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화 〉미안해요
치맥 전문점, ‘이리온나’.
중간고사가 막 끝난 탓인지, 그동안 술이 고팠던 대학생들이 모여들어 빈자리를 찾아보기 어려웠다.
치킨을 굽는 사장님의 손길이 바삐 돌아가고, 치킨을 찍어먹는 손님들의 손길도 급하기 이를 데 없었다.
치킨 맛집 답게, 각 테이블의 치킨들은 금방 자취를 감추었고, 급기야는 치킨을 굽는 사장님의 입에서 단내가 나는 신음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 테이블만큼은 그 맛있는 치킨이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 테이블에는 키 작고 체격이 다소 왜소한 남학생 한명과, 긴 흑발머리의 여학생 한명이 치킨을 고이 모셔둔 채로, 서로 맥주만 깔짝이고 있었다.
그 둘의 표정은 심각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 호프집에 들어온 많은 이들이 이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를 관심 있게 지켜봤고, 남자의 고백이 거절된 상황이라고 대충 넘겨짚기도 하였다.
실제, 이 둘의 대화는 그런 것과는 전혀거리가 멀었지만.
“그러니까, 지혁과 승지의 어머니가 자연사로 돌아가신 게 아니다?”
“내 생각에는 살인이야. 그 문자 메시지를 보낸 사람이 사고가 났던 날 아침까지 승지를 붙잡아 두라고 했었으니까.”
“그 문자 메시지 볼 수 있어?”
“사라졌어. 아니, 삭제되었어.”
“하아..”
“내 폰에 저장된 메시지까지 삭제되었으니, 이건 아마츄어의 솜씨가 아냐.”
종철이 입술을 깨물고는 맥주잔에 손을 댔다.
목을 채우고자 한 잔을 그대로 들이켰다.
맥주보다는 안주발을 세우는 평소의 모습과는 확실히 달랐다.
“씨바.. 승지를 죽이려했던 그 죷같은 인간의 눈빛을 생각하면 지금도 끔찍해..”
“그 괴수같은 인간에 대해서 더 아는 바 없어?”
“몰라. 잘 모르겠는데, 승지가 하비천이던가.. 그 새끼 이름을 대기는 했어. 혹시 그 인간이 그 괴물이 아닐까?”
“아닐 거야. 그 사람은.”
“아니라고? 너.. 혹시 이 사건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있어? 널 그리 만들었다는 외계인과 관계된 거야?”
얼은 의심의 눈빛을 보내는 종철을 보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그에게 또 하나의 비밀을 털어놓을 순간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종철아, 우선 미안해.”
“뭐가?”
“내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너한테 위험이 닥쳐올 수도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대체?”
“지금부터 내가 겪었던 일들을 들어볼래? 싫으면 말고.”
“허, 영화 관객 우롱하는 것도 아니고.. 뭐야? 빨리 말해봐.”
한얼은 맥주 500CC를 원샷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가기 시작하였다.
변종외계인의 존재, 광혁이 자신에게 벌였던 사건, 변종 외계인과의 전투, 그리고 자신의 살인까지.
힘들었던 시간들을 그 앞에서 토로했고, 종철은 아무 말 없이 그녀의 말을 경청하였다.
그리고 얼의 이야기가 다 끝났을 때, 종철은 얼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한얼은 맥주 한 잔을 또 비웠다.
“여기까지야. 내 이야기는.”
“......”
“믿을 수 없겠지만, 내가 겪었던 건 다 사실이야.”
“돌아..”
종철은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미안하다, 잘 들었다, 고맙다. 수고했다. 훌륭하다..
그 어떤 말도 이 상황에 맞지가 않았다.
딱 한마디만 간신히 꺼냈다.
“괜찮아?”
“괜찮아 보여?”
“그게...”
“지금 네가 날 보는 눈빛만 치워주면 난 괜찮을 거 같은데.”
종철은 쾡해보이는 한얼의 안색에 안쓰러운 눈빛을 보냈고,
한얼은 그 눈빛을 불쌍한 자를 바라보는 값싼 동정으로 해석했다.
“휴...”
“그 한숨도!”
종철이 내뱉은 긴 한숨마저도 그녀는 용납을 하지 못했다.
한얼은 종철을 가볍게 한 번 흘겨보고는, 새로 주문한 500C 한 잔을 모두 들이켰다.
그녀의 볼이 불그스름해졌다.
“오늘따라 맥주가 참 시원하다.”
“한잔 더 시킬까?”
“어. 오늘 참 술이 땡기네.”
“너 술 약한데 괜찮겠어? 너 벌써 500CC 8잔 마셨어.”
“오늘 달려 보는 거지. 뭐.”
“너 오늘 좀 안 좋아 보이는데..”
“야!! 서종철!”
한얼이 벼락 소리를 질렀다.
근처에 술 마시던 사람들이 모두 종철과 한얼의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조용히 해.. 사람들이 다 보잖아.”
“씨바.. 나 남자야. 남자 새끼가 이 정도도 못 마시냐?”
“한얼, 좀...”
“날 여자취급하지 말라고. 이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씨~”
한얼이 얇고 고운 하이톤의 목소리로 유달리 남자임을 강조하였다.
그녀의 주사는 이 치맥집을 방문한 모든 손님들의 귀에 다 들어갔고,
사람들은 그녀를 귀엽고 엉뚱한 여인으로 취급하며 웃음들을 지었다.
그녀가 불만어린 표정을 하고서는 자리에서 불쑥 일어났다.
“씨이.. 왜 다들 날 보는 거야!”
한얼이 주위를 쑥 둘러보면서 씩씩 거렸다.
그녀가 주위 사람들과말썽을 일으키지 않을까 걱정하는 종철이 얼의 팔을 슬며시 잡았다.
“돌.. 그래. 너 남자새끼 맞거든. 그러니까 앉자고.”
“싫어!”
“앉아서 이야기 좀 하자.”
“싫다고.”
“돌아, 너 취했어.”
“나 쌀 거 같다고!! 왜 잡고 지랄이야!”
한얼은 또 목소리를 높였고, 종철은 짧은 신음과 함께 그녀의 팔을 놔주었다.
얼이 비틀비틀 걸으며, 남자화장실로 향하자 종철은 잽싸게 그녀의 갈 길을 막았다.
“한얼, 이쪽 아냐!”
“나보고 여자화장실로 가라고?”
“어! 그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
“자식.. 이거 변태새끼네.”
하루아침에 변태로 호칭된 종철의 얼굴이 빨갛게 되었다.
스팀이 밑에서부터 올라오고 있었으나, 종철은 애써 참았다.
“그럼 빨리 갖다와. 남자 화장실. 내가 밖에 지키고 서 있을게.”
“냅둬!! 나 혼자 갖다올 슈 이쎠”
한얼이 혀까지 꼬이기 시작하더니, 이상한 단어를 남발하였다.
종철은 눈썹을 잔뜩 찡그린 채, 그녀를 남자화장실로 팍 밀어버리고는 화장실 문 앞을 지켰다.
화장실에 들어가려는 남자 두 명을 제지하고 싹싹 빌며 양해를 구하고 나서야, 한얼이 비틀거리며 나왔다.
“그게 없어셔 앉아셔 쐈셔~! 헤헤헤”
히쭉 웃으며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얼을 어이없어 하다가, 종철은 더 이상의 사고를 막아야 할 의무감을 느꼈다.
그녀의 발음이 술을 먹어서 다행이었다.
“히잉.. 홀딱 젖은 거 같애.. 내 팬트..읍읍읍...”
“야! 이 미친 것아. 좀 조용히 해.”
종철은 그녀의 입을 자신의 손으로 봉해 버리고는, 그녀를 질질 끌고 테이블로 되돌아 왔다.
곧 한얼은 테이블 의자에 던져졌고, 내동댕이쳐진 그녀는 반즈음 쪼그리고 눈을 감으며 누워버렸다.
“종처라.. 음.. 술 좀 따라라.. 음...”
“씨바.. 네가 다 쳐 마셔서 내 먹을 술도 없다.”
식은땀과 진땀이 섞여 셔츠가 거의 젖어버린 종철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의자에 쓰러져 누워 있는 한얼을 야리면서,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였다.
“불쌍한 건 네가 아니고 나였어. 하아 참...”
“종철아...음.. 종철”
“으.. 정말 이 새끼가 어쩌다 내 죽마고우가 돼가지고..”
종철은 투덜거리며, 볼썽사납게 누워있던 한얼의 자세를 바로 고쳐주었다.
그래봐야, 테이블 위 포개어진 양 팔에 머리를 갖다 댄 것에 불과하지만.
자신의 손에 묻은 한얼의 침을 바지에 쓱싹 닦고 있는데, 폰이 울렸다.
승지였다.
<어디야?>
“어.. 그게... 학교 근처”
<밥먹자.>
“지금 이 시간에?”
<싫어?>
대답을 잘 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종철의 땀샘을 자극하였다.
약간의 주저한 빛을 비치면, 말 그대로 죳되는 것이다.
“싫다니? 무슨 소리야? 너랑 저녁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어.”
<거짓말!>
“뭔 소리야?”
<주위가 시끄러운 거 보니 식당 아냐?>
“아..아냐! 당구장.”
다행히, 이 치킨집은 음악을 틀어놓지 않았다.
그 덕에 승지가 당구장이라는 걸 믿는 눈치였다.
세삼 모든 것이 고마워진 종철이 치킨을 정신없이 굽고 있는 주인에게 감사의 목례를 하였다.
당연히, 그 주인은 그가 인사했는지 모른다.
<참나, 누군 알바하는데 누구는 쳐 놀고. 팔자 참 편하다.>
“노는 것도 겁나 힘드네요. 그래서, 저녁 먹으러 어디로 갈까?”
<우리 외할아버지 집 근처에 맛있는 식당 있어. 거기로 와.>
“어? 좀 걸리겠네?”
<넉넉잡고 1시간 줄게. 장소는 레므르쥬. 알아서 잘 찾아오세요.>
다행히 그녀가 학교 근처에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간이 넉넉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종철은 고심하며, 기절해 있는 한얼을 쳐다보았다.
‘쟤를 여기다 그냥 놔두고 갈 수도 없고 어쩐다..’
길게 늘여진 눈썹도, 중얼거리는 빨간 입술도,
붉게 물든 뺨도,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에 가린 하얀 얼굴도 너무나도 매력적인 여인이었다.
그녀를 홀로 놔두고 가면, 누군가 옳다고나 업어갈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한숨을 쉬며, 지혁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는 지혁이가 오기를 기다리며, 자신의 뒷머리를 북북 긁었다.
“뭐.. 어쩔 수 있나? 승지에게 잔소리 좀 들어야지.”
한얼은 누군가의 손이 자기의 머리에 얹혀 있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떴다.
반즈음 감긴 눈에 익숙한 실루엣이 들어왔다.
그녀는 고개를 한번 흔들고, 다시 한 번 그 실루엣에 초점을 맞추었다.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리는 가운데에서도, 그녀는 용케 그 대상의 이름을 맞췄다.
“지혁씨?.. ”
그녀가 입에 올린 인물, 박지혁은 한 손으로 코를 막고 다른 한 손으로는 한얼의 머리를 천천히 어루만졌다.
“술을 얼마나 마셨길래?”
“어어.. 만지지 마요. 남자끼리 남사스럽게.”
“후후 또 시작했네. 얼이의 남자 놀이.”
박지혁은 쓰다듬던 손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깍지를 낀 손을 턱에 괸 후, 얼을 잔잔히 바라보았다.
“헤헤.. 여기 어떻게 와써여?”
“종철이가 연락해 주어서.”
“에이.. 종철이 이 의리 없는 쟈슥.. 말하지 말라고 했는데.”
“듣는 나는 좀 서운한데?”
박지혁은 살짝 기운 빠진 모습을 연출하였다.
짐짓 울상인 표정을 지어 보인다.
그 모습을 잠자코 보던 한얼의 표정도 점차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한마디 말을 힘들게 꺼낸다.
“미안해요.”
“!”
“미안해.”
“얼아!”
“지혁씨, 당신을 아프게 해서 미안해요.”
갑작스러운 한얼의 사과에 지혁은 당황했다.
“농담이야.. 농담. 절대로 서운한 거 없었어.”
―뚝.
그녀의 뺨으로부터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많은 의미를 담았던 이슬 하나가 땅에 부딪쳐, 여러 갈래의 파편으로 갈라져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