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화 〉여자로서 살 수 있습니다.
“내 목소리 들리는가?”
헤프의 목소리가 내 귀에 어렴풋이 들렀다.
그리고 머리를 때리는 가벼운 통증에 눈을 떴다.
난 치료용 캡슐 안에 있었고, 나의 머리에는 라테카움(전자가발)이 씌어져 있었다.
싸늘한 기운에, 고개를 들어 아래를 훑어보니 실 한 오라기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순간적으로 국부를 가린 나는 다소 빨개진 얼굴로 헤프를 쳐다보았다.
‘이 염감탱이, 팬티라도 좀 입혀 주지.’
내가 원망섞인 중얼거림을 입에 띄우자, 헤프는 슬쩍 감정 없는 미소를 짓는다.
“다행이군.”
“제가 왜 여기서 자고 있었던 거죠?”
“자네는 잔 게 아니라 치료를 받았던 것일세.”
“치료요? 지금 멀쩡한데요?”
“자네 죽을 고비까지 겪었단 걸 아는가?”
“설마요..”
이 안에서 정신없이 잠을 잤을 뿐인데, 그게 내 삶의 마지막 꿀잠일 수도 있었다니!
문득, 나는 숨이 막혀 죽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눈을 뜨긴 떴는데,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손만 움직일 수 있는 상태였다.
굵은 통유리가 바로 내 몸 위에 덮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프 박사님. 이 유리 좀...”
“자네가 본 건 유리가 아냐. 투명막이지. 1분 있으면 저절로 그 투명막이 해체될 것일세.”
박사의 말대로 1분 후, 그 투명막이 사라졌다.
나는 몸을 천천히 일으켜 세웠다.
아직 머리의 통증이 미약하게나마 남아 있었지만, 상태는 제법 괜찮았다.
나는 손과 이마의 상처 상태를 확인해 보았다.
놀랍게도, 상처의 흔적은 사라지고 없었다.
“정말, 감마족의 의술은 대단하네요.”
“상처의 흔적을 없애는 건, 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이 상처로 죽을 수도 있었다고요?”
“그 외상은 아무것도 아니네. 다만 자네 머리의 에너지 파동이 문제지.”
“그럼 혹시 저 머리에 뇌출혈이 생긴 겁니까?”
“아니. 뇌출혈보다 더 심각한 상황에 있었던 것일세. 싸이킥 에너지가 거의 폭주하기 직전이었으니까.”
언뜻 싸이킥 에너지의 위험성에 대해서 박사에게 강의를 들은 기억이 났다.
싸이킥 에너지는 일종의 감정 에너지이기 때문에 감정 기복이 통제 불가능한 수준에 이르면, 사람의 두뇌가 견딜 수 없는 지경에까지 싸이킥 에너지가 발산된다고 하였다.
“자네. 나에게 한 가지를 더 약속해줘야 하겠네.”
“어떤 것을 말입니까?”
“어제의 난동을 기억하는가?”
박사의 힐난성 문책에 난 할 말을 잃었다.
샤워하다 말고 밖으로 뛰쳐나가 박사에게 고래고래 소리 질렀던 순간이 주마등을 스쳤다.
“죄송합니다.”
“너의 죄송 소리를 듣기 위함이 아니네.”
“하지만, 어제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이유를 듣고 싶지도 않네.”
“.....”
“네가 지켜줘야 할 약속은, 어제와 같은 난동이 벌어지지 않도록, 예방조치를 철저히 취하라는 것이다.”
역시 예상대로, 박사는 나의 내면의 상처, 그런 것에 대한 이해도, 관심도 없었다.
결과에 대한 기계적인 처방, 그게 다 일뿐이지.
처방이 아무리 완벽한들, 마음의 상처는 남기 마련인 것이다.
그게 인간의 마음인데, 감마족이 설마 그걸 알려나?
“이 시간부로 밖에 나갈 때는 라테카움(전자가발)을 항시 쓰고 다니도록 해라. 싸이킥 에너지를 통제하고 안정화시킬 수 있는 라테카움을 쓰고 있지 않으면 어떤 결과를 초래할 지는 어제 잘 알았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적의 레이더에 걸리지 않도록 은폐물질인 라피카움을 바르고 다니고.”
“네.”
“또한 전투상황이외의 셀리카움의 사용을 금한다.”
“네? 그건... 그건 안 됩니다.”
셀리카움을 활성화시켜야 한돌이 될 수 있고, 평범한 여자의 모습으로 밖을 돌아다닐 수 있는데?
나는 그 조건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강한 의사를 표시했다.
“셀리카움의 과용은 너의 신체적 기능을 약화시킨다. 정작 전투 때 힘을 제대로 못쓰고 적에게 죽고 싶은 것인가?”
“하..하지만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어서요. 적과의 전투에서 이기는 것도 중요하지만 저에게는 제 개인적인 목표를 이뤄가는 것도 중요하다고요”
“.......”
“그러지 않으면, 전 미쳐서 죽어요. 지금도 전쟁의 기억 때문에 힘든데, 개인적인 꿈마저 없다면 전 살 수가 없어요.”
“지금 모습 가지고는 안 되겠는가?”
“제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한돌이 필요합니다.”
박사가 나의 애절한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자신의턱을 몇 번 쓰다듬었다.
“하루에 두 시간.”
“네?”
“그 이상은 어렵네. 셀리카움(초정밀 보호막)의 세팅을 그렇게 맞추어 놓을 테니, 그리 알게나.”
“...알겠습니다.”
나는 헤프박사의 결정에 수긍하였다.
그나마 하루에 두 시간 만큼은 예전의 한돌로 보낼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였다.
전쟁이 끝나면, 예전의 상태로 돌아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도 가져보았다.
전쟁이 끝나면.
그러나 전쟁이 끝나기 전까지, 나는 살아 있을 수 있을까?
어제 전투의 기억이 저절로 떠올리며, 또 마음이 울적해졌다.
“자네, 지금의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고 사는 것이 어떤가? 이한얼이 싫은 건가?”
헤프 박사가 뜬금없이 내게 제안이라는 것을 하였다.
전혀 생각지 못한 그의 말에 나는 당황했고, 나의 응답은 궁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저는 여자가 아니니까요.”
“그건 너의 주관일 뿐이다.”
그의 성급한 주장은 나의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저는 여자가 아닙니다.”
“쓸데없는 의지일세.”
이 사람이 정말 오늘따라 끈질기다.
헤프가 이러는 이유가 뭐지?
“왜 자꾸 저를 여자로 만들려고 하십니까?”
“너는 왜 생물학적 성을 애써 거부하는가?”
“제 마음이 예전의 한돌로 돌아가고 싶다는데, 그럼 어쩌라고요?”
“그게 언제까지 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아뇨. 전 끝까지 갈 겁니다. 한돌이고 싶은 마음, 놓지 않을 것이라고요.”
“후후후. 글쎄다. 너의 의지를 몸이 따라갈까?”
그의 말이 매섭게 다가오고 있었다.
이한얼이 된 이후부터, 그렇게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나의 내면에 균열이 일어나고 있었다.
무디었던 감성도,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도, 나의 가치관도 모든 것이 변하고 있었다.
나의 의지가 몸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점차 몸이 나의 의지를 잡아먹고 있었다.
슬프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그리고 헤프는 그 지점을 명확히 지적하고 있었다.
“예전의 너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았던 사람이라지? 지금은 어떠한가? 조그만 것에도 상처를 받고, 감정적으로 격앙되며 눈물 흘리는 일이 많지 않았던가?”
“당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여요?”
“연구자의 호기심이라고 해두지. 성별이 바뀐 인간 실험체가 겪는 감성적 변화가 꽤 흥미로운 주제거든.”
헤프의 말에, 난 완전히 격앙되었다.
헤프의 말대로 난 쉽게 흥분해 버렸다.
머리에 뒤집어 쓴 라테카움 덕분에 어제와 같은 어지럼증은 없었지만,
제어가 되지 않는 감정의 폭풍이 나를 다시 삼켜버렸다.
“이.. 나쁜 자식... 개새끼.... 나를 실험실의 쥐로 취급하다니..”
“인정하게. 자네의 현재를. 신체적 자아와 감성적 자아를 분리하면 그만큼 더 힘들어지니까, 지금의 모든 것을 인정하라는 이야기일세. 분리하면 분리할수록 더 고통스러워질 것이고, 그건 결국 전투력의 저하로 이어질 테니까.”
“대체 시발 왜... 왜 또 나를 건드리냐고!!!!”
“어제의 기억을 완화시켜주는 데에는 새로운 고민이 특효약일 수도 있지. 난 자네에게 약을 준 것이네.”
아, 이 잔인한 인간.
나는 온몸에 힘이 쭉 빠지며, 치료용 캡슐에 걸터앉았다.
더 이상 그와 이야기할 힘마저 없어져 버렸다.
헤프가 내게 처방한 약 때문일까?
모든 생각들이 다 부질없이 느껴졌다.
“어제의 그 부질없는 기억들, 너를 갉아먹는 기억들은 빨리 잊게나. 그건 너의 잘못이 아닐세. 너는 해야 할 바를 다 한 것일 뿐.”
그의 말에 다시 시야가 흐려진다.
눈물이 또 흐르기 시작했다.
왜, 헤프의 마지막 말에 눈물이 나는 것이었을까?
두 손을 이마에 괴고 나는 울었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울어버리는 게 가능하다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내가 숨죽여 오열하는 것을 지켜본 헤프가 내 옆에 검은색 캡슐 10개를 조용히 놔두었다.
“이건, 좀 더 강력한 신경안정제일세. 어제의 기억을 잊는데 도움이 될 것이야. 대신 부작용으로는, 지금과 같은 모습이 종종 보이게 된다는 점이지만.”
“....”
“힘들면 먹게나. 일상으로 돌아가기에는 부족함이 없을 것일세.”
그가 조용히 사라지려는데, 내가 그의 소매를 붙잡았다.
소매를 잡힌 헤프가 살짝 당황하며, 내 손위에 그의 손을 포갰다.
내 손을 뿌리치려는 것이겠지..
“헤프 박사님..”
“왜?”
“박사님 말씀대로 그렇게 사는 것이 정답일까요?”
“이한얼로 사는 것을 의미하는 건가?”
“그렇게 살면 제가 행복해 질 수 있을까요?”
“모든 것은 네 마음에 달린 것이겠지.”
이외로 헤프 박사가 내 손을 뿌리치지 않았다.
단지 토닥였을 뿐이었다.
전에 한번도 보지 못했던 헤프의 새로운 모습 때문이었을까...
나는 내 마음 하나를 표현했다.
"살고 싶어요. 전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다면, 여자로도 잘 살 수 있어요. 살아 남을렵니다. 꼭 살 거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