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화 〉제발 여기까지만 해요
밤에 보는 서울의 야경은 참으로 예뻤다.
강물에 비친 빛의 파편들도 곱기 이를 데 없었다.
거기에 밤공기의 상쾌함도 더했다.
비록 예정에 없던 한강공원 방문이었지만, 지혁은 뜻하지 않는 선물들을 덤으로 얻었다.
도시의 압제 속에서 꾹꾹 눌러져왔던 자연의 정취와,
바쁨을 핑계로 잊어 왔던 일상에서의 여유와,
지금 옆에서 비닐 안에 머리를 쳐 박고 자기 음식물을 확인중인 그녀.
굳이 반론을 하자면, 그 옆의 그녀는 선물보다 민폐덩어리인 것이 사실에 더 가까웠다.
하지만, 그것은 타인의 객관적인 정의일 뿐이고,
지혁의 입장에서 한얼은 설레임, 그 자체였다.
물론, 그의 차에 남겨진 그녀의 성가신 흔적은 원치 않는 덤이었고.
그 덤을 치우느냐고 일 톤의 땀을 흘린 지혁에게 이제부터의 시간은 보상이었다.
지금 지혁은 한얼과 함께 한강을 마주보는 벤치에 앉아 있었고, 이제 보상의 시간을 즐길 참이었다.
“이제 좀 괜찮니?”
“헉..헉.. 아즉.. 죽게써여.”
혀의 꼬락서니로 보아서, 그녀는 아직 제 정신이 아니었다.
또다시 컥컥 댄다.
이번에는 음식 찌꺼기가 걸린 모양이었다.
한참을 또 그러다가, 목에 걸린 것이 해결이 되었는지 조용해졌다.
“진짜 괜찮은 거야?”
“이제.. 좀 괜찬슙다.”
“글쎄. 그렇다고 하기에는 아직 먼 거 같은데?”
자욱한 술냄새와 토냄새를 같이 풍기며, 입술에까지 뻗은 머리카락을 물고 있던 그녀의 모습이 웃겼다.
지혁은 품에서 편의점에서 산 음료수를 하나 꺼냈다.
“이거 좀 마셔볼래?”
“와.. 박지혁. 너 진짜 준비성 대단함다.”
그녀가 반말과 존댓말을 혼용하더니 지혁의 손에 들었던 음료수를 가로챘다.
―벌컥벌컥
그가 건넨 음료를 맥주 한잔 들이키듯 마셔버리고,
―캬아!
맥주를 마시고 나서의 감탄사를 내뱉는다.
그녀가 병에 남겨진 최후의 한 방울까지 톡톡 털어 입에 털어 넣는다.
“에게? 술이 왜 이리 적어?”
“그거 숙취제야.”
“아닌데? 분명 알콜 맛이 났는데?”
아직 해롱대는 것을 보니, 그녀의 정신이 돌아오지 못했다.
그녀가 제정신일 때 묻고 싶은 것들이 있었던 지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잠시 둘 사이에 정적이 흘렀다.
지혁은 강을 보고 있었고, 얼은 밤하늘을 보고 있었다.
둘은 아무 말 없이 각자의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지혁이는 얼이에게 하고 싶은 말을,
얼은 스멀스멀 올라오는 무엇인가를 제압하는 방법을.
결국 정적을 먼저 깬 것은 한얼이었다.
“휴우.. 지혁씨..”
“왜?”
“미안해요.”
“뭐가?”
“차 안에 잔뜩 토해서.”
“그래. 그건 좀 미안하겠다.”
사실 지혁의 차가 그런 봉변을 당한 것은 생전 처음이었다.
휴지와 물티슈를 잔뜩 사다가 수습을 하긴 했지만, 냄새는 여전히 강렬하게 남아 있는 상태였다.
그대로 타다가는, 얼이 연쇄반응을 일으켜 또 사고를 칠 가능성이 농후했다.
‘게다가.. 저 옷은 어떻게 한담?’
지혁은 혀를 차며, 이물질로 오염된 얼이의 옷을 흘끔 바라보았다.
“앉아만 있으니 답답해. 이제 걸을래요.”
그녀가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소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겨가기 시작했다.
지혁은 당황하여, 재빨리 그녀 옆에 붙었다.
“같이 걷자.”
얼이가 넘어질 듯 비틀거리더니, 그에게 몸을 쏟았다.
지혁이 그녀의 팔을 잡고 가다가, 자기 손을 내리더니 슬금슬금 한얼의 손을 툭툭 쳤다.
그리고는 손가락과 손가락 사이를 교차하여 깍지를 꼭 끼었다.
얼이가 초점이 풀린 눈동자를 하고서는, 지혁을 질책했다.
“이 아저씨가 지금 뭐하는 거야? 떽! 이럼 안 돼!”
“널 놓는 건 더 안 돼. 너 내가 붙잡지 않음 자빠진다?”
“에쒸.. 놔요. 쪽팔리게.”
“네 술주정 나올 때부터 이미 쪽팔렸어.”
얼이가 말은 그렇게 했으나, 그의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뿌리칠 생각은 있었으나 거부할 의지는 없어보였고,
걷다 보니 이렇게 동행하는 것도 괜찮다 싶은 모양이었다.
둘은 서로 손을 잡고 잡히며, 한강을 바라보고 천천히 걸었다.
1 km를 움직이는 동안, 둘은 걷는 행위에만 몰두했다.
얼이는 말이 없었다.
지혁이도 애써 말을 꺼내지 않았다.
애쓰지 않아도, 그의 입술에서 자연스럽게 말이 미끄러져 나왔을 뿐이었다.
“밤날씨가 참 싸늘하네.”
“........”
“이제 집에 들어갈까?”
“.........”
“우리 많이 걸은 거같은데..”
“지혁씨.. 저어..”
그녀의 말끝에 붙은 자투리가 떨렸다.
그녀를 향해 불어오는 강바람의 추위가 말을 품은 마음을 얼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었다.
적어도, 지혁의 입장에서는 그랬다.
불안하게 떨린 ‘저어..’가 그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어? 왜?”
“.........”
“뭔데?”
“나 좋아하지 마요.”
둘의 걸음이 멈췄다.
지혁은 그녀로부터 뜬금포를 맞아 제정신을 차릴 시간이 필요했고,
얼은 다가올 지혁의 ‘왜?’를 대비할 레퍼토리가 필요했다.
또다시 침묵의 순간이 흐르고, 그 침묵은 지혁의 격정을 삼킨 말로 끝이 났다.
“그게 무슨 말이야?”
“지혁씨가 날 좋아하는 거 알거든요.”
“아는데?”
“지혁씨는 날 좋아할 수 없어. 나도 당신을 좋아할 수 없고.”
뻣뻣이 굳은 지혁이.
방금 전까지 불었던 봄바람이 차디찬 삭풍으로 변해 버렸다.
—하아, 이런..
그의 입에서 거친 한숨을 내뱉고는, 떼어지지 않는 입을 간신히 열어 그녀의 잘못된 전제를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그건.. 왜지?”
“.........”
“왜냐고!!”
“나, 여자 아니니까!”
“뭐라고?”
“나, 남자도 아냐!”
“?”
“난, 난... 괴물이야. 괴물이라고요.”
그녀의 모든 말들이 마치 외계어처럼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괴물이 상징하는 모든 것들을 머릿속에 모두 끄집어냈을 뿐.
그나마 답도, 힌트도 전혀 보이지 않았다.
지혁은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머리와, 감정이 격렬하게 몰아치는 심장으로 이 상황을 도저히 견딜 수가 없었다.
“네가 말하고자 하는 게 뭔데?”
“말.. 그대로여요. 전 누구를 좋아할 자격이 안돼요. 괴물이니까.”
“그게 무슨 개떡 같은 소리냐고?”
“그래서 당신에게 미안해요..”
“얼!!”
“다 미안하다고요.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까지. 전부. 다!”
지혁은 그녀의 어깨를 두 손으로 거칠게 잡았다.
지금 그에게는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일 이유도, 여유도 없었다.
“이제 와서 이게 무슨 개소리야?”
“여기까지 온 게 잘못된 거여요.”
“뭐?”
“내가 당신 덕 좀 보려고, 당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 모르겠어요?”
지혁이는 의도적 접근이라는 말을 이미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왜 지금 그녀가 의도적으로 ‘의도적 접근’을 꺼내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 사실이 알고 싶어 미칠 지경이었다.
“어차피 그건 나한테 중요하지 않았어. 나 역시 널 이용해 먹고 있으니까.”
“지혁씨. 당신은 내게 모든 것을 보여주었지만, 난 당신에게 보여준 게 없어. 앞으로 보여줄 수도 없고.”
“그게 뭐 어때서?”
“그건 당신이 날 이용해 먹는 게 아니야. 내 호구가 되는 거지.”
“그럼 그렇게 해. 이런 식으로 날 이용해 먹으라고. 호구가 되려면 될 테니까!”
“그런데 내가 더 이상 이 짓을 못해 먹겠다고요. 내가!”
마지막 한얼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정제되지 못한 감정이 그녀의 목소리를 습하게 만들었다.
지혁은 한 손으로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속이 날카롭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난 더 이상 이놈의 재벌놀이 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당신 형제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다고요.”
“더 이상 끼어들지 않겠다..?”
“나 때문에 당신까지 죽을 수 있어요. 그러니까 지혁씨,”
“........”
“우리, 제발 여기까지만 해요.”
지혁은 끓어오르던 분노를 억눌러왔던 자제력이 급격히 소비되어 가고 있음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는 분노의 일면을 마그마 품어내 듯, 토로해버렸다.
“씨발...”
“지혁씨..”
“네가 나를 가지고 놀 때부터, 너는 이미 이 짓을 그만둘 권리와 자유가 없어.”
“하..아..”
“그러니, 나한테 재벌놀이 그만두겠다는 그딴 소리 집어치워!”
“......”
“그래, 난 너 때문에 죽을 수도 있겠어. 그러니까 난 죽을 때까지 너랑 갈 거야.”
얼이가 몸과 목소리를 같이 떠는 지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녀를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를 읽고서, 깊은 고뇌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전투에만 전념하고자 하였는데, 정작 지혁을 포기시키는 것에는 실패한 것이다.
그리고 이 때를 대비한 마지막 한 수를 꺼내들어야 할 때임을 알았다.
정말 그에게 하고 싶지 않았던 그 마지막 수를.
“지혁씨. 밝힐 게 있어요.”
“뭐?”
“당신이 알아둬야 할 거. 그리고 당신이 알고 나면 진짜로 날 죽일 수도 있을 거.”
얼이는 지혁에게 무엇인가를 귀속말로 말했다.
그리고 그 귓속말이 끝났을 때,
지혁의 안색은 생각보다는 평온했고, 생각보다는 복잡했다.
“당신.. 별로 놀라지 않네요?”
지혁의 무표정에 오히려 놀란 것은 이한얼이었다.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지혁의 이후 동작은 처절하게 일그러진 표정으로 그녀의 뺨을 때렸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것이 합리적이었다.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그녀의 예상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지나치리만큼 조용한 그의 모습이 꽤 낯설어 보였다.
그녀는 약간은 어색한 상황 속에서도, 준비한 대사를 읊고 있었다.
“당신이 알고 있는 이한얼은 이 정도로 형편없는 사람입니다.”
“얼...”
“절 때리고 싶으면 때리세요. 그리고, 저 같은 건 잊어주세요.”
하지만, 지혁은 원하는 방향의 답변을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사실까지 내게 알리면서 나와 헤어지려는 진짜 이유가 뭐야?”
얼이가 가장 답변하기 까다로운 질문을 내어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