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8화 〉당신 하나면 됩니다.
해가 산 너머로 잠기어, 어둠이 몰려오는 시간.
서울 외곽의 변두리 지역.
캄캄한 빈 연립주택에 비밀 번호를 따고 들어오는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손에 반짝이는 식칼이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보아,
예사롭지 않는 목적을 가지고 그 집에 침입한 듯보였다.
위 아래 검은 츄리닝으로 도배한 30대 초반의 체구 듬직한 남자가 빈 집에 들어오자마자 자신의 모자를 벗었다.
스포츠형 머리의 각진 얼굴형을 지닌 이 사내는 입가에 유달리 긴 흉터가 있었고, 흉터는 껌을 씹는 턱의 움직임에 따라 요동치고 있었다.
그는 쫙 찢어진 서늘한 눈가에 살기를 담고서는, 빈집에 있는 가족 사진을 노려보고 있었다.
특히, 가족 사진 가운데에 위치한 예쁘장하게 생긴 여인 하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쌍년.. 날 배신하고 딴 놈하고 붙어?”
그의 말에는 온기라고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는 도저히 진압할 수 없는 격노를 몇 마디 욕과 함께 밖으로 뿜어 내고서는, 발작적으로 마른 기침을 해댔다.
담배를 많이 핀 탓인지 그의 입에서는 짙은 니코틴 향이 베어져 나고 있었다.
“다, 죽여버린다. 은연서.. 네 눈 앞에서 최고의 고통을 맛보게 해주지. 네 언니, 네 엄마의 살점이 뜯어진 시체를 직접 보게 해주마.”
그는 음침한 웃음을 흘리고서는, 이 집의 주인들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다.
—찰칵
문이 열리는 소리에, 이 사내는 자신의 칼을 단단히 쥐었다.
그의 머릿속에는 그가 해야 할 일들을 재빨리 탐색하고 있었다.
목부터 찔러 소리를 지르지 못하게 하고, 차례로 배와 가슴에 칼 빵을 놓는다.
그리고 다리를 찔러 도망가지 못하게 한다.
그리고, 죽어가는 여자들에게 마지막 극락을 선사한다.
그는 자기가 세운 계획을 자화자찬하며, 문을 막 열고 들어서는 인물의 목을 향해 찔러 들어갔다.
―퍼억~~
이상했다.
그 사내의 계획에는 빈틈이 없었는데, 그의 칼은 빈 곳을 갈랐다.
대신 그 사내는 자신의 복부로부터 심장을 멎게 하는 둔통을 느껴야만 했다.
―우욱~~~
외마디 비명과 함께 무릎을 꿇어야 했던 사내.
곧바로 그는 점심에 먹었던 것을 자기 눈으로 확인해야만 했다.
열심히 음식물을 게워내는 그 사내의 코에 낯선 라벤다향이 들어왔다.
그 사내가 고개를 들어 보니, 색기가 넘쳐 보이는 아리따운 여인의 모습이 보였다.
그 여인은 그 사내를 내려다보며, 재미있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어머나. 이를 어쩌면 좋아? 제품에 손상이 생겼네?”
“으...으.. 너.. 누구냐?”
“내가 누군지 알면 뭐하시게여?”
“너.. 이.. XXX년.. 널 죽여서...”
“긍워쵸레이바(跟我做爱吧) [날 따먹어 보시게]?”
이 여인의 입에서 갑자기 나온 유창한 중국어에 슬쩍 놀란 사내.
그는 이 여인이 자신을 희롱하고 있음을 느끼고, 격노를 참을 수가 없었다.
사내는 곧 칼을 손에 다시 쥐고 천천히 일어났다.
“미친 뇬.. 누군지 모르지만 넌 죽었어.”
“입조심 하세요. 창자가 끊어지는 고통을 당하지 않으시려면여.”
그 사내는 그 여자를 향해 매섭게 칼을 찔러 들어갔다.
그러나 그 칼은 다시 허공을 갈랐을 뿐이었다.
―쨍깡~~
칼이 바닥에 떨어지고, 들려오는 것은...
―우욱~~~ 우욱~~~~ 아...아아악
어느덧 갑자기 거대해진 여자의 손에 얼굴을 잡혀버린 사내의 신음소리.
그녀의 날카로운 손톱이 그의 정수리와 측두골에 예리하게 박혀,
그곳으로 부터 검붉은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비명을 지르시면 안 되니까.. 입 좀 다물게 해볼께여..”
그녀의 가운데 손가락이 긴 촉수로 변하며, 그의 구강을 파고들었다.
아무 말도 못하고, 그 긴 촉수가 자신의 머리 속으로 들어 오는 것을 생생히 느껴야만 했던 사내,
결국 동공이 없어지고 흰자위만 보이더니, 축 늘어져 버렸다.
그 여자는 촉수의 끝에 묻은 그 남자의 뇌수를 그녀의 혀 끝에 살짝 대어 보았다.
“맛있네... 먹고 싶은데....”
하지만, 곧 그녀는 자신의 ‘수확’ 임무를 떠올렸다.
그녀의 이름은 마윈.
워낙 바쁜 하르슈켄트를 대신하여 자신이 임무를 자원한 상황이었던 것.
지금 여기서 자기 배 속이나 채우고 있으면, 그렌바움 대관이 중국에 위치한 자신의 하이브(hive)에 지원을 끊을 수도 있었다.
마윈은 고개를 떨궜다.
“아쉽지만, 지금은 참아야지. 음.. 하르슈켄트가 이 사내라고 했겠다? 맞나 확인해 볼까?”
그녀는 메시카움을 키고 이 사내의 두뇌를 스캔해 보았다.
메시카움의 전원이 켜지면서, 그녀의 눈으로부터 빛의 광선이 아래 위로 교차하여 흘렀다.
그리고 나온 결과.
[본 인간은 전두엽이 거의 없는 양질의 두뇌를 갖고 있습니다.]
그녀는 메시카움의 메시지를 보고 미소를 지었다.
“이 정도면 카테고리 3이상의 바퀠라를 만드는데 손색이 없겠어. 후후.. 이 제품에는 어떤 능력을 부여하지?”
그녀는 이 사내에 맞는 특수 능력을 생각하고 있다가 손뼉을 쳤다.
“그래, 그 능력이면 암살자를 처리하는데 딱이겠네... 호호.. 재미있겠다.”
마윈은 벽장 위에 시간을 확인하더니, 곧 그녀가 가야할 때임을 알았다.
그녀는 쓰러져 있는 사내에게 주문을 읊는다.
“르테슈마르테(너는 나의 종!)”
그러자, 동공에 흰 자위만 가득한 사내가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 사내를 보며 만족한 웃음을 지은 마윈이 명령을 내렸다.
“이제 우리 집으로 가자.”
“네......”
“내가 널 맛있게 만들어 줄게.”
서서히 움직여 가는 그 사내의 몸체.
그 사내에게서는 일절 어떤 의지도 볼 수 없었다.
그 사내와 같이 떠나려던 마윈은 문득 가족 사진에 시선을 고정했다.
“저것들, 다 먹고 갈까?”
잠시 고민했던 마윈은 그러나, 고개를 흔들었다.
“어차피, 우리가 지배하는 세상이 오면 널린게 뇌수일 것을. 지금은 시간이 없으니까.. 호호호. 당신들 오늘 운이 대통한 날이네요.“
그녀는 웃음소리를 남기며, 그 집에서 서서히 자신의 자취를 감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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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W(New World) 그룹 사옥이 눈에 보이는 한 커피숖.
그곳에 흰 티셔츠에 청바지를 대충 구겨 입은 한 단발머리의 여자가 커피 한잔을 시켜 놓고 누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혀 화장을 안 한 얼굴, 부수수한 머리, 부엉이를 연상케 하는 커다란 둥근 테 안경을 쓴 모습 등은, 영락없이 자신을 가꾸는데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히키코모리
인상마저 주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눈에 이제 막 커피숖의 문을 열고 등장한 한 남자가 들어왔다.
그 사내는 일면 글만 읽은 서생 같은 풍모를 풍겼지만, 그의 눈빛은 물길을 자르는 예리한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그 30대 초반의 지성미가 넘치는 남자는 천천히 그녀가 앉은 자리로 다가섰다.
“혹시 이한얼씨입니까?”
“네.. 맞아요. 제 생얼이 화장한 얼굴과 많이 다르죠?”
“하하.. 솔직히 알아보기 어렵군요.”
“여자한테 그런 말을 하면 실례기는 한데..”
“다행히, 한얼씨한테는 실례가 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이한얼은 지금 마주친 남자를 찬찬히 쳐다보았다.
그녀가 꼽는 강력한 호적수, 송준수를 지금 마주보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잠시 숨을 고른 후, 말을 이었다.
“송준수씨. 박광혁을 잡을 물건을 가져왔습니다.”
“물건이라.. 그거 참 궁금해지는군요.”
이한얼은 그의 폼에서 서류를 하나 꺼낸 후, 그에게 내밀었다.
“박광혁, 그의 자금 횡령을 입증할 수 있는 자료입니다.”
송준수는 그녀가 내민 자료를 꼼꼼히 훑어 보았다.
그리고는 그 자료를 내려다 놓았다.
“이 자료가 허위이거나 부실자료일 가능성은 없겠습니까?”
“수치는 살짝 다를 수 있는데, 자금 사용 출처는 정확한 것으로 판명되고 있습니다.”
“페이크(fake)를 쳐서 역으로 이용해 먹을 상대의 계략일 수도 있는데요..”
“제가 알아본 바로는 그런 가능성은 없습니다.”
“이한얼씨께서 알아본 바로는 그렇다?...”
송준수는 턱에 손을 괴었다.
그가 깊이 생각할 때의 버릇을 드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이 정도면 1급 기밀 자료인데.. 그 사람 주위에 이한얼씨와 통할 수 있는 제5열이 있겠군요.”
“제 5열이라 함은...”
“당신의 친구가 그의 주변에 포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새봄은 그 가능성도 생각해 보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런 기밀 자료를 누설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박광혁 주변에서 도통 떠오르지 않아서, 공모자의 가능성은 폐기했었던 것.
그럼에도 이한얼은 준수의 추론 자체를 거부하지 않았다.
“아직은 그 친구가 누군지는 모르겠습니다.”
“후후.. 그 공모자가 당신의 친구가 아닐 수도 있다는 것으로 들립니다.”
“적일수도 있다는?”
이한얼은 그 순간 한 인물이 번뜩이며 스쳐지나갔다.
바로 하비천.
하르슈켄트로 불리는 자.
하비천에게 박광혁이 수단이라면, 그는 자신의 더 큰 목적을 위해 박광혁을 버릴 수도 있을 것이다.
이한얼은 송준수의 추론에 비로소 뭔가 단서를 잡은 느낌이었다.
이한얼의 눈빛이 변하는 것을 지켜본 송준수는 입가에 조용한 미소 하나를 띄웠다.
“뭔가를 알아 내신 것 같군요.”
“아.. 네.. 송준수씨 때문에 그림 하나가 잡혔습니다.”
“그래요? 그럼 제가 이한얼양에게 한턱 얻어먹어야 겠습니다.”
“그럼, 이왕 도움을 주실 바에, 통 큰 도움 하나 주시면 어떠실지요?”
“어떻게 말입니까?”
한얼은 여기 커피숖에서 송준수를 만나는 목적을 이제부터 이야기하고자 하였다.
“제 친오빠를 송준수씨의 개인비서로 NW에 취직시켜 주십시오.”
“.....그게 무슨?”
“가급적 계약직으로요. 아니면 인턴이라도 좋습니다.”
“차라리 이한얼, 당신이면 모를까 친오빠를 취직시켜 달라?”
“제 친오빠가 NW의 타이틀을 가지고 박하영과 접촉하게 해달라는 겁니다.”
송준수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한얼을 바라 보았다가, 곧 평정을 되찾았다.
“그러니까, 친오빠에게 박광혁의 비리를 박하영에게 전해주는 전달자의 역할을 맡기겠다는 말씀이군요”
“네. 저는 이미 상대에게 오픈된 상태이고, SH 그룹을 배반한다는 욕을 들어먹으면서까지 박지혁씨가 나설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런 건 대가가 필요한 건데?”
“대가는... 리듐폴리모베터리(전기자동차 배터리), BMS(배터리 관리 시스템)가 어떻겠습니까? 대신, NW에서도 체구에 맞지 않는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를 내놓으시면 상호 윈윈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보는데요..”
송준수는 한얼의 제안에 쓴웃음을 지었다.
송준수는 이미 AP(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 사업 진입이 거의 불가능함을 체득하고 있었던 바였다.
반면, 상대적으로 자동차 부품 사업에 강점을 가지고 있던 NW측에서는 SH에 뺐긴 두 가지 사업부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한얼의 제안은 송준수에게 있어서 어찌 보면 굉장히 필요한 것이었다.
“좋은 거래 내용이군요.”
송준수는 그녀의 제안에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건 우리 둘만이 처리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담보를 설정하자는 겁니다.”
“담보라? 담보로 생각해 두신 것이 있습니까?”
송준수의 질문에 한얼은 침을 꿀꺽 삼켰다.
솔직히 한얼은 준수가 그녀의 제의를 받아들일지 확신은 서지 않는 상태였다.
50대50의 확률.
하지만, 그녀는 과감히 질러 보기로 하였다.
“담보는 박지혁과 저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송준수는 빙그레 웃었다.
한얼이 정확하게 해석할 수 없는 애매모호한 웃음.
그가 담보를 받아들이겠다는 것인지, 아닌지 전혀 알 수 없는 웃음을 띄우며,
송준수는 이한얼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담보는 하나로 족합니다.”
“네?”
“바로 당신 하나. 하나면 됩니다.”
송준수의 말에, 이한얼은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카페에서 틀어 놓은 TV에서 뉴스 하나가 그들의 귀에 들려오고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TSN 오후 뉴스입니다. 어제 밤에 실종된 호송차가 **강에 추락한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차안에 있던 죄수와 경찰 관계자등 총 15명이 실종되었으며. 현재 수색작업이 한창입니다. 경찰은 CCTV등을 통해서 사고 원인을 조사 중이나. 근방 10km내의 모든 CCTV의 작동이 멈추는 사고가 발생하여 원인 규명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소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