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별 뜻이 있어서 웃는게 아냐!
회의 시작부터가 이상했다.
보통 새로운 사람이 오면 서로 자기소개를 하기 마련인데, 신입인 나만 인사를 했지, 지금 앞에 앉아 있는 두 중년의 신사들은 잠자코 앉아 있기만 했다.
뭔가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설마, 송준수가 시킨 건가?’
나는 차마 그에게 묻지는 못하고, 파워포인트를 틀어 놓고 발표준비를 하였다.
“그럼, 대외전략비서이신 한돌씨가 준비한 자료를 보도록 하겠습니다. 한돌씨, 발표 시작하시죠?”
송준수가 곧바로 NW와 SH그룹 간 빅딜 전략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시켰다.
이제 막 대외전략비서로 임명된 사람에게 중차대한 발표를 시키는 의미는 분명했다.
나의 능력을 본격적으로 시험해 보기 위한 것임을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도 알 수 있었다.
이 긴장감을 뚫고, 초장부터 강인한 인상을 심어줘야 하겠지.
“안녕하세요. 발표 시작하겠습니다. 우선 이 자리에 참석하신 오종복 HR 실장님과..”
매섭게 청중을 훑어보았다.
거구의 신사의 입가가 살짝 씰룩였다.
저 찰나의 움직임으로 그가 오종복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럼, 반백머리 신사분은 자연스럽게 심재기 본부장이다.
“심재기 본부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심재기 본부장에게 가볍게 목례를 했다.
시작하기 전에 낚시를 하나 드리워 보기로 했다.
오종복 실장의 몸매가 탄탄한 것으로 보아, 분명히 운동을 좋아할 것이고,
이정도의 지위를 갖춘 사람이라면 자주하는 스포츠 하나를 떠올려봤다.
“이렇게 날씨가 화창한 날, 골프라도 치시면서...”
골프라는 짧은 단어에 오종복 실장이 눈빛을 반짝이며 흥미롭게 나를 쳐다본다.
빙고. 그냥 던졌는데 걸렸다.
저 표정으로 보건대, 오종복 실장은 골프를 좋아한다.
“특히, 오종복 실장님께서 이런 날 라운드를 못 가셔서 아쉽겠습니다. 그래서 더욱, 이 자리에 와주신 것을 감사하게 생각하고요.”
오종복 실장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올랐다.
자신의 취미를 용케 알아낸 것에 대한 놀라움이랄까.
“심재기 본부장님과는 이 회동이 끝나면, 낚시를 함께 가고 싶습니다.”
심재기 본부장이 얼굴이 활짝 펴졌다.
그리고 신기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알아냈느냐는 것이겠지.
그것은 순전히 우연이었다.
자료를 뒤적이다가, 심본부장이 회사연보에 간단한 기행문을 적어놓은 것을 눈여겨보았고, 거기서 낚시의 스킬이나 기술을 자세히 기술한 것을 확인하였다.
연보에 적어 놓을 정도면, 낚시광이라는 이야기지.
청중의 관심사를 알아내는 것은 프리젠테이션의 원칙이다.
지금 이 발표를 듣는 고객은 부회장을 빼고 두 명이며,
이 두 명의 청중에게 개별적으로 관심 있다고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친밀감과 신뢰감 형성에 결정적이다.
게다가, 난 메씨카움(전자렌즈)의 검색기능을 활용하여,
발표 중간에 골프 용어와 낚시 용어를 적절하게 섞어 쓰고 있다.
이 정도면, 이 두 사람 충분히 경탄해 마지않았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내용이겠지.
나는 NW의 20년간 매출변동사항과 성장지표의 변이, 주식 변동 변화 등을 고려하여 종단요인분석(longitudinal factor analysis)을 시행하였고,
그 결과를 토대로 NW가 감당할 수 있는 적자의 범위를 설정하였다.
SH그룹으로부터 빅딜을 받았을 때, NW그룹이 그 부담을 어느 선까지 감당할 수 있는지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한 것이다.
물론, 통계분석은 메씨카움의 도움을 좀 받았고, 난 해석만 한 것이지.
메씨카움의 존재를 알 수 없는 두 분의 관객께서는, 나의 입에서 구체적인 분석 데이터가 나오자 충격을 받은 눈치다.
그 침착하다던 송준수도 열린 입을 다물지 못했으니까.
마지막 하이라이트는 박광혁의 퇴출방안.
박광혁이 개별적으로 104억을 편취했음을 입증하는 자료 이외에,
그를 물러나게 할 수 있는 또 하나의 음성 자료를 제시했을 때에 세 명의 청중들은 경악을 금지 못했다.
물론, 그 결정적 자료를 하비천이 간접적으로 건네주었다는 건,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여기 제시된 사실을 보더라도, SH와 NW의 빅딜은 우리에게 큰 이득이 되는 사업입니다. 걸림돌인 박광혁만 제거하면, 두 그룹이 다 상생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봅니다. 이것으로 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발표가 끝났을 때,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는 청중의 힘찬 박수소리가 들렸다.
일상적인 프리젠테이션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스탠드 오베이션이라고 할까.
송준수가 고개를 절래 흔들며 나를 바라보았다.
심재기 본부장이 경탄어린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이 분석이 삼사일 걸렸다고요?”
“네. 그 덕에 제 몸 상태가 그렇습니다만, 뭐, 괜찮습니다.”
“병원에 입원하시면, 제가 모든 병원비와 위로비까지 책임지도록 하죠.”
송준수가 평소에 안하는 오버액션을 말 속에 담아, 내게 보냈다.
‘저 가증스러운 주둥아리.’
나는 잠시 그를 쪼아보았다가, 싱긋 웃으며 말했다.
“생명보험까지 가입시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렇게 까지 회사를 위해서 충성을 바치려 하다니, 매우 감동했습니다.”
이봐, 송준수! 내가 의미하는 건 그게 아니잖아?
내가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준수를 바라보고 있는데, 오실장과 심본부장이 내게 정식으로 악수를 건넨다.
역시, 처음에 나한테 인사를 하지 않는 건 사전조율 같은 것이 있었던 거야.
“역시 부회장님의 말씀은 허언이 아니시군요. 인재를 보시는 눈이 탁월하십니다. 한돌씨, 다시 인사드리죠. 저는 골프를 좋아하는 오종복 HR혁신실장입니다.”
“후후. 저도 늦었지만 제 소개를 다시 하겠습니다. 저는 낚시광인 심재기 대외전략본부장입니다.”
그들이 나를 인정한다는 걸 악수로 보여준 이후, 심도 깊은 논의가 오갔다.
오실장은 박하영 전무와 설성국 SH종합개발사장을 분석한 파일을 내놓으면서,
박하영 라인 측 인사들과 그들이 갖고 있는 우호지분에 대하여 자세히 소개하였다.
오실장에 따르면, 설성국은 박광혁이 주도하는 현재의 사업추진방향에 대하여 강하게 반대하고 있으며, 빅딜을 찬성할 수 있는 유력인사였다.
“제가, 설성국 사장 개인의 비리를 조금 알고 있습니다. 뭐, 이럴 때 써먹을지 몰랐지만.”
오실장은 국정원 출신답게, 무서운 인간이었다.
분명히 그는 그 비리를 통해 설사장을 압박하고, 빅딜을 받아들이라는 압력을 가하겠지.
반면, 심재기 본부장은 냉철한 분석을 통하여, 전반적인 SH그룹의 경영실적 및 자금 사정 등을 제시하였다.
박광혁 경영기획실장과 박덕성 회장의 우호세력을 나노단위로 분석한 것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최근 박광혁의 실책으로 인하여, 그의 경영능력에 의문을 표하는 주주가 많이 늘어났습니다. 그래도 주주총회를 통해서 그를 퇴진시키기는 역부족이라 생각했는데, 여기 한비서가 갖고 온 자료가 분위기를 충분히 반전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심재기에 따르면, 상대편으로부터 지분 5%만 더 가져오면 된다.
이것은 충분히 해볼 만한 싸움이었다.
물론 이 지분 5%를 가져오는 것은 어려운 일이기는 하다.
박광혁을 지지하는 박덕성 회장의 일선 후퇴를 전제로 하고 있기에.
“자, 오늘 회의는 이것으로 끝내겠습니다.”
송준수가 회의의 종결을 알렸다.
그는 매우 만족스럽다는 제스쳐를 취하며, 그의 수족들을 바라보았다.
“SH그룹과의 비밀회동이 이번 주 금요일 저녁입니다. 박광혁실장 측 눈을 피해, SH종합개발 워크샵이 열리는 연수원 부근 식당으로 예약을 잡았습니다. 아시다시피, 저는 가지 않습니다. 여기 심재기 본부장님, 오종복 실장님, 그리고 한돌 비서가 저 대신 중차대한 임무를 맡게 되실 겁니다. 여러분들의 손에 NW의 운명이 달렸습니다만, 전 충분히 여러분들의 뛰어난 능력을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제가 이 빅딜의 결과를 보증합니다.”
송준수의 용병술이 여기서 드러난다.
부하직원이 자신의 마음에 들면, 전적으로 일을 맡기고 완벽하게 신뢰한다.
그리고, 결과에 대한 책임을 자신이 진다.
그게 설혹 말뿐이라도.
“아, 미리 말씀드릴 것이 하나 있는데, 다음 주에 대외전략비서 한 분이 합류하시게 될 겁니다. 외모와 능력이 대단히 출중한 여성분이신데, 여기 계신 한돌씨 못지않을 겁니다."
송준수의 용병술 하나 더.
경쟁을 통해서 부하직원들을 자극시킨다.
그나마, 나와 나를 경쟁시켜서 다행이다.
다행이긴 한데...
왜 나랑 상의도 없이 여기서 발표를 해 버리는 거지?
아악!! 저 인간이 진짜!
나 다음 주에 할 일도 많고, SH측에 이한얼이 드러나면 안된다고!!!
다시 4일 후, 연수원 부근 식당.
“어휴.. 그... X같은 새끼”
그렇게 난 과거의 송준수를 씹고 있었다.
옆에서, 오실장이 넌지시 말했다.
“박광혁을 꽤 증오하시는 모양입니다.”
“네?”
“아까부터 입모양을 지켜봤는데, 욕인 것 같아서...”
역시, 오실장은 눈치가 빠르다.
하지만, 내가 욕한 사람은 당신 보스라고요.
“드디어 SH측 인사들이 식당에 도착한 것 같습니다.”
심재기 본부장이 조용히 소식을 알렸다.
다시 심장이 쿵쾅거린다.
미리 준비한 인사 멘트를 입으로 중얼거려 보았다.
오실장이 방긋 웃으며 주먹을 쥐어 보인다.
“자,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이군요.”
“네. 절대로 쫄지 않고 잘 해 내겠습니다.”
그때 내 폰으로 문자 메세지 두 개가 연속적으로 전송되었다.
발신자는 동일 인물이었다.
[지금 막 매형이 도착했다. 내가 대기할 테니, 회의가 끝나는 대로 주차장으로 나와.]
[한돌, 고맙다. 매제는 네가 잘 해내리라 믿는다.]
음, 송준수처럼 박지혁도 미쳤다.
이젠 아예 누굴 자기 부속품으로 아는구먼.
기분이 슬 나빠져서, 난 웃고 있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는 거지, 별 뜻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절대로 그런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