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7화 〉황여사의 며느리
“지금 상중에 뭐하자는 것이야?”
박덕성 회장의 날카로운 쇳소리가 공기를 찢었다.
하얗게 질려 버린 한얼을 흘끔 보며, 지혁은 담담하게 자기 속말을 꺼내었다.
“어머니 소원을 들어 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뭣..뭣이?”
박덕성 회장은 어안이 벙벙한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제 어머님 영정 앞에서, 당신 소원인 며느리 감을 보여드리는 겁니다.”
“이 자리가 어디라고? 이런, 불효망측한 놈!”
“불효망측하다뇨? 슬프지도 않는데 억지로 슬픈 척을 하는 아버지나 여기 있는 사람들보다야 제가 더 낫지 않겠습니까?”
박광혁과 박하영이 지혁의 도발에 어이가 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고, 지혁은 분노의 눈빛으로 그 둘과 아버지를 번갈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분노를 마주하던 박덕성 회장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밖으로만 나돌고 다른 여색을 가까이 했던 나의 업보로군. 업보야.’
박덕성은 아들의 눈길을 애써 외면해 버리고는 입을 닫았다.
그리고 아들에 의하여 애인으로 일컫는 여자에게 눈길 하나 주지를 않았다.
한얼은 한얼대로, 지혁의 폭주에 기절초풍할 노릇이었다.
분향소에서 손을 잡힌 것도 놀랄 일인데, 그의 입에서 연이어 나온 말은 그녀의 상상을 초월해 버린 것이었다.
그렇다고, 지혁을 제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여기서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라고 부인하는 것은 지혁을 너무 비참하게 만들어 버리는 꼴이었다.
이도저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는 그녀 앞에 구세주가 등장한 건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내 딸의 마지막 가는 길이 왜 이리 시끄러운가..”
천천히 노구를 이끌고 모습을 드러내는 80대 후반의 백발의 노신사, 황정달.
그리고 그 황정달을 부축이며, 초췌한 모습으로 박승지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장신이며 듬직한 체구의 그가, 나이에 걸맞지 않는 정정한 모습을 보이며 등장했을 때,
분향소의 분위기는 더없이 진중해졌다.
젊은이보다도 더 빛나는 총기를 가득 채운 그의 눈빛은 차갑게 주위 사람들에 꽂혔다가, 지혁에 이르러서는 자애롭고 따스한 것으로 변모하였다.
“손자가 우리 성희, 마지막 소원 들어주려고 하는 데 뭐가 문제인가?”
“장인..어르신.”
황정달은 휠체어에서 살짝 일어나 목례를 취하려는 박덕성에게 가만히 앉아있으라 손짓하였다.
황정달은 옆에서 훌쩍이는 박승지의 등을 천천히 토닥거리며, 딸의 영정앞에 섰다.
딸의 주검 앞에서 이미 많은 눈물을 쏟은 듯 눈이 벌겋게 되었지만, 그는 영정 앞에서 의연한 태도를 잃지 않았다.
“지혁과 승지는 걱정하지 말고 잘 가게. 여기 아들 며느리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황정달 옆에 선 승지는 가슴 깊이 흐느끼며 울고 있었지만, 황정달은 그녀를 애처럽게 바라볼 뿐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다.
그는 의도적으로, 박덕성 회장의 전처 자식들과 박덕성 회장이 보는 앞에서 일체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이 그의 살아오는 방식이었던 셈이었다.
적이 될 수 있는 자들에게는 등을 보이지 않는다는 그의 철저한 삶의 방식.
황정달은 딸을 분향하는 이 순간에도, 삶의 철학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황정달은 분향을 마치고 천천히 지혁과 한얼의 앞에 섰다.
박지혁이 할아버지의 앞에 고개를 숙였다.
“외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저 때문에..”
“죄송하단 말은 어미가 살아있었을 때 했어야 하는 것이지.”
“네..”
살짝 울음을 삼키는 지혁.
황정달이 지혁의 옆에 있던 한얼을 지긋이 바라보았다.
그때서야, 지혁이 얼이의 잡은 손을 풀었다.
“지혁이, 네가 말하던 색시가 이 아가씨더냐?”
한얼이 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하였다.
“안녕하세요. 이한얼이라고 합니다.”
“내 이름은 손자놈으로부터 들어봤을 것이고?”
“네. 명동에서 오랫동안 금융사업을 하셨던 황 정자, 달자라고 알고 있습니다.”
“금융사업이라.. 후후. 딸 간수도 제대로 못하는 놈이 돈놀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이한얼은 황정달의 풍채 앞에서 숨이 막히는 기운을 느꼈다.
하지만, 그녀는 최대한 상대의 기에 눌리지 않기 위하여 한자씩 또박또박 답변하였다.
“자네.. 잠깐 나를 좀 똑바로 볼 수 있겠나?”
황정달의 주문에 이한얼은 의아함을 느끼면서도 황정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의 주름진 얼굴이 한얼의 한 눈에 들어 왔고, 그의 범상치 않는 안광이 그녀에게 똑바로 향하였다.
황정달은 한동안 이한얼을 그렇게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 무거운 입을 떼었다.
“천하절색의 미모군.. 우리 손자가 좋아할 만하네.”
“네.. 감..감사합니다.”
“난 근데, 자네 눈빛이 특히 맘에 드네. 자네의 총기를 사고 싶을 만큼.”
“제가..요?”
“언젠가 우리 손자놈과 같이 우리 집에 들리시게. 그리고..”
황정달이 이한얼에게만 들릴 만큼 조용히 속삮였다.
“우리 손자를 꼭 지켜주게.”
지켜준다? 부탁한다도 아니고 지켜준다?
황정달의 말이 돌덩이처럼 그녀의 마음에 깊이 가라앉았다.
한얼은 분향소를 천천히 나가고 있는 그 노구의 신사를 복잡한 심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딸의 죽음가운데에서도 지나치리만큼 침착하고 의연한 태도를 견지하는 그의 뒷모습이 유달리 강하고 커보였다.
**
“도대체 당신 왜 그딴 말을 했어?”
나는 분향소에 있던 지혁을 불러내어 심하게 따졌다.
아무리 어머니 상중이라지만, 사안이 사안인지라
넋 놓고 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혁이 ‘그딴 말’이라는 말에 기분이 상한 듯싶었다.
“그딴 말은 아니야. 심각하게 고민하고 한 말이야.”
“당신 진짜 미쳤어? 내 의사 한마디 묻지 않고 며느리?”
“그건.. 진짜 어머니 소원이 생각나서..”
평상시 같으면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릴 일이다.
남의 인생을 작정하고 망쳐 놓는 발언인데.
거기에다가 그 외할아버지되는 사람한테,
신부감으로 인정을 받은 상황이었다.
한마디로, 내 동의없이 누구 신부로 팔려간 상황인거지.
“허... 참.”
“솔직히, 아까 분향소에 있었을 때 박광혁이 널 보는 걸 견딜 수가 없었어. 그래서..”
“그래서 그런 개소리를 했다?”
“씨팔. 그건 개소리가 아니었다고.”
그가 드러내놓고 면전에서 욕을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상황에서 정신이 없기도 하고 여러모로 신경이 날카로운 상황이겠지.
그래도, 그 욕을 듣는 입장은 정말 열 받을 수 밖에.
갑자기 나도 분기탱천해져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씨발? 그게 지금 나한테 할 소리야?”
“이한얼! 쫌!!”
“왜!!”
“그냥.. 그냥 받아주면 안 돼? 지금 내 상황이 어떤 줄 알잖아? 어?”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가 갑자기 애원조로 바뀌었다.
욕을먹은 나 역시 필사적으로 내 감정을 누르고 있었다.
둘이 이렇게 감정싸움을 하고 있으면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지혁씨. 당신 마음은 잘 알겠는데, 지금은.. 아냐. 이렇게 하는 건 아니라고.”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는데?”
“우선 우리, 이건 나중에 말하기로 해요. 지금은 어머니 상중이니까.”
“이한얼, 네가 불러서 지금 말하고 있는 거잖아. 지금! 지금이 아니면 언제 이야기 하는데?”
평상시의 지혁이 아니었다.
감정기복이 지나치게 심하고 쉽게 격분하는 모습.
자신을 절제하지 못하는 모습이 지나쳤다.
지금 상황에서 내 말 한마디 잘 못하면 지혁은 큰 상처를 입을 것만 같았다.
그리고 더 난처한 건, 그가 울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의 눈으로부터 눈물이 뚝 떨어져 그의 허벅지를 적셨다.
아까 분향식에서 흘리던 것과는 다른 종류의 눈물이 지금 내 앞에서 보이고 있었다.
정말,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지혁씨?”
“.......”
“오빠...”
“미안하다. 나 바보 같지? 내가 너한테 욕한 것도, 다 내가모자라서, 그런거야.”
이렇게 지혁이가 울어버리면 안되는데.
이 자식한테 해야 할 말이 더 남았는데..
차마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광혁이 편취한 104억의 행방을 규명하는 자료를 확보했다는 것도,
주주총회를 열어서 결판을 봐야 한다는 사실도,
최대한 우리 측에 우호적인 주주를 끌어 모아야 한다는 사실도,
그러려면 현 시점에서 아버지를 적으로 돌려버리면 안 된다는 것도,
그의 현 상태에서는 어떤 것도 말할 수가 없었다.
지금의 지혁은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해졌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의 충격이 그를 뒤흔들어버린 탓이겠지.
이 메마른 순간에는, 그와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이럴 때는,나에게 기댈 수 있도록, 조금의 여지는 허락해 주는 수밖에..
“오빠..”
“미안해. 얼! 그래, 나중에 이야기하자. 지금은 너무..”
“오빠. 안아줄게. 잠깐만이라도.”
“얼아?”
“몸과 마음을 잠깐 맡기고 가세요. 저기 가면 또 싫은 사람들과 함께 있어야 하잖아.”
지혁이 잠깐 망설였다.
하지만, 그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내게로 와서, 나를 꼭 안았다.
나와 그는 그냥 그렇게 5분을 안고 있었다.
그의 거칠었던 숨소리가 점차 부드러워 지고 있었고,
내 목덜미를 간질이는 그의 호흡에서 그 온기가 점차 더해지고 있었다.
한동안 조용히 그를 안고 있던 나는 그에게 위로랍시고 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그에게 부러워했던 것을 살짝 과대해서.
“오빠, 알죠? 나 고아인거.”
“어.”
“난 가끔 부모님 상 당했다는 분들을 부러워 한 적이 있어요.”
“왜?”
“부모님의 마지막 순간을 같이 할 수 있다는 거잖아. 적어도 부모님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을 간직하는 것이니까.”
그가 조용히 포옹을 풀고, 나를 보았다.
무슨 말을 하려다가 그가 입을 다물었다.
아마도 위로의 말이겠지.
“생각해 보면, 나는 영원히 부모님을 기억할 수 있는 시간이 없는 거여요. 정말 나 죽을 때까지 혼자만의 추억으로 채워지는 거고... 물론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릴 수는 있겠지만, 남들이 가지고 있는 ‘영원한 내편’은 없는 거죠. 차라리 아예 기억이 없는 게 나으려나?”
“.......”
“왜 날 버렸냐고 차라리 원망할 수 있는 대상이 있으면 좋겠는데, 그 대상도 없으니까..”
“얼..”
“그러니까, 힘내시라고요. 부모를 모르는 나 같은 사람도 잘 살고 있잖아요.”
뭐 사실, 부모 자체에 대한 기억이 없으면 슬퍼할 건덕지가 별로 없다.
같이 있던 순간의 추억거리자체가 없는데 무엇을 가지고 슬퍼해야 하나?
하지만 지금의 나는 그를 위로해야 했고, 나는 내 상실감을 과대해서 말해야 했다.
그래도, 나의 위로에 힘을 얻었는지, 나를 보고 웃었다.
“고맙다. 얼”
“이제, 빈소로 가세요.”
“얼, 미안한데 너한테 하나만 하고 가면 안 돼?”
“뭔데요, 그게?”
그가 갑자기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정말 이 녀석이 또!
“이....”
“내 어머니의 소원을 들어드릴 키스야!”
그는 그렇게 빈소로 돌아갔다.
저렇게 저 녀석이 가버리면, 내가 얼굴도 모르는
황성희 여사의 며느리가 되는 걸 인정하는 꼴이 되어 버리는데.
아씨. 난 남자라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