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64화 〉이렇게 날 시켜먹다니!! (64/68)



〈 64화 〉이렇게 날 시켜먹다니!!

송준수와 나는 눈을 마주쳤다.
잠시 둘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하지 못했다.
차마 상상하지 못했던 것을 본 충격과 들키지 말아야 할 것을 들켜버린 낭패감,
 가지 모두 말과 생각을 삭제하는데 충분한 것들이다.



“저..기...요”

음성변조기 끄는 것을 잊어 버렸고, 소녀의 모습에 아재의 목소리가 나왔다.
빼도 박도 못하는 증거 하나를 더 그에게 갖다 바쳤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음성변조기를 껐다.

“이..게...”
“설..명..할게요. 설명..”
“당..신... 대체.. 누구야?”
“저.. 이게요.. 이게.. 하아..”


절박한 허사와 휴지(休止)의 나열!
누가 먼저 문장을 제대로 말하는가의 싸움이다.
속이는 자가 속았던 자보다 빨리 정신을 차리면, 근사한 변명이 나오고,
속았던 자가 속이는 자보다 빨리 의식을 회복하면, 귀싸대기가 나온다.
근데, 정신을 차려봤자, 나한테는 변명거리가 없다.
고로 난 얻어터질 일만 남았다.




“죄송합니다.”

이 말 한마디로 귀싸대기는 피할 수 있으려나.


“한돌, 당신의 정체는 뭐지? 이한얼인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가장 답변하기 곤란한 질문을 그가 초장에 던진다.
마치 너는 누구인가란 철학적 질문을 던지는 것처럼.
진리란 인식의 과정을 거쳐야만 하지만,
인식의 과정을 거친 모든 것이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상식과 현실에 박제되어야만 진리가 되는 것이다.
근데, 난 상식에 없는 존재인데, 어떻게 상식적으로 설명하지?
사실 정답은 ‘나는 정의될  없는 존재입니다’인데,
그렇게 말하면, 그가 이해하려나?
그가 나를 인식하면서 믿지 못하고 있는데, 어떤 상식적인 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에구, 모르겠다. 나도.

“몸은 여자고, 정신은 남자입니다.”



최선을 다했으나 내가 들어도 납득이 안 된다.
송준수 입장에서는 뻘소리일 거다.
안다. 내가 당신 입장에서도 그러리라는 거.
하지만, 당신이  입장이라면 더 좃같을 거야.

“갑자기 여자로 변하는 기술은 들어 보지도 못한 건데..”
“음.. 그런 기술은 없죠. 아직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존재인가?”
“외계인에 관리 받고 있습니다.”
“설마, 외계인인가?”
“그럴 리가요? 지구인입니다.”
“대체,  누구야?”
“다시 질문이 첨으로 돌아왔네요.. 전, 몸은 여자고 정신은 남자라고요.”


준수와 나의 문답이 진지함이라고는 하나도 묻어있지 않는 말장난 같은데,
기실 우리 둘 다 장난이 아니다.
내가  있는  공간이 빨래 건조기 같다.
습기가 빠져나가는 게, 진짜 말라 죽을 거 같다.
송준수가 말을 멈추고, 한 손으로 이마를 짚는다.
처음에는 당혹의 빛이었던 것이, 점차로 침잠의 그것으로 바뀌어 간다.
그가 무엇을 말할까?
1초의 시간이 1시간이 되는 크로노스의 마법이 진행 중이다.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하기는 어렵겠지.”



네. 그럽죠. 보시다시피.


“나한테 중요한 건, 여전히 너의 의도다.”
“제 의도는 당신이 알고 있지 않습니까?”
“지혁을 사랑해서 이런 일을 하고 있는 건가?”
“네...엑!?”



이 자식이 또 무슨 말을 이렇게 하는 거야?
요즘 만나는 인간들마다  이리 나랑 지혁을 못 엮어서 안달이야?


“지혁에 대한 의리일 뿐, 다른 뜻은 없지..”
“돈 때문인가?”
“않죠. 돈도 벌고.”
“광혁에 대한 증오는 사실이고?”
“여자로서... 그 자식은 반드시 죽이고 싶습니다.”



‘여자로서, 그에게 수치를 당했다’라는 표현을 입에 담았다가 지웠다.
준수 앞에서 ‘당했다’라는 단어는 차마 내키지 않았다.
그가 한번 나를 물끄러미 보더니, 평상시의 표정으로 되돌아왔다.

“어쨋든, 당신의 모습이 이렇게 된 건 피치 못할 이유가 있겠지요?”

끄덕. 말은 안하고 고개 짓을 했다.
잘하면 넘어가 줄 것 같기도 하다.


“당신의 정체에 대한 모든 비밀, 지금은 덮겠습니다.”
“설마.. 나중에라도 밝히시면..”
“설마, 제가 그러겠습니까? 저는 이익에 밝지만, 파렴치한 사람은 아닙니다.”
“감사합니다. 기꺼이 덮어주신다니.”
“감사할 필요 없습니다. 난 당신에게 약조 하나를 내세울 겁니다.”

그럼 그렇지. 이 인간이 그냥 봐줄 리가 없다.
그래도 약점을 잡힌  나니, 쉬운 걸로  쳤으면 좋겠다.




“쳇! 치사하게.”
“몸도 여자고, 말투도 여자인  맞군요.”
“뭐.. 뭐라는 거야?”
“정신조차도.”

끄응.
이 자식 앞에서 걸걸한 욕이라도 한 사발 들이켜야 저딴 생각을 안 할까?
그래봐야, 또 놀려먹겠지?
이 녀석의 모든 말이 다 내겐 진땀으로 흐른다.




“후후.. 제 조건은 이겁니다. 박광혁이 물러나도, 여기에서 대외전략비서를 계속 하는 것.”
“뭐.. 뭐라고요?”
“NW그룹 대외전략비서로 2년은 더 의무적으로 근무하라는 겁니다.”

이건 생각도 못한 조건이었다.
지키기 어려운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백수 입장에서는 쌍수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박광혁이 물러나고 나면, 당신은 SH 그룹을 위해 일할 수 없습니다. 박지혁도 예외가 아닙니다. 직업윤리의 문제이니까 잘 아시리라 생각됩니다.”

약점 잡은  한가지로 지혁과  분리시켜 버렸다.
송준수가 굳이 이렇게까지 할 이유가 있을까?
나를 설마 NW그룹에 위협적인 존재로 보는 건가?
지혁은 꺼벙하고 난 정상이 아닌데?
어쨌든 지금 상황에서 송준수의 저 말은 통보지 제안이 아니다.
하지만, 괜찮은 통보다. 그냥 OK하면 된다.
그런데, 받아들이기가 꺼려진다.
박지혁 얼굴이 떠오른다.
지혁이가 뭐라고 할 텐데.




“박지혁 때문에 생각이 많으시군요. 그한테 사적인 조언은 괜찮습니다. 공적인 업무 관계만 유지하지 말라는 겁니다.”
“알겠어요. 그럼. 부회장님 비서가  테니까 기밀 유지해 주세요.”
정말,  인간이 내 속을 다 들어다 보는 것 같았다.
그만큼 능글맞고 그만큼 무서운 인간이다.
그래, 이 인간 밑에서 많이 배우고 2년 후에는 퇴사해서 SH를 위해 써먹어야지.

“SH를 위해 어떤 일도 할 수 없다는 거, 퇴사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씨바, 진짜  인간 정말 독심술까지 갖추고 있는 거 아냐?
돗자리 깔고 점을 봐도 돈을 긁어모을  같다.
그래도, 당신은 날 너무 얕봤어.
저 약조에는 빠져나갈 구멍이 있고,  그걸 노릴 거야.
설마 그것마저 이 녀석이 눈치를 채지 못하겠지?

“알겠다고요. 뭐 이리, 사람이 째째해.”
“그럼, 주말 잘 보내십시오. 한돌씨.. 아니 이한얼씨.”



당신 덕에 주말 참 잘 보내기도 하겠습니다.
그는 입가에 웃음을 지어 보이고서는 그렇게 사라져 갔다.
그의 걸음걸이를 보니, 송준수는 승리자의 모습이다.
반면, 난 정체를 들킨 것만으로 오늘 준수에게 완벽히 패배했다.
미친 놈. 미친 년. 까마귀 고기를 쳐 먹은 놈. 그의 손아귀에서 놀게  가련한 년.
아악! 진짜 돌아가시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난 눈치 보는 것 없이 편하게 일했다.
생각해 보니, ‘편하게’는 아닌 거 같다.
 날 실수를 잊기 위해서 ‘미친 듯이’ 일한 것이지.
회의 참석자인 오실장과 심본부장의 정체를 알기 위하여 NW그룹 모든 실장급과 본부장급 이상 간부들의 얼굴과 이름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바보스럽게도 그때서야 송준수의 의도를 알았다.
NW의 중간 관리급 인사들을 전부 알아두라는 그의 무식한 뜻을.


참석인원 중 한명은 바로 캐치했다.
심재기 대외전략본부장.
내 직함이 대외전략비서니, 유추해서 알아내기가 쉬웠다.
 한명은 오종복 HR혁신실장.
다행히 실장급에서 오씨는 딱 둘이었고, 직함 상 이 일에 가장 관련이 있는 사람은 그 한명 뿐이었다.
시설관리실장이 이따위 업무를 맡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헤프박사가  각성제 캡슐  알과 날밤 세 번을 까고 나서야, 내게 주어진 업무를 마쳤다.
다시  번 느끼건대, 이걸 시킨 송준수는 리얼 미친 변태 새끼다.
300페이지가 훌쩍 넘는 사업구조개편안의 모든 자구를 꼼꼼히 짚어야 했고, NW의 사료와 연감을 다 뒤져봐야 했다.
NW의 전반적인 사업구조를 모두 기억해야 했고, 각 섹트별 관련자 인적 사항을  알아둬야 했으며, 게다가 SH측 대응 방안까지 머리 싸매고 연구해야 했다.
이건 차마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는데, 이걸 해낸 나는 리얼 또라이 미친년인 것이다.
 삼사일 간  입에서 나온 신발 소리는 신발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고, 지금도 내 입에서는 신발이 양산 중이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내가 복장터져 죽을 것 같았으니..

월요일 오전,  닭장 같은 개인사무실에서 양복을 차려 입고 부회장실로 직행했다.
 시간에 전공수업이 있었으나, 생리공결제를 써서 결석처리 되는 것은 면했다.
양복을 입은 젊은 남자가 이따위 짓을 하고 있다면 필시 학교에서 매장당하기 쉽상인데,
그나마 회사라 신경 쓰는 사람이 없어서 다행이다.
정말로 미안합니다. 전 여자 맞고요. 대신 그날 출석해서 오늘의 결석을 갚겠습니다.


부회장실 앞 데스크를 가니 여비서가 대기 중이었다.




“무슨 일로 찾아오셨습니까?”

그녀가 내 눈치를 보며 묻는다. 이 여자, 분명히 알고 있다.
지금 찾아온 내가 자신의 동료임을.
제발  아니길 바라는 마음에 되묻는 것이지.

“이번에 새롭게 채용된 대외전략 비서, 한돌이라고 합니다.”



이 여자의 표정이 실감나게 무너져 버린다.
그녀의 기대를 거침없이  버려서 허벌나게 미안했다.
절라 잘생긴 백마  왕자의 모습이여야 했는데,
실상은 등 굽은 드왈프였으니 화가 치밀 만하다.
내색만 안했다면, 왕자 하나 즈음은 목마 태워 당신 앞에 대령시킬 수도 있을 텐데,
당신 표정 보니 글러 쳐먹었다.
왕자 따위는 가내수공업으로 알아서 만드세요.



부회장실에 들어가니, 송준수씨께서 친히 나를 접견한다.

“주말은 잘 보내셨습니까?”



당신이 저지른 짓거리를 보세요.
지금 내 모습이 사람새끼입니까?


“죽지는 않았습니다.”
“회의 준비는 잘 하셨죠?”
“회의 때 보시면 알잖아요.”
“죽지는 않으셨으니 잘 하셨겠군요.”



죽을래, 진짜?



“그럼, 지금 회의실로 갑시다. 오종복 HR혁신실장과 심재기 대외전략본부장이 와 계십니다.”

하아~
이럴 거면,  진작 오종복과 심재기 이름을 오픈 안  거래?
송준수가 하루 동안 들인 내 수고를 간단하게 허공에 날려버리고서는, 나를 이끌고 회의실로 간다.
정말, 이 인간은 마음에 들지 않는다.

회의실 안.
반백의 머리에 뿔테 안경을 쓴 사람과, 몸집이 붙은 거구에 머릿기름을 잔뜩 발라 머리를 넘긴 중년신사 한 명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 두 사람은 부회장이 들어오자, 자리에서 일어나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송준수를  따라온  역시 어정쩡하게 인사하였다.
인사를 마친 후, 그들이 나를 심상치 않게 바라보았다.
그들이 입만 열면, ‘넌 어디서 굴러먹은 개뼈다귀야?’라는 대사를  것도 같았다.


“회의를 시작하기 전에, 소개하지요. 이쪽은 이번에 새로 들어온...”
“대외전략비서 한돌이라고 합니다. 잘 부탁합니다.”


흥, 당신들이 태양과 같이 받드는 부회장 말을 한번 끊어 봤다.
내 맞은 편에 앉아 있던 두 분이 개뼈다귀를 불쾌하게 바라본다.
송준수는 이 보이지 않는 신경전을 재미있게 감상하다가, 입을 열었다.

“여기, 한돌씨는 제가 얻은 최고의 인재입니다. 이번 SH그룹 회동 때  대신 참여할 숨은 전략가이죠.”




어라? 이건 웬 쌩쇼?
고생을 바가지로 시켜놓고, 최고의 인재라고 입 터는 이유가 궁금해진다.
사람들에게 시선을 돌리니, 다들 믿기지 않는 듯 얼떨떨한 모습들이다.
나야말로 최고의 인재가 맞긴 맞는데, 그걸 불신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썩 유쾌하진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내 능력을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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