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3화 〉최악의 실수로 그에게 들켜버렸다 (63/68)



〈 63화 〉최악의 실수로 그에게 들켜버렸다

더위가 기지개를 피고 서서히 세상을 잠식해 들어가는 5월 중순,
두 번째 전투가 끝난 지 벌써 2주가 지났다.
SH종합개발 산하 경기도 연수원을 지나쳐 차로 10분을 가다 보면,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는 맛집이 있었다.
맛집이라고는 하지만, 홍보가 제대로 되지 않아 평일 밤에는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 식당이었다.



그러나, 이날 만큼은 그 식당의 매상이 평소의  배였는데, 아마도 중요한 이벤트가 이 식당의 매상 증대에 큰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 누추한 식당의 VIP룸에서, 두 그룹의 운명을 건 비밀 회동이 이루어진 것이다.
회의의 명목상 취지는 그룹 간 빅딜을 성사시킴으로써 SH와 NW의 상생을 도모하자는 것이었으나, 실상은 박지혁을 몰아내고자 함이었다.
회의참석인원은 모두 6인.
박하영 라인 측에서는, 박지혁의 매형 되는 설성국 SH종합개발 사장과 임채근 재무감사 2팀장, 정송진 구조조정관리팀장이 참석할 예정이다.
NW측에서도 동 수의 인사가 대화 파트너로 참여한다.
NW측 인사에 한돌,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박하영 측 사람들이 오기를 기다리면서, 나도 모르게 계속 위축이 되었다.
반복해서 손을 쥐었다 폈다 했다.

“한돌씨, 긴장을 애써 추슬러 하지 말고, 여기에 오기까지  힘든 과정을 생각해봐. 그럼 긴장 대신 오기가 생겨.”
“네.. 감사합니다.”


오종복 NW그룹 HR(Human Resource)혁신실장.
안면을 튼 지 얼마 안  그가 나한테 넌지시 조언했다.
오종복 실장은 국가정보원 사이버정보팀장으로 활동한 적이 있었고,
그 이력을 바탕으로 인력관리에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여기서 인력관리란, 특정인물에 대한 정보 수집 및 감시를 뜻하기는 하지만.



“한비서는 이런 자리가 처음이죠? 너무 잘 하려 하지 마시고, 예전 모의회동 때 했던 것처럼 하면 됩니다.”




심재기 NW그룹 대외전략 본부장, 그가 나를 북돋아 주었다.
심재기 본부장은 위기관리 능력과 정세 파악이 뛰어난 자로 NW의 경영기획 업무를 맡고 있으며, 이번 회동을 성사시킨 주역이기도 하였다.



“이봐, 한비서. 이번 회의가 성공적으로 끝나면, NW에 정식으로 입사하는 거지?”
“한비서도 정식으로 공개채용 과정을 거쳐야죠.”



오실장의 말에 심본부장이 딴지를 걸었다.
오실장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심본부장을 보며 지긋이 웃었다.




“허.. 이거. 심본부장이 인사채용에 대해서는 FM이라는 걸 잊었군.”
“단, 특채를 활용하면 됩니다.”
“뭐야? 평소 당신 생각에 따르면 그거 편법 아냐?”
“원리원칙보다는 회사의 이익이 당연히 먼저입니다. 그게  원칙이지요.”



직함은 심재기가 위라 하더라도, 사석에서는 나이가 많은 오종복이 반말을 하는 편이었다.
회사의 위계 관계에  신경을 쓰지 않을 만큼, 둘은 제법 친한 사이였다.
그 둘이 나를 화제에 올리면서 분위기를 누그러뜨리고자 노력한다.
순전히 날 위해.



오종복이 나를 흘끔 보더니, 그동안 참아 왔던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어쩌다 송준수 부회장님을 알게 된 거지? 웬만한 사람은  내 레이다 망에 걸려 있는데?”
“COMIS 때, 그 분 앞에서 따로 프리젠테이션을 한 적이 있습니다.”
“거기 입상자 명단에 자네 이름은 없었어.”
“저의 혁신경영안을 주목하셔서, 따로 부르신 것입니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제게 비서 자리를 제안하신 거죠. 비록, 한  동안의 인턴이기는 하지만, 제겐 영광스러운 자리입니다.”
“음... 그래. 송준수 부회장님은 사람 보는 분이 남다르시지. 그러니까, 한비서가 여기 올 수 있었던 것이고.”



송준수 부회장은 역시 대단한 사람이다.
이  능력이 출중한 사람들이 그의 결정을 두 말 없이 따른다.
한  짜리 계약비서가 이 중요한 자리에 오게  그의 미심쩍은 결정도,
송준수가 안배한 바가 있을 것이라며 일체 토달지 않고 받아 들인다.
이건 지위와 위계에 대한 물리적인 순응이 아니다. 마음으로부터의 진심이다.
송준수 회장에 대한 그들의 충심을 보며, 나는 잠시 이 회의에 참여하기까지의 과정을 되돌아 보았다.



처음 이 NW에 들어올  있었던 계기는 COMIS(Competition Of Management Innovation Strategy)였다.
NW의 혁신경영보고대회(COMIS). 회사 내부 인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응모할 수 있는 NW만의 행사였다.
 짜여진 각본대로, 난 거기에 응모하였고, 송준수는 나의 기획안을 뽑았으며, 나를 한달 짜리 계약직 비서로 고용하였다.
기밀 유지 때문에, 나는 입상자 명단에 없었지만 어쨌든 나는 채용되었다.

내가 NW그룹 부회장실로 첫 출근하게 된 날,
송준수는 나에게 대외전략비서라는 직함을 수여하였다.



“명호(名號)만큼 사람들을 혹하게 하는 것이 없습니다. 실체가 아무리 부실해도 말이지요.”

송준수는 임시 알바치고는 과분하게 근사한 직함을 내게 주면서, 나의 현실을 꼬집었다.
내 얼굴이 붉어지는 것을 보고서는, 그는 빙긋이 웃었다.


“그래서, 제가 부실한 실체를 좀 채워드릴까 하는데.”


그가 갑자기 나한테 두꺼운 서류뭉텅이를 건네 주었다.
그 서류들의 정체는, 정치권의 압력에 굴복해 하이브리드차 개발 파트를 SH에 넘겨주면서 폐기된 NW측의 사업구조개편안이었다.


“이것을 다음 주 월요일 회의 전까지  읽고, 이 개편안에 대해서 참석자들 앞에서 발표해 주시기 바랍니다.”
“네? 그렇게 빨리요?”
“설마 자신 없다는 말씀은 아니겠지요?”
“아닙니다. 이 정도는 충분히   있습니다.”
“한돌씨.  당신의 채용에 대하여 사람들에게 설득할 근거와 명분이 필요합니다. 그러니까 잘하셔야 합니다.”



송준수는 항상 자신의 결정에 대한 근거를 휘하 직원들에게 명료하게 보여준다.
그의 결정은 대부분 합리적이고 투명하며 게다가 혁신적이다.
직원들이  결정을 따르고 싶게 만들며, 실제로 군말없이 따른다.
확실히 그는 뛰어난 변혁적 지도자임에 틀림 없다.
하지만, 지금의 내 입장에서는 그를 위대한 수령동지 마냥 바라볼 수는 없었다.
그의 말은 나의 능력이 부족하다 판단할 경우, 나를 가차없이 자르겠다는 이야기니까!
 삼사일 만에 이 두꺼운 개편안을 다 이해해서 발표하라..
헐!
게다가,




“다음  초 회의가 SH그룹 경영기획실장의 노후를 논의하는 자리인   아시겠죠. 자리의 성격에 맞게 잘 준비하십시오.”



단순한 개편안을 설명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박광혁의 세부적인 퇴출 방안까지 가지고 오라는 것이지.



“못할 것 같으면 미리 여동생한테 양보하시지요.”
“그럴 일 절대 없습니다. 저 혼자 잘 해내겠습니다.”


씨바, 여동생이 나라고.
송준수의  ‘양보하란’ 말이 나를 놀리는 듯싶었다.



“미리 말씀드리건대, 회의 참석자는 오실장과 심본부장입니다.”
“그 두 분의 존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알아서 찾아보십시오.”

뭐야? 장난하나? 흔해 빠진 직함만 던져주고 두 사람을 찾아보라고?
송준수가 회의 참석자를 이딴 식으로 내게 알려준 것은 분명히 어떤 의도가 있었다.
아마도, 이 두 사람의 취향이라거나 성격을 알아보라는 것이겠지.

“좋아요. 좋습니다. 백수를 구제해 주셨으니, 입 닥치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지금 보신 자료는 다 기밀자료라서, 밖으로 못 가져갑니다.”
“네?”
“모든 작업은 다 회사 안에서 하십시오. 당연히 작업 중에는 본인 핸드폰도 반납하셔야 합니다.”
“뭐야? 저보고 여기 갇혀서 작업하라?”
“작업시간만 그렇다는 겁니다. 그 외 다른 시간은 학교를 가던, 친구를 만나던 일체 터치 안 합니다.”




젠장. 내가 셀리카움 쓸 수 있는 시간이 하루에  4시간이다.
그것도 원래 2시간으로 제한 두었던 것을, 헤프 박사를 졸라 한시적으로 4시간으로 늘려놓은 것이다.
여기서 종일 작업해야 한다면, 난  빌어먹을 NW회사에서 변신을 해야 한다.
이건, 내가 생각못한 변수인데..
실수하면, 자칫  정체가 드러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이다.

“좋습니다. 저도 송준수 부회장님께 요청사항 있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일체 감시 장비가 없는 개인공간을 마련해 주십시오. 여기 부회장실과는 좀 떨어진 장소에다가요. 물론, 인터넷도 돼야 하고, 전화도 있어야 하고.”
“후후. 그 정도야 당연히 들어드리죠. 이미 회사  개인 공간을 마련해 두었습니다. 바로 작업하시면 됩니다.”

송준수는 준비성이 매우 철저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가 일정에 쫓기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이 목요일 저녁이니, 다음 주 월요일 오전 회의까지 시간이 얼마 없군요.”
“네. 누구 때문에 코피 흘리게 생겼네요.”
“건강은 챙기면서 하시지요.”
“수당이나 많이 챙겨 주시죠?”
“특근수당을 듬뿍 챙겨 드리겠습니다.”

밤샘 작업을 기정사실화하는군.
그래 괜찮다.
뭐, 작업실만 괜찮으면 충분히 할  있다.




그리고 나의 작업실은...
예전 청소도구를 쌓아두었던 2평도  안 돼는 창고였다.
1평이라도 될런가 모르겠다.
냄새도 쾌쾌하기 이를 데 없고, 햇빛도 전혀 들어오지 않는 어둑한 공간이다.
4일간 꽤 괜찮은 복지혜택을 누리려던 나는 결국 닭장을 체험하게 생겼다.
욕심을 부린 내가 잘못이지.
그래도 인터넷 라인과 연결된 컴퓨터도 있고, 오래된 도트 프린터도 있고..
인간의 지식을 남김없이 착취할 수 있는 모든 장비들은 다 갖춰놓고 있었다.
그래, 열심히 착취시켜주마.

금요일과 주말동안, 나는 학교를 다녀온 것 빼고는 그 닭장 안에 갇혀서 피터지게 작업했다.
이 몹쓸 창고에 오는 사람도 없었고, 감시 장비도 없어서, 나는 티셔츠에 반바지만 입고 작업을 했다.
왜냐고? 날씨는 더워지는데 에어컨도 없이 선풍기만 하나 달랑 주어졌으니까.
아직은 쪄죽을 여름 날씨가 아닌 것은 정말 다행이었다.



문제는 항상 닭장 같은 사무실을 나갈 때였다.
이 장소는 내가 편하게 돌아다닐 수 없는 회사이고,
송준수 외에는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다.
나 역시  회사를 다니는 사람들에게는 유령 같은 존재였다.
화장실에 갈 때조차도 복장에 신경을 써야 했고,
최대한 사람들 눈에 뜨이지 않게 정장을 입고 있어야 했다.




그래서, 나의 원칙은 닭장 안에서는 이한얼로 지내고,
닭장 밖에서는 한돌의 모습으로 나간다는 것이었다.
나는 이 원칙을 금요일에는 철저히 지켰다.
밖을 나갈 때는 정장으로, 안에 있을 때는 편하게.


그러나 사람은 언제나 한번은 바보 같은 실수를 하고는 한다.
그리고 종종 그 실수는 때로는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내가 그랬다.
내가 X같은 실수를 그에게 했다.
가장 멍청한 실수를 반드시 피해야 할 대상에게 하고야 말았다.

내가 원칙을 어긴 것은, 토요일 오후의 빌어먹을 낮잠 때문이었다.
닭장 안에서 정신없이 오수를 즐기다가, 제정신  차린 상태로 창고문을 열고 나왔다.
게다가 그때 복장은 반바지를 착용하여 한얼의 하얀 다리를 훤히 드러낸 상태.
토요일에도 근무 나온 남자직원 몇 명이 나를 보고 헤벌쭉  벌리자마자, 나의 실수를 자각했다.
사람 하나 없는 남자 화장실로 부리나케 뛰어 들어갔고, 변기 문을 닫은  셀리카움으로 변신했다.
변기를 붙잡고 10분간 자책하고 나서야, 화장실을 나섰다.
다행히 토요일이라서 회사에 나온 직원은 별로 없었고, 다른 사람들에게 들키지 않고 무사하게 내 사무실로 돌아올  있었다.
나는 닭장 사무실 문고리를 등지고 밖을 둘레둘레 살펴보면서 들어온 지라,
그 좁은 닭장 안에 누가 있는지도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내 등 뒤를 살펴보지 않고, 앞만 보면서 문을 닫았다.



그리고  빠르게 주문을 외웠다.
너무도 성급하게.
너무도.



―셀리뷰 (초정밀보호막 해체)




그렇게 아무 생각 없이 돌아섰다.
그리고 아무도 없어야 할 사무실을 지키고 서있는  사람을 보고 얼어버렸다.
미동도 하지 못한 채, 입을 멍하니 벌릴 수밖에 없었다.
나의 행동은 그 사람에게로 전염되어,  역시 전혀 움직이지를 못했다.
그의 경악에  표정은 이전에도 보지 못했고, 이후에도 보지 못할 종류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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