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8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의 진실
얼이는 머뭇거렸다.
지혁이 보인 행동은 그녀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지나치게 차분했고 또한 차가웠다.
게다가,
“생각해보니, 네가 말한 건 사실도 아냐. 대체 이런 거짓말까지 하는 이유가 뭐지?”
그녀가 귓속말로 전했던 이야기의 진위마저 간파 당했다.
“지금 난 한없이 기분이 비참하거든. 그러니 말해봐. 뭐야?”
“더 물어봐야 소용없어요, 저한테는 그게 사실이니까.”
“설혹 박광혁이 널 범했다 한 덜, 그건 네가 원했던 관계가 아니었어. 약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아뇨. 저도 즐긴 겁니다. 약 기운이던 뭐든.”
“이한얼!”
“아시잖아요. 송혜정이 왜 당신을 멀리 했는지.”
애써 없는 사실을 만들어내면서까지 자기와의 관계를 부인하고자 하는 얼을 보며, 지혁은 한없이 비참해졌다.
“얼...”
“혜정씨처럼 내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아서 그래요. 그러니, 제발.”
“네가 여기서 나랑 헤어질 진짜 이유를 말하지 못한다면, 그건 정말 나를 죽이는 거야.”
“진짜 이유, 그거 맞아요.”
“네가 끝까지 잡아떼면, 난 박광혁보다 못한 존재가 되어 버려. 정말 이유 없이 싫은 사람이라는 거잖아. 내가.”
“절대로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그럼, 제발 진짜 이유를 말해봐!”
얼은 꿋꿋이 입을 다물었다.
지혁은 얼굴이 뻣뻣하게 굳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보고 죽으라는 소리군.”
“그게 대체 무슨...?”
“나, 말리지마!”
그녀가 만류할 사이도 없이, 그는 한강물로 뛰어 들어갔다.
한얼은 경악을 금지 못했다.
잠시 멍하게 있다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바로 한강물에 몸을 던졌다.
인근 사람들의 비명소리는 곧 안도의 한숨소리로 바뀌었다.
허우적거리는 그의 목을 붙잡고, 물 밖으로 그를 꺼냈다.
그의 몸을 질질 끌고서는 난폭하게 그를 바닥에 눕혔다.
숨이 가쁜지, 그녀는 헉헉 거렸다.
곧 그녀의 매서운 시선이 쿨럭거리는 지혁에게로 향했고, 그의 멱살을 잡았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너 돌았어?”
“그래, 네가 날 돌게 만들었지!”
“너, 그까짓 여자 하나 때문에 인생 종 치려고 그래?”
“나 때문에 네 인생 종칠 뻔 했는데, 이게 대수인가?”
한얼은 그 앞에서 할 말을 잃어 버렸다.
지혁에게는 어떤 거짓된 변명도 먹히지 않았다.
그렇다고 그녀의 비밀을 진솔하게 밝히는 것도 불가능했다.
그럼, 단 한가지 밖에 선택할 것이 없었다.
현상유지.
그를 쥐고 흔들 힘조차 남아 있지 못했던 그녀의 손이 멱살을 놓았다.
4월의 강바람이 물에 젖은 그녀를 더욱 매섭게 몰아세웠고,
차가운 물방울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타고 내려와 땅바닥에 하나 둘씩 떨어졌다.
사람들의 시선이 물에 홀딱 젖은 이 둘을 향했고, 그 시선들을 의식한 얼이 일어섰다.
지혁을 뒤로 한 채로, 얼은 조용히 물에 젖은 발걸음을 옮겼다.
지혁이 엉거주춤 일어나, 그녀 뒤를 조용히 따라 나섰다.
몇 걸음 떼었을까?
“나, 수영할 줄 안다고.”
“.........”
“진짜 죽을 의도는 아니었어. 다만, 죽고 싶을 정도로 괴로웠던 것뿐이지.”
잠시 멈춘 발걸음.
얼은 뒤돌아 봤다.
“그 정도로 괴로워?”
“그래. 나한테는 죽을 만큼. 너한테 내가 이 정도밖에 안 되는 구나 싶으니까.”
둘의 초점이 틀렸다.
겨우 그까짓 거 가지고 괴롭냐는 반문에, 지혁은 감정의 깊이를 토로하였다.
“웃겨, 진짜! 누가 보면, 당장 배 곪아 죽는 것 때문에 이러는 줄 알겠네.”
“뭐라고?”
“이봐요, 재벌집 아들 박지혁씨! 지금 네가 괴로워 죽겠다는 그 고민, 누구한테는 사치라고.”
“재벌집 아들도, 가난한 집 아들도 똑같은 고민을 하고 살아. 그건...”
“어련하시겠어요? 당장 먹고 살 생활비가 없어, 물건 훔쳐본 적도 없는 사람이!”
“너...”
“한때는, 내가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았어. 왜? 그렇지 않으면 도저히 살 수 없으니까. 사람을 속여야 장사를 하고, 집주인을 속여야 한 달이라도 더 집에 붙어 살 수 있으니까. 정직이 최고의 가치다? 좃 까라고 하세요. 그건 먹고 살만한 사람들이 지껄이는 이야기야.”
거친 말을 쏟아내기 시작한 얼이의 낯선 모습에, 지혁은 눈이 동그래졌다.
얼이는 마음속에 쌓아뒀던 적대감을 지혁에게 쏟아 붓기 시작했다.
“맞아. 나 거짓말 너한테 많이 했어. 지금까지 내가 내세웠던 이유들, 그거 다 사실 아냐.”
그녀의 말에 지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의 표현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긴 한숨이었다.
얼이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어떤 결심이 그녀의 얼굴에 비쳤다.
“헤어지자고 했던 진짜 이유 이제부터 이야기해줄게. 그걸 믿던 말던 그건 네 마음이야.”
“얼, 날씨도 추운데 우선 실내에 들어가서 조용히 이야기하는 게?”
“아냐. 지금 할 거야. 나중엔 말 못해!”
얼은 여자로서의 가식을 모두 버리고, 대신 개구쟁이의 가면을 썼다.
의도적으로 10세 아이의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우며.
“잘 들어봐. 재미있을 거야. 나 원래 가진 거라고는 쥐뿔 없는 남자였었거든. 운도 없어서, 물에 빠져 죽었었어. 그런데, 외계인이 날 살려놨어. 그랬더니, 날 여자로 만들어 놓데?”
“?!!”
“그랬더니 날 살려준 대가로, 그 외계인이 변종 외계인들을 처리해 달라 하더군. 정말 목숨을 걸고 그들과 전쟁을 벌이라는 거야.”
“얼, 너 지금 뭐하자는 거야?”
“잘 들어보라고. 내 말 끊지 말고. 그래서, 변종 새끼들이랑 싸웠지. 내가 뭐 어떻게 하겠어? 근데 그 변종 새끼들이 알고 보니까 사람이었던 거야. 나는 그것들을 신나게 쳐 죽였고, 앞으로도 죽여야 하고. 이 내 두 손에 앞으로 피 묻힐 일만 남았네.”
얼은 자신의 두 손을 바라보며, 씩 웃었다.
지혁은 지금 이한얼이 아닌, 전혀 낯선, 광기어린 사내를 보는 착각에 빠져 있었다.
마치, 싸이코 범죄드라마를 한 걸음 떨어져서 바라보는 관객의 입장이라고 할까.
“그런데, 지혁이, 네가 있으면 걸리적거려. 그 변종들과 제대로 전쟁을 하려면, 다른 일로 신경 쓸 여유가 없거든. 게다가, 자칫 너도 죽을 수 있어! 그래서 헤어지려고 하는 건데 왜 눈치 없이 달라붙을까?”
“하아~~”
“자, 이게 다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는 나의 진실이지.”
“이한얼, 너... 진짜...”
“알아서 판단해. 날 미친 놈 취급하던, 내가 뱉은 진실을 믿던. 생각해보니, 내 말을 믿게 되면, 너도 미친 놈 되는 건가?”
“제발, 이한얼. 그만해!!”
“뭘 그만해? 네가 원한 게 이거잖아? 진짜 이유를 알고 싶다며!”
박지혁이 오른손을 들었다.
이한얼은 그 오른손을 똑바로 주시했다.
그녀의 뺨을 정조준하던 그 오른손은 그대로 정지 상태가 되었다.
박지혁은 곧 그 손을 내렸고, 고개를 떨궜다.
“다음.. 다음에 보자. 이한얼.”
그의 목소리는 가냘프고 매말랐다.
진실을 말해도, 그 진실이 상식을 벗어나면 거짓이 되는 법이다.
지혁은 거짓으로 채색된 진실에 크게 상처를 받았고,
그 상처에 짙게 물든 마음으로 얼을 그대로 지나쳐 갔다.
“미안해요.”
그녀의 한 가닥 중얼거림과 함께, 그녀의 의지에 반하는 눈물 한 방울이 눈가에 맺혔다.
바쁘게 앞서 걷던 지혁이 그녀의 시선에서 사라져가자, 그 눈물이 주체할 수 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잘 했어. 넌 잘 한 거야. 이따위 재벌 노름 그만하고, 전투에서 살아남을 고민만 하는 거야.’
입으로는 자신을 칭찬하지만, 눈물은 자신을 질책하고 있었다.
몸에서 수분이 빠져나가며 열을 빼앗고, 그녀는 곧 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녀에게 다가와 도움을 주겠노라고 했지만,
그녀는 괜찮다며 애써 그 도움들을 거절했다.
그녀는 그렇게 홀로 터벅터벅 걸었다.
얼은 눈물 흐르는 자신을 누구한테도 보여주고 싶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인채로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그리고 뭔가에 부딪혔다.
으레 또 지나가는 행인인가 싶었다.
“죄송합니다...”
“목소리가 젖어 있군.”
고개를 치켜드니, 지혁이가 보였다.
그가 어느새 얼의 길을 막고 있었다.
먹이의 약점을 발견한 사자의 눈빛을 하고서.
“너, 운 거 맞지?”
“뭐야? 당신!”
“이 눈물은 거짓이 아닌 거 같은데.”
“누가 울었다고 그래요!”
“네 말을 믿기는 힘들어도, 네 눈물은 믿으련다.”
어떻게 해야, 이 자식을 쫓아낼까.
얼은 다시 머리가 아파지기 시작했다.
“난 네 말을 전혀 믿을 수가 없어.”
“내가 말했잖아. 진실이라고!”
“그런데,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 너의 속사정이 있다는 건 믿어.”
“와아.. 정말 어떻게 해야 너를 납득시키지?”
“여기까지 오면서, 네가 훌쩍이면서 울었던 눈물은 뭔데?”
“악어의 눈물 몰라? 당신, 바보야? 눈물 따위를 왜 믿어?”
지혁이 담담하게 얼을 바라보았다.
바로 전 헤어졌을 때의 모습과는 정반대였다.
“생각해 보니, 너 미안하다고 할 때 입술을 심하게 떨더라고.”
“그게 어때서?”
“눈가에 눈물을 맺어놓고서는, 날 바라봤지.”
“허.. 참.”
“혜정이도, 혜정이도 너와 똑같은 표정을 지었어. 그런 다음, 마음에도 없는 말을 지껄였지.
그녀의 표정은 내게 도와달라는 것이었는데, 잔인하게 난 그녀의 표정보다 말을 믿었었어.“
“.........”
“난 그녀를 떠나보냈지만, 넌 그러지 않을 거야. 다시는 그런 실수를 하고 싶지 않아.”
얼은 그녀의 계획이 그의 집념에 의해 그르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그냥 모든 걸 던져버리고 그에게 항복해 버릴까?
얼의 마음 하나를 지탱하고 있던 줄 하나가 위태하게 끊어질 지경에 있었다.
“네가 뭐 때문에 그런지는 모르지만, 네가 스스로 진실을 보여줄 때까지 난 참을 거야. 그러니, 그냥 이렇게라도 같이 가자.”
그 줄이 끊어지기 직전에, 지혁은 퇴로를 제시해 주었다.
그것은 현상유지.
해결되는 것 하나 없이, 모든 일이 제자리로 돌아왔다.
얼이는 그러나 현상유지가 최선의 선택임을 부인하지 못했다.
“지혁씨는, 참, 대단한 사람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정말 미련하다고요. 정말 미련곰탱이가 따로 없어.”
“후후.. 그것도 맞아.”
“근데, 나 때문에 죽지는 마세요.”
“그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의 말에 몇 마디를 덧붙이려는 얼의 시도는 연이은 기침소리로 좌절되었다.
지혁이 그녀의 이마에 오른손을 댔다.
“너.. 열나는 거 같은데?”
“괜찮아요. 아무렇지도 않은데..”
사실 괜찮지 않았다.
그동안 잠을 제대로 못 잔데다가, 술을 잔뜩 먹고 강에 빠지기까지 했으니, 그녀의 몸 상태는 지극히 최악이었다.
열을 인지한 것은 지혁의 말 때문이었고, 그의 말이 끝나자 본격적으로 오한이 따라왔다.
“빨리 차에 가자. 집에 데려다 줄게.”
“나 혼자 집에 걸어갈 수 있는데...”
“옷이 젖었잖아.”
하얀 셔츠가 젖어 브래지어 칼라까지 다 나올 정도였다.
게다가 두통까지 찾아오는 상황이라면, 그의 제안을 거부할 수 없었다.
“그럼.. 신세 좀 지죠.”
*
여명이 어둠을 몰아내는 새벽에 눈을 떴을 때, 익숙하지 못한 천장이 보였다.
그리고 내 머리에 얹혀 있는 미지근한 얼음주머니를 느꼈을 즈음, 나는 낯선 장소에 누워있음을 알았다.
아직은 개운치 않는 두통이 괴롭히고는 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아픈 것은 아니었다.
내가 모르는 속옷이 내 몸을 감싸고 있었고,
내가 누워있는 침대는 스프링이 삐꺽대는 질 나쁜 것이 아니었다.
그리고,
내 오른손이 유달리 따스했다.
열 때문인가 싶었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이유는 명백했다.
한 사람의 손이 내 오른손을 슬며시 쥐고 있었기 때문에.
침대 옆의 의자, 그리고 그 의자에 걸쳐 앉아 상체를 침대에 엎드려 자고 있는 지혁.
지혁의 포즈를 보아서, 그는 밤새 나를 간호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이 바짝 말랐다.
밤새 열로 수분이 증발된 탓에, 몸은 물을 원했다.
마침, 물로 가득 채워진 컵이 저 책상위에 있었다.
그런데 잡힌 손이 신경 쓰여 쉽게 움직이질 못했다.
손을 빼면 그가 깰 것이고,
이 상황에서 서로 마주보면 곤란할 것 같았다.
갈증이 유발한 갈등이 심해졌다.
“깼어?”
지혁이의 잠긴 목소리에 갈등이 해갈되었다.
그가 하품을 하며 부스스 몸을 일으켰다.
“자, 여기 물 좀 마셔.”
그가 책상위에 있던 컵을 내게 건넸다.
자고 있던 게 아니었나?
나를 관찰하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나는 그에게서 컵을 받아, 물 한잔을 다 마셨다.
단순히 물일 뿐인데,
물맛이 이렇게 달달할 줄은 몰랐다.
“이제 좀 괜찮아?”
“네. 머리는 좀 아프지만 참을 만 합니다.”
“참을 만 하다..”
그가 손을 내 이마에 대었다.
아마도 이 손이 밤새 이마를 수시로 방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것일까?
아무런 거부감 없이 그 손을 받아들였고,
그 사실이 내게 낯설게 다가왔다.
“아직 열이 있네.”
“지혁씨는.. 괜찮아요?”
“나? 나야 뭐 튼튼하지.”
“하.. 나야 말로 건강 체질이라고 생각했는데.”
“미안.”
“뭐가요?”
“나 때문에 걸린 거잖아.”
‘신경쓸 거 없습니다’라고 말하기는 좀 그랬다.
그가 물에 뛰어 드는 바람에 내가 고뿔에 걸린 건 사실이니까.
그래도 그 덕에 밤새 간호를 받아보는 호사는 누려보았다.
“저.. 여기는?”
“우리 외할아버지집.”
“아...”
“너 어제 거의 기절상태로 와서, 걱정 많이 했어.”
“살짝 기억이 나네요. 노인어르신께 인사 드린 건 기억이 나는데.”
나는 분홍색 잠옷치마를 살짝 손끝으로 만졌다.
아무래도 평소에 안 입던 치마라 낯설었다.
혹시나 싶어, 지혁을 길게 쬐려보았다.
설마?
“내가 입힌 거 아니다. 그거”
“그랬으면 큰일 나죠.”
“그러고도 싶긴 했는데.”
“그랬다간 다리 몽뎅이를 확 뿐질러버릴 겁니다!”
“후후. 승지가 속옷까지 다 입혀준 거야. 소중한 지 것을 남한테 입히는 건 처음이라면서 툴툴대긴 했지.”
승지가 나의 신체 비밀을 다 알게 되었으니, 다음부터 그녀를 볼 때 편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아니다.
내가 그녀의 속옷을 입었으니 서로 민망한 게 맞는 건가?
“제가 어떻게 여기에 오게 된 거죠?”
“그렇지 않아도, 어제 오빠인 돌한테 전화했는데..”
“진..진짜요?”
“돌하고 전혀 통화를 못했어. 알고 보니 네가 오빠 폰까지 가지고 있던데?”
“아..”
“결국 아픈 널 혼자 집에 보내기가 그래서 여기에 온 거야. 요즘은 오빠랑 데면데면한가 보지?”
다행히, 그가 나와 한돌의 관계를 아직 눈치 채지 못했다.
나는 점차로 나의 위생 상태에 대해서 신경 쓰기 시작했다.
청결치 못한 라테카움(전자가발)의 상태가 걱정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밤새 땀을 흘린 탓에 몸이 찌뿌둥하기 이를 데 없었다.
몸에서 냄새도 날 터이고.
이 집의 식구들이 일어나지 않는 지금 이 시간에 샤워를 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지혁씨, 지금 몇 시죠?”
“이제 오전 6시 30분이네. 좀 더 자.”
“잠은 됐고요.. 저 샤워 좀 하게 나가 줄래요?”
“그럴래? 근데, 열이 다 떨어지지 않는 상태에서 샤워를 하는 건 좋지 않은데?”
“제 걱정은 마시고요. 지혁씨 걱정이나 하셔야 할 거 같은데요?”
지혁의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다.
곧 쓰러질 것 같은, 잔득 피곤해 보이는 낯빛이었다.
“지혁씨, 나 때문에 밤 샜죠?”
“뭐.. 너 때문만은 아니고 봐야할 서류가 좀 있어서..”
지혁이 애써 내게 웃음을 보였다.
창살을 통해서 들어온 아침 햇살이 그의 웃음을 더 훤하게 만들었다.
나를 밤새 간호한 그의 정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그에 대한 미안함 때문이었을까?
나는 유달리 그 웃음이 애틋하게 다가왔고,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에게 빈틈을 주고야 말았다.
“지혁씨, 어제 일은 잊고요.. 우리 끝까지 같이 가 봐요. 오빠가 나를 굳게 믿어준다면, 모든 것 이겨낼 수 있을 거 같아.”
감격에 겨운 사람의 얼굴은 하회탈과 같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벅차오르는 감격을 금하지 못했는지, 하회탈이 된 박지혁이 와락 나를 안아버렸다.
‘아씨, 몸에서 냄새 나는데.. 괜히 쓸데없는 말을 해가지고.’
가벼운 후회를 했지만, 그래도 그를 내칠 수가 없었다.
그가 나를 버티게 만드는 하나의 지지대임을 인정하였고,
처음으로 그가 내 가족이 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품어보았다.
그렇게, 나는 그의 품이 서서히 마음에 들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