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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선계-27화 (27/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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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서의 서쪽 끝에 위치한 옥계(玉溪)는 당나라 이후 본격적으로 발달한 비단길이 만들어 낸 많은 상업 도시 중 하나였다. 기록에 의하면 한 해 오만 마리의 말이나 낙타가 비단을 싣고 옥계를 거쳐 서역으로 들어갔다고 하니, 이로 미루어 비단길의 의미를 약간 달리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단순히 비단을 수송하는 길에서 한발 더 나아가 마타(馬駝)에 실린 비단을 연결하면 그만한 길이의 장도를 충분히 놓을 수 있는 길. 그래서 비단길인 것이다.

옥계에서 동북쪽으로 삼백여 리 떨어진 곳에는 도요산(陶窯山)이라고 불리는 자그마한 산이 있다. 적백관(積白關)이라고도 불리는 이 도요산에서는 예부터 도자기를 굽기에 적합한 양질의 흙이 많이 생산되었다. 물과 반죽하면 은은한 백색을 띠는 고령토는 도요산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희귀한 토종이었다.

요업의 연원은 춘추전국시대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민간에 도기(陶器) 및 자기(磁器)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은 후당에서 송대까지. 그 이전의 요업은 전문지식의 부재와 대량생산 시설의 미비로 생산 비용이 매우 높아서, 생활용품이라기보다는 감상과 소장을 목적으로 한 귀족 문화의 일부로 해석하는 것이 옳았다. 이러한 생활 자기는 명대에 들어 더욱 활발히 보급되게 되었다.

도요산 아래 형성된 도요촌(陶窯村)은 영청(影靑 : 靑白瓷)을 생산하는 경덕진(景德鎭)이나 천목(天目 : 술잔 또는 찻잔)을 생산하는 길주요(吉州窯), 용천요(龍泉窯) 등과 같은 관요(官窯 : 국가가 직접 관리하는 도자기 공장)는 아니지만, 수요가 많은 질그릇이나 항아리들을 생산해 짭짤한 재미를 보는 마을이었다. 생산된 물품들은 가까운 탕구진(糖丘津)으로 운반, 수로를 통해 황하 연안의 크고 작은 도시들로 공급되는 것이다.

“짐이 시장하구나! 대장군, 빨리 먹을 것을 대령해라!”

의젓함을 가장하려 애쓰지만 치기를 감출 수 없는 음성이었다. 열두어 살쯤 됐을까? 나이에 비하면 제법 큰 몸집을 지닌 소년이 한껏 거드름을 피우며 다시 말했다.

“어허! 이것 봐라? 빨리 빨리 못 할까!”

소년은 재촉하듯 바닥을 탕탕 두드렸다. 소년의 손바닥 아래 둔탁한 소리를 내는 것은 은행나무의 심재로 짠 결 좋은 목판. 지금 그 목판은 낡은 가마의 지붕 역할을 하고 있었다. 진흙으로 만든 가마의 한쪽 벽면은 풍상을 견디지 못한 듯 허물어져 있었다. 허물어진 벽면을 통해 보이는 것은 짚단이나 석탄, 장작 등의 탄재(炭材)들. 오래돼 못쓰게 된 가마에 지붕을 새로 올려 탄재고로 사용하는 것 같았다.

“여기 대령했사옵나이다.”

아래에 있던 비쩍 마른 소년 하나가 가마 지붕을 향해 조그만 나무판자를 받쳐 올렸다. 얼굴에 핀 마른버짐과 덕지덕지 기운 의복이 그 소년의 모습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있었다. 가마 지붕을 향해 받쳐 든 판자 위에 놓은 것은 꼭지가 노랗게 익은 참외 몇 알인데.

“히히! 맛있겠다. 황비도 먹으시오.”

가마 위의 몸집 큰 소년이 옆에 앉은 소녀에게 참외를 한 알 내밀었다. 벽촌의 아이답게 행색이 남루하긴 했지만 큼직한 눈과 마늘쪽 같은 콧날이 제법 귀여운 느낌을 주는 소녀였다.

소녀는 참외를 받아 입으로 가져가다가 문득 시선을 돌리며 손길을 멈췄다. 나무판자를 받친 채 벌 받는 아이처럼 서 있는 비쩍 마른 소년에게서 부러움의 기색을 읽은 것이다.

“대장군도 먹어요.”

여자애가 입으로 가져가던 참외를 비쩍 마른 소년에게 내밀었다. 소년은 헤헤 웃으며 판자를 내려놓은 뒤, 소녀가 내민 참외를 껍질째 덥석 깨물었다.

“염병할 자식, 황제보다 먼저 먹다니!”

가마 위에 앉아 있던 몸집 큰 소년은 마치 역적이라도 대하는 듯한 눈길로 비쩍 마른 차림의 소년을 한차례 흘겨보고는, 뒤질세라 급히 참외를 입으로 가져갔다. 소녀 또한 참외를 집어 옷에 문지른 뒤, 한 입 베어 물었다. 먹을 것이 생긴 아이들은 하던 놀이도 잊은 채 참외 먹기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참외가 참 달다. 그렇지?”

대장군은 무엄하게도 황비에게 반말을 지껄이고, 참외를 오물거리던 황비는 체통도 없이, ‘응.’ 하며 배시시 웃는다. 그 때 묻지 않은 천진함.

아이들이 놀고 있는 가마에서 아래쪽으로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는 수령이 몇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커다란 정자나무가 한 그루 서 있었다. 우산처럼 드리운 나무그늘 아래엔 두 명의 사내가 앉아 있었다. 아마도 한낮의 폭염을 피하려는 듯. 파랗게 깎은 머리와 가슴 아래로 드린 염주는 그들이 부도(浮屠)의 신분임을 말해 주었다.

“망아(忘我), 무엇을 보고 있는가?”

두 명의 화상 중 붉은 가사를 걸친 노승이 자애로운 목소리로 물었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주름살로 뒤덮인 나무껍질 같은 메마른 얼굴. 몇 올 남지 않은 흰 눈썹과 저승꽃이 피어난 피부는 그 노승의 살아온 날 수가 지극히 오래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두껍게 늘어진 눈꺼풀 아래 자리 잡은 심유한 눈동자는 옆에 앉아 있는 승려를 향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노는 것을 보고 있었습니다.”

노승의 옆에 앉은 승려가 가마에 고정했던 시선을 거두며 대답했다. 나이는 환갑 정도 되었을까? 가사도 없이 칙칙한 잿빛 승복 차림인 승려의 얼굴은 대단히 추했다. 툭 튀어나온 뒤통수와 초승달처럼 휘어진 턱은 마치 광대가 사람들을 웃기기 위해 일부러 붙인 양 희극적으로만 보였다. 하지만 누구도 감히 그 승려의 면전에서는 비웃음을 짓지 못할 것이다. 오른뺨에서 목덜미까지 이어진 끔직한 화상자국이 그 승려의 인상을 흉신악살(凶神惡煞)처럼 험악하게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근육과 신경이 모두 죽어 버린 듯, 입을 벌려 말을 할 때마다 온전한 좌반면(左半面)만 요란스레 꿈틀거리는데, 그것이 더욱 두려운 느낌을 주었다.

노승은 이가 빠져 합죽해진 입가에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망아라 불린 추면승(醜面僧)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 황제 놀이가 보기에 재밌던가?”

추면승 망아는 노승을 향해 공손히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가 잠시 망령된 생각에 빠졌습니다. 죄송합니다, 사부님.”

만일 누군가 이들의 대화를 엿들었다면 이들의 정체가 평범한 탁발승에 그치지 않음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십여 장 떨어진 곳에 있는 아이들의 노는 소리를 낱낱이 듣는다는 것은 결코 평범한 탁발승이 흉내 낼 수 없는 재주이기 때문이다.

붉은 가사의 노승은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망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목에 걸린 염주를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사바에서의 부귀 권세란 모두 저 아이들의 놀이와 같은 것이지. 부유하면 부유할수록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마음이 어지러워지고, 높이 되면 높이 될수록 권력의 욕망에 눈이 어두워지기 마련이라네. 망아, 내가 자네에게 한 가지 얘기를 해 주겠네.”

“하교해 주십시오.”

“어느 날 한 청년이 석가를 찾아왔네. ‘제게 한 가지 고민이 있습니다.’, ‘어디 말해 보게.’ 청년은 말했네. ‘밤에 잠을 편히 잘 수 없습니다.’ 석가께서 물으셨지. ‘몸에 병이 있는가?’, ‘아닙니다.’, ‘그럼 여인을 그리워하는가.’ ‘그것도 아닙니다. 저는 이미 결혼했으며 아내를 누구보다도 사랑하고 있습니다.’, ‘그럼 생활이 어려운가 보군.’, 청년은 당치도 않다는 듯 큰 소리로 대답했네. ‘소생은 이 지방에서 제일가는 부자입니다! 소생이 소유한 땅은 한 사람이 열흘을 걸어도 돌아보지 못할 만큼 광대하고, 소생이 거느린 하인은 스무 개의 큰 가마로 밥을 지어도 모자를 정도로 많습니다.’ 석가께선 빙긋 웃으셨네. ‘건강하고 아내를 사랑하며 재산도 많은데 잠을 편히 못 이루는 이유는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가?’, ‘저도 모르겠습니다. 잠만 들면 여섯 명의 커다란 사내들이 저를 채찍질하며 돌을 나르거나 밭을 가는 힘든 일을 시킵니다. 저는 밤새 힘든 노동에 시달리다가 뼈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끼며 깨곤 합니다.’ 청년은 울먹이며 이렇게 대답했지.”

노승은 이야기를 잠시 멈추고 시선을 망아에게 주었다.

“자네는 청년이 그런 꿈을 꾸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가?”

망아는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제자는 우매해서 잘 모르겠습니다.”

노승은 희미하게 웃은 뒤, 계속 말했다.

“석가께서 청년에게 말씀하셨네. ‘자네는 병이 있으며, 무엇을 그리워하고 있고, 또 생활이 어렵다네. 단지 자네가 그 사실을 모르고 있을 뿐이지.’, 청년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지. ‘자네가 가진 부귀와 권세는 한 사람이 가지기에 너무나 벅찬 것이야. 그런데도 자네는 만족하지 않고 더 큰 부귀, 더 큰 권세를 바라고 있네. 자네가 그런 욕망을 버리지 않는 이상, 꿈에서 자네를 매질하는 사내들의 수는 점점 늘어날 것이고, 자네가 하는 노동도 점점 더 힘들어질 걸세. 맺힌 것이 있으니 병이 찾아들고, 만족을 모르니 더 큰 것을 그리워하며, 그러니 자연 생활이 힘들어지는 게야.’ 석가께선 이렇게 말씀하셨네. 청년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었네. ‘하면 제가 어떻게 해야 할까요?’, ‘재산을 둘로 나눠서 절반은 하인들에게 주게나. 그리고 그들을 자유의 몸이 되게 해 주게. 그런 연후에 마음을 정하게 하며 명상을 계속한다면 자네는 원하는 바대로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을 것이네.’, 청년은 펄쩍 뛰었지. ‘제 재산은 가문 대대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하인들 또한 그렇고요. 제가 사업을 더욱 번창하게 만들어 아들들에게 물려줘도 모자란 판국에 재산을 나누고 하인들을 내보내라고요? 정말 어이없는 말씀이군요. 그것만은 절대로 못 합니다!’, 청년은 화를 내며 돌아가 버렸지.”

노승은 눈을 살며시 감았다. 메마른 뺨 위로 언뜻 불그레한 화색이 감돌았다.

“무릇 사바에서의 부귀는 내세의 매서운 채찍과 같고, 사바에서의 권세는 내세의 힘든 노동과 다름없는 법. 청년이 떠난 뒤, 석가께선 제자들을 돌아보시며 말씀하셨네. ‘어쩌면 그는 더 큰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밤은 더욱 빈곤해질 것이다.’라고. 이 우언(寓言)이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겠는가?”

밍이는 한차례 부르르 몸을 떨더니 노승을 향해 다시 머리를 조아렸다.

“제자는 헛된 부귀와 그릇된 권세를 모두 떨치고 사부님을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복되게 생각합니다. 사부님의 높은 가르침, 항상 명심하겠습니다.”

“부디 그럴 수 있기를, 아미타불…….”

망아의 뒤통수 위로 노승의 나직한 독경소리가 얹혔다.

슬슬슬…….

정자나무의 짙푸른 잎 그림자 밑에선 제철을 만난 참매미들이 신명난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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