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5화 〉마윈 그리고 하비천
케르베르스를 처단했던 날로부터 4일이 흘렀다.
짧은 전투의 상처 탓인지, 나는 완벽히 이방인이 되어버렸다.
이전의 자연스러웠던 모든 일상들이 그 전투를 기점으로 내게는 낯선 이질감으로 다가왔다.
나는 홀로 피를 흘려가며 목숨을 건 싸움을 하고 있는데,
타인은 일상속에서 경쟁에 뒤쳐지지 않기 위한 소소한 싸움을 하고 있었다.
싸움의 스케일과 본질이 달라, 나와 다른 사람들사이에는 간극이 조금씩 넓어지고 있었다.
이것도 순전히 나만의 감상이겠지만.
그래도 나는 일상에 제대로 복귀해 보고자 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난 여전히 학교를 잘 다녔고, 나름 열심히 공부하여 중간고사를 봤다.
시험 성적은 어떻게 나올지 모르지만, 남들이 하는 걸 모두 다 따라서 했으니 내 스스로에게 대견하다는 생각을 억지로라도 가져보았다.
난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내 옆에서 학교 교정을 걷고 있는 종철이는 아무 생각이 없어 보인다.
일상을 노력하는 나와 달리, 그는 일상을 즐긴다.
얄미운 자식.
“어우.. 드디어 중간고사 끝이다”
경영학 원론 시험을 막 보고 온 종철이가 기지개를 폈다.
그리고 홀가분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고 너털웃음을 짓기 시작했다.
그가 시험을 잘 본 건 아니다.
찍신이 제때 강림하지 않아 시험을 제대로 망쳤는데, 저 지랄을 하는 것이다.
이해를 못하는 바는 아니다.
승지와의 달콤할 순간을 생각하면 그 까짓 시험이었다.
연애의 망상에 지 인생 망치는 줄 모르고 날뛰는 하루살이 같은 놈,
그 서종철이 하루의 시간을 일생처럼, 치열하게 연애하며 살겠다는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것이다.
“어이, 한돌.”
“왜?”
하늘하늘 거리는 긴 머리를 한 나의 모습을 자연스럽게 부인하듯, 그가 과거의 이름으로 나를 부른다.
“간만에 LOL 한판 뜰까?”
“나, 게임 끊었다.”
“됐다. 그럼.”
예전의 그라면 삼세번 더 하자고 졸랐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못이기는 척 했을 지도 모르는데.
칼 같이 끊어버리는 그의 말에 혹시나 했던 나의 마음이 다 송구스럽다.
“너, 그렇다고 LOL 안할 놈 아니잖아.”
“당연하지. 할 사람 따로 있거든.”
“그럼 나한테 왜 물어본 건데?”
“그냥 예의상 물어본 거고, 넌 예상했던 답변을 한 거지.”
“예상했던 답변이 뭔데?”
“지금 네가 말했잖아. 안하겠다고. 그래서 난 고마운 거고.”
내가 LOL 상대를 응해주지 않아서 고맙다는 그의 반응에 괜히 심통이 났다.
“게임은 끊었지만 LOL은 할 수 있어.”
“그게 말이 되냐?”
“나한테 LOL은 게임이 아니다. 실전 전투지.”
“됐어. 이미 버스는 지나갔거든.”
“지금 버스 세우고 있잖아.”
“미안하다. 운전사 마음이다.”
종철이, 이 의리 없는 새끼! 진즉 알아봤어야 했다.
이리도 같이 놀 친구가 없다니.
이럴 줄 알았으면 학과 내 여러 사람들과 두루 사귀었어야 했는데.
오직 박지혁에 목매단 대가가 이리도 크구나.
종철이 폰이 흔들렀다.
종철이 얼굴에 미소가 피어나는 것으로 보아, 그 주인공은 뻔하지.
그런데, 그가 웃으면서 받았다가 울상이 되어 전화를 끊는다.
“왜? 오늘 승지가 만나기 힘들데?”
“알바가 줄줄이 잡혔다고 해서.”
“어이구야. 이거 어떻게 하냐?”
“우리, 간만에.. LOL 할까?”
이러면 역전이 된 거 맞지?
그러기에, 종철이처럼 사람은 미리 단언을 해서는 안 된다.
“버스 떠났다며!”
“떠났다기보다는.. 어..”
종철이 비굴한 태도를 보이며, 갑자기 내 소매를 잡았다.
“간만에, 우리 어릴 적 시절을 회상하며 놀아보는 것이 어떻겠냐?”
“이렇게 둘이? 승지가 별로 안 좋아할 텐데..”
“승지 걔 배포 큰 여자야. 걱정 안 해도 돼.”
“됐어요. 꺼지세요.”
종철이가 머리를 긁적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진즉 잘 하지.
이제 와서 아쉬운 듯 꼬리를 흔들다니.
나는 그 앞에서 코웃음을 쳤다.
종철이 녀석이 조금 기죽은 표정이다.
어차피 오늘 종철이 녀석과 놀 계획이 있었으니,
한번즈음은 너그럽게 봐주는 것도 대인배다운 모습이겠지?
“종철아, 오늘 술 먹자.”
“술?”
“게임 말고, 간만에 우리 둘이 따로 술 먹자고.”
“너 술 약하잖아?”
“너보다는 낫지.”
“근데 술은 좀..”
종철이가 술 먹자는 나의 제의에 쉽게 OK를 하지 않는다.
승지가 아마도 그녀 외에 여자랑 단둘이 술집 가지 말라고 종철이를 협박했을지 모를 일이다.
“왜? 내가 여자의 모습이라 꺼림칙해?”
“그거는.. 어... 그래. 맞다. 네가 돌이 모습을 하면 되겠네. 너 변신 가능하잖아?”
“미안하지만, 그건 어려워졌어.”
“왜? 이유가 뭔데?”
종철이 급격하게 어두워진 내 표정을 보면서 질문을 거둬들였다.
“뭐.. 말 못할 이유가 있구먼.”
“말 못할 비밀도 많아. 오늘 너랑 이야기를 좀 하며 풀고 싶어서.”
“그럼 지혁이 형도 부를까?”
박지혁.
그는 시험이 끝나자마자 만나야할 사람들이 있다며 바삐 떠났었다.
아마도 주주총회와 관련된 우리 측 우호세력들을 만나고 있겠지.
나에게도 같이 가자고 했지만, 난 거절했었다.
아직까지 내가 정상이 아닌데, 섣불리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는 않았다.
“그 사람은 놔둬. 너하고만 이야기할 게 있어.”
박지혁은 지금 매우 바쁜 사람이고, 아직까지 그에게 내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은 없었다.
“돌아, 오늘 말하고자 하는 게 심각한 거야?”
“음.. 그냥..”
종철이가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긴장감이 잔뜩 서린 표정으로 내 귀에 소곤거렸다.
“사실.. 나도 네게 털어놓을 게 있어.”
“어?”
“말해야 될까, 말까 고민하던 게 있어. 승지와 관계된 거야.”
“....”
“너라면 승지를 위험에서 건져줄 수 있을 거 같기도 해서.”
한없이 진지한 종철이의 얼굴에서, 그의 눈이 갑자기 빨개졌다.
이렇게 급격한 감정의 변화를 보이는 건, 그에게서 처음 보는 일인데.
오늘 술모임이 뭔가 심상치는 않겠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가 자신의 눈을 소매로 닦더니 다시 내게 웃음을 보였다.
“나 지금 잠깐 누굴 만날 일이 있거든. 이따 6시즈음 치맥집에서 보자.”
“그러지 뭐.”
“오늘 술자리 기대 많이 하고 가마.”
“잠깐만. 종철아!”
“왜?”
이대로 헤어져서 반대편으로 뛰어가려는 종철이를 불러 세웠다.
그의 얼굴을 보며, 그냥 내 마음 하나를 표현하고 싶었다.
“고맙다. 네가 내 옆에 있어줘서.”
“뭐?”
“그냥 고맙다고..”
종철이가 씩 웃었다.
저녀석이 저렇게 웃을 줄도 아나?
얼굴에 비친 햇살을 머금으며, 소리 없이 웃는 그의 모습이 제법 멋있었다.
“그 고맙다는 말, 나 말고 아껴두었다가 그 사람한테 해라.”
“........”
“네 옆에 항상 있는 것은 내가 아닌 그니까.”
그는 그렇게 내 맘에 잔잔한 고민거리를 남기고는 햇살을 등지며 사라져갔다.
**
바퀠라(변종외계인)들이 양성되고 있는 감마족 하이브의 지하 공간.
그 지하 공간 한 편에서는 한 사내의 신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그 사내는 유리관 안에 온 몸을 속박당한 채로 묶여 있었고,
온갖 다양한 튜브들이 그의 몸에 삽입되어 있었다.
그가 다른 실험체와 다른 특성이 있다면, 그의 목소리가 유달리 크다는 것이었다.
그는 심한 통증으로 정신을 잃을 지경에서도 쩌렁쩌렁한 호통소리를 내질렀다.
“이 놈의 새끼들.. 너희들은 대체 뭐하는 새끼들이야. 이거 빨리 풀지 못해.”
그 모습을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던 묘령의 여인과 냉철한 표정의 한 남자.
바로, 마윈과 하르슈텐트였다.
마윈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하르슈텐트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하르슈텐트가 무심하게 그녀를 바라보자, 마윈은 장난스럽게 웃으며 잡은 손을 풀었다.
마치 한 커플의 일상적인 모습인데, 그들의 입에서는 전혀 커플의 대화에 어울리지 않는 낯선 단어들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훗.. 저 남자 대단한 정신력의 소유자네여?”
“그렇습니다. 감마족의 뇌 유기체가 저 숙주의 대뇌를 30%이상 장악했음에도 아직도 지구인으로써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아쉬워여... 저 사람의 정신력만큼 두뇌의 품질이 좋지 않아서..”
“카테고리 2가 저 숙주의 최대치인 셈입니다.”
마윈은 잠시 턱에 손을 괴었다.
잠시 생각에 빠졌던 그녀는 곧 하르슈텐트를 향해 환한 웃음을 보였다.
“하르슈텐트, 안 되겠어여. 시간이 너무 많이 걸린다.”
“제가 나서란 말씀이십니까?”
“역시 실험체가 일반 범죄자가 아닌 경찰이라 쉽지는 않네여. 그대가 저 숙주의 길 좀 들여놓으세여.”
“알겠습니다.”
그가 그 실험체로 다가가려는데, 마윈이 갑자기 그의 손목을 잡았다.
“호호.. 이럴 때는 당신의 정신감응 능력이 탐난다니깐..”
“과찬이십니다.”
“손도 참 이쁘셔...”
“마윈님의 칭찬은 마음에 새기겠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업무 중입니다.”
하르슈텐트 하비천은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풀며, 귀찮은 표정으로 짧게 한마디 할 뿐이었다.
그리고는 한때 경찰이라고 불리웠던 사내의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그 사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하르슈텐트를 보며 분노의 함성을 내질렀다.
“이놈의 새끼들. 네들이 북한의 사주를 받은 새끼들일지 모르지만, 결코 대한민국에서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하르슈텐트는 무표정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자꾸 이렇게 저항하면 고통이 심할 겁니다.”
“우.... 절대로..절대로.. 네놈들한테 굴복하지 않을 것이야...”
“굴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만, 정신만 잃고 편안히 계시면 되지요.”
“뭐...뭐야....”
하르슈텐트가 사내의 고개를 돌려 그와 시선을 맞추게 하였다.
그 사내가 몸이 묶인 가운데에서도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하지만, 곧 그의 시선은 하르슈텐트의 얼굴을 향하게 되었다.
“나를 보십시오.”
“이....이....”
“나를 보라고. 이 열등한 생명체여!”
“으....으....”
하르슈텐트의 주문에, 그 사내의 눈에서 동공의 크기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동시에, 그의 목소리도 점차 잦아들기 시작하였다.
1분즈음 지났을 무렵, 그의 목소리에서 기괴한 쇠소리가 들려오더니
그의 눈은 회색빛으로 가득찼다.
예전 사내의 의식이 감마인의 것으로 채워졌던 것이다.
“크크크... 절 다시 살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의 감사 말에 여자의 고운 목소리가 응답했다.
하비천은 조용히 옆으로 빠져 서 있었다.
“잘 왔어. 프레레믈리.”
“제게 명령을 내릴 실 분은 누구십니까?”
“나야. 마윈.”
“마윈 각하?”
“그래.. 네게 생명을 주고 권능을 줄 마스터지!”
프레레믈리라고 불리우는 존재가 마윈에게 기괴한 손짓을 하였다.
그들의 세계에서는 절대복종을 의미하는 표식이었다.
“프레레믈리, 난 그대에게 메탈아머를 만들어주려고 해. 체구에 맞게 큰 파워를 선사해 주지.”
“감사합니다.”
“시간은 4-5일 정도 걸릴 거야. 시간이 좀 늦어져도 완성되면 볼만할 거 같은데.”
“모든 건, 마윈님의 뜻입니다.”
“어머, 그런 말 하면 안 돼. 그렌바움님이 노여워 하실 텐데?”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꺄우뚱하는 플레레믈린을 보며, 마윈은 장난스럽게 웃었다.
“자, 그럼 작업을 계속 할 테니, 잠을 좀 자고 계세요.”
“알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눈을 감은 프레레믈리가 곧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마윈의 말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따른 것.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하비천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다시 마윈의 곁으로 다가갔다.
“저보다 더 대단하신 건 마윈 각하십니다.”
“호호호.. 무슨 말씀을요. 그런데, 참 아쉬워요.”
“프레레믈리 말씀입니까?”
“그래요. 프레레믈리 정도이면 훌륭한 전사인데, 숙주가 좋지 않으니..”
“앞으로 우리 전사들을 위해, 더 좋은 숙주를 찾아보겠습니다.”
하비천이 말을 끝내자마자, 마윈은 그를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방금 전의 색기어린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다.
“하비천, 이미 간직하고 계시잖아요? 좋은 숙주.”
“네? 무슨 말씀을..”
“계집애 하나 알고 계신 거 같은데?”
“..........”
“그 좋은 숙주를 혼자 차지하려고 하는 거 아니예요?”
하비천은 그녀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눈빛이 꽤 흔들리고 있었다.
“당신이 그 계집애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지만, 날 속이지는 못하지여”
“마..윈.님..”
“훗훗.. 그 애를 갖고 싶으면 가지세요. 단, 난 당신을 가질 거야.”
그녀는 잠시 감추어두었던 색기를 꺼내어, 그를 쳐다보았다.
움찔하던 그의 턱을 가볍게 붙잡은 마윈은, 곧 자신의 입술을 서서히 그의 입가로 가져갔다.
그리고는 길고 매혹적인 키스를 그에게 선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