지만.....”
승지는 주저하면서 말을 흐렸다.
주여사는 순간적으로 어두워지는 승지의 낯빛을 보며, 뭔가 그녀를 붙잡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이상하게도 승지가 자고 가도록 꼭 그녀를 붙잡아야 한다는 어떤 예감이 들었다.
“지금 밤에 가는 것도 너무 늦으니까, 자고 가요. 부모님께는 꼭 전화 드려서 허락받고.”
“하지만, 어머니. 폐가 되는 것 같아서..”
“그래, 승지야. 오늘 하루 자고가. 누나 방에서.”
종철은 지금 자기 방에서 틀어박혀 있을 누나를 떠올렸다.
‘미안하다. 누나야.’
그리고 무엇보다도, 종철은 승지가 여기서 머물도록 필사적으로 그녀를 설득해야만 했다.
아까 10분전에 온 메시지 때문에..
<승지를 내일 아침까지 집에 오게 하지 마라..>
그건 명령이었다.
그 명령을 어기면 승지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를 일이었다.
종철은 어떻게든 그녀를 잡아두기 위하여 머리를 굴리고 있었고, 그 표정에는 저절로
어떤 간절함이 새겨졌다.
승지는 종철의 그 표정을 봤고, 결국 한숨을 쉬며 자신의 판단을 보류했다.
“그럼, 이따 어머니께 전화 좀 드리고 올 게요.”
그렇게 즐겁고도 애매한 저녁식사가 끝났다.
주여사와 종철이가 같이 저녁상을 치우고 있는 동안, 승지는 화장실로 들어가 집에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몇 번 들리더니, 가정부가 받았다.
“엄마 있어요?”
<지금 사모님께서 막 하비천 비서님이랑 말씀 중이신데요?>
“하비서.. 그 새끼.”
갑자기 승지의 입에서 나온 욕지거리에 깜짝 놀라는 가정부.
<네?>
“아..아녀요. 그럼 나중에 다시 전화할 게요.”
<아, 지금 사모님께서 나오셨네요. 바꿔 드리죠. 사모님, 아가씨입니다.>
어머니를 부르는 가정부의 목소리에 살짝긴장한 승지.
어떻게 해야 어머니에게 자고 간다는 걸 이해시킬지 고민하였다.
<승지니?>
최근에 들어보지 못했던 어머니의 따스한 목소리가 승지의 귀에 꽂혔다.
“엄..엄마?”
<왜 이리 늦어?>
“엄마. 미안. 나 오늘 일이 있어서 친구 집에서 자고 가야 할 거 같아.”
<야, 이 미친 뇬아, 너 오늘 처음 본 소개팅 남자랑 외박하려는 거 아냐?>
“내가 미쳤어? 절대 아냐. 내일까지 숙제할 게 많아서, 친구랑 같이 하려는 거야.”
<진짜지? 우리 딸 믿어도 되는거지?>
승지는 뭔가 이상했다.
어머니의 말투는 얼추 비슷해도, 그 말투에 이 정도로 자상함이 담긴 적은 없었다.
‘우리 딸’, 거의 10년만에 들어오는 어머니의 말.
승지는 뭔가 올라오는 것이 있으면서도, 애써 참으며 말을 이었다.
“믿던지 말던지. 여튼, 나 내일 가요.”
<그럼 내일 봐.>
“그럼 전화 끊는다~”
<승지야.. 잠깐.>
“왜?”
<엄마가 사랑한다.>
“....”
<잘 자. 우리 딸.>
승지는 전화를 끊고 나서, 어머니의 마지막 인사에 가슴이 먹먹했다.
어머니가 이외로 너무 쉽게 자고 오는 걸 허락했고, 거기에 사랑한다는 말까지 했다.
‘엄마가 왜 이러지?’
승지는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반응에 대해 곰곰이 생각하다가,
하비천이 배신 때리고 자신을 차희석에게 데려갔음을 어머니께 말하지 못한 것이 떠올랐다.
그 하비천이 자기의 어머니를 만나고 있다는 것이 내심 꺼림칙한 승지는 그러나 곧 고개를 흔들었다.
‘하비천이 내게 한 짓이 있어 미안하니까, 엄마한테 나에 대해 잘 말했나 보네.’
그래도 오늘 일은 용서할 수 없다고 승지는 이를 갈았다.
차희석에게 마음을 주었던 그 짧은 순간에, 한 여자의 풋풋한 감정을 이용하여 그녀의 몸과 마음을 마음껏 희롱했던 차희석을 씹어 죽이고 싶었던 승지였다.
그딴 새끼를 만나게 한 하비천 역시, 그녀에게는 오늘부터 증오의 대상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이 날부터, 그녀는 결단코 하비천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었다.
**
별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자정의 하늘.
그리고 강 흐르는 소리 외에 소음이 제거된 듯한 적막한 경기도 부근 전원주택.
그 곳의 정원으로 검은 승용차 하나가 소리 없이 들어오고 있었다.
그 승용차가 대기하고 있던 하비천앞에 섰을 때,
하비천은 뒷문을 열어서 고개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마윈님.”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차 밖으로 내리는 여인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사뿐하게 뻗은 매끈한 다리, 사내의 정욕을 자극하는 둔부,
볼록한 허리에 풍만한 가슴이 차례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 허리까지 차오르는 진갈색의 머리를 사뿐 휘날리는, 고양이형 얼굴이 마지막으로 선 보였을 때, 색기와 요염미 넘치는 여인의 이미지가 완성되었다.
그녀는 몽환적으로 보이는 에메랄드 빛 눈망울을 굴리면서, 애교기가 많은 웃음을 하비천에게 보냈다.
“어머, 하르슈텐트, 잘 지냈어여?”
“네. 마윈님도 그동안 중국에서 잘 지내셨는지요?”
“호호호. 나야 뭐.. 숨어 지내고 있지여. 아직까진.”
“자, 그렌바움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쪽으로 오시지요.”
천천히 지하 연구실로 걸음을 옮기는 두 사람.
“그렌바움, 그 양반이 웬일로 나한테 도움을 청하실 까나?”
“아마도 암살자 때문일 겁니다.”
“암살자? 헤프 그 머저리가 만들었다는 실험체 때문에 지하에서 벌벌 떠는 거야?”
“이제 막 카테고리 5에 들어온 자입니다. 게다가 날로 성장하고 있고요.”
심각한 표정을 짓는 하르슈텐트, 하비천과는 반대로, 마윈은 생글거리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흠.. 그래서 나의 기술력이 필요하다는 거지여?”
“네. 마윈님께서는 각 바퀠라에게 고유의 특성을 부여하시는 데 최고의 권위자 아니십니까?”
“호호.. 우리 하르슈텐트 잘 아네요? 헤프가 역시 잘 만들었어.”
마윈의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잠시 얼굴을 찡그렸던 하비천이 곧 평정을 되찾았다.
하지만 마윈은 그의 표정변화를 날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실험체들은 충분히 확보 되었고?”
“지금 수확중입니다. 곧 충분히 마련될 것입니다.”
“암살자와 싸우려면, 숙주들은 양보다 질이 우선인거 알져?”
질 좋은 숙주, 그것은 눈 하나 깜박이지 않고 살인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 일수록 질좋은 실험체로 평가 받는다.
전두엽의 기능이 거의 죽어 있는 인간이야말로 최상급의 숙주로 인정받고 있고.
하비천은 그 사실을 염두해 두면서, 오늘 벌일 일을 머리 속에 그려 놓고 있었다.
“오늘, 양질의 숙주들을 수확하러 갑니다.”
“카테고리 차이가 나는 적을 상대하려면, 다른 것을 다 희생하더라도 특정 능력을 극대화하는 수 밖에 없어요. 알져?”
“네..”
“그래서 말인데요, 내가 하르슈텐트, 그대를 매력적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데..”
'젊은 남자를 유혹하는 여인의 모습이라... 거의 지구인같이 구는군.'
하르슈텐트는 마음 속으로 마윈에 대해 불평을 뱉어내고 있었다.
“호호.. 하르슈텐트, 지금 당신의 거친 눈빛 맘에 들어요. 나를 미친 쌍년이라고 생각하는 듯한 눈빛.”
“....”
“어머, 진짜인가 보네? 호호호.. 걱정 말아여. 나 그렇게 쪼잔한 사람 아냐.. 아니지, 나 사람 아니지, 감마인이구나. 내 정신 좀 봐.”
“오해이십니다. 마윈님.”
“오해아니라니깐! 하르슈텐트. 팔다리를 다 잘라놓은 몸통에 당신의 머리만 얹어 놓으면, 그대 능력이 극대화될 수 있지여. 남의 정신을 조종할 수 있는 그 매력적인 능력. 그거 아무나 하는 거 아닌데...”
마윈은 하비천을 유혹하는 듯한, 귀여운 소녀의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나서, 당신을 느껴보고 싶은데.. 어때여?”
“암살자와 헤프를 처리하고 나면, 진지하게 고려해 보겠습니다.”
“호호호.. 좋다고 하는 표정은 아니네. 이마에 난 땀 좀 봐바.”
마윈이 짙은 향기가 나는 하얀 손을 뻗어, 그 손가락으로 하비천의 이마에 난 땀을 묻혔다.
그리고는 자기 입으로 그 손가락을 쪽쪽 빨았다.
“난, 이 땀이 맛있어. 마치 인간의 뇌수 같거든..”
“인간 실험체가 많이 쌓일 테니, 앞으로 뇌수를 많이 드실 수 있을 겁니다.”
“호호호.. 그래여? 내가 그걸 먹고 싶어서 여기 온 것이라니까.”
“양질의 것으로 많이 준비해 두겠습니다.”
하비천은 그녀를 보고 싶지 않아 고개를 정중하게 숙이며 말했다.
고개를 숙인 하비천을 보며, 마윈이 싸늘한 눈초리로 말했다.
“하비천, 난 당신이 이래서 좋아여. 알아서 준비를 잘 해 주시거든. 거기에 제법 사내다운 야망도 있고.“
마윈이 하비천의 귓가에 가까이 가서, 그의 귓불에 숨을 불어 넣는다.
<근데 어쩌지? 난 그 야망까지 사랑하지는 않는데에?>
하비천은 애교 섞인 미소를 담고 있는 마윈의 보조개를 바라보았다.
차가운 그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는 마윈의 섬뜩한 미소를 보며,
그의 마음은 더욱 무겁게 침잠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