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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9화 〉기다림도 하나의 방법 (59/68)



〈 59화 〉기다림도 하나의 방법

소파에 앉았다가 2시간 동안 깜박 잠 들었던 지혁은 구수한 냄새에 눈을 떴다.
 몸이 노곤한 탓에 눈꺼풀이 무거웠으나,
집에 손님이 있다는 생각에 애써 몸을 일으켰다.

‘잠깐! 가정부 아줌마가 오늘 집에 일이 있어서  못 나올 거라고 했는데?’

된장찌개의 냄새와 칼질 소리의 근원은 분명 부엌이었다.
승지는 제대로 요리를  본 적도 없었고, 하는 것도 싫어했다.
할아버지가 요즘 요리학원을 다닌다고 했는데, 이 경쾌한 칼질은 할아버지가 낼 수 있는 소리가 아니었다.
그럼, 남아 있는 딱 한 사람!
지혁은 설마 하는 마음에 황급히 부엌으로 움직였다.
그리고 거기서 놀라운 풍경이 펼쳐졌다.

할아버지는 식탁에 앉아 신문을 펴들어 읽고 있었고,
부엌에는 앞치마를 두른 얼이 익숙하게 두부를 썰고 있었다.
부글부글 끓는 된장찌개 소리가 그의 청각을 자극했다.



“일어났어요?”



그녀가 손놀림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요리를 한두 번 해 본 솜씨가 아닌 듯싶었다.

“지혁아, 승지 좀 깨워서 오려무나. 어제 늦게까지 잠을 안 잤는지 통 일어나려 하질 않는구나.”
“네? 네. 할아버지. 근데..”



황정달은 당황한 손자를 흘끔 바라보며 다시 신문에 눈을 고정했다.

“네 색시 말이냐? 고맙게도, 혼자 아침에 일어나서 이 많은 걸  준비했더구나. 손자보다 낫구먼.”

황정달이 언급한 ‘색시’ 소리에 잠시 칼질을 멈췄던 얼이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그.. 그래도 밤새 아팠던 사람인데...”
“지혁 선배, 전 괜찮아요. 감기가 별거 아니었는지, 하루 만에 다 나았어요.”

아직 열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약간의 두통도 있었다.
다만, 혼자 힘으로  있기에는 충분한 몸 상태였고, 신세를 갚으려는 요량으로 식도를 집어  것 뿐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자취생활을 하여, 간단한 음식이야 뚝딱 만들어 낼 수 있는 정도는 충분히 되었다.



“허허. 이 할애비가 여자친구 부려먹는다고 속이 안 좋은가 뵈지?”
“아니, 그게 아니라..”
“내가  아가씨에게 아침부터 사업 컨설팅을 해줬으니,  정도는 충분히  값한 것 같은데!  그런가?”
“네? 무슨 말씀을.. 밥값이라뇨? 너무 좋은 조언 해주셔서 감사한데요.”

지혁은 둘 사이에 있었던 컨설팅과 조언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그 내용이 무엇인지 물어보려는 찰나, 부스스한 얼굴을  승지가 어느새 끼어들었다.


“어머? 이게 뭐야? 여친이랑 아침부터 신혼 분위기 내는 거야?”

한얼은 갑자기 쿨럭거렸다.
지혁이 어슬렁어슬렁 부엌에 기어 들어오는 여동생을 노려보며 힐난했다.


“넌 어쩌자고 지금까지  자다 온거야?”
“왜 시비야? 내가 저 언니.. 아니, 한얼씨 케어해 준다고 늦게까지 잠도 못 잤는데!”
“그래도 아픈 손님을 놔두고, 네가 좀 아침을 챙기면 안 되겠어?”
“여동생이 네 몸종이야? 네가 데려왔으면 네가 책임져야 할 거 아냐?”
“그만. 너희  다 아침부터 이런 꼴 보이면,  할아비가 어떻게 한다고 했지?”



황정달의 무언의 위협이 통했는지 둘은 입을 다물었다.
그의 말을 듣지 않으면, 둘은 황정달로부터 빌린 각종 돈을 당장 뱉어야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중간에서 뻘쭘해진 얼이 조용하게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빨간 빛깔이 유달리 식욕을 자극하는 제육볶음과 깨소금이 뿌려진 시금치가 마그마를 뿜어내며 끓고 있는 된장찌개를 호위하고 있었으며, 고춧가루가 뿌려진 콩나물 국이 하얀 김을 발산하며 수저 옆에 가지런히 자리잡고 있었다.


“자, 모두 앉아서 먹자구나. 얼이가 정성껏 준비한 것이니 기대되는구나.”


한 두 번 만난 사람에게는 좀처럼 애칭을 부르지 않는 황정달이 한얼에게만큼은 자신의 규칙을 접었다.
지혁의 눈에 섬광이 스쳐지나갔고, 곧 할아버지에게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승지가 오빠와 황정달을 둘러보고서, 고개를 갸우뚱하고는 숟가락을 들었다.



―쭈루릅..



“맛이 참....”

된장찌개 한 숟갈 먹고서, 승지는 퉁명스럽게 숟가락을 놓았다.

“맛이 뭐? 왜?”
“오빠가 왜 발끈하는데?”
“아..아니다.”
“흥. 너.. 아니 오빠 무서워서 말도 못하겠다.”

할아버지 눈치를 보며, 잠시 판단을 보류한 승지가 이번에는 젓가락으로 돼지고기 하나를 입에 넣었다.


“음~ 이것도 맛이 차암...”
“너, 끝까지  안하고 자꾸 장난칠래?”
“네가 그러니까 맛이 달아났어. 이젠 맛없어!”
“네가 6살짜리 얘야? 대체 뭐가 불만인데?”


정작 음식을 만든 당사자는 둘이 서로 아웅거리는 모습을 멀뚱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정쩡한 미소를 짓고 있었던 얼을 구해준 것은, 황정달의 감탄사였다.


“오호!!”
“입맛에 맞으실런가 모르겠네요. 간만에 요리를 한 거라..”
“변변치 않은 재료를 가지고 이정도 맛을 내다니, 아주 훌륭하군.”
“그렇게 과찬해주시니..”
“나는 칭찬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네. 내  그대로 알아듣게나.”
“아? 네.”
“좋은 재료를 가지고도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것을.. 성치 않는 재료를 가지고 이리 좋은 완성품을 만드는 건 쉽지 않지.”

황정달이 말한 ‘성치 않는 재료’는 여동생을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황정달은 그 모습에 쓴웃음을 지었다.

“얼이, 자네는 좋은 요리사야. 자신을 믿게.”
“제가 좋은 요리사인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 노력해 보겠습니다.”
“좋아, 좋은 자세야.”
“오늘 할아버님 말씀은 너무 감사했습니다.”
“허어~ 그게  대단하다고.”
“앞으로 종종 말씀 청해듣겠습니다.”
“허허허.. 그렇다고  말을 너무 신주단지 모시듯 하지 말게나. 결국 결정은 자네가 하는 것이니.”


지혁은 귀를 쫑긋 세우며 얼과 황정달의 대화를 듣고 있었다.
 사이에 중요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그 비밀이 알고 싶어졌다.
얼은 호기심으로 가득찬 지혁을 보며, ‘밥이나 잡수세요’라고 입술을 방긋 하였다.


지혁은 평소보다 더 많이 먹었고, 평소에 하지 않던 호들갑을 떨었다.
얼이 눈치를 주기는 했지만, 그는 전혀 개의치 않고 주둥아리의 자유를 풀었다.
황정달이 혀를 차기는 했지만, 애써 그를 제지하지는 않았다.
그 꼬락서니가 못 마땅했던 승지는 말로는 투덜대기는 했어도, 평소에 안 먹던 밥  공기를 깨끗이 비웠다.
아침밥을 맛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는 나름대로의 인사법을 보여주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참, 언니.”
“저..저요?”
“누구긴 누구겠어요?”
“네. 승지씨.”
“팔불출  잘 부탁해요. 저리 얼빵해 보여도, 이외로 쓰임새가 많답니다.”

지혁이 벌떡 일어섰다.
오빠의 화를 돋우는데 성공한 승지가 혀를 내밀고는 부리나케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곧 지혁이 승지의 뒤를 따라 쫓아 올라갔다.
올라가는 모양새로 보아, 매섭게 동생을 훈계할 듯하였다.



“허어.. 거 참..”



황정달은 손자 손녀의 유치한 장난에 고개를 절래 흔들었다.
한얼이 황정달의 웃음기가 섞인 얼굴을 조심스럽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할아버지...”
“왜, 그러느냐?”
“아직은.. 아직은 제가  모르겠습니다.”
“세상을 가지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이고?”
“모르겠어요. 제가 그것을 정말로 원하는 건지.”



고개를 숙이는 얼을 묵묵히 바라보는 황정달.
손녀딸을 대하는 자상함이 그에게 풍겼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포장하여 그녀에게 넘겨주었다.

“얼아, 정 힘들면 가지 말고 기다리거라.”
“네....”
“기다리는 것도 네   가는 거란다. 애써 발걸음 떼려 하지 말고. 그러다 보면, 네 마음이 닿는 곳이 생기지.”
“......”
“네가 기다려야 할 때, 내가 도와주마.”
“할아버지..”


황정달을 바라보는 한얼의 눈에 이슬이 맺혔다.
자신이 기댈만한 또 하나의 거대한 언덕이 생겼다는 생각이, 그녀의 가슴을 따스하게 만들었다.

**************


그로부터 3일후.


비가 보슬보슬 내리는 새벽 3시.
비가 대지를 적시는 소리 이외에는 다른 소음을 찾아보기 어려운 시간이었다.
더군다나 장소가 야산 중턱에 위치한 운동장이라면, 일체 사람의 흔적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은 당연하였다.
하지만,  당연한 사실이 무색하게도, 운동장에 한 인영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인영의 정체는 이한얼.

그런데, 그녀의 복색이 예전과는 많이 다른 모습이었다.
머리에는 투구를 쓰고,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메탈 갑옷을 온 몸에 둘렀다.
즉, 셀리카움(초정밀 보호막)이 적의 물리적 공격에 취약한 점을 감안하여, 헤프박사가 만든 특수슈트를 착용하고 있었던 것.
한얼은 좀 전 헤프 박사가 내뱉었던 말들을 곱씹어 보고 있었다.

“특수슈트는 유동성 금속 재질인 라트를 통해서 만든 것일세. 카테고리 4이하 바퀠라(변종외계인)의 공격 한 방 정도는 거뜬히 막아줄 것이야. 물론, 한방 정통으로 맞고 나면, 특수슈트의 기능이 급격히 저하되겠지만.”

“이번에는 카테고리2 짜리가  것일세. 이놈을 처리하면 다음 한 달의 여유가 생길 것이지. 높은 카테고리일수록 숙성기간이 길어지고,  다음에 만나는 적은 점점 강해질 것일세.”

“적도 현 시점에서는 인간들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지. 자신의 힘이 약해서 인간들에게 당할 수도 있으니. 그래서 주로 바퀠라들은 새벽 늦은 시간에만 출현할 것이며, 기꺼이 프로카움(원형돔)안에서 싸울 것일세. 그건 우리도 바라는 바이긴 하지만..”

“본체에 해를 끼치지 않고 변종외계인의 뇌만 죽일 수 있는 것은 이번 카테고리 2가 마지막일거야.  다음 카테고리 3이상부터는 숙주를 구할 방법이 거의 없다네.”


적들은 점점 강해지고, 전투의 경험으로 너 역시 강해진다..
그게 헤프 박사의 격려 섞인 말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헤프 박사의 말에서 일말의 불안감을 느꼈다.
적의 성장속도가 그녀보다 더 빠르다면, 종국에 가서는 결국 그녀가  수밖에 없는 싸움이 되지 않겠는가?
다행히, 헤프 박사에게는 그런 경우에도 대안이 있다고 하였다.
정말 대안이 있기는 한 지 모르겠지만, 그의 말을 믿지 못할 이유는 없었다.
헤프 박사를 믿고 편안히 싸우기만 하면 되는 것이라고 그녀는 자위하였다.



오늘 전투에서 중요한 건, 가급적 본체를 살리는 것.
외계인에 뇌를 잠식당한 불쌍한 인간을 살리는  하나의 방법은...



그녀의 생각이 채 끝나기 전에, 특수전자렌즈와 인이어에서 경보메세지와 경보음이 요란하게 울렸다.

―삐삐삐삐
[전방 10km 부근에서  출현. 5분후  장소에 출현 예정]



적은 그녀가 착용한 라트 금속을 포착하여, 맹렬히 그녀가 서있는 곳으로 육박해 들어오고 있었다.

얼은 긴장감 속에서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곧, 그녀는 또박또박 명령어를 발음하였다.

“레.넨.카.진!(매그넘 레벨2)”

그녀의 음성명령어가 끝나자마자, 유동성 금속 물질들이 그녀의 손으로 이동하니, 권총의 형상으로 변환되었다.

“이번에는..”



매그넘의 그립을  손에 힘을 가했다.


“반드시 사람을 살리고 만다.”

그녀의 비장한 각오 속에서, 비는 점차 더욱 강해졌다.
더 세차게 그녀의 전신을 몰아치는 비는 다가올 전투의 긴장감을 더욱 고조시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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