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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0화 〉두번째 전투: 프레레믈리와의 격전 (60/68)



〈 60화 〉두번째 전투: 프레레믈리와의 격전

얼마 지나지 않아, 희미한 형상 하나가 땅에 착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 음향은 얼을 향해 다가오는 묵직한 발자국 소리로 바뀌며, 비로 차가워진 공기를 팽팽하게 달구고 있었다.

―저벅저벅

얼과 50미터쯤 떨어진 지점에서,  인영의 발자국은 젖은 땅을 무겁게 짓누르고 섰다.
그 거대한 몸체에 하릴없이 부딪힌 빗방울들이 흘러 내려, 그가 발을 딛고 선 땅에 검은 웅덩이를 만들고 있었다.

얼의 시야를 가득 채우는 거구 하나가 완연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그 형체를 바라보는 얼의 눈가는 떨리고 있었다.
대략 2미터에 가까운 장신에 구리 빛으로 반짝이는 두툼한 근육은 헤라클레스, 그 자체였다.
 근육을 탄탄하게 감싸고 있는 은색 메탈갑옷은 어떠한 타격도 허용치 않는 것처럼 보였고, 얼은 갑옷의 무게만큼 가슴이 퍽 내려앉았다.

‘저 걸 뚫으려면 레벨 4이상의 무기가 필요하겠어. 하지만, 그러다가..’

레벨 4이상의 무기는 기생체 뿐만 아니라 숙주를 죽여 버린다.
그럼, 애써 찾은 그녀의 평온도 갈기갈기 찢어져버리게 될 것이다.
그녀는 무기를 레벨업하려는 욕구를 애써 가라앉히며, 눈앞의 거구를 마주하고 있었다.

투구의 그림자에 가린 근육덩어리의 눈동자가 얼을 음습하게 주시하였다.

“네가 암살자?”

굵고 음침한 목소리가 빗소리를 뚫었다.
들려오는 것이 사람의 음성이라는 것을 자각한 얼은 살짝 반가운 빛을 보였다.

“말을 할 줄 아는군.”
“나.. 케르베르스 같은 하급 전사는 아니니까...”

눈 앞 거구를 분석한 데이터가 메씨카움의 화면에 떴다.

[생체융합지수 52로 카테고리는 2. 특수갑옷과의 조합으로, 레벨2 무기 효과 제한적. 신체에 특이양상 관찰]

특이양상이란 메시지에 얼은 입술을 깨물었다.
상대는 위닝샷으로 특수능력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인데, 아직 그것을 파악하지 못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그녀를 옮아 맸다.
불안감을 쫓아내 듯, 그녀는 힘차게 주문을 외쳤다.

―프.로.카.움 (원형돔 ON)

그녀 주위에 하얀 빛의 줄기들이 30자 가까이 솟구치며 너울대기 시작했다.
그리고 줄기들이 서로를 옮아 매며, 서서히 돔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하였다.
빛의 부드러운 손길들이 돔을 완전히 빚어내자, 거센 빗줄기는 흔적도 없이 완전히 사그라들었다.
고개를 치켜들며, 돔의 형상을 물끄러미 지켜보는 거구의 얼굴에 회한이 서렸다.

“프로카움. 이 안에서 싸우던 게, 정말 오래간만이군.”
“『오래간만』이라는 그 말, 그게 너의 유언이 되겠지.”
“『너』라고 불리우는 건 불쾌하다. 프.레.레.믈.리. 이 껍데기에 가린 진짜 내 이름이지.”
“기생체 주제에 이름을 불러달라? 좋아. 프레레믈리. 망자의 이름으로 기억하기에 딱 이군.”
“너의 이름은?”
“알 거 없잖아!”
“후후. 까짓 네 정체는 중요하진 않지. 하지만,  껍데기의 정체는 알아두게.”

프레레믈리는 마윈으로부터 이상한 명령 하나를 전달받았다.
지구인 육체의 정체를 암살자에게 누설하라는 것.
그의 머리로서는 마윈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는 그저 그 명령을 충실하게 따랐다.

“뭐?”
“이 육체는 경찰이었다.”
“!!”
“정의감이 투철했다 하더군.”
“이.. 간악한 새끼들!!”

얼이는 프레레믈리의 말에 담긴 뜻을 알고는 치를 떨었다.
적의 간계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온 몸을 감쌌다.

―레에치! (검 레벨 3)

그녀의 손에서 매그넘의 형상이 바뀌기 시작하더니, 금빛으로 반짝이는 검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날개처럼 굽은 볼록한 날과 일자로  뻗은 칼등이 살기를 머금은 예리함으로 가득 찼다.
뱀 껍질을 두른  같은 반질대는 손잡이를 힘껏 쥐자, 미미하지만 선명한 무형의 기운이 검을 둘러싸고 있었다.
그리고 검광이 그녀의 얼굴에 반사되어, 황금빛의 은연한 줄기가 그녀의 얼굴을 부드럽게 채색하였다.

-레바크치! (도끼 레벨 3)

프레레믈리가 벼락같은 함성으로 무기를 소환했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낸 도끼와 방패.
적어도 2미터 가까이 되어 보이는 거대한 도끼에는, 전체를 뒤덮은 푸르스름한 뇌전이살아  쉬며, 적을 잡아먹을듯 노려보고 있었다.
그 도끼 옆에는, 그의 상체를 가리기에 충분한 방패가 칠흑의 빛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레벨보다 한 단계 상위의 무기를 소환한다는  기생체의 생명을 갉아먹는 미친 짓이었다.
그리고, 숙주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

‘빨리, 끝내야 한다.’

얼의 조바심은 선제공격으로 이어졌다.
바로 프레레믈린을 향해 육박해 들어갔다.
그 거구의 지척에서 10자(3미터)로 높게 점프했다.
거구의 얼굴을 피해서, 그대로 검을 내려 찍었다.

―퉁퉁!

방패를 흔드는 둔탁한 타격음이 들렸다.
검을 쥔 그녀의 손이 눈에 띄게 떨렸다.
얼은 잠시 뒤로 물러났다.
공교롭게 틈이 드러났고, 날카로운 도끼날이 그녀의 틈을 매섭게 노렸다.
공속은 다소 느리지만, 강력한 파워가 도끼에 서려있었다.
얼은 뒷걸음치며 검으로 막았다.
검을 잡은 어깨가 얼얼하며, 검을 떨어뜨리기 일보 직전.
적이 내공이 실린 도끼를 수직으로 찍었다.
얼은 물구나무 자세로 세 바퀴를 뒤로 굴렀다.
그리고 간신히 위기를 벗어났다.

‘젠장. 적의 수비가 완벽해. 그렇다면...’

그녀의 눈에 적의 방패가 들어왔다.
달빛마저 보이지 않는 이 밤보다  까만 어둠이 방패를 물들였지만, 그녀가 방패를 인식하는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저 것을 먼저 박살낸다!’

다시 땅을 딛고 팽팽하게 튀어오르며,  끝을 적에게 겨눈다.
이전보다 더 선명한 검기가 아로새겨졌다.
검기로 충만한 칼 끝이 더욱 매섭게 상하좌우 흔들렸다.
상대가 애써 방패로 막아 보지만, 자세의 견고함은 실종되기 시작했다.
집요하게 노려 치는 금빛의 검기와 단단하게 수비하는 흑빛의 도끼날이 교차하였다.
그렇게, 양자 간 순식간에 20합을 주고받았다.
결국, 방패에 생긴 균열이 점차 커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온 힘을 다한 일격이 균열의 중심을 파고들었다.
그리고 방패는 완벽히 찢겨졌다.

다시 거리를 두고 물러난 얼과 프레레믈리, 거친 호흡을 진정시켰다.

“역시 암살자, 그대의 공격은 내가 당할 수가 없군.”
“한얼이다.”
“뭐?”
“내 이름, 암살자가 아니라 이한얼이라고.”

프레레믈리가 까칠한 턱을 내리며, 희미하게 웃었다.
동시에, 위로 째진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이한얼, 나를 인정해 주는  같아 기분이 좋군.”
“당신은 제법 훌륭한 상대야. 네가 죽기 전에 이 정도 예의는 충분히 보일 만큼.”
“클클클.. 이미 나는 그대에게 졌다. 그러나 난 명령에 따르는 감마족의 전사. 동귀어진(同歸於盡)도 불사할 뿐.”
“과연, 그것이 가능할까?”
“나의 명운을 건 마지막 도박이지.”

그가 서서히 모습을 변형하기 시작하였다.
마치 김밥말이하듯, 구형(球形)의 형태로 몸을 접었다.
입을  벌리고 그 모습을 바라보는 얼.
적이 2미터 가까이 되는 바퀴의 모습으로 완벽하게 바뀌고 나서야, 얼은 정신을 차렸다.

“이...이게 뭔?”

톱니바퀴 돌아가듯 회전하기 시작하는 그의 몸.
점차 가속도가 더해지며, 인간의 형상은 사라져갔다.
오직 200km의 시속으로 달리는 차바퀴의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의 특수능력을 보여주마!”

날카롭게 회전하는 프레레믈리의 몸이 총알처럼 얼을 향해 격발되었다.
동시에, 얼은 급하게 레벨3 매그넘을 소환하였다.

―타아아아탕탕

불을 뿜는 매그넘의 총구에서 분출된 에너지 탄환이 공기를 찢어버린다.
그러나, 극도의 빠른 회전력으로 돌고 있는 구체가 탄환을 튕겨 버렸다.
그렇게, 프레레믈리의 회전이 얼의 눈앞까지 왔다.
부스터에서 강한 에너지가 분출되며, 얼이는 공중으로 9자를 튀어 올랐다.
간발의 차이로 충돌을 면한 얼이가 잠시 회전을 멈춘 프레레믈리의 투구를 향하여 매그넘을 쐈다.
머리를 손으로 막는 프레레믈리. 손을 커버하던 장갑이 깨져버렸다.
얼은 다시 땅으로 착지했다.

‘회전이 멈출 때가 바로 공격할 때야. 그런데  자식이 필사적으로 머리를 보호하니...’

그녀의 생각은 길지 못했다.
적이 다시 톱니바퀴 돌기로 그녀에게 육박해 들어 왔다.
이번에는 거뜬히 공중으로 회피하였다.
그러나, 프레레믈리가 톱니바퀴 돌기 그대로 땅을 딛고 훌쩍 공중으로 튀어 올랐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얼이는 피하지 못했다.
그의 칼날 같은 회전이 그녀의 몸에 닿아 버린 것.
셀리카움(초정밀 보호막)이 완벽히 깨졌고, 그녀를 감싸던 특수슈트에도 균열이 생기며부서져버렸다.
그녀의 상의는 속옷까지 다 찢어져 버렸고.
그녀는 다소 휘청거리며 땅에 착지했다.
상체에 피가 맺혀 있었으며, 가슴이 온전히 다 드러난 상황이었다.

다행히, 상처는 크지 않았지만, 그녀의 생각은 복잡해졌다.
긍정적인 건, 시간이 갈수록 적의 회전력이 눈에 띄게 줄어든다는 것.
부정적인 건, 프레레믈리의 에너지가 다할수록, 숙주의 생존이 촌각을 다투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안되겠어.  회전력을 어떡하든 늦춰야 한다.’

그녀의 머리에 떠오른 가장 적합한 무기.
 무기를 소환하기 위하여 명령어를 외쳤다.

—레스터치

그녀는 무기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적이 다시 빠른 회전력으로 톱니바퀴 돌 듯 돌았다.
그리고 그녀에게로 육박하여 들어오기 시작하였다.
얼은 옆으로 회피하며, 그 무기로 프레레믈리를 속박하였다.

 번의 시도 끝에, 레벨3의 채찍이 회전하는 프레레믈리의 온 몸을 감아버렸다.
곧 프레레믈리의 톱니 바퀴는 채찍의 움직임에 따라 궤도를 이탈해버렸다.

—쿵!

큰 나무 줄기와 부딪혀 버린 프레레믈린.
충돌의 충격으로 그의 움직임이 지극히 둔해졌다.

‘이때다!’

얼은 재빨리 레벨3 매그넘을 소환하였다.
그리고, 아직 제 정신을 못 차린 프레레믈리의 투구를 정확히 겨냥하였다.

—타앙!

딱 한발! 한 발의 총알이 공기의 저항을 뚫고 빠르게 그 투구를 향해 나아갔다.
 총알이 드디어 투구를 관통하였고,
투구가 맥없이 해체되어 버렸다.

―타앙타앙

이번에는 레벨2 매그넘으로부터 발사된 두 발의 에너지탄이 노출된 적의 이마를 향했다.

―퍽. 퍼퍽

이마에 총알을 머금은 프레레믈리는 결국 무릎을 꿇고 서서히 쓰러졌다.

“성공이다.”

얼은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재빨리 프레레믈리 곁으로 뛰어갔다.
쓰러진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 빛의액체가, 물에 젖은 땅에 스며들고 있었다.

“으....크...윽... 최..선..을 다...했..으..니.. 후..회..는.. 없..다.”

그가 마지막 유언을 남기듯한마디 한마디를 결사적으로 내뱉었다.

“나...는... 우..리..종족을.. 위해... 목..숨..을 바..쳤..을..뿐.”
“프레레믈리, 당신은 훌륭한 전사였습니다.”
“축...하...한...다. 한...얼. 나만.. 죽..을.. 뿐.. 숙주는.... 살..아..날.. 것..이다.”
“당신과 나는 목적이 달랐을 뿐, 결국 당신도 이 전쟁에서 희생된 것입니다.”
“희..생..이..라... 클..클...클...”

인간의 뇌에 깃들어 있던 프레레믈리는 피 섞인 웃음과 함께 영혼이 소멸되었다.
그리고 변형되었던 육체는 예전 지구인의 모습으로 서서히 돌아오고 있었다.
이 신체의 변화를 지켜보던 얼의 얼굴에는 복잡한 감정이 피어올랐다.
슬픔, 기쁨, 안도, 성취감, 피곤함..
모든 감정이 뒤섞인 채로, 얼은 자신의 풀어헤쳐진  살을 바라보았다.

“결국, 이번 전투도 상처 하나는 남기고 끝나는구나.”

그래도, 사람을 살리자는 목표를 달성한 이상, 이 상처는 승리의 기억일 뿐이라고 그녀는 애써 자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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