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화 〉종철을 향한 승지의 마음
화성의 지하 감마기지.
황제파와 반황제파 간의 극렬한 전투로 폐허가 된 지 벌써 3년째.
감마기지의 완전한 파괴를 꿈꾸었던 반황제파의 염원과는 달리, 기지 지하 깊숙이 위치하고 있었던 중앙동력장치는 온전히 가동되고 있었다.
인공지능을 갖춘 이 장치는 태양플레어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스스로 생존을 꾀할 수 있었고, 3년간의 자동수리를 거쳐 이제 막 깨어나기 직전에 있었다.
중앙동력장치는 태양플레어 에너지를 변형, 융합한 다량의 감마에너지를 지구로 전송할 채비를 갖추고 있었다.
감마 에너지.
그것은 반황제파와 지구인들한테는 불행의 서막이지만, 황제파들에게 있어서는 기회의 시작이었다.
바퀠라(변형외계인)를 제조하고 유지하기 위해서, 그리고 각종 감마족의 장비와 무기를 활성화시켜주기 위해서 필수적인 이 감마에너지가 송출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동력장치의 인공지능 창으로부터 카운트 다운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슈케트 팔레이트마라 크레텔진 로큐미테 (모든 필요한 절차 완성. 전송 타겟 크레82 로큐 40)]
[트.미.치.진.스 (5.4.3.2.1)]
―쿠오오오오오오오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에너지 송출탑에서 시뻘건 빛의 무리가 어마어마한 섬광을 발산하며, 무시무시한 속도로 이동하기 시작하였다.
그 강력한 에너지파들은 핏빛에서 점차 투명색으로 색깔을 바꿔가며, 거칠게 지구를 향해 몰려 들어가고 있었다.
마치 태양이 발산하는 슈퍼플레어의 축소판처럼..
이날 인공위성 몇 개가 박살 나버렸고, 한국에서는 전자장비에 일시적으로 장애가 오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NASA가 이 불규칙한 에너지 파동을 감지하여 미국의 백악관에 통보하였고, 백안관에서는 자체적으로 비상사태를 선언하여 긴급국가안보회의까지 여는 촌극이 벌어지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NASA는 이상 현상에 대한 원인을 규명하지 못한 채, 끝내 오늘의 사건을 불가사의한 일로 치부해버렸다.
그리고, 이후에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지구의 모든 일상은 그렇게 평온하게 유지되었다.
**
[종철이의 고백]
나는 승지 어머니의 3일장을 내내 지켰다.
승지의 가족도 아니고,
장례식장에 아는 사람이라고는 거의 없는데도,
승지가 눈물을 머금고 나를 바라보는 그 표정 하나 때문에,
황금 같은 주말을 장례식장에서 보냈다.
어머님 발인 전날 승지가 내 손을 잡고 부탁했었다.
“네 집에 두고 온 내 노트북 좀 내일 갖다 줘.”
나도 눈치가 있다.
어머니 가시는 마지막 길에 나도 따라와 달라는 거구나..
그래서, 그녀를 위해 승지 어머님 발인에도 따라 갔었다.
승지는 어디서 그 많은 눈물을 자꾸 만들어 내는지, 오열하고 또 오열했다.
지혁이 형은 그런 승지를 다독이며 눈물 몇 방울 흘렸고.
안타까운 건, 이 발인식에 정말 슬퍼하는 사람이라고는
지혁이형과 승지, 그리고 승지의 외할아버지 정도나 될까?
나머지 가족들은 다른사람이 보기에도 정말 딱 티가 날 만큼,
최소한의 예의만 차리고 있었다.
그래서, 승지가 나에게 와달라고 부탁했던 것일까?
그런데, 솔직히 나도 장례 절차 내내,
1교시와 5교시 수업 결석의 여파를 걱정하고 있었다.
승지한테는 미안한 일이지만.
장지까지 내가 따라가니, 사람들의 시선이 좀 이상하긴 했다.
재벌집 딸 하나 꼬시려고 별 짓을 다한다는 그런 시선?
나와 그녀의 사정을 모른다면 그럴 만하겠지!
이외로 지혁이 형이 나를 따스하게 보며, 고맙다고 인사를 했다.
지혁이 형한테 그런 온화한 표정을 본 일이 없는데...
혹시 승지의 남자친구로 인정을 한 것일까?
아니다. 그럴 리가.
그냥 의례적인 인사겠지.
모든 장례절차가 끝난 후, 버스타고 서울로 돌아오는 길.
승지가 남의 눈치 보지 않고 내 옆 자리에 앉았다.
“종철아.”
“왜?”
“여기까지 왜 왔어? 발인까지 네가 올 필요 없었는데.”
“네가 오라고 했잖아?”
“어?”
이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입을 벌린다.
자기가 했던 말이 기억이 안 나는 모양이다.
선택적 기억 삭제인가?
“노트북 갖고 오라며?”
“아...”
“자, 이거 네 노트북 돌려줄게.”
“아냐. 이거 네가 갖고 있어.”
“뭐?”
“내일 학교에서 돌려줘.”
승지의 마음을 모르겠다.
이 무거운 것을 들고 내내 뻘뻘 거렸는데, 다시 가져가랜다.
그럴 것이면 아예 오늘 돌려달란 말을 하지 말지.
“종철아..”
“왜에 또?”
다른 때보다 승지의 목소리가 작아진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목소리로,
입을 오물거리며 말한다.
“모든 것에 다 고마웠어.”
이 가시나,
이제야 자기의 맘을 표현하네.
내가 승지에게서 오늘 처음 고맙다는 표현을 들은 것 같은데..
그런데, 말이 좀 이상하다.
모든 것이 고마웠다?
고맙다는 말을 왜 과거로 표현하지?
회자정리, 뭐 그런 거야?
이제부터 나를 좀 멀리하고 싶다.. 그런 건가?
“왜.. 과거형이야?”
“엉?”
“그냥, 네가 고마웠다고 그래서..”
“그..게 이상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
승지가 잠시 침묵을 지킨다.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해서 버스 창문 밖 풍경을 잠시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5분 정도가 흐르고, 빨갛게 충혈된 그녀의 눈이 다시 나한테로 향했다.
좀 전만 해도 눈이 붓기는 했지만 충혈 되지는 않았었는데..
그런데, 전혀 예상 못한 엉뚱한 말이 그녀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다시 생각해봐도, 노트북.. 오늘 말고 내일 받아야겠다.”
그럼 그렇지.
저 여자 생각에는 노트북 밖에 없다.
그녀의 노트북 앞에서 난 아무것도 아닌 존재이지.
에이, 나는 뭘 기대한 거야?
승지는 곧 잠에 빠져들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무거워진 자기 머리를 나한테 기대었다.
그녀를 보며 마음 한 편으로는 가슴 설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아련해지는 느낌.
그리고 점차 강하게 내 마음을 짓누르는 걱정.
그녀를 죽이려고 했던 그 야수 같은 인간과
내게 전화를 걸어 승지를 구하는데 도움을 준 정체불명의 사내가 마음에 걸렸다.
‘절대 비밀로 하라는 그 사내의 말이 옳은 것일까? 그 사내가 혹시 승지를 해코지하려는 건 아닐까?’
나는 결국 생각을 정리하지 못한 채로,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나와 승지 둘은 결국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서로의 머리를 기대고 푹 자고야 말았다.
다음날,
난 노트북을 승지에게 미리 가져다주지 못한 대가를 치르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학교 수업에 늦었다.
물론, 내 수업이 아니고 그녀 수업에.
나는 부리나케 달려가고 있었다.
경영대 건물이 아닌 음대 건물을 향해서.
내 옆에는 승지가 헥헥 거리며 나를 열심히 쫓아오고 있었다.
저렇게 뛰다가는 수업에 늦을 텐데.
가만, 음대 건물이 경영대 건물과는 꽤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 생각났다.
이런, 음대로 뛰면 뛸수록 경영대와는 멀어지던데?
“승지야, 여기서 헤어지면 안 될까? 나도 수업 늦을 거 같거든.”
“안 돼. 음대 건물 앞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잖아.”
“너 다 큰 어른이야. 이걸 못 들어서 날 부려 먹냐?”
“참나. 넌 그것 하나 못 들어서 씨부렁거리냐?”
나의 품에는 하드복구용 노트북과 그녀의 핸드백이,
승지의 손에는 나의 백팩이 있었다.
“각자짐은 각자가 들지 이게 뭔 지랄이래?”
“간단해. 네 건 가볍고, 내 건 무거우니까.”
“이게 웬 똥구멍에 콧털 나는 논리야?”
“정 억울하면 나보다 살을 빼던가!”
다행히도, 하루 만에 승지가 기운을 차린 듯 싶었다.
그리고 난 하루 만에 머슴으로 복귀하였다.
“너 다음부터 사물함에 짐 좀 두고 다녀.”
“사물함 더러워서 싫어.”
“그럼 차를 갖고 다니던가.”
“할아버지가 걸아가래.”
“할아버지?”
“나, 집 나와서 외할아버지 댁에서 살기로 했어.”
어쩐지.. 종종 보이던 승지의 차가 없더니만.
외할아버지가 좀 엄하신 편인 모양이군.
내가 장례식에서 기억하기로, 그녀의 외할아버지는
풍채가 든든하셨던 분인데..
“말년에 고생이 많으시다. 그 어르신.”
“흥... 내 덕에 할부지 자기계발 하실 거거든.”
“엉?”
“요리학원 다니실 거래. 그 연세에.”
“그 연세에 굳이?”
“손녀딸에게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신가 보지, 뭐.”
확실히 예전의 승지가 맞았다.
철딱서니 없이 저리 말하는 거 보니, 틀림없네.
다행이다.
승지가 예전의 그녀 모습을 잃고 살까봐 걱정했었는데..
“너 그거 자랑할 일은 아닌 거 같은데.. 네가 다녀야 하지 않을까? 그 요리학원.”
“요즘 내가 얼마나 살기 바쁜 지 알아?”
“그럼 나는? 네 뒤치다꺼리는 나는 어떨 것 같아?”
“사내 자식이 속 좁기는.. 나한테 이 정도도 못해 주냐?”
“네 까짓 게 뭐라고?? 이 정도면 충분히 됐지! 뭘 또 바래?”
그녀의 구박에 내가 반항을 좀 세게 해봤다.
솔직히, 이렇게 사람을 부려먹는 건 정도가 아니지..
나도 주여사의 귀한 아들인데, 이렇게 머슴같이 시달리는 꼴을 주여사가 보면 뒤로 넘어가실 거다.
그래서, 한번 세게 나가본 건데...
승지가 갑자기 바쁘게 움직이는 걸음을 멈췄다.
그러더니 상처 입은 얼굴을 하고서는, 나를 노려보았다.
씩씩 대며, 내게로 오는 승지.
“왜..왜?”
“이.. 존나게 나쁜 자식아.”
―퍽~~
그녀가 구두로 나의 정강이를 세게 깠다.
난 외마디 비명과 함께 바닥에 쓰러졌다.
“야이.. 이... 너.. 이씨..”
그녀가 쓰러진 나에게서 자기 핸드백을 뺏어 가져가더니, 그대로 음대로 뛰어갔다.
그녀의 노트북은 여전히 내 수중에 있었고, 내 백팩은 여전히 그녀의 수중에 있었다.
참, 저 백팩에 수업과제가 있는데?
아우, 내가 미쳤지.
저런 개싸가지가 뭐가 좋다고?
나는 이를 박박 갈면서, 그녀를 쫓아 음대로 정신없이 뛰어갔다.
내 가방을 내놓으라고, 이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