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화 〉[2부 시작] 폭풍의 전야에서 난 선배를 거부한다.
감마에너지가 지구에 전송된 지 8일.
4월 중순의 햇살은 여기 한국대학교의 전경을 따스하게 어루만져 주고 있었다.
짙은 아카시아 냄새가 펄럭이며 휘날리는 꽃가루에 그 향취를 더하고 있었고,
오고가는 여학생들의 옷차림은 봄의 유혹에 화답하듯 유려한 색채를 선보이며,
젊은 남학생들의 가슴에 강렬한 청춘의 설레임을 선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봄날의 이 전경을 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한 청춘들도 많은 법.
누구는 알바의 고단함에, 누구는 학자금 대출의 걱정으로, 누구는 미래 취업의 고민으로 각자 일그러진 자화상을 안고서, 결코 따스하지 못한 봄날을 견뎌내고 있었다.
시간과 같이 전진해서 가는 건, 그들의 비쩍 마른 고민일 뿐, 행복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은 뒤로 돌아갈 뿐이다.
그리고, 자신을 억눌러 오는긴장과 고민으로 아침부터 한숨을 푹 쉬어대는 여기 또 하나의 청춘이 도서관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하얗다 못해 파래기까지 해 보이는 순백의 피부에 꼿꼿이 솟아오른 콧날,
빛이 반짝이며 머물다 가는 입술,
그리고 맑고 투명한 눈망울까지 모든 것이 완벽해 보이는 여인이었다.
허리 근처까지 차오르는 윤기 있는 검은 머리카락이 그녀의 하얀 피부와 선명한 대조를 이루어, 보는 사람들에게 잊혀지지 않을 그리움을 주는 소녀였다.
그러나, 다른 이의 그리움을 자아낼 그녀는 정작 아침부터 한 번도 활짝 웃은 적이 없었다.
미래에 대한 걱정보다, 미래가 아예 없어질지 모르는 중압감어린 공포로 그녀는 아미를 연신 찡그리고 있었을 뿐이었다.
애써, 행복이라 불릴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뒤로 돌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빛이 반짝이는 그녀의 입술이 빛바랜 한숨을 토해내며, 몇 마디 말을 중얼거렸다.
‘어쩌면 오늘부터 생존게임에 돌입할 거야. 바퀠라와의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그녀는 잠시 도서관 너머의 창연의 하늘을 넋 잃고 바라보았다.
‘저 하늘을 내일도 볼 수 있을까?’
그녀의 상념은 곧 누군가의 굵은 목소리에 의해 깨졌다.
“무슨 생각 해?”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막 대출한 경영학 관련 책 다섯 권을 책상 위에 올려 두며, 어깨를 아래 위로 돌리고 있었다.
“아, 지혁 선배. 그냥 이것 저것 생각 중. 중간고사 기간이라 마음이 심란하네요.”
“이한얼씨가 웬 엄살이실까.. 나의 제갈공명께서?”
‘나의 제갈공명’이라..
한얼은 그의 말을 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부쩍 지혁 선배가 그의 것에 그녀를 집어넣는 경우가 많아졌다.
처음에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했건만, 이제는 그녀도 지쳐 버렸다.
그녀가 말리다가 지칠 바엔, 차라리 그냥 그가 알아서 지쳐 떨어지도록 하는 것이 좋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그가 그런 말을 할 때 마다 철저한 무반응.
그녀가 생각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이다.
“공부하기 힘들면, 잠깐 산책이라도?”
그의 제안에, 얼이는 도서관의 시간을 체크했다.
오후 12시 30분이 다 되어 가는데 산책을 이야기하는 이 사람은 참 눈치가 없는 인간이라는 생각을 가져본다.
그녀는 아직 밥을 안 먹었는데, 그가 밥을 먹었다면 의리가 없는 것이고.
“밥 먹죠. 선배.”
“어?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얼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종철을 찾았다.
가급적 식사 같이 하자고 늦게라도 온다 하였는데, 그는 끝내 올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승지와 밥을 먹고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오늘도 지혁 선배와 단 둘이 식사할 수 밖에 없을 듯싶었다.
“어.. 내가 밥을 늦게 먹어서 밥 생각이 없었네. 미안! 대신 네가 메뉴 정해봐.”
“소식하고 싶네요.”
“소식? 다이어트 중이야?”
“소고기 먹자고요.”
당장 오늘 밤이라도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식사 한 끼 잘 먹어둬야 한다는 게 그녀의 철칙이었다.
‘소식은 무슨 얼어 죽을 소식. 고기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곱다는데..’
그리 말하고 그녀는 입을 손으로 급하게 막았다.
죽다는 표현을 두 번이나 생각하다니..
그녀의 머릿속에 불길함을 떠올리고는 또 그 생각을 급히 지웠다.
그녀의 머릿속에 무엇이 들어있는지 모르는 지혁이 의아한 듯 쳐다보았다.
얼이가 대충 웃음으로 얼버무린다.
“하하.. 선배가 사실 거죠?”
“내가? 또?”
“네. 또 사세요.”
“좀 억지 같은데. 그거?”
“메뉴 정해보라고 선배가 말했잖아. 그럼 선배가 쏘겠다는 말 아닌가?”
결국 그녀의 의지대로 모든 것이 실현되었다.
소의 껍질들이 숯불위에서 그대로 자빠져 있었고,
그의 두툼한 지갑은 식탁위에 올라가져 있었다.
“오빠 지갑이 꽤 멋져 보이네요?”
“왜 갑자기 호칭 전환?”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니까 해 본 겁니다.”
“오빠라는 말 한마디에? 그건 당연한 거잖아?”
“당연하지 않아요. 저한텐.”
그녀에게는 매우 어렵고 힘든 표현이 오빠라는 호칭이었다.
아직도 한얼은 본인이 테스토스테론이 넘친다고 착각하고 있었고,
그의 정체성을 해치는 오빠라는 표현을 쓰는 건 크나큰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라고 검증받지 못한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물론, 그 생각은 그녀가 맘대로 합리화하는 것에 불과하지만.
“사람이 속 좁게 굴지 말고, 소고기나 먹어요.”
“뭐가 속 좁은 거야?”
“오빠라는 호칭에 목매지 말라는 거죠.”
“그 호칭... 지금 네가 먼저 꺼낸 거잖아.”
소고기 사주며, 오빠 소리 제대로 못 듣고,
속 좁은 사람으로 매도당한 바보선배가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자, 이거 드시고 속 푸시지요. 오라버님.”
한얼은 다 익은 고기 한 점을 그에게 내주고, 두 배의 고기를 자신이 취하였다.
그가 아무리 여자가 되었다 해도, 남자일 적의 식욕과 밥량은 그대로였던 것.
공기밥에 가득 쌓아둔 일용할 양식을 싹둑 비워내는 한얼을 보면서,
지혁은 이제 자기의 소원을 입 밖으로 꺼내놓아야 할 때임을 알았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지만, 지혁의 소원은..
“너보고 있으면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물로 가득 차 팽창할 대로 팽창해진 양 볼을 하고서는, 한얼이 불안한 눈초리로 그를 쳐다보았다.
“아므..믈..드..흐..지..마..엽! (아무 말도 하지 마요!)”
“다행히 내가 좀 잘 살거든. 어때? 황성희 여사 며느리로 오는 게?”
결국 분수가 뿜어져 나오는 것처럼 다양한 음식물 찌꺼기들을 지혁에게 작렬시키는 한얼.
지혁은 한얼의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 버렸다.
지혁이의 얼굴에 파편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한얼은 급히 화장지를 꺼내서 잔해 처리를 하고 있었다.
“너!!!”
“그러기에 그따위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해요?”
“빨리 얼굴, 휴지로 닦아줘.”
“그냥 화장실 가세요.”
“사고 친 사람이 책임을 져야지!”
“선배가 사고를 유발했잖아!”
결국 지혁이 짜증을 내며 화장실로 뛰어갔다.
한얼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그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어쩐다.. 저 선배, 장례식 이후로 점점 더 집착이 심해지네.’
결국 한 치의 틈을 보이면 상대는 그 틈을 집요하게 파고드는 건 당연한 것.
한얼은 지혁이 어떻게든 그녀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기 위하여 최선을 다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지혁을 이용할 뿐, 자신의 마음을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더군다나, 이제부터는 전장의 한 가운데 있게 되지 않겠는가?
설마 그럴 리는 없을 것이라고 마음을 굳게 먹어도,
그녀는 자기 자신이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질 수도 있음을 알고 있었다.
‘미안해요. 지혁 선배.’
어차피 그녀가 뭐라 말하든 지혁이가 듣지 않는다면, 한얼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결국 그녀는 가장 뻔한 결론에 도달했다.
‘될 대로 되라지.’
**********
밤 11시즈음 되는 시각..
레이다 교란 장치를 달고 있는 윙바디 트럭 하나가 인적이 없는 도로 길을 달리고 있었다.
그 윙바디 트럭의 운전사는 나이를 제대로 가늠할 수 없는 40-60대 사이의 남성이었다.
그의 나이대를 제대로 추산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행색이 매우 특이했기 때문이었는데,
그의 눈에 동공이 하나도 없이 온통 회색 빛으로 번들거렸고,
그의 머리는 머리카락이 모두 빠진 채 핏빛이 감도는 이방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런 그가 어디론가 교신을 하는 중이었다.
“에덴카스 보고드립니다. 현지점 크레305 로큐145. 방출지점에 거의 도착했습니다.”
<카테고리 1 케르베로스는 안전한가?>
그는 콘솔박스에서 버튼 하나를 눌렀다.
그러자, 트레일러가 다소 불규칙하게 흔들렸고, 그 진동에 괴이한 소음이 들려왔다.
―크르르르릉.. 크흐흐흐
―캬아아악..크크르르
―카이아악 크흐흐
“확인 결과, 케르베로스, 4마리 모두 안전합니다.”
<이제 명령을 하달하겠다. 케르베로스 오픈 후, 트럭을 특정장소에서 대기시킨다.>
“네...”
<두 가지 지침을 잊지 마라. 수확 혹은 교전이다.>
“교전이면 어떻게 할까요?”
<케르베르스를 따라가서, 암살자를 지켜보도록. 그리고 그의 정체를 파악해서 보고한다.>
“로트! 네쿠트 감마(알겠습니다! 감마족의 영광을!)”
그가 교신을 끊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트럭 안에 경고음이 울렸다.
그는 씩 웃고서는 콘솔 박스의 파란색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트레일러의 입구가 개방되기 시작하였고,
그곳 안에서 있던 네 마리 괴물이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것들은 놀랍게도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오래된 피가 묻어서인지 검붉은 색의 침을 걸쭉하게 흘리고,
예전에는 손이라 불렸던 앞발 두 개와 뒷발 두 개로 땅바닥을 딛고 서서,
얼굴을 가득 덮은 머리털 사이로 혈안을 번뜩이고 있는 괴이한 모습.
바로 케르베르스라 불리는 것들의 정체였다.
케르베르스는 각 발마다 부착한 단단하고 예리한 손톱으로,
트레일러의 바닥을 날카로운 쇳소리를 내며 긁고 있었다.
―띠띠띠띠.. 삐이익~~~~~
―크아아아악... 커하하하하하. 크크크크크
케르베르스들의 목줄에서 파란 신호가 빨간 신호로 바뀜과 동시에,
그 괴물들은 트레일러 바닥에 깊은 상처를 내며,
땅을 박차고 무시무시한 속도로 타켓을 향해 짓이겨 나아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