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8화 〉당신이 이해를 해주면 안돼?
박지혁은 이한얼의 전화를 받고 기분이 날아갈 듯싶었다.
그녀와의 통화에서 몇 가지 이상한 점은 있었지만,
그녀 성격이 원래 그렇다는 식으로 가볍게 퉁 쳤다.
한돌에게서 직접 회의결과를 듣지 못해 아쉽지만,
한얼과 금요일 저녁을 같이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뜻밖의 소득이었다.
독거노인인 본인에게 주는 하늘의 선물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내일이나 모래 즈음에 처형 불러다가 듣지, 뭐.”
한돌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에게서 처형이 되었고,
한얼은 자연스럽게 유부녀로 등극되어 버렸다.
혼인신고서에 자기 혼자 도장을 찍어 버리는 그림을 완성할 때 즈음,
지혁이 운전하는 차가 서서히 음식점의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자, 그럼 나를 존나 보고 싶어 하는 얼을 찾아볼까요?”
희미한 차 전조등이 한 여자를 비췄다.
그리고, 지혁은 자신의 넋 나간 주둥아리가 그녀를 묘사하도록 놔둬 버렸다.
단정한 묶음 머리에 하얀 원피스를 차려 입고, 화장을 곱게 한.....
입술의 주름을 타고 번질거리던 힘없는 말들이 생명을 다하지는 못했다.
입가에 생글거림이 방울방울 맺힌 그녀의 연용(姸容)을 보았을 때,
지혁은 벅차오르는 가슴을 진정시키기에도 여력이 없었다.
입술 끝이 천장으로 올라간 그녀의 잇몸미소는 분명 지혁을 보자마자 생긴 것이다.
지혁은 그 사실을 안 것만으로도 오늘 하루의 밥값은 다했다고 생각했다.
오늘 먹은 식사는 부실했지만, 그녀의 마음을 먹은 순간은 부유했다.
그의 마음을 잡수신 그녀가 뒤 차문으로 사푼히 걸어갔다.
—덜컥덜컥
그가 뒤 문을 열어 줄 리 없었다.
향기는 가까운 데서, 오랫동안 맡아야 느낌이 오기에.
지혁이 손짓으로 조수석 의자를 가리킨다.
그녀가 이마에 살짝 깊은 선을 그리며 조수석 문을 열고, 자리에 앉았다.
향기를 자기 옆으로 끌고 오는데 성공한 지혁이 기세등등하였다.
“치마가 짧아서 싫은데.”
“인사보다 옷 감평을 먼저 하는 건 싫은데.”
“오늘 수업은 잘 받았어요?”
“안부인사가 아니라 출석점검 같다.”
한얼이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모양이다.
아닌 게 아니라, 지혁이 그녀를 놀려먹는 게 오늘따라 유별났다.
“우리 오늘 오전 수업 때 잠깐 봤는데, 인사가 필요해요?”
“우리 둘이 이렇게 있는 건 정말 오래간만이잖아. 그래서 인사가 필요하지.”
“인사는 그런 특별한 때만 하는 게 아니잖아요.”
“그래서, 지금 인사하잖아. 우리!”
“허~~~ 오늘 간만에 입 좀 터시네요?”
“후후, 오늘 컨디션이 좋거든.”
한얼은 지혁의 기분이 한층 업 되어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기쁜 소식을 지금 전하기로 하였다.
이 순간이 화룡정점을 찍을 정확한 타이밍이었다.
“친오빠가 그러는데, 오늘 회의는 대성공이랍니다.”
“그래?”
“별로 좋아하지 않네요?”
“네 얼굴이 이미 결과를 말해주잖아. 그리고, 사실 NW에게 좋은 일 시켜준 것 같아서 좀 그래.”
“뭐, 그래도 박광혁을 몰아내기 위한 첫걸음은 힘차게 내딛은 것이니까요. 설성국 사장이 NW가 제안한 모든 빅딜 제의를 받아들였다네요. 그리고 한 달 내 박광혁 및 박덕성 회장의 2선 후퇴를 위한 주주총회를 추진하기로 했고요.”
박지혁의 표정은 복잡했다.
아버지를 강제로 일선에서 물러나도록 한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이 보였다.
또한, SH그룹이 새로운 구조조정안을 잘 받아들일 수 있을 지에 대한 걱정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고개를 흔들며, 애써 밝은 웃음을 지었다.
“잘했다, 얼. 잘했다, 지혁. 열심히 일 한 우리들에게 휴식을 줘야지.”
“네?”
“우리, 영화 보러 가자!”
영화관 간다는 말에 그녀가 놀랄 틈 없이, 지혁은 엑세레이터를 거칠게 밟았다.
한얼은 몇 마디 말을 덧붙이려다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오늘은 그와 입씨름해봐야 자신이 질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지혁이 운전하는 차량이 어느 덧 경춘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이제 어둠이 짙게 깔린 강가에는 물이 흘러가는 윤곽만 보일 뿐이었다.
둘 사이의 의미 없는 말장난을 몇 차례 주고받았던 그들은 잠시 침묵을 지켰다.
이한얼이 먼저 그 침묵을 깼다.
“이 차, 못 보던 건데요?”
“할아버지 차를 갖고 왔지. 매형의 이목을 피하려면 어쩔 수 없었어.”
“매형분께서 평소 듣던 대로 날카로운 카리스마가 있으시던 데요?”
“누나는 좀 맹한 구석이 있는데, 매형이 장난이 아니지.”
이한얼은 설성국보다 나이가 한참 지긋한 중역들이 그 앞에서 쩔쩔 매는 것을 지켜보았다.
설성국을 대하는 직원들의 태도는 송준수 수하의 직원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눈으로 직접 확인한 결과, 설성국은 강(强)으로 나가는 용장 스타일이었다.
“그런데, 매형을 직접 만나봤나?”
“아....그게... 접때 어머님 장례식에서 봤을 때, 인상이 그랬다는 거죠. 하하.”
“지금 그거 웃을 상황이 아닌 거 같은데..”
“아, 죄송해요. 죄송합니다. 제가 웃으려고 했던 건 아닌데..”
“됐어. 고의도 아닌데 뭐.”
한얼은 계면쩍은 웃음을 잘못 날린 죄로, 자기 이마에 꿀밤을 매겼다.
이 모습을 보던 지혁이 굳어졌던 표정을 풀었다.
안도의 한숨을 살짝 쉬던 그녀가 중요한 안건을 풀기 시작했다.
“이번 쿠데타에 성공하면, 설성국 사장의 성향 상, 피의 숙청이 이뤄질 거여요.”
“쿠테타라.. 단어 선택이 좀 그렇군.”
“아마 박광혁 측 라인이 갈려 나가겠죠. 다수는 명예퇴직을 당하거나, 그래도 능력 있는 소수는 회사에 남아 있을 겁니다.”
“제대로 된 적폐청산이 이뤄지겠군.”
“아뇨! 지혁씨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당신은 절대로 CEO가 될 수 없습니다.”
“뭐?”
지혁의 눈이 커졌다.
한얼의 단호한 표현에 허를 찔렸다.
“생각해 보세요. 지금 SH 경영진 중에 지혁 선배를 지지하는 사람이 있나요?”
“음....”
“지혁씨가 설성국 사장과 동일한 행보를 하는 이상은 절대로 지혁씨는 자기 세력을 가질 수가 없어요.”
“그렇다면, 나보고 박광혁 측 라인을 포옹하라는 말인가?”
“네. 박광혁이 쫓겨나는 그 순간이 능력 있는 직원들을 수족으로 만들 절호의 기회입니다.”
“.........”
“수동적으로 박광혁을 따랐던 자, 박광혁의 사업추진방향에 반대했던 임원, 박덕성 회장님의 가신들, 모두 대상으로 삼으셔야 합니다.”
한얼의 조언은 지혁의 현실을 제대로 꿰뚫었다.
회사 내에서 그의 세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극히 보잘 것 없었다.
아니, 아무도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박지혁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일은 세력을 형성하는 것임을 알려 준 것이다.
“가장 박지혁씨 편으로 만들어야 할 사람은 정송진 구조조정관리 팀장입니다. 그가 경영기획실장으로 영전될 예정이고, 지혁씨를 가장 호의적으로 보고 있는 사람이니까요. 그다음 김정출 상무, 김인식 SH캐피털 부사장입니다. 왜 그들을 구제해야 하는지 지혁씨가 잘 아실 거여요.”
“김인식은 개쓰레기같은...”
“지혁씨가 그 욕을 내뱉으면 남의 목이나 치는 망나니가 되어 버리죠. 그러고 싶으세요?”
“음......”
“지혁씨는 앞으로 가급적 피를 묻히지 마세요. 방수혁 과장의 음성 녹취록은 제가 공개합니다. 박광혁 퇴출이 확정되면, 지혁씨는 남은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하여 애써야 하고요. 지혁씨 당신은 남들을 살리는 대범한 천사가 되어야 합니다.”
한얼의 준엄한 질책성 발언에 지혁은 할 말을 잃었다.
이 순간만큼은, 그녀가 박지혁의 비서로서 현실적인 조언을 쏟아 붇고 있었다.
그 쓰다 쓴 조언 덕인지, 좀 전에 업 되었던 기운은 다 사라지고, 박지혁은 침울해져 있었다.
“오빠, 제 말에 너무 다운되어 있지 마시고, 기운 좀 차려요.”
지혁의 기가 너무 죽었다고 생각한 한얼은 그를 격려하기 시작했다.
쓰기 싫어하던 ‘오빠’라는 호칭을 아끼지 않으면서.
“오빠는 되게 똑똑하고 영민한 사람이야. 그러니까, 충분히 잘 할 수 있어요. 엄청난 브레인의 소유자인 제가 아낌없이 도움을 드릴께.”
“음.. 고맙다. 얼. 네가 지금 해준 조언과 지금의 위로. 내가 잊지 않을게.”
“악!! 지혁씨, 앞에 봐! 앞에!”
지혁의 차가 커브길에서 순간적으로 중앙선을 넘어 버렸다.
다행히 건너편에 다가오는 차가 없었다.
지혁과 한얼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깊게 쉬었다.
얼이가 지혁을 쏘아보며 따발총을 쏘기 시작했다.
“뭐야! 당신 때문에 나 장가 못갈 뻔 했잖아! 눈이 삐구예요? 운전 똑바로 못해요? 아 진짜. 가슴이 아직도 덜컹거리네. 이거 우리가 박광혁 퇴출하기 전에, 우리가 세상에서 퇴출당할 뻔 했어. 내가 이 인간을 믿어야 하는 건 맞아? 앞으로 앞만 보고 똑바로 운전해요. 네?”
“어.. 어... 미안..”
“어우씨. 놀래라. 근데 어디까지 이야기 했더라?”
지혁의 운전 미숙으로 촉발된 사태는 한얼의 기억까지 지워 버렸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놀란 가슴에 따발총을 다 쏴버린 나머지, 총알을 장전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방수혁 과장의 음성 녹취록 오픈 문제와 관련해서요..”
그녀가 우물쭈물 한 끝에, 새로운 화제를 꺼내 놓았다.
“아무래도 그 음성 녹취록은 우리끼리 아는 비밀로 했다가, 주주총회 당일 날 터트려야겠습니다. 지금 오픈하면, 설성국 사장의 성향 상 방수혁 과장을 들들 볶으며 괴롭힐 거 같아요.”
“그 음성 녹취록에 무슨 내용이 있다고 했지?”
“말씀드리기 민망하긴 한데, 박광혁이 방수혁 과장 따님을 희롱하는 내용도 있어서, 그 부분은 차마 공개하기 어렵습니다.”
“음.. 박광혁을 죽일 불렛(bullet)중의 하나군.”
차가 잠시 신호에 걸렸다.
박지혁은 운전대위에 걸친 손을 쥐락펴락 했다.
“그 녹취록이 방수혁 과장의 메일 계정으로 들어왔다고 했지? 누가 그걸 보냈는지, 넌 알겠어?”
“아무래도, 박광혁의 최측근이겠죠.”
“하비천일 가능성이 크군. 하비천, 그가 박광혁을 배신하고 있는 거야.”
한얼은 박지혁의 추론에 별다른 긍정이나 부정의 표시를 하지 않았다.
하비천은 이번 일에 방관하겠다고 약속했지만, 방관을 넘어 협조를 하고 있었다.
하비천은 박광혁이 했던 모든 것들을 기록했고, 그 기록의 일단을 조금씩 박지혁 측에 흘리고 있었다.
‘하비천이 뭔가 급하다. 박광혁을 빨리 물러나게 해서, 자신의 아지트로 데려가려는 거야. 그렌바움의 용기로서 박광혁을 시급히 써야 할 일이 생긴 건데..’
하지만 한얼은 자신의 한정된 정보로서는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사실, 이 시점에서 자신의 호기심을 충족하는 것은 별로 의미가 없었다.
하비천과 협정을 맺어, 박승지와 서종철을 적의 공격대상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이 중요했다.
박광혁에게 물리적 위해를 가할 수 없는 대가로, 박지혁의 안전을 약속받는 것이 그녀에게는 더 의미가 컸다.
그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들이었다.
특히, 옆자리에서 조심스럽게 운전하고 있는 어설픈 총각만큼은 반드시 지켜주고 싶었다.
박지혁이 음악을 틀었다.
뱅크의 ‘가질 수 없는 너’라는 음악이 차안에 울려 퍼졌다.
한얼은 그에게 자신의 취직 사실을 알리려다가 멈칫 했다.
가사 내용이 자신이 전할 메시지와 절묘하게 매칭되어 있다는 느낌 때문이었다.
“저기 박지혁씨..”
“어, 말해.”
“어, 오빠...”
“잠깐. 네가 오빠라고 말할 때는 꼭 무슨 의도가 있었는데? 불안하게 뭔데 그래?”
이번에는 한얼이 지혁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그리고 슬며시 침이 마른 입술을 뗐다.
“저 취직했습니다.”
“알바?”
“알바긴 한데.. 취업자리가 좀..”
“어딘데?”
“NW 그룹 송준수 비서로...”
차가 차도에 스키드 마크를 남기면서 급작스럽게 멈췄다.
한얼의 허리가 급격하게 앞으로 갔다가 뒤로 젖혀졌다.
다행히 지혁의 차를 가까이 뒤따르는 차가 없었다.
지혁은 얼굴이 굳은 상태로, 차를 길 어깨에 주차시켰다.
“진짜 이 사람이? 당신 정말 사고 내려고 미쳤어? 중앙선을 침범해서 죽다 살아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심장폭행을 연달아 하냐고? 와, 진짜 죽으려면 혼자 죽지, 왜 나까지 죽이려 하냐고!! 정말 이 세상에 여한이 없는 거야? 이제 세상 뜰 때가 된 거야? 우와 정말..”
“너야말로 정말 너무 한다. 이한얼.”
“음.. 내가 뭘?”
“왜, 나한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송준수 비서로 가는 건데?”
그가 갑자기 한얼 앞에서 고성을 지르며 따졌다.
한얼은 미안하기도 하고, 뿔나기도 한 표정으로 그를 잠자코 바라보았다.
‘실수로 내 정체를 송준수에게 들켜버려서, 그의 제안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한 것뿐인데,
나보고 어쩌라는 것인지... 네가 이해를 좀 해주면 안 되나?’
그녀는 그렇게 자신의 사정을 속으로만 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