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남쪽 지방이 북쪽 지방보다 덥다는 사실이야 일곱 살만 먹으면 알 수 있는 일이지만, 그래도 흑룡강(黑龍江) 싸늘한 강바람 속에서 잔뼈가 굵은 왕풍(王豊)에겐 강소 땅의 늦더위가 고역일 수밖에 없었다. 말복이 지난 지도 한 달이 넘건만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해도 줄줄 흐르는 기분 나쁜 땀방울이라니!
왕풍은 허리에 끼워 놓았던 수건을 꺼내어 이마와 목덜미를 벅벅 문지른 뒤 하늘을 바라보았다. 태양은 아직 중천에 오르지 않았으니 기껏해야 오시(午時 : 오전 11시-오후 1시) 초. 그런데도 이렇게 숨이 턱턱 막히는 것이다.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었다.
마음 같아선 가게 문 닫아걸고 그늘진 계곡이라도 찾아가고 싶지만, 코딱지만 한 식당 하나에 일곱 식구 명줄을 걸고 사는 신세가 어디 마음 내키는 대로 움직일 수 있다던가. 계곡은 고사하고 눈앞의 태호(太湖) 호변 시원한 물 기운도 그림의 떡일 수밖에 없는 게 왕풍의 처지였다.
오늘 하루 어떻게 속 좀 덜 끓고 보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차에 저 아래로 배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먼발치서 보기에도 선객이 바글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왕풍의 시선은 과히 곱지 못했다.
“염병…….”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인근 갑부 하나가 나흘 전 모친상을 당했다는데 눈도장이라도 받으려는 놈들로 이른 시각부터 저 지랄인 것이다. 여느 때라면 저 선객들 모두가 돈으로 보이련만 사흘을 연달아 속고 나니 이젠 욕부터 나왔다. 초상집 앞에 두고 제 돈으로 밥 사 먹는 등신 드문 탓이다.
“몽땅 상문살(喪門煞)이나 맞아라.”
마른 먼지 풀풀 피워 올리며 가게 앞을 지나치는 인파를 향해 왕풍은 악담을 퍼부었다. 물론 귀에 들어갔다간 사달 날 일이기에 고개를 외로 꼬아 웅얼거린 것에 불과했다.
그런데 세상엔 고양이처럼 귀 밝은 인간이 있었다. 그 인간은 심지어 발걸음도 고양이처럼 가벼웠다.
“생면부지의 행인에게 다짜고짜 저주를 퍼붓다니 참으로 몹쓸 위인이로다!”
화들짝 놀란 왕풍은 외로 꼬아 두었던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것일까? 그의 머리 위에는 햇빛을 등져 더욱 근엄해 보이는 두 눈이 정광을 번뜩이고 있었다.
“제, 제가 언제 저주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이젠 식언까지? 아무래도 혼쭐이 나야 정신을 차릴 위인이로고!”
처음엔 놀란 마음에, 다음엔 두려운 마음에 자신도 모르게 앉아 있던 나무 의자에서 엉거주춤 엉덩이를 떼던 왕풍은 어느 순간 인상을 와락 구기고 말았다.
“방금 씨불인 게 너…… 맞니?”
“여기 자네와 나 말고 또 누가 있는가?”
“자, 자네? 하!”
너무 기가 막히면 말도 잘 나오지 않는 법이라고 하던가. 지금 왕풍이 그랬다.
앉아 있을 때엔 미처 몰랐다. 아니, 켕기는 구석이 있는지라 차분히 살필 경황이 없었다는 게 옳은 표현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보니 이건 숫제 난쟁이 똥자루였다. 보통 사람 어깨에나 미칠까 말까 한 키로 한껏 버티고 서서 고개를 발딱 치켜세운 채 노려보는 품이 근엄하기는커녕 콧방귀도 나오지 않았다.
거기에 행색은 또 어떻고? 덕지덕지 기운 낡은 단삼은 접어 둔다 쳐도, 정체를 알 수 없는 얼룩으로 누렇게 변색한 바지는 어느 집 개에게 물어뜯긴 두 종아리 어림이 모두 너덜너덜했다. 어디 그뿐이랴. 봉두난발을 질끈 묶은 것은 짚신 삼는 데나 쓰면 딱 알맞을 새끼줄인데, 목욕은 연례행사로 아는지 드러난 살갗마다 땟물이 켜켜이 쌓여 있었다.
왕풍은 이런 행색으로 나다니는 종자들을 뭐라 부르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것도 모른다면 애당초 밥장사할 생각 따위는 품지도 않았을 것이다.
“요, 요 거지 새끼가 감히 누구 앞에서……!”
말과 동시에 번쩍 치켜진 것은 주먹, 지금이야 그렇고 그런 밥집 주인이지만 한창 때엔 뒷골목 칼부림도 마다 않던 왕풍의 억센 주먹이었다. 이쯤 되면 꼬리를 말고 웅크리는 게 거지란 종자들의 본령일진대, 그런 면으로 본다면 이 땅딸보 거지는 뭔가 다른 구석이 있었다.
“어허! 그래도 제 잘못을 뉘우치지 못하고!”
땅딸보 거지는 목소리를 더욱 높이며 때릴 테면 때려 보라는 식으로 얼굴을 들이대는 것이었다. 그러니 왕풍의 두 눈에 어찌 쌍심지가 돋지 않겠는가. 바야흐로 왕풍이 대성일갈, 호통을 내지르며 주먹을 휘두르려는 찰나…….
“요기할 곳을 알아보라고 먼저 보냈더니만 여기서 또 시빈가?”
탁주라도 한 사발 들이켠 것처럼 걸걸한 목소리가 왕풍의 주먹을 멈추게 만들었다. 왕풍은 ‘이건 또 뭐야?’라는 표정으로 목소리의 주인을 찾았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더라도 한 번 더 생각하고 행동하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알아듣겠는가? 쯧, 그 꼬장꼬장한 성질은 언제쯤이나 고치려는지.”
심히 못마땅한 듯 혀까지 차며 처음의 땅딸보 거지를 책망하는 사람은, 짙은 눈썹에 부리부리한 두 눈이 딴에는 엄정한 분위기를 풍기지만 남루한 옷차림이나 전신에 흐르는 궁기만큼은 앞선 땅딸보 거지에 비해 하등 나을 게 없어 보이는 중년인, 아니, 중년 거지였다.
“하지만 이 위인이…….”
“어허, 이게 누구 탓을 할 문제인가? 자네가 문제 삼지 않았던들 왜 이런 일이 생기는데!”
앙앙불락한 땅딸보 거지의 항변을 점잖게 묵살한 중년 거지는 왕풍 쪽을 바라보며 두 손을 모아 보였다.
“이 친구가 조금 빡빡한 구석이 있소. 귀하가 이해하시구려.”
제법 정중한 화해의 시도였지만 아침부터 화풀이할 대상만 찾고 있던 왕풍에겐 씨알이 먹혀들 리 없었다.
“장사도 안 되는 판국에 거지새끼들이 쌍으로 찾아와 이 어르신을 놀리는구나! 오냐, 어디 한번 죽어 봐라!”
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왕풍은 준비해 두었던 주먹을 힘차게 내질렀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얄미웠던지 목표는 나중에 등장한 중년 거지의 콧잔등이었다.
한데 중년 거지는 허리를 살짝 틀어 왕풍의 주먹을 피하는 것이었다. 왕풍의 손등에 도드라져 있던 굵은 핏줄들이 무색할 만큼 간단한 몸놀림이었다.
“어? 너 방금 피했니? 내 주먹을 피한 거냐고?”
왕풍은 중년 거지와 제 주먹을 번갈아 바라보며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물었다. 중년 거지는 사람 좋은 웃음을 떠올리며 손을 홰홰 내둘렀다.
“그럼 때리는데 가만히 서서 맞아 줘야 쓰겠소? 그러지 말고 말로 합시다.”
“이 자식이 그래도 주둥이는 달렸다고 계속…… 어?”
씨근덕거리며 재차 주먹을 날리려던 왕풍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중년 거지의 허리께에서 뭔가 심상치 않은 물건 하나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기장이 긴 웃옷에 가려 이제껏 보이지 않다가 손을 내두르는 바람에 살짝 드러난 물건. 그것은 값비싼 금실로 짠 것이 분명한 휘황찬란한 비단이었다.
비록 비단 귀한 게 예전 같지는 않다지만 그래도 왕풍 같은 민초로선 만져보기 힘든 귀물이 아닐 수 없었고, 예사 비단도 아닌 금실로 짠 비단이라면 더욱 그러할 수밖에 없었다. 욕심은 순식간에 없는 이야기 하나를 지어냈다.
“오호라, 엊그제 내다 말리던 비단이 없어졌다 싶었더니 바로 네놈이 훔쳐 갔구나!”
중년 거지의 얼굴이 묘하게 변했다. 그러자 뒷전에 물러나 있던 땅딸보 거지가 투덜거렸다.
“저런 위인이라니까요. 좋은 말이 소용없는 속물입니다.”
“시끄럽다! 요 쥐새끼 같은 도둑놈들!”
호통을 내지르며 득달같이 달려든 왕풍은 중년 거지의 늘어진 웃옷을 와락 들췄다. 눈을 황홀하게 만드는 금실 비단이 왕풍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야 잡았구나! 관아에 끌려가서 발꿈치를 잘릴 테냐, 아니면 네 죄를 인정하고 순순히 돌려줄 테냐?”
왕풍은 자꾸만 벌어지려는 입가에 억지로 힘을 주며 중년 거지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그에게도 나름대로 생각한 바는 있었다. 거지 주제에 무슨 돈이 있어 금실 비단을 지닐 수 있겠는가! 내 집에 있던 물건은 아닐지언정 분명 어딘가에서 훔친 것이 분명할 테니, 자신에게 빼앗기더라도 그 억울함을 대놓고 하소연하지는 못하리라 생각한 것이다.
중년 거지가 왕풍에게 물었다.
“그게 당신 물건이라고?”
“암! 마누라 주려고 소주까지 나가 사 온 물건이지.”
내친 김에 이야기에 살을 붙이는 왕풍. 뒷전의 땅딸보 거지는, ‘저, 저런 나쁜 놈!’ 하며 분을 참지 못하는데, 정작 당사자인 중년 거지는 느긋하기만 했다.
“가져갈 수 있거든 가져가시구려.”
그 느긋함이 마음에 걸리지 않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눈앞에 보배가 있는데 어찌 망설이겠는가.
“힝! 내 물건 내가 가져가는데 네까짓 놈 허락이 무슨 필요냐?”
왕풍은 기다렸다는 듯이 금실 비단을 향해 손을 뻗었다. 뜻밖의 횡재에 희색을 감추지 못하면서.
그러나 비단을 움켜쥔 순간, 그의 얼굴에 떠오른 희색은 씻은 듯이 사라지고 말았다.
‘얼레?’
생김새도 비단이고 허리에 감긴 모양새도 비단인데, 무슨 조환지 감촉이 철판처럼 완강했다. 섬뜩한 마음에 허리 아래로 늘어뜨린 끝자락을 쥐어 보니 묵직하게 가라앉는 품이 사람 잡으라고 만들어 놓은 몽치철퇴를 쥔 느낌이었다.
“어째 힘들어 보이는구려.”
중년 거지는 말과 함께 배를 슬쩍 퉁겼다. 그런데 이건 또 무슨 조화일까? 그 간단한 몸짓에 왕풍은 마치 황소에 받친 사람처럼 주르륵 밀려나고 만 것이다. 여섯 걸음이나 물러나 자세를 잡은 뒤에도 등줄기가 새큰거리고 오금이 저리는 게 격한 방사라도 치른 다음 같았다.
뭔가 잘못됐구나 하는 생각이 왕풍의 머릿속에 떠오를 즈음, 중년 거지가 빙긋 웃으며 제 허리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아직도 이 물건이 탐나시오?”
왕풍의 두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철판 같기만 하던 금실 비단이 중년 거지의 손길 아래에서 술술 풀리는 광경을 목격한 것이다.
왕풍은 시선을 들어 중년 거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위엄스러운 네모진 얼굴에 정기 흐르는 검은색 선명한 눈동자가 별안간 새삼스럽게 보였다. 그 순간이었다. 당금 강호를 진동하는 한 사람의 별호가 생각난 것은.
그 사람은 무쇠처럼 단단한 천을 허리에 두르고 다니는 기벽이 있다고 했다. 그 사람은 일신에 쌓은 재간이 신선 못지않아 한 번 주먹질로 담벼락을 허물고 한 번 발길질로 성곽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거지들의 대왕이라고 했다!
“아이고, 대왕님!”
늦더위에 후끈 달아오른 땅바닥 위로 왕풍의 몸뚱이가 허물어지듯 엎어졌다. 이어지는 읍소.
“소인이 눈깔이 멀어 대왕님을 몰라 뵈었습니다!”
그런 왕풍의 뒤통수 위로 땅딸보 거지의 매서운 추궁이 쏟아졌다.
“뭐? 발꿈치를 잘라? 감히 대개방의 방주님께 도둑 누명을 씌우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아이고, 목숨만! 목숨만 살려 주십시오!”
왕풍은 행여 이마가 바닥과 떨어질까 더욱더 고개를 조아리는데, 허허, 하는 중년 거지의 웃음소리가 천둥처럼 그의 고막을 두드리고 있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아이고, 쇤네가 좋아서 하는 일입니다요. 사양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노자도 넉넉하지 않고…….”
“아이고, 돈 받을 생각을 품으면 쇤네가 천벌 받습죠. 그런 염려랑은 접어 두시고 어서 들어오십시오. 오늘 아침 배로 들어온 잉어가 아주 싱싱합니다요. 그나저나 이거 집이 누추해서 어쩌나, 아이고.”
입추가 지나도록 꺾일 줄 모르는 늦여름 더위와 사흘째 약만 올리고 지나가는 초상집 손님들로 잠시 심사가 꼬이긴 했지만, 그래도 근본만큼은 악하지 않은 왕풍이었다. 마음에 두지 말라며 길을 재촉하려는 중년 거지를 아이고 소리 연발해 가며 굳이 식당 안으로 맞아들인 것은, 비단 후환이 두려운 때문만은 아니었으리라.
“주인장의 뜻이 정 그렇다면…….”
중년 거지의 언행은 대왕님답게 중후했다. 적당히 사양하다 짐짓 못 이긴 채 식탁 앞에 앉을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그랬다. 그런데 잠시 후, 주방 쪽에서 동당동당 도마 소리와 함께 향긋한 음식 냄새가 솔솔 풍겨 오자 중년 거지가 이제껏 견지하던 중후함은 심각한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뜬 듯 감은 듯 분간하기 힘든 눈은 꿈길을 헤매듯 몽롱해지고, 유달리 두툼한 양 콧방울이 풀무질을 하듯 벌름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 마침내 터져 나온 탄성은 대왕님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극히 속된 것이었다.
“크으흐! 냄새 한번 죽이는구먼!”
철포결 우근.
올해 나이 사십육 세.
남의 밥을 빌어먹는 자들에겐 황제보다 귀하게 떠받들어지는 개방의 용두방주.
검왕 연벽제, 고검 제갈휘 등의 강자들과 더불어 신 오대고수의 한자리를 당당히 차지하는 외가공부의 달인.
뒤끝 없는 성격과 시원시원한 일 처리로 개방 사상 가장 화통한 방주라 칭송 받는 일세의 쾌남아.
이상은 중년 거지 우근에 대해 널리 알려진 사항들이었다. 그러나 그런 우근에게 체통에 걸맞지 않은 나쁜 버릇 한 가지가 있음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 버릇이란 다름 아닌…….
‘먹을 것 앞에선 조사야(祖師爺)도 몰라본다, 이거지!’
우근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땅딸보 거지 호유광(胡兪廣)은 이렇게 생각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조사야도 몰라본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었다. 우근의 사부이자 개방의 전대 방주인 금정화안신개(金睛火眼神?)의 고단한 말년을 지켜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작고한 지 올해로 꼭 십 년이 되는 금정화안신개를 떠올릴 때면 호유광은 지금도 안쓰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유업(遺業)으로 삼을 만한 하 많은 일들을 놔두고 왜 하필 제자 놈 식탐을 고치는 데 마지막 열정을 불사르려 한 것일까?
거지치고 먹을 걸 밝히지 않는 자 누가 있겠느냐만, 우근의 경우엔 거지란 특수성을 십분 감안하더라도 그 정도가 과한 것이 사실이었다. 그리고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사부와 제자가 밥그릇을 마주하는 개방의 식사 관행에 비추어 볼 때, 우근의 식욕을 가장 못마땅하게 여긴 사람이 금정화안신개란 점 또한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못마땅했다면 코흘리개 적에 고칠 일이었다. 코흘리개 적에 고치지 못했다면 아예 못마땅하게 여기질 말아야 할 일이었다.
아쉽게도 금정화안신개가 취한 방식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코흘리개 적엔 오냐오냐하며 놔둔 버릇을 이모지년(二毛之年 : 32세)이 되도록 장성한 뒤에야 고치겠다고 나선 것이다.
때문에 그는 지극히 고단한 말년을 보내야 했고, 어느 날부턴가 ‘저놈 처먹는 꼴 보기 싫어서라도 어서 죽어야지.’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게 되었으며, 길하지 못한 말은 함부로 내뱉어선 안 된다는 교훈을 몸소 보여 주기라도 하듯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부친 같은 사부의 별세에 우근은 졸도까지 할 만큼 커다란 슬픔에 빠졌지만, 방규(幇規)가 정한 사십구 일의 상례 기간 중에도 삼시 세 끼에 간식 야참까지 꼬박꼬박 챙겨 먹는 왕성한 식욕을 보여 줌으로써 고인의 고단한 말년을 지켜본 몇몇 친인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후 식탐을 문제 삼아 우근에게 왈가왈부하는 거지는 두 번 다시 나타나지 않았다. 고인에겐 안된 얘기지만, 세상엔 해서 될 일이 있고 해서 안 될 일이 있는 것이다.
호유광이 이런저런 회상에 잠긴 동안에도 우근의 안달은 끊이지 않았다.
“아! 왜 이리 오래 걸리는 걸까? 이 친구, 요리하다 말고 급한 볼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이곳 주인장이 대접하려는 요리는 태호의 명물로 이름난 잉어찜이었고, 잉어찜은 주방에 들어간 지 일 각 만에 내올 수 있는 성질의 음식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벌써부터 주방 쪽을 힐끔거리며 다리까지 달달 떨어 대는 우근의 모습은 아랫사람 된 도리로 차마 지켜보기 힘든 것이었다. 그래서 호유광은 아예 시선을 돌려 버렸다.
그렇게 시선을 돌린 곳은 대나무 발이 드린 문가인데, 때마침 대나무 발을 들추며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세 사람이 있었다.
“어?”
호유광은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터뜨렸다. 별생각 없이 바라본 사람들 중에 뜻밖에도 아는 얼굴이 있었던 것이다.
그 소리에 귀가 뜨인 듯 우근도 문가 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다음 순간,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손을 번쩍 들었다.
“거기 방금 들어오신 분은 사자검문(獅子劍門)의 유 총관(劉總管)이 아니시오?”
우근이 반가이 부르자 방금 들어온 세 사람 중 하나가 만면에 웃음을 띠며 우근의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사십 대 초반쯤 되었을까? 균형 잡힌 체구에 서글서글한 눈매를 지닌 그 사람은 깔끔한 느낌을 주는 청의 무복을 입고 있었다.
“불민한 아우를 여태껏 잊지 않고 기억해 주시니 그저 황송할 따름입니다. 개봉에서 예까지는 누천리 길인데 원로에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인상만큼이나 좋은 넉살을 지닌 듯 대뜸 아우를 자처하는 청의인에 대해 우근은 사람 좋은 웃음으로 답례했다.
“유랑 걸식에 이력이 난 게 거진데 수고는 무슨 수고겠소? 그나저나 이 거지가 오늘 복이 쌍으로 겹쳤나 보외다. 음식 복에 이어 사람 복까지…… 하하!”
“하하! 사람 복으로 따지면 저는 내일부터 감사 불공이라도 올려야 하겠지요. 방주님께서 어디 예사 분이십니까? 그동안 북방에서 울려오는 방주님의 위명이 어찌나 쟁쟁하던지, 이 아우 까딱하면 귀머거리가 될 뻔했습니다.”
상대를 추켜세우는 언변이 어찌나 매끄러운지, 만일 청의인의 사람됨을 사전에 알지 못했다면 아첨이나 일삼는 모리배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청의인은 결코 모리배가 아니었다. 금릉성(金陵城) 이왕부(二王府)에서 열린 비무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한 경력이 있는 뛰어난 검객인 동시에, 강동 일대에서 가장 이름난 검술 도장의 총관 자리를 오 년씩이나 지키고 있는 대단한 위인이 바로 이 청의인인 것이다.
이름은 유태성(劉泰晟).
강호인으로선 드물게도 예의 바른 성품이지만, 일단 실전에 임하면 눈보라처럼 몰아치는 검법이 일품이라 하여 별호는 난분군자검(亂雰君子劍)이었다.
“끌끌, 섭섭하오, 섭섭해. 유 형의 눈엔 위명 쟁쟁하신 방주님만 보이지 나 같은 조무래기 거지는 아예 차지도 않는 모양이외다?”
호유광이 짐짓 골난 체 유태성에게 투덜거렸다. 유태성은 빙긋 웃으며 호유광을 향해 포권했다.
“개방의 순찰노두(巡察老頭)를 괄시했다가 그 뒤탈을 어찌 감당하려고요? 이 사람에게 그런 깜냥은 없으니 호 형께선 노여움을 푸시기 바랍니다.”
순찰노두는 호유광이 개방 내에서 맡은 직책의 이름이었다. 개방에는 모두 여덟 명의 노두가 있는데, 그중 바깥바람을 가장 많이 쐬어야 되는 사람이 바로 순찰노두였다.
“흐흐! 유 형의 그 보비위하는 말은 언제 들어도 기분 좋단 말씀이야. 어쨌거나 반갑소! 안 그래도 볼일이 끝나는 대로 기별을 넣어 볼까 생각하던 참이었소.”
호유광과 유태성은 과거 몇 차례 만난 적이 있었다. 천하 각지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행사에 각각의 문파를 대표하여 참석할 기회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들이 인사를 나누는 동안 유태성과 함께 온 두 사람도 우근의 탁자 쪽으로 다가왔다. 유태성이 입은 것과 비슷한 청의를 입은 근엄한 인상의 노인과 먹물처럼 새까만 흑의를 입은 건장한 체격의 장년인이었다.
“어느 분이 개방 방주이신가?”
노인이 물었다. 그리 높은 음색도 아니건만 그 속에 담긴 기운은 얼음 동굴에서 흘러나온 것처럼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이를 의식한 듯 우근이 조금 굳은 표정으로 나섰다.
“소생이 개방 방주 직을 맡고 있습니다만…….”
노인은 매처럼 날카로운 눈초리로 우근의 전신을 훑어보았다. 그 모습이 유태성이 이제껏 보여 준 공손함과는 사뭇 딴판인지라 곁에서 지켜보던 호유광은 눈살을 찌푸리고 말았다. 그러나 뒤이어 흘러나온 노인의 말에 호유광은 생각을 고쳐먹을 수밖에 없었다.
“노부는 방령(方嶺)이라 하오.”
우근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세를 고치더니 노인을 향해 깍듯이 포권을 올렸다.
“용서하십시오. 눈은 달렸으되 사람을 보는 안목은 없어 노영웅(老英雄)께서 왕림하신 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노인이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내 이름을 들어 보았소?”
“듣다마다요. 냉면무정검(冷面無情劍)의 대명을 듣지 못하고서야 어찌 개방 방주 노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근의 태도는 죽은 사부라도 돌아온 듯 공손하기 그지없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방령이라면 협의를 실천하기 위해 평생을 바친 백도의 노명숙. 허례를 즐기지 않는 우근이라도 예의를 갖춰 경의를 표해야만 하는 이름이었던 것이다.
‘그나저나 방령이라니…… 놀랄 일이군, 놀랄 일이야.’
호유광은 새삼스러운 눈길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현역 시절엔 강동삼수의 대형으로서 석안과 양무청, 두 의제와 더불어 혁혁한 협명을 떨치고, 현역에서 물러난 뒤엔 사자검문이란 검술 도장을 개파, 강동 무림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 올린 사람이 바로 냉면무정검 방령이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성정이 지나치게 차가워 사람을 쉬이 사귀지 못한다는 것. 그러한 성정은 강동삼수의 둘째 석안이 비명에 세상을 뜬 이후 더욱 깊어져, 이젠 여간해선 강호 출입을 하지 않는 괴팍한 늙은이가 되었다고 한다.
강호 출입을 끊었다는 얘기는 그 얼굴을 알아보는 후배가 적다는 얘기와 일맥상통할 터. 그러니 마당발로 소문난 개방의 방주, 순찰노두가 방령을 몰라본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어쨌거나 노인의 정체는 밝혀졌다. 이제 남은 건 노인의 뒷전에 서 있는 흑의 장년인인데…….
‘누굴까? 사자검문의 제자로는 아닌 것 같고…….’
호유광은 눈을 가늘게 뜨고 흑의 장년인의 전신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가장 먼저 눈길을 끈 것은 헐렁한 흑의 위로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만큼 잘 발달된 육체였다. 흑의 장년인은, 몸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 본 경험이 있는 남자라면 누구나 한 번쯤 꿈꾸었을 완벽에 가까운 육체를 지니고 있었다.
다음으로 눈길을 끈 것은 이 식당에 들어온 이래로 흑의 장년인이 줄곧 유지하고 있는 당당함이었다. 호유광도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인지라, 풋내기가 억지로 꾸며내는 당당함과 대가가 자연스럽게 풍겨 내는 당당함을 구분할 줄 아는 안목 정도는 있었다. 한데 흑의 장년인의 경우엔 놀랍게도 후자 쪽이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많이 봐줘도 삼십 대 중반의 나이. 천하의 개방 방주를 앞두고 자연스럽게 당당할 수 있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결국 호기심을 참지 못한 호유광은 유태성에게 전음을 보냈다.
-저 검은 옷을 입은 친구는 누구요?
유태성은 뜻밖이란 표정으로 호유광에게 반문했다.
-근래 강동에서 제일 유명한 사람도 몰라본단 말입니까?
강동에서 제일 유명하다고? 그 순간, 호유광은 자신의 두 눈을 세게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 되었다. 그제야 비로소 흑의 장년인의 정체를 알아차린 것이다.
호유광의 짐작을 확인시켜 주려는 듯, 때마침 방령이 흑의 장년인을 소개했다.
“내 조카요. 아마 우 방주께서도 들어 본 이름일 게요.”
흑의 장년인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우근에게 포권해 보였다.
“석대문이라고 합니다.”
우근은 잠시 멍한 표정을 짓다가 흑의 장년인에게 물었다.
“강동제일인?”
흑의 장년인, 석대문은 담담한 미소로 답했다.
“과분한 호칭이지요.”
우근은 그러고도 여전히 멍한 표정을 거두지 못하더니 돌연 식당 천장이 떠나가라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오늘 이 거지가 정말 운수대통한 모양이오. 강호엔 오래전에 발길을 끊으신 어르신을 만나 뵌 것도 부족해, 평소 가장 사귀길 원하던 후배와도 이렇게 인연을 쌓게 되다니, 이게 대체 무슨 홍복이란 말이오.”
“그 또한 과분한 말씀입니다.”
석대문의 반응이 시원찮다고 여긴 것일까? 우근은 정색을 하며 다시 말했다.
“빈말로 듣지 마시오. 전대의 후광만 의지하다가 가문과 문파를 망쳐 버리는 얼치기 같은 후대들 투성이인 요즘 세상에 석 가주 같은 진짜배기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어찌나 만나고 싶었던지…….”
곁에서 지켜보던 호유광이 우근의 말을 은근히 거들어 주었다.
“우리 방주님의 말씀은 한 치의 과장도 없는 사실이라오. 내가 보장하리다.”
우근이 그것 보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무렴, 내가 만일 여자였다면 소실 자리라도 꿰차려고 진작 석가장으로 쳐들어갔을 거요.”
석대문은 갑자기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근이 의아해하며 물었다.
“왜 그러시오?”
“지금까지 살아오며 들은 중에 가장 열렬한 구애를 연상의 남자로부터 들었으니, 이를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우근은 얼빠진 황소처럼 눈을 끔뻑거리다가 석대문의 어깨를 탁 후려치며 또 한 번 호탕한 대소를 터뜨렸다.
“으하하! 듣던 대로 유쾌한 친구로구먼. 넉살이 이 어깨만큼이나 두툼해. 기분 좋군, 아주 기분 좋아. 이 철포를 전당 잡히는 일이 있더라도 오늘 하루 어찌 대취하지 않고 보낼 수 있겠는가? 으하하!”
그러나 넉살이 두툼하기로 따지면 우근도 만만치 않을 것이다. 비록 연배가 아래라 해도 한 가문을 이끄는 어엿한 가주인데, 안면을 튼 지 반각도 채 지나지 않아 벌써 말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나저나 손자 놈 불알 같은 철포를 전당 잡힌다는 말까지 하는 걸 보면 반갑다는 게 진짜 빈말은 아닌 모양이지?’
호유광은 이런 생각을 하며 히죽 웃었다.
다행히 우근은 손자 놈 불알 같은 철포를 전당 잡히지 않아도 되었다. 새로 합류한 세 사람은 거지가 아끼는 물건을 전당포에 잡히는 꼴을 그냥 두고 볼 만큼 뻔뻔한 성격이 못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점에 대해 가장 다행스럽게 여겨야 할 사람은 요리하다 말고 불려나온 이 식당의 주인이 아니었을까?
“이 집에서 제일 잘하는 요리로 몇 접시 더 내다 주시오. 술은 소흥주(紹興酒)를 단지째 내오고.”
유태성이 이렇게 말하며 탁자 위에 올려놓은 물건은 왕풍으로선 얼마 만에 구경하는지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싯누런 금두(金頭)였다. 황홀한 마음에 대답조차 까먹은 왕풍에게, 이어진 유태성의 말은 더욱 황홀한 것이 아닐 수 없었다.
“거스름돈은 필요 없소이다.”
저 정도 크기의 금두라면 요즘 같은 불경기에 서너 달 수입과 맞먹는 것이었다. 떨리는 손으로 금두를 집어 들며 왕풍은 한 가지 귀중한 교훈을 깨닫게 되었다.
‘거지 대왕님을 제대로 모시니 재신(財神)께서 당장 복을 내리시는구나! 앞으로는 다른 거지들에게도 잘해 줘야겠다.’
그런 왕풍에게 문제의 거지 대왕님이 점잖게 한마디 했다.
“그나저나 요리가 너무 늦는 것 같소만…….”
그 말에 정신을 차린 왕풍이 거지 대왕님께 고했다.
“일단은 먼저 요리한 잉어찜과 술을 내올 테니 손님들께선 시장기를 달래고 계십시오. 그동안 소인은 태호에서만 맛보실 수 있는 사품(四品) 잉어 요리를 준비하겠습니다요.”
거지 대왕님의 콧구멍이 짧은 경련을 일으켰다.
“사, 사품 잉어 요리?”
“헤헤, 사품 잉어 요리란 곧 잉어찜과 잉어회, 잉어 튀김 그리고 어죽을 말하지요. 산초(山椒)로 민물 냄새를 제거한 매콤한 잉어찜으로 속을 푸신 뒤, 펄펄 뛰는 잉어를 산 채로 떠낸 잉어회와 어린 잉어에 뜨거운 땅콩기름을 끼얹어 튀겨 낸 잉어 튀김을 차례로 드시고, 마지막으로 잘 발라 낸 잉어 살과 각종 야채들을 절구에 갈아 찹쌀과 함께 푹 고아 낸 어죽으로 마무리하시면 아마 다른 곳의 잉어 요리는 눈에 차지도 않으실 겁니다요.”
아마 거지 대왕님의 마음도 왕풍의 그것처럼 황홀해졌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