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6화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46/68)



〈 46화 〉이 여자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헉, 헉

나는 헐떡이는 숨소리와 함께 잠에서 깨었다.
얼굴은 불에  것처럼 화끈거리고,속옷들은 젖어 있었다.
밑에서부터 전해 오는 불쾌한 습기의 기운과는 반대로,
입가는 물기가 바짝 말라 뒤틀어진 낙엽과 같았다.
나, 꿈에서 무엇을  거지?
이 나이에, 더구나 여자의 몸으로 몽정이란 걸  건가?

전화벨이 울린다.
시간을 보니 벌써 오전 10시.
토요일이라 학교를 가지 않는 것이 다행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뒤로 쓸어 올리며, 잠긴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나 헤프일세. 이제 막 일어났나 보군.”
“아, 네. 밤새 악몽을 꾸어서요.”
“악몽이라.. 혹시 그 악몽에 자네와 사내의 알몸이 보이던가?”
“네? 그걸 어떻게?”

헤프 박사가 내 꿈을 어떻게 알았지?
헤프 박사가 오늘 새벽에 나의 타액을 채취해서 검사한 것이 생각났다.
혹시 그 검사결과가 내가 오늘  야릇한 악몽과 관련이 있는 것인가?

“극도의 흥분상태에 있었고?”
“네...”
“지금 당장 지하 연구실로 내려오게.”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속옷을 갈아입었다.
젖어 있던 속옷을 벗고, 검은색 츄리닝을 입으며, 어제 내가 지혁이에게 교태부리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이상했다.
어제부터 그를 생각하면 계속 가슴이 울렁거렸다.

‘아씨.. 나 정말 미친 거 같아. 아니, 음란마귀에 씌웠다면, 여자가 나와야지  사내새끼의 덜렁이는 그것이 보이냐고.’

나는 머릿속에 가득 찬 음란마귀를 쫓아내고자, 고개를 세차게 좌우로 흔들었다.
아마도 헤프라면, 이 현상에 대해서 좋은 처방을 내려줄  있겠지.
헤프를 보기 위하여, 부리나케 지하로 내려갔다.
그로부터 어쨌든 무슨 조취를 받아야만 할 것 같았다.
이대로는 정말 견딜 수가 없었다.

“어서 오게.”
“잘 주무셨습니까?”
“흠.. 나야 잠을 자지 않고도 견딜 수 있지. 그건 그렇고...”
“뭐  알아내신 게 있어요?”

침을 삼키며 급히 물었다.

“자네, 어제부터 계속 흥분 상태가 지속된 것은 마시지 말아야 할 것을 마셔서 그런 것일세.”
“뭐라고요?”
“자네가 우연찮게 마신 건, 뇌의 특정 부위의 기능을 강화하고 다른 부위의 기능을 둔화시키는 특수 물질일세. 거기에 최음제를 섞은 것이야.”
“최음제..요?”
“지구인들은 흔히 그걸 감마 하이드록시낙산,  물뽕이라고 부르지. 물뽕에 섞인 특수 물질은 흥분기능을 극대화시키고 대신 단기기억을 손상시킨다네.”
“누가..  딴 물질을 만들었데요? 혹시  특수 물질도 감마인이 만든 건가요?”
“그렇다네. 그리고 그걸 만든 사람도 바로 네 눈앞에 있고.”

헤프가 이 약을 만들었다니, 충격적인 진실이었다.
내가 팔자 눈썹을 하여 헤프를 쳐다보았지만, 헤프는 개의치 않았다.

“감마 행성에 있을 때 과학 실험의 목적상 만든 것이네. 지구인의 왕성한 생식의 원인 및 결과를 알아보는 시약으로 말이지. 물론, 이 약을 납치한 지구인들에게 투여했고.”
“헤프.. 당신..”
“날 그리 보는 건 자유네만, 날 죽이려 들지는 마세. 당시의 나는,번식력을 잃어 멸종의 길을 걷는 감마인을 위해서라면 뭐든지 했으니까.”

그가 세삼 감마인이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그의 본질을 깨달았을 때, 나는 이질감을 느꼈다.
그에 대한 나의 분노는 당연한 것이고, 그 역시 자기의 종족을 위하여 최선을 다했다.
 뿐이다.
그 뿐인데, 멘탈이 걷잡을 수 없이 흔들린다.
그 멘탈을 붙잡기 위해, 깊은 한숨을 폐부로부터 내쉬었다.

그가 폼에서 알약 하나를 꺼냈다.

“이걸 먹게. 자네가 느끼는 증상을 완화시킬 것이야. 앞으로 하루만 더 있으면 자연스럽게 증상이 없어지기는 하겠지만.”
“감사하면서 먹어야 하나요? 이걸?”
“네가 감사하든 증오하든 내 알 바 아니고. 다만, 단기 기억 상실에 대해서는 저절로 기억이 돌아오도록 놔두는 게 좋을 것이야. 억지로 기억을 되살리다가는 큰 후유증이 올 수 있기에.”

박사를 곱지 않는 눈길로 쳐다보면서, 그가 준 알약을 꿀꺽 삼켰다.

“그것보다 중요한  있는데.. 네가 착용한 메시카움(전자렌즈)으로부터 부분적으로 전송된 정보를 분석하다 보니 박광혁은 바퀠라(변종외계인)가 아니었네.”
“그렇다면, 박광혁이 아니라, 하비천이라고 하는 비서가 혹시 바퀠라?”
“그가 바로 하르슈텐트이겠지. 내가 준 알약까지 가지고 있다면.”
“하르슈텐트?”
“내가 제작한 너의 초기형 모델이네. 프로토타입이라고도  수 있겠지.”

놀랄 일이 너무 많았다.
만날 때 마다 섬뜩한 기분을 주었던 그 하비천을 헤프박사가 개조했다니?
그리고 박사의 다음 부탁은  놀라움에 의아함을 더했다.

“부탁인데, 당분간 그를 해하지 말게. 공격하려고 하지도 말고.”
“박사님.. 왜..”
“언젠가 우리에게 도움을  수 있는 인물이네. 어떤 식으로든.”
“....”
“그보다메씨카움에 문서정보가 떴는데, 이게 뭔지 아나?”

그가 보여준 문서를 보자마자, 난 희열에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문서는 바로 박광혁의 횡령을 입증하는데 결정적인 증거가 될 수 있는 서류들.
그가 사적으로 유용한 104억의 출처를 알 수 있는 스모킹건.
지금까지 헤프에게 느꼈던 불편한 감정이 일순간에 사라지고,
나는 환희에  미소를 박사에게 보였다.

“네 표정을 보아하니,  서류가 박광혁에게 뼈아픈 한 방이 될 수 있겠군.”
“네.. 네. 이걸로 박광혁을 끌어내릴 수 있어요. 현재의 자리에서.”
“그런데 그토록 중요한 서류를 왜 너한테 스스로 보여줬을까?”
“왜 그가 그런 바보같은 짓을 했는지 모르겠지만, 어제 내가 박광혁을 만난 건 분명하네요.”
“그렇긴 하네. 메씨카움이 보내온 마지막 정보에 의하면  그를 두들겨 팼으니까.”
“와? 그래요? 그거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요.”

지금 시점에서는 내가 기억을 잃고 말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이 서류만 있다면, 검찰이나 금융원에 고발하여 그를 구속시킬 수도 있을 것이고,
아니면 장녀인 박하영을 이용하여 주주총회를 통해 박지혁을 끌어내릴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방향이든, 박광혁의 미래는 끝난 것이지.

박지혁에게연락해서, 하루빨리  서류를 박지혁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이 놀라운 소식을 알면 그가 꽤나 좋아할 것이다.
당연히 수당을 엄청나게 챙겨줄 것이고.
나중에 한자리는 두둑하게 챙겨주지 않을까?

기쁜 마음에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신호음만 계속 갈 뿐, 나의 콜은 응답을 받지 못했다.
고개를 갸우뚱했다.
내가 이한얼로 전화하면 즉각 받는 사람이 전화를 받지 않는다?
박지혁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인가?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박지혁이 아닌,
서종철로부터 10분 뒤에 뜬 메시지.
나의 불안한 예감은 결국 답을 찾았다.

[박지혁 친모가 심장마비로 돌아가셨어.]

**

SH그룹의 안주인 ‘황성희’ 여사 장례식장.
각지에서 배송된 근조화환이 장례식 복도를 꽉꽉 매우고 있었고,
각종 정재계 인사들이 장례식장을 찾아들어, 식장은 매우 혼잡한 상태였다.

막내 승지를 제외한, 장녀 박하영, 둘째 박광혁, 그리고 셋째 박지혁까지 분향소에 도열하여 문상객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최근 들어 급격하게 병색이 완연한 박덕성 회장은 휠체어에 앉아, 활짝 웃고 있는 황여사의 영정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승지와 함께 병원과 장례식장을 따라온 종철에게는 현재 이 모든 상황이 혼란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아침에 집으로부터 온 전화  통에 그대로 쓰러져 버린 승지.
혼절한 승지를 깨워서 부리나케 병원에 왔는데,
어머니의 주검 앞에서 승지는 아버지와 자기 큰 오빠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고,
하비천을 저주하며 울다가,  실신해 버렸다.

그는 그렇게 실신한 승지와 떨어져서, 병원 휴게실 한쪽 구석에 쪼그려 앉아있었다.
 장례식장에서 아는 사람이라고는 박지혁과 박승지일 뿐, 그는 말을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었다.
다행히 그의 고독은 이한얼이 오면서 해결되었다.
검은 상복을 입은 한얼이 종철을 발견하고는 그에게로 뛰어왔다.

“종철아, 어떻게 된 거야?”
“...보는 대로. 승지 어머님이 갑작스럽게 돌아가셨고, 여기 와보니 지혁 선배가 있었고.”
“정말 심장마비로 돌아가신 거야?”
“병원에서는 그렇게 이야기해. 검안의도 그렇게 통보했고.”

모든 정황을 보더라도, 자살도 아닌, 더더군다나 타살도 아닌, 단순 급사인 것이었다.
그러나, 한얼은 머릿속을 짓누르는 꺼림칙한 그림을 떨쳐 버릴 수가 없었다.

‘한필 나한테  좋은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에 이런 부고가 발생하다니..’

그녀의 생각은 곧 종철의 차가운 목소리에 흩어졌다.

“이한얼.”
“왜..?”
“너 알고 있었지?”
“무엇을 말야?”
“승지가 지혁 선배의 친동생인거.”

종철이의 날카로운 추궁에 그녀는 할 말을 잃어 버렸다.
말을 더듬는 그녀를 보고 확신에  종철.

“그..그게..”
“알고 있었구나.”
“사실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시바, 이 나쁜 새끼야.”
“.........”
“재벌놀이에 심취하더니, 알면서 즐긴 거냐?”
“종철아,그건 오해야.”
“닥쳐! 네가 지금 한돌이었으면 턱 쪼가리 날라 갔을 거야.”

그의 목소리가 분노로 강하게 떨려오고 있었다.
종철이의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얼은 그의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잠시 둘 사이에 침묵의 시간이 흘렀다.
하지만,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종철이가 자리에서 일어나 바지를 툭툭 털었다.
한얼의 시선을 외면한 채, 퉁명하게 말을 걸었다.

“가자”
“장례식장 분향소로?”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분향은 드리고 가야지.”
“알았어.”

종철이가 앞서가고, 그 뒤를 한얼이 묵묵히 뒤따라 걷고 있었다.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 한적한 곳에 이르러서, 종철이가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여전히 한얼을 보지 않은 채로, 살짝 젖어있는 습기를 목소리에 담았다.

“승지가 재벌 막내딸인  진즉에 알았으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야.”
“......”
“그녀에게 닥친 불행도, 위험도 볼 일이 없었겠지.”
“......”
“그 모든 것을 지켜봐야 하는 내가.. 지금 존나게 힘들거든.”
“무슨 일이 있었어?  사이에?”

종철은 얼이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무슨 고민을 털어놓을 듯 입술을 움직이더니 곧 입을 닫았다.

“아니다. 힘들긴 쥐뿔. 그냥 해본 말이야.”

한얼은 본능적으로 그에게 어떤 비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3삼자가 알아서는   종철이와 승지 사이의 비밀.
그게 혹시 박광혁과도 연결되어 있는 비밀일까?
하지만 한얼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종철이가 터져 나올 울음을 애써 참고 있었기 때문이다.

분향소 앞에 왔을 때,
종철은 그 안에 승지가 없음을 알았다.
아직까지 승지의 정신이 제대로 들어오지 못한 탓이었다.

“얼, 너 혼자 들어가. 난 승지가 오면 이따 따로 분향할게.”

종철의 말에 따라, 분향소에 혼자 들어오게 된 한얼,
분향소에 들어오면서 한얼은 내심 긴장을 하고 있었다.
분명히 박광혁을 마주  텐데, 그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이 되지 않았다.
야심만만하고 도도하다고 소문난 박하영을 처음 만나는 것 역시,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박덕성 회장, 요즘 외부활동을 자제할 만큼 병색이 완연하다고 하지만 그 깐깐한 대호(大虎)를 어찌 대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인사만 하고 나와야지.’

한얼은 그리 마음먹고 분향소에 들어갔다.
그렇게 분향소에 들어가는 순간, 그녀를 보는 눈들이 유달리 빛났다.
지혁은 그리움과 반가움이 섞인 눈빛을, 광혁은 음탕한 기운이 담긴 눈빛을, 하영은 호기심어린 시선을 얼이에게 보내고 있었다.

한얼은 종철과 함께 국화꽃을 헌화하고 향을 피운 다음, 고개를 숙여 묵념을 하였다.
묵념이 끝난 후, 광혁에게로 와서 인사말을 던졌다.

“상념이 크시겠습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혀 그녀와 만난 일이 없었던 것처럼 천연덕 스럽게 말하는 광혁.
어제 얼이한테서 폭행을 당한 사람답지 않게, 다친 곳도 없이 특별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의 시선도 어느새 음욕을 거둔지 오래였고.

‘전혀 나를 보는 시선에 흔들림이 없다. 이게 뭐지?’

한얼은 고개를 살짝 갸우뚱했다.
그녀는 곧 마음속에 떠오르는 의문을 떨쳐 버리고는, 장녀인 박하영에게로 가서 목례를 하였다.
하영 역시 말없이 살짝 얼이에게 고개를 숙였다.
제법 쌀쌀하고 날카롭게 생긴 각진 얼굴에, 체구는 매우 말라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성이 눈가에 슬픔이라고는 전혀 담기지 않는, 메마른 감정을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지혁.
가족 중 유일하게 진심으로 슬퍼 보이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서 애도의 표현을 하려는 순간이었다.
한얼이 입을  떼기도 전에, 지혁이가 얼이의 손을 잡았다.
깜짝 놀란 얼이가 눈을 동그렇게 떴다.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손을 잡힌 얼이가 당황한 가운데, 말을 더듬으며 위로의 말을 애써 꺼내고 있었다.

“삼가 고인의.. 명..복..”
“한얼,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

지혁을 제외한 모든 가족들이 깜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고,
가족의 시선을 아랑곳 하지 않는 지혁이 박덕성 회장에게로 가서 한얼을 소개하였다.
낮고 단호하게, 그리고 또박또박 천천히.

“아버지,  여자가 제가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때까지 흐릿했던 박덕성 회장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면서, 지혁과 한얼을 노려보고 있었다.
죽어있던 총기(聰氣)와 분기(憤氣)가 같이 되살아 난 듯, 매섭게 둘을 바라보며 그가 다물었던 입을 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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