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십 년 전만 해도 모용풍에겐 두 가지 예사롭지 않은 신분이 있었다. 하나는 순풍이(順風耳)로 통하는 강호인의 신분이요, 다른 하나는 황서계주(黃書契主)로 통하는 정보 상인의 신분이었다.
순풍이라 하면 이야기책에서 등장하는, 하계에서 울리는 모든 소리를 일일이 듣는다는 매우 한가한 신의 이름을 가리킨다. 그 이름을 별호로 사용한다는 것은 모용풍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양이 그만큼 방대함을 의미했다.
황서계주라 하면 말 그대로 황서계란 조직의 우두머리를 가리킨다. 황서계란 조직이 각종 정보를 팔아 치부하는 극소수 정보통들의 모임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모용풍이 어떻게 거부가 되었는가를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하지만, 모용풍은 그 십 년 사이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 결과, 강호인으로서의 신분은 자의에 의해 숨겨야 했고 정보 상인으로서의 신분은 타의에 의해 박탈당하고 말았으니까. 그러나 억울하지는 않았다. 만일 한 사람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그는 이미 십 년 전에 한 줌의 더러운 황수(黃水)로 녹아 버렸을 터. 순풍이도 좋고 황서계주도 좋지만 모두 이승에 있을 때 얘기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억울하지 않다고 해서 원한마저 잊어버린 것은 아니었다. 모용풍은 강호의 다섯 괴인, 강호오괴(江湖五怪)의 일원. 보통 사람들도 잊기 싫어하는 원한을, 괴(怪) 자 붙는 인간이 어찌 있을 리 있을까.
그래서 모용풍은 십 년이란 긴 세월을 어떤 조직의 뒤를 캐는 데 바쳤다. 생명을 구해 준 은인의 부탁도 있거니와, 그에게서 순풍이와 황서계주의 신분을 앗아 간 무리에게 복수의 일격을 가하기 위함이었다.
뒤를 캐는 것, 다시 말해 정보를 수집하는 것은 모용풍에게 있어서 숨 쉬는 것만큼이나 자연스러운 일. 시간이 흐를수록 그 조직에 대한 다양한 정보가 쌓여 갔다. 그 조직을 보호하던 비밀스러운 안개는 그의 예리한 분석력 앞에서 조금씩 농도를 잃어 가고 있었다. 기름진 식사 한 끼, 깨끗한 옷 한 벌이 아쉬운 궁벽한 생활이 오히려 즐거웠다. 인고가 혹독할수록 복수의 순간이 가져다줄 쾌감도 크리란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모용풍은 스스로를 원망했다.
칠흑처럼 깜깜한 밤, 발길에 걸리는 것이 돌부리인지 나뭇가지인지 살필 경황도 없이 미친놈처럼 달리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던 것이다. 조금만 더 신중했다면, 한 번만 더 생각했다면 이런 일은 당하지 않았을 것을…….
그러나 후회란 아무리 빨라도 늦은 법이다.
“헉, 헉!”
입술이 저절로 벌어지며 가쁜 숨을 내보내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허파가 목젖 바로 아래까지 치고 올라오는 느낌이었다.
객관적으로 평가할 때 강호오괴의 일원인 순풍이 모용풍의 경신공부는 매우 훌륭한 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이미 오래 전 그가 조사하는 조직에 의해 차가운 땅 속에 묻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훌륭한 경신공부라도 단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사흘 내내 전개한다면 심각한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상실하허(上實下虛)의 요결 따위는 이제 머릿속에 떠올릴 기력조차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내디딘 다리가 허방을 밟았다.
“으헉!”
일신의 균형이 기다렸다는 듯이 허물어지며 모용풍은 비탈면을 따라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그렇게 구르기를 이십여 회. 어디가 하늘이고 어디가 땅인지 구분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엉덩이에 뭔가 단단한 물체가 부딪쳤다.
“아구구!”
모용풍은 허리를 뒤로 꺾은 채 비명을 내질렀다. 비탈 아래 있던 바위에 꼬리뼈 부분을 호되게 찧은 것이다. 눈물이 핑 도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측간 출입하려면 당분간 고생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이러고 있다간 그 고생마저도 그리워하게 될 거라는 위기감이 그를 강하게 압박해 왔다.
그러나 몸을 일으키던 모용풍은 또 한 번 중심을 잃으며 엉덩방아를 찧고 말았다. 엉덩이에서 올라오는 고통조차 그를 다시 일으키진 못했다. 지쳐도 너무 지친 것이다.
“빌어먹을! 때려 죽여도 더 이상은 못 뛰겠다!”
모용풍은 그 자리에 벌렁 누워 버렸다. 어제까지 내린 폭우로 땅 위에 고여 있던 흙탕물이 등덜미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 느낌이 차라리 시원했다.
밤하늘을 향한 모용풍의 눈에 서쪽 하늘을 밝히고 있는 둥근 달이 들어왔다. 어쩌면 두 번 다시 대하지 못할 달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밝고 고울 수가 없었다. 달빛 아래로 곱게 드린 나뭇가지는 산중에 보기 드문 잘 빠진 매화가지. 저 가지에 매화가 열리면 아마도 좋은 운치를 느낄 수 있으리라.
‘나도 참 웃긴 놈이지. 이런 상황에 한가하게 풍경이나 감상하고 있다니…….’
하지만 모용풍의 입은 벌써 좋아하는 시구를 흥얼거리고 있다.
“화하일호주(花下一壺酒) 독작무상친(獨酌無相親) 거배요명월(擧盃邀明月)…….”
꽃가지 아래 술 한 병
친한 이 없어 홀로 기울이네.
잔 들어 밝은 달 맞으니…….
다음 구절은 ‘대영성삼인(對影成三人)’, 즉 ‘그림자까지 셋이 되었구나.’였다. 그러나 달빛에 실려 내려온 것은 운치 있는 그림자가 아니라 끔찍한 포효였다.
우오오오!
모용풍은 하도 기가 막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헛! 저것들은 잠도 없나?”
이걸로 다 끝난 건가?
지난달 이맘때였을 것이다.
사당 안에 비축해 놓은 식량이 바닥을 드러내자 모용풍은 추오령에서 이십여 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 시전으로 내려갔다. 사람이 많은 곳에 갈 때면 언제나 그랬듯, 그는 자신을 위장함에 주의를 기울였다. 소매 없는 갓옷에 너구리 가죽으로 만든 모자, 그리고 화소산 산중에서 주운 단궁(短弓)을 어깨에 건 그의 모습은 누가 보아도 영락없는 늙은 사냥꾼이었다. 하물며 등에는 짐승 가죽까지 짊어지고 있었으니…….
이 짐승 가죽은 위장을 위한 소품만이 아니었다. 식량을 구하려면 돈이 필요한 것은 당연할 터인데, 그가 평생에 걸쳐 모은 돈은 황서계가 무너지던 십 년 전 몽땅 날아가 버렸으니 좋든 싫든 짬짬이 틈을 내 사냥꾼 흉내를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날, 시전으로 향한 모용풍의 발걸음은 매우 가벼웠다. 등에 진 짐승 가죽 중에는 부르는 게 값이라는 흰여우의 것이 끼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라면 아무리 못 받아도 은자 열 냥은 족히 받을 수 있을 터. 야인 살림에 은자 열 냥은 문자 그대로 횡재였다.
하지만 그 횡재가 화를 부른 주범이 되었으니, 그래서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들 하는 모양이다. 때마침 그 시전을 지나던 호상(豪商) 하나가 지나가던 모용풍을 불러 흰여우 가죽을 사겠노라 나선 것이다. 얼굴에 잘잘 흐르는 개기름과는 딴판으로 그 호상에겐 시원스러운 면이 있었고, 덕분에 흰여우 가죽은 은자 열일곱 냥이란 기대 이상의 값으로 팔렸으니, 여기까지는 모용풍도 희희낙락.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문제는 은자를 들고 돌아서는 모용풍을 향해 호상이 던진 한마디에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소?
모용풍은 움찔 놀라며 고개를 홰홰 내저었다.
-소인처럼 산중에만 사는 천한 사냥꾼이 어찌 대인 같은 귀인을 만난 적이 있겠습니까?
-그렇소? 왠지 낯이 익어서…….
-그러실 겁니다. 흔한 얼굴이란 얘기는 소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으니까요.
켕기는 구석이 있는 모용풍으로선 황급히 그 자리를 피할 수밖에 없었다. 그자의 착각일 거야. 설마 별일이야 있겠는가? 하지만 추오령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호상의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거처인 관제묘의 문을 여는 순간, 모용풍은 자신이 자칫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실수를 저질렀음을 깨달았다. 그 또한 호상을 대하는 게 처음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그 호상의 정체는 과거 황서계의 일원이던 제남(濟南)의 가 대인이 데리고 다니던 종복. 가 대인은 계와 함께 횡액을 당했으니, 그 재산을 빼돌려 호상 노릇을 하고 다니는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놈이 남의 재산을 빼돌렸건, 아니면 자수성가를 했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놈이 자신을 알아봤을지도 모른다는 점.
잘못 본 것으로 치부하고 잊어버릴 가능성도 없지는 않았지만, 그러기엔 모용풍이 처한 환경은 너무 절박했다. 그는 강력한 적으로부터 피신 중인 도망자였고, 신분이 들통 난 도망자의 최후는 뻔했다. 가능성 따위를 따지고 앉았을 상황이 아닌 것이다.
놈을 죽여야 한다!
모용풍은 엉덩이 한번 붙이지도 못하고 그길로 시전으로 달려 내려갔다. 그러나 놈의 종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알고 지내던 상인들에게 물어도 소용없었다. 놈과 같은 호상이 하루에도 수백 명씩 오가는 번화한 시전이었으니까.
거처로 돌아온 모용풍은 갈등에 휩싸였다. 한시바삐 떠야 한다는 생각과 아직 할 일이 남았다는 생각이 그의 머릿속에서 어지럽게 교차했다.
만일 기다림의 결실이 그리 머지않았다는 은공(恩公)의 전언을 떠올리지 않았다면, 모용풍의 신중한 성격으로 미루어 필경 그곳을 떠나는 쪽으로 결정했을 것이다. 앞서 밝혔듯 그가 처한 환경은 그만큼 절박했기 때문이다.
지금 떠나면 은공과 언제 다시 연락이 닿을지도 알 수 없는 일이 아닌가! 조금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자!
마침내 모용풍은 놈이 자신과의 조우를 잊는다는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기로 작정했다. 매 순간마다 치밀어 오르는 불길함을 애써 억누르면서.
빌어먹을! 불길한 예감은 왜 항상 들어맞는 것일까?
우오오오!
포효가 또 한 번 들려왔다. 애써 생각하지 않아도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울렸음을 알게 해 주는 생생한 여운.
이어, 모용풍이 구르던 비탈을 따라 붉은 인영들이 훌훌 떨어져 내렸다. 앞서 내려오는 셋은 붉은 장포에 늑대 탈을, 뒤따라 내려오는 예닐곱은 늑대 탈 대신 붉은 복면을 쓰고 있었다.
앞선 셋 중에서도 가장 선두에 선 자는 키가 매우 작고 등이 툭 튀어나와 있었다. 그가 뒤를 돌아보며 고갯짓을 한 번 보내니, 일곱 명의 적포인들은 신속한 몸놀림으로 모용풍의 퇴로를 차단했다.
적이든 친구든 누워서 맞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모용풍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잠깐 취한 휴식일망정 도움은 되었는지 아까와는 달리 몸뚱이가 제법 움직여 주고 있었다.
선두에 선 키 작은 늑대 탈이 모용풍을 향해 말했다.
“기껏 달아난 곳이 겨우 이곳이오? 어찌 된 일인지 이 화소산 주위에서 벗어나지를 못하는구려. 근방에 금덩이라도 묻어 놨소?”
금덩이보다 더 귀한 거다, 이 못난이 땅딸보야!
모용풍은 속으로 이렇게 외쳤다. 키 작은 늑대 탈은 일 보가량 뒤쳐져 있던 다른 두 늑대 탈을 돌아보며 득의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며칠 동안 숨바꼭질하느라 수고들 했소. 이 밤이 가기 전에 어디 가서 거하게 한잔합시다.”
모용풍은 안중에도 없는 듯한 말투였다. 이 말이 모용풍의 자존심을 긁었다. 그가 단지 괴짜란 이유만으로 강호오괴에 뽑힌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동파로(東巴勞), 오뉴월 복중에 감기라도 걸린 거냐? 괴상한 탈바가지는 왜 뒤집어쓰고 나온 거냐?”
모용풍이 이름을 부르자 키 작은 늑대 탈의 어깨가 잠깐 움찔거렸다. 하지만 그는 곧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으하하! 과연 순풍이의 식견은 남다른 데가 있군! 내 정체는 언제 알았소?”
“처음 볼 때 알았지. 다음부터 변장하려거든 등에 달린 혹이나 떼고 하여라.”
키 작은 늑대 탈, 동파로는 자신의 허물을 비꼬는 모용풍의 말에도 화를 내지 않았다.
“모용 선생의 가르침, 명심하리다. 기왕 감탄한 것, 뒤에 계신 두 분의 정체도 한 번 맞춰 보시구려.”
“흥! 저까짓 놈들의 정체가 뭐 대단하다고!”
모용풍은 우선 좌측에 선 마르고 키 큰 늑대 탈의 오른쪽 허리을 가리켰다.
“저 괴상하게 생긴 왜도(倭刀)를 보고도 모르면 순풍이란 이름을 떼어 버려야겠지. 이 년 전인가 남해 부근에 왜인 무사 한 사람이 나타나 몽도류(夢刀流)인가 뭐가 하는 좌수도법(左手刀法)으로 소동을 일으킨 적이 있었다. 관에 의해 체포되었다고 하는데, 네놈들의 힘이라면 압송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빼돌릴 수 있었겠지. 저놈은 바로 그 왜인 무사, 이시이 타로오[石井太郞]다!”
“오! 정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소! 이분의 성명을 아는 사람은 관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데 이토록 정확히 맞추다니!”
동파로는 손뼉을 치며 찬사를 늘어놓았다. 모용풍은 이어 우측에 선 중키에 넓은 어깨를 지닌 늑대 탈을 가리켰다.
“너는, 네놈은…….”
모용풍이 더듬거리자 동파로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르겠소? 이시이 공보다 훨씬 널리 알려진 분이건만…….”
“모르긴 왜 몰라! 입에 담기가 더러워 이러는 거지! 계집 엉덩이만 봐도 침을 질질 흘리는 음불양(淫不讓) 유붕(兪棚)이 아니면 누구겠느냐! 저 닭 모가지만 보면 누구나 알걸.”
모용풍이 발끈 성내며 쏘아붙였다.
“이 늙은이가 감히……!”
유붕이라고 지목 당한 자가 늑대 탈의 눈구멍으로 독살스러운 빛을 뿜어내며 한 발짝 앞으로 나섰다. 아닌 게 아니라 그의 목은 유달리 길고 가늘었다. 마치 닭 모가지처럼.
“아우는 잠시만 기다리게. 우리는 모용 선생께 받아야 할 물건이 있으니까.”
손을 들어 유붕을 제지한 동파로는 모용풍을 향해 물었다.
“책은 어디 감췄소?”
모용풍은 코웃음을 치며 시치미를 뗐다.
“책을 찾으려면 책방에 갈 것이지 조용히 사는 이 늙은이는 왜 못살게 구는 거냐?”
“고생을 자초하기엔 너무 연로하지 않으셨소? 비세록(秘世錄)만 넘겨주면 고통 없이 끝내 드리리다.”
모용풍은 키득거렸다.
“으흐흐! 네놈들이 비세록 무서운 줄은 아는구나. 하기야 무섭기도 하겠지. 소문나면 오장이 뒤집힐 놈들이 여럿 있을 테니까.”
“비세록은 어디 있소?”
동파로의 목소리에서 살기가 진득이 묻어나기 시작했다. 모용풍은 귀찮다는 얼굴로 말했다.
“괜한 수고 말고 덤비려면 어서 덤비려무나. 하도 뛰었더니 이젠 입술 놀리기도 힘겹구나.”
조금 전 동파로에 의해 가로막혔던 유붕이 다시 앞으로 나오며 음흉한 목소리로 을러댔다.
“냄새나는 늙은이가 아가리만 살았구나! 시체라도 온전히 남기고 싶거든 비세록이 있는 곳을 빨리 실토해라!”
모용풍은 불쾌했다. 그것도 엄청나게 불쾌했다. 사람 새끼 같지도 않은 놈에게 저따위 소리를 듣다니! 강간, 간살, 심지어는 시간(屍姦)까지, 음탕한 짓이면 무엇도 사양하지 않는다는 음불양이란 별호는 유붕에 대한 세상의 시각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망할 자식! 알고 싶은 게 있으면 네 어미 사타구니에다 대고 물어보지 그러냐?”
유붕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아무리 흉악한 놈도 제 어미를 욕하는 것만큼은 견디기 힘든 모양이다.
“동 형님, 소제를 말리지 마시오.”
유붕은 쌍장을 가슴 앞으로 치켜든 채 모용풍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동파로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말로 해결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것 같았다.
살기등등한 눈빛으로 자신과의 거리를 좁혀 오는 유붕을 바라보면서도, 모용풍은 한가하게 다른 생각을 떠올리고 있었다.
잔왜타(殘矮駝) 동파로는 사사로운 시비 끝에 무당파의 이 대 제자 둘을 죽인 일로 오래전 모습을 감춘 자였다. 유붕 또한 백련교(白蓮敎)의 여신도 여럿을 간살한 일로 남패 무양문의 추격을 받고 관외로 달아난 자였다. 동영에서 건너온 이시이 타로오도 중원의 강호에 적응하기 힘든 처지임은 마찬가지. 그렇다면……?
‘저들이 속한 조직 자체가 중원 강호로부터 배척받은 자들로 이루어진 것은 아닐까?’
모용풍이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 유붕은 그의 목전까지 당도해 있었다.
“아가리를 함부로 놀린 대가가 무엇인지 똑똑히 깨닫게 해 주마!”
독기 품은 외침과 함께 유붕의 쌍장이 허공을 갈랐다. 쓰와왓, 하는 파공성이 울리며 음산한 경기(勁氣)가 모용풍의 전면으로 밀어닥쳤다. 수많은 악행을 저지르고도 그를 살아남게 만들어 준 음풍투심장(陰風透心掌)이었다.
유붕 같은 놈에게 질까 보냐!
모용풍은 이를 악물고 운단비설(雲端飛雪)의 초식으로 쌍장을 휘둘렀다. 그러나 장심에 모인 진력은 평소의 절반도 못 미치는 빈약한 것이었다.
펑!
모용풍의 상체가 고꾸라질 것처럼 앞으로 휘청거렸다. 유붕의 장력에 스며 있던 괴이한 흡인력이 단 한 수만에 그의 중심을 흔들어 놓은 것이다.
모용풍이 크게 놀라 상체를 바로 세우는데, 유붕의 좌장이 때를 놓치지 않고 날쌔게 날아들었다. 왼쪽 어깻죽지 위에 떨어진 아찔한 충격…….
“으윽!”
모용풍은 왼쪽 어깨를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그런 그를 유붕이 가만 놔둘 리 없었다.
“아직 멀었다!”
호곡성처럼 기분 나쁜 파공성이 쉴 새 없이 울리며, 음풍투심장의 음한지기(陰寒之氣)가 모용풍을 정신없이 몰아치기 시작했다. 모용풍은 멀쩡한 오른손을 어지러이 휘둘러 그것들을 막아 보려 했지만 일곱 초를 넘기지 못하고 가슴과 배에 다시 이 장을 허용하고 말았다.
“우엑!”
입에서 뿜어진 핏물이 모용풍의 수염을 붉게 물들였다. 서너 걸음 물러서던 그의 몸은 더 이상 지탱하지 못하고 엉거주춤 주저앉았다.
“죽어라, 늙은이!”
유붕이 모용풍을 향해 쌍장을 번쩍 치켜 올리는데, 뒷전에 있던 동파로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아우, 아직 죽여선 안 되네!”
막 떨어지려던 유붕의 쌍장이 우뚝 멈췄고, 모용풍의 몸뚱이는 그대로 허물어졌다. 등은 하늘로 배는 바닥으로 각각 향하니, 공교롭게도 얼굴이 처박힌 곳엔 흙탕물이 고여 있었다. 가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코와 입으로 흙물이 밀려들어오니 얼마나 괴로울까?
그런 모용풍을 내려다보던 유붕의 눈에 잔인한 기운이 떠올랐다. 이어진 것은 승자의 아량이라곤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야비한 웃음소리였다.
“크흐흐! 맞소, 이렇게 편하게 죽는다면 섭섭한 일이지.”
유붕은 모용풍의 뒤통수를 발로 밟아 흙탕물 속으로 더 깊숙이 밀어 넣었다. 모용풍의 얼굴 옆으로 더러운 거품이 부글부글 피어올랐지만, 유붕은 오히려 그것을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어허! 손 속을 삼가라니까…….”
“흐흐! 이 아우에게 맡겨 주시오. 명줄은 형님이 원하는 시간까지 멀쩡히 붙여 놓을 테니까.”
유붕은 모용풍의 뒷덜미를 잡아 흙탕물에서 끄집어 냈다. 진흙을 얼굴에 처바른 모용풍은 이미 의식을 잃은 뒤였다. 신체 내부에 침투한 음풍투심장의 음한지기가 어렵사리 지켜오던 노강호(老江湖)의 마지막 자존심마저 앗아 간 것이다. 급히 요상하지 않으면 그대로 절명할 수도 있는 위독한 상태였지만, 뼛속까지 흉악한 유붕은 무자비했다.
“제까짓 게 이래도 안 깨어나고 배기겠소?”
모용풍을 강제로 일으켜 앉힌 유붕은 품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그것은 끝이 괴이하게 휘어진 한 자루 단도였다. 날 부분이 톱니처럼 생긴 것이 보기만 해도 섬뜩한 느낌을 주었다.
“뭘 하려는 건가?”
동파로가 물었지만 유붕은 대답 대신 단도를 들어 모용풍의 왼쪽 어깨를 내리찍는 것이었다.
“윽!”
육체에 가해진 지독한 고통이 사라진 의식을 되돌아오게 만들었다. 모용풍은 눈을 부릅뜨고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흐흐! 아가리를 함부로 놀린 대가가 무엇인지 알겠느냐?”
유붕은 모용풍의 귓가에 대고 음침하게 속삭이며 단도를 쥔 오른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루하리만치 천천히.
쯔꺽! 끄드득!
근육과 뼈가 함께 잘리는 끔찍한 음향이 모용풍의 어깨 어림에서 울려 나왔다. 콸콸 흘러나오는 핏물로 인해 모용풍은 순식간에 혈인(血人)이 되어 버렸다. 끝내 참을 수 없었던 것일까? 모용풍은 밤하늘을 향해 처절한 비명을 내질렀다.
“으아악!”
유붕의 잔인한 심성은 그 더러운 음행(淫行)만큼이나 유명한 것이었다. 산 사람의 사지를 톱질하는 일쯤은 이처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해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강호의 네 마인, 강호사마(江湖四魔)의 말석이나마 차지할 수 있었던 것도 이런 잔인함이 다른 삼마(三魔)에 못지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무공만으로 따진다면 유붕 따위가 어찌 감히 패(覇), 독(毒), 철(鐵)의 삼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는가!
세인이 유붕을 강호사마에 포함시킨 데에는 흑도를 경원하려는 심리가 어느 정도 작용했으니, 다른 삼마들로선 무척 억울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정말 독한 사람이군.”
동파로가 이시이 타로오를 돌아보며 말했다.
이시이도 같은 생각이었다. 잔인하기로 유명한 동영에서조차 저런 끔찍한 만행은 보기 힘든 일이었다. 자르려면 빨리 자를 것이지…….
‘사귀어 도움 될 것이 없는 축생이로다.’
이시이는 내심 유붕을 욕하며 시선을 위로 돌렸다. 생사람을 톱질하는 작업을 지켜보느니 차라리 밤하늘이나 바라보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폭풍 같은 반전이 시작된 것은 바로 그때였다.
“……!”
이시이는 눈을 끔뻑거렸다. 밤하늘에 떠 있는 둥근 달 속으로 검은 점 하나가 떠오른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달 속의 항아(姮娥)가 내려올 턱은 없으니, 그들이 내려온 비탈 위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달을 등진 탓에 그것이 무엇인지는 한눈에 파악할 수 없었다.
“저게……?”
늑대 탈 밑에서 서투른 한어가 튀어나왔다.
“왜 그러시오?”
동파로가 의아해하며 이시이의 시선이 향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순간, 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둥근 달을 순식간에 가려 버리며 그의 면전으로 무서운 속도로 확대되어 온 그림자 하나를 발견한 것이다. 그것은 분명 인간의 그림자였다.
위험하다!
아마도 본능이었을 것이다. 동파로는 자신도 모르게 경신술을 발휘해 신형을 뒤로 물렸다.
그러나 이시이는 달랐다. 수직 높이 이십여 장을 한 번에 뛰어내리는 인간이 존재한다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싸워 보지도 않고 피한다는 것은 수치라는 동영의 무사도가 뿌리 깊이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텁!
떨어져 내리던 기세에 비교하면 너무도 경미한 소리와 함께 이시이의 일 장 앞에 착지한 그림자.
늑대 탈의 눈구멍 안에서 가늘게 접힌 이시이의 눈은 그 그림자의 전신을 아래에서 위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검은 가죽신, 거친 마의, 그리고 암녹색 두건, 그리고 두건 상단에 박혀 있는 한 쌍의 냉정한 눈…….
냉정한 눈이 스윽 움직이기 시작했다. 장내를 돌아보던 그 눈이 고정된 곳은 유붕의 잔인한 손 속에 의해 피범벅이 되어 버린 모용풍이었다. 순간, 그 눈에서 소름 끼치는 한광(寒光)이 뿜어 나왔다.
그 한광을 대한 이시이는 등줄기를 따라 싸늘한 전율이 달려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어린 시절의 언제였던가. 다다미방에 앉아 흰 마포로 도를 닦으시던 아버지의 모습. 그 손끝에서 점점이 묻어나던 장도(長刀)의 서늘한 빛. 그것은 다름 아닌 지극히 정제된 살기였다.
“위험……!”
동파로를 움직인 것과 동일한 본능이 이시이의 무사도를 집어삼켰다. 이시이는 뭐라 경호성을 발하며 다급히 뒷걸음질을 쳤다. 그 순간, 암녹색 두건이 움직였다. 한광을 뿜어내는 냉정한 눈이 이시이의 시야를 가득 메워 왔다.
이시이는 좌수발도술(左手拔刀術)의 달인이었다. 동영 이시이 가문의 비전인 몽도류는 처음 장도를 뽑는 한 호흡 안에서 승부를 결정지어 버리는 쾌속무비한 수법이었다. 그러나 한 쌍의 냉정한 눈은 몽도류의 쾌속함을 무참히 짓밟았다.
언제 뽑힌 것일까? 이시이의 좌수가 장도의 손잡이에 이르기도 전에 허공에서 갑자기 솟아난 한 자루 철검은 그의 미간을 여지없이 꿰뚫어 버렸다.
“끄으…….”
한숨 같은 단말마와 함께 이시이의 눈동자가 하얗게 뒤집어졌다. 어찌 이렇게 빠를 수가……! 탄성을 토해 내는 영혼은 이미 갈라진 미간 사이로 새어 나간 뒤였지만, 장도를 휘두르려는 의지만큼은 아직 육신을 떠나지 않았던지, 몽도류의 일 도가 허공을 휙 갈랐다. 화려하지만 헛된 일 도였다.
“적이다!”
“조심해라!”
이제야 상황을 파악한 사람들이 허둥거리며 대항할 준비를 갖췄지만, 냉정한 눈과 한 자루 철검은 단 한순간도 기다려 주지 않았다.
우르릉!
돌연 은은한 뇌성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그와 함께 이시이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던 적포인 하나가 병기와 함께 두 조각으로 잘려 나갔다. 이것을 시작으로 그 일대는 한 자루 철검이 그려내는 환상 같은 검영에 갇혀 버렸다.
진동하는 뇌성 속에서 번갯불처럼 번뜩이는 검광!
정해진 식도 그리고 형도 없는 것 같았다. 마구잡이로 휘둘러지는 철검. 하지만 피하기엔 너무 빨랐고 막기엔 너무 강했다. 복면을 쓰고 있던 적포인 일곱은 단 한 초식도 저항하지 못한 채 철검 아래 쓰러져 갔다.
‘뭔가 이상하다!’
부하들의 죽음을 멀뚱멀뚱 지켜보기만 한다면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로 볼 때 동파로는 우두머리가 될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적어도 부하의 죽음을 보고 등을 돌리는 비겁한 위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명절기인 유명잔백수(幽冥殘魄手)로서 암녹색 두건을 쓴 괴인의 측면을 공격해 들어가는 동파로는 형용하기 힘든 기묘한 기분에 휩싸여 있었다. 그 기분은 두려움이나 공포와는 약간 성질이 달랐다. 물론 저자의 철검은 무서웠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의 한 가지 의문이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것이다.
아니, 이제는 의문이라고 할 수 없었다. 해답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의문과 해답 사이를 잇는 논리에 심각한 결함이 있다는 점이다.
“유명잔백수인가?”
암녹색 두건의 괴인은 철검을 옆구리 쪽으로 비스듬히 당겼다.
그르릉!
예의 뇌성이 다시 한 번 울리며, 동파로가 쳐 낸 유명잔백수의 경력 속으로 한 줄기 괴이한 기운이 스며들었다. 거센 파도가 암초에 부딪쳐 흩어지듯, 유명잔백수의 경력은 괴인의 몸 주위에서 덧없이 사그라졌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갔건만 동파로는 분노나 허탈을 느끼지 못했다.
“으아아압!”
발악 같은 기합을 외치며 재차 괴인에게 달려들 때에도 동파로는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 바로 저 소리였어! 부하들을 쓰러뜨리던 괴인의 철검에서 울려 나오던 소리, 아득히 멀리서 울리는 우렛소리 같은 바로 그 소리가 모든 혼란의 주범이었다. 의문과 해답 그리고 둘 사이에 결여된 논리!
설마 ‘그’란 말인가?
잔왜타 동파로는 무당파를 농락할 만큼 고강한 무공을 지니고 있었다. 비록 엉뚱한 생각에 빠져 있다고는 해도 반사적으로 전개한 그의 유명잔백수는 결코 가벼운 것일 리 없었다.
그러나 저 괴인의 정체가 정말로 ‘그’라면 다 부질없는 짓이리라.
괴인의 가슴에 유명잔백수의 경력이 막 적중되려는 순간, 괴인의 신형이 뿌옇게 흐려졌다. 안개가 흩어지는 듯한 신비막측한 움직임이었다. 문득 동파로는 오른팔이 허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이어 밀어닥친, 마치 얼음물 속에 팔을 담근 듯한 섬뜩한 느낌!
뭔가가 붉은 꼬리를 매달고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그것이 자신의 오른팔이란 것을 알아차린 순간, 은은한 뇌성이 또 한 번 울렸다. 이젠 아무도 부정할 수 없었다.
바로 ‘그’였다!
“검뢰대구식(劍雷大九式)! 당신이 왜……?”
우릉!
늑대 탈 속에 들어 있던 동파로의 머리통은 물음이 끝나기를 기다려 주지 않고 오른팔을 따라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동파로의 두 눈은 한껏 부릅떠 있었다. 뇌성을 동반한 번갯불 같은 검광. 천하에 그런 검법을 쓰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이것은 이미 알고 있던 해답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이 끝난 뒤에도 논리는 여전히 결여되어 있었다.
‘그’가 왜 우리를 벤단 말인가?
모용풍을 추격하던 십 인 중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유붕은 아직까지도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거, 검뢰대구식이라고?”
동파로의 마지막 절규가 유붕의 귓가를 왱왱 맴돌았다. 그는 자신의 몸뚱이가 심하게 떨리고 있다는 사실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이것은 악몽이었다. 검뢰대구식이란 검법은 한 사람의 이름과 직결되었다. 곤륜지회의 오대고수 이후, 천하제일검으로 공인 받은 절세 검수!
“사, 삼비영?”
안개처럼 모호하던 덩어리가 유붕으로부터 이 장 떨어진 곳에서 인간의 형상으로 스르르 뭉쳤다. 암녹색 두건을 쓴 괴인이었다.
“저, 정녕 삼비영님이시오?”
유붕의 떨리는 물음에 괴인은 왼손을 머리 뒤로 돌려 두건의 한쪽 끝을 잡아당겼다. 두건이 풀리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표정을 담은 얼굴이 환한 달빛 아래 드러났다. 구레나룻이 위맹하게 뻗친 호목(虎目)의 중년인. 바로 검왕 연벽제였다.
연벽제의 얼굴이 드러나자 유붕의 떨림은 더 이상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사, 삼비영님, 우리가 대체 무, 무슨 죄를 저질렀기에…….”
마흔아홉 개의 숫자로 구별되는 비영 중에서 동파로는 서른두 번째, 유붕은 서른다섯 번째 그리고 이시이 타로오는 서른여섯 번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연벽제는 이들의 생사여탈권을 쥔 삼비영의 신분. 그가 다짜고짜 살수를 전개한 이유를 유붕은 그 신분 차에서 찾으려 한 것이다.
연벽제는 아무 대답 없이 유붕의 앞에 주저앉은 모용풍을 바라보았다. 모용풍의 왼팔은 이미 뼈까지 잘려 건들거리고 있었다. 고통을 견디지 못한 듯 눈동자가 완전히 풀린 모습이 실로 가련해 보였다.
“그를 놔주어라.”
연벽제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유붕의 눈동자 속으로 한 줄기 교활한 빛이 떠올랐다. 연벽제가 살수를 쓴 이유가 비영의 서열과는 무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올린 것이다.
“모용풍을 살리고자 하시오?”
유붕이 물었다. 연벽제는 물음에 대한 대답 대신 앞서의 말을 반복했다.
“그를 놔주어라.”
유붕은 이제 확연히 알 수 있었다. 연벽제의 행동이 모용풍과 깊은 관련이 있다는 사실을. 그는 재빨리 모용풍을 당겨 자신의 몸을 가렸다.
“연벽제, 이 늙은이를 살리고 싶다면 허튼 수작 부리지 않는 게 좋을 것이다.”
연벽제의 검뢰대구식에 맞선다는 것은 대다수 무인들에게 있어서 자살행위나 다름없었다. 유붕도 그 범주를 벗어날 수 없었다. 지금 그에게 있어서 유일한 생명줄은 바로 모용풍. 모용풍을 잘 이용하면 이 위기를 벗어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유일한 살길인 것이다.
“더러운 놈!”
연벽제의 눈빛이 칼날을 품은 듯 날카롭게 변했다. 유붕은 화들짝 놀라며 들고 있던 기형 단도를 모용풍의 턱 밑에 바짝 갖다 댔다.
“소, 손가락 하나라도 까딱 하는 날엔 이 늙은이의 목숨은 날아갈 줄 알아라!”
그러나 유붕의 이 공갈(恐喝)은 곧 공갈(空喝)이 되어 버렸다. 연벽제는 주저 없이 앞으로 내디뎠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것은 오히려 유붕 쪽이었던 것이다.
유붕이 심성이 여려 모용풍의 목을 찌르지 못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 장이란 공간을 순식간에 없애며 일직선으로 쏘아 온 저 빛살 같은 검광이라니!
“어?”
유붕의 팔에서 떨어진 뭔가가 뒤로 휙 날아갔다. 그것이 기형 단도를 쥐고 있던 자신의 손임을 알아차렸을 때엔, 또 한 줄기의 시퍼런 검광이 유붕의 망막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상하다? 내 앞엔 분명 늙은이가 있는데?
연벽제의 검도가 검강(劍?)을 휘어 쳐낼 수 있는 지고무상한 경지에 올라 있음을 유붕이 어찌 짐작했겠는가!
우르릉!
우렁찬 뇌성이 그 일대의 대지를 짓눌렀지만 유붕은 그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소용돌이 같은 검기에 휘말려 수 장 상공으로 떠오른 머리통은 어떠한 소리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다.
머리통을 잃어버린 유붕의 몸은 몸뚱이는 한두 번 건들거리다가 뒤로 쓰러졌고, 기댈 데를 잃어 그 자리에 주저앉던 모용풍의 몸은 하나의 굳센 팔뚝에 안겼다.
후드득!
유붕이 쓰고 있던 늑대 탈이 수십 개의 목편들로 화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