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중추야(仲秋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엔 휘영청 둥근 달이 떠올라 있었다.
보름달은 원(圓)이요, 원은 단합을 의미했다. 일 년 중 보름달이 가장 밝은 중추절의 다른 이름이 단원절(團圓節)인 까닭도 거기에 있었다.
보름달을 보노라면 옛 추억에 젖을 수밖에 없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고개 들어 밝은 달을 바라보고, 고개 숙여 고향을 그리워한다[擧頭望明月 低頭思故鄕].’는 두보(杜甫)의 유명한 시구도 바로 그러한 인정의 발로였을 터. 때문에 객지에 나가 있는 사람들도 중추절이 되면 고향의 가족 품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석대원은 중추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돌아갈 수 없는 고향, 돌아갈 수 없는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너무나도 가슴에 사무쳤기에, 그는 중추절을 좋아하지 않았다. 사창 밖에 내걸린 저 보름달도 마찬가지였다.
콜랑콜랑.
귀에 익숙한 소리가 어두운 상념을 밀어냈다. 술병이 술을 토해 놓는 소리였다. 그 소리가 듣기 좋은 걸 보니 석대원도 주당이 다 된 모양이었다.
석대원의 앞에 놓인 사기잔에 담황색 액체가 차올랐다. 가을밤과 잘 어울리는 그윽한 주향이 코끝을 간질였다. 그의 술잔을 채워 준 사람은 북슬북슬한 턱수염이 멋들어진 중년인, 바로 제갈휘였다.
외로운가?
남우세스러운 일일지도 모르지만, 석대원은 자신을 바라보는 제갈휘의 눈빛에서 이런 질문을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이런 질문을 읽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십일 년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시달린 탓에 이제는 완전히 삶의 일부가 되었다고 여겨 온 외로움이 아니던가. 그런데 아닌 모양이었다. 그는 천애(天涯)에 홀로 버려진 듯한 적막한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그때 제갈휘가 물었다.
“외로운가?”
석대원은 약간 수그렸던 시선을 들어 제갈휘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아니, 괜한 소리를 했나 보군. 문득 자네가 외로워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한 말일세. 다시 생각해 보니 외로워하는 건 자네가 아니라 나였던 모양이네.”
자신의 말이 감상적이라 여긴 것일까? 제갈휘는 조금 쑥스러워 하는 것 같았다.
“외로우십니까?”
이번엔 석대원이 제갈휘에게 물었다.
“외롭냐고?”
제갈휘의 얼굴에 미소가 맺혔다. 많은 사연, 많은 곡절을 담은 듯한 미소. 그것이 대답이었다. 제갈휘는 묵묵히 자신의 잔 위로 술병을 가져갔다.
“제가 따르겠습니다.”
석대원은 손을 내밀어 술병을 잡았다.
두 개의 술잔이 가득 찼다.
두 개의 술잔이 말끔히 비워졌다.
술자리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한 시진이 넘어가고 있었다. 모용풍과 한로는 젊은 사람들에게 자리를 만들어 준다는 명목으로 일찌감치 객방으로 들어간 뒤였다. 탁자 위에 즐비한 것은 깨끗이 비어 버린 술병들. 그 수가 벌써 열둘이다.
드물게도 조용한 술자리였다. 참과 비워짐을 무수히 반복한 두 개의 술잔과는 달리, 두 사람 사이에 오간 대화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대원은 조금도 어색해하지 않았다. 오랜 친구를 앞둔 듯 오히려 자연스러운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제갈휘가 느끼는 기분 또한 자신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두어 순배 더 돈 무렵, 익숙해진 침묵을 깨고 제갈휘가 질문을 던졌다.
“묻고 싶은 것이 있네. 자네가 정녕 혈랑곡주의 전인인가?”
“그렇습니다.”
석대원은 곧바로 시인했다.
“모용 선배로부터 듣긴 했지만, 솔직히 믿기 어려웠네. 그런데 사실인가 보군.”
석대원의 제갈휘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검을 익힌 사람이게 있어서 혈랑곡주의 존재란 무한한 경배의 대상인 동시에 극단적인 공포의 상징이었다. 쉽사리 믿지 않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호수처럼 고요한 시선으로 석대원의 두 눈을 정시하던 제갈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고금제일 마검이라 불리는 혈랑검법의 명성은 철들기 전부터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지. 석대원이라고 했나?”
“예.”
“미안하네.”
“예?”
의아해하던 석대원의 두 눈이 순간적으로 얼어붙었다. 소리도 없었다. 형체도 없었다. 그러나 분명히 감지할 수 있는 지극히 위험한 ‘그 무엇’이 인후를 향해 무서운 속도로 쏘아온 것이다.
찰나의 순간, 육신을 움직인 것은 사고 이전의 반사 신경이었다. 석대원은 신체의 중심을 우측으로 가라앉히는 것과 동시에 오른손을 활짝 펼쳐 인후를 엄습해 온 ‘그 무엇’의 측면을 베어 갔다.
우당탕!
석대원이 앉아 있던 나무의자가 요란한 소리와 함께 나뒹굴었다. 그리고 잠시의 정적…….
“검객이 아니라면 반응이 늦었을 테고, 검법이 부족하면 반격이 없었을 테지. 아까 공중에서의 몸놀림을 보고는 검수(劍手)인지 권사(拳師)인지 헷갈렸는데, 이젠 확연히 알겠네. 허락도 없이 시험한 점을 용서해 주게.”
제갈휘는 이렇게 말하며 내밀고 있던 오른손을 천천히 거둬들였다. 그 손에 쥐어진 물체를 확인한 순간 석대원은 자신도 모르게 무거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대나무를 결 따라 쪼개 만든 지극히 평범한 젓가락 한 짝. 그것이 제갈휘가 쥔 물체의 정체였다. 제갈휘는 그 젓가락으로 그저 가볍게 찔러 내는 시늉을 했을 뿐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대원은 한 자루 날카로운 검에 인후를 꿰뚫리는 듯한 아찔한 위기감을 맛본 것이다.
만일 저 손에 쥐어진 것이 젓가락이 아닌 진검이었다면?
만일 제갈휘의 마음속에 일말의 살기라도 깃들어 있었다면?
어느 하나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석대원은 목덜미가 선뜻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래서 명불허전이란 말이 생겼나 보다. 고검 제갈휘의 명성이 검왕 연벽제의 그것에 비해 조금도 뒤지지 않는 까닭을, 석대원은 이제는 명확히 알 수 있었다.
석대원이 자리를 잡기를 기다려 제갈휘가 다시 말했다.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네.”
“그러시지요.”
“근자에 혈랑곡도들로 인한 혈겁에 대해선 자네도 들어 봤으리라 믿네. 자네와는 무관한 일이겠지?”
석대원은 이번에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물론입니다.”
제갈휘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다행이네.”
석대원으로선 의외의 반응이었다. 자신의 말을 입증하기 위해 최소한의 해명은 곁들일 각오였기 때문이다.
“끝인가요?”
“그렇다네.”
“제 말 한마디만으로 충분하다는 말씀인가요?”
“뭐가 더 필요할까?”
“아무리 그래도…….”
제갈휘는 석대원의 잔에 술을 채워 주었다.
“난 우부(愚夫)라네. 그래서 한 분뿐인 사부님께도 용서를 받지 못한 채 이십 년이 넘는 세월을 가슴앓이만 해 왔지. 하지만 난 이 세상에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이 있다는 것은 안다네. 하나는 아까 내가 물은 것과 비슷한 종류의 질문에 대해 거짓말을 할 줄 아는 똑똑한 사람이고, 다른 하나는 거짓말을 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지. 자네는 죽었다 깨어나도 전자는 되지 못해.”
석대원은 짐짓 인상을 쓰며 따져 물었다.
“제가 어리석다고 은근슬쩍 욕하시는 겁니까?”
“그런 셈인가? 하하!”
제갈휘가 앞서 웃고 석대원이 뒤따라 웃었다.
오늘 처음 만난 두 사람이지만, 그들에겐 통하는 점이 있었다. 그들의 영혼엔 동일한 상처가 새겨져 있었다. 가장 가까워야 할 친인들로부터 배척당한 상처였다. 그 상처 속에서 그들은 한없이 외로워졌고, 그러한 외로움이 매개가 되어 그들은 각자의 고통을 공유할 수 있었다.
기나긴 토굴 같은 외로움 속에서도 밝은 세상을 이루기 위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살아가는 장부들!
술잔을 부딪쳐 가는 두 사람의 마음속엔 지음(知音)을 만난 기쁨이 소리 없이 차오르고 있었다.
이 좋은 분위기를 깨뜨린 것은 주방으로부터 나온 점소이였다.
“가절(佳節)을 맞이하여 저희 가게에서 특별히 준비한 음식입니다. 부디 맛있게 드십시오.”
점소이가 내민 접시 위에는 둥그런 월병(月餠)이 여남은 개 놓여 있었다. 보름달을 닮아 그런 이름이 붙은 월병은 중추절에 반드시 먹어야만 하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오죽하면 ‘매봉중추(每逢仲秋) 배사월병(倍思月餠)’이란 속담까지 나왔겠는가.
“고맙네.”
제갈휘는 전대에서 은자 몇 닢을 꺼내어 점소이의 손에 쥐여 주었다. 뜻하지 않은 횡재에 크게 놀란 점소이는 다리 잡힌 방아깨비처럼 머리를 열심히 조아렸다.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그런데…….”
점소이는 말끝을 흐리며 제갈휘의 옆자리를 바라보았다.
“여기 주무시는 손님은 소인이 방으로 모실까요?”
제갈휘와 석대원의 시선이 그곳으로 모아졌다. 그곳엔 탁자에 얼굴을 처박은 채 완전히 의식을 잃은 양진삼의 처량한 모습이 있었다. 술잔 하나로 온갖 묘기를 다 부리는 그였지만, 정작 마실 수 있는 주량은 모태주(茅台酒) 석 잔이 한계였던 모양이다.
二十二章 救出作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