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쟁선계-84화 (84/421)

(2)

아이는 두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호오! 호오!”

하얀 김이 몽글몽글 피어올랐다. 그 온기는 꽁꽁 언 손가락에 닿기도 전에 얼음장 같은 눈보라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그래도 아이는 입김 불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혼까지 얼릴 듯한 이 무지막지한 추위를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우우우후훙!

눈보라가 무저갱에서 기어 나온 귀신처럼 귓전에서 울부짖었다. 악몽에서나 만날 법한 맹수처럼 몸뚱이를 할퀴어댔다.

“아앗!”

아이는 두 손으로 머리에 쓴 털가죽 모자를 꼭 움켜쥐며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모자가 날아가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줍기 위해 이 백설 천지를 얼마를 헤매야 할지 모르는 일이다. 다행히 모자는 손가락 사이에 걸렸고, 아이는 그것으로 안심할 수 있었다.

바람이 조금 잦아드는 것 같았다. 새우처럼 웅크렸던 아이의 몸이 서서히 펴졌다.

아이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발 옆에 세워둔 나무통이었다.

“칫!”

새파랗게 질린 아이의 입술이 실룩거렸다. 나무통은 쓰러져 있었다. 방금 전 몸을 웅크리다가 쓰러뜨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나무통 안에 들어 있던 내용물의 절반은 눈 위에 쏟아져 있었다.

아이는 그 자리에 쪼그리고 앉아 쏟아진 내용물을 두 손으로 퍼 담기 시작했다. 원래 나무통 안에 들어 있지 않았던 눈 덩이가 섞여 들어가도 아의는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들어 있던 놈들도 그것들과 똑같은 눈이었기 때문이다.

퀴이이히힝!

눈보라가 다시 한 번 조그만 몸뚱이를 후려치고 지나갔다.

훈훈한 공기를 맛 본 바람은 좀처럼 문밖으로 나가려 하지 않았다. 아이는 바람을 내쫓기 위해 몸뚱이 전체로 밀어붙이다시피 문을 닫아야만 했다.

바람은 휘파람 소리 같은 푸념을 남긴 채 결국 문밖으로 밀려나갔다.

“쿨룩! 쿨룩!”

병 기운 가득한 기침 소리가 아이를 반겼다. 아이는 걱정스런 눈초리로 기침 소리가 울린 쪽을 바라본 뒤, 나무통을 들고 집 안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집 안 한편에는 커다란 아궁이가 마련되어 있었다. 그 위에는 큼직한 무쇠 솥이 걸려 있었고, 무쇠 솥 안에는 물이 펄펄 끓고 있었다.

아이는 나무통을 기울여 그 안에 담긴 눈 덩이를 무쇠 솥 안으로 부었다. 첨벙, 소리와 함께 더운 물 몇 방울이 아이의 옷자락에 튀었지만, 아이는 그저 툭툭 털 뿐이었다. 아이는 이런 일에 무척이나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솥에 부은 눈 덩이는 금방 물과 하나가 되었다. 아이는 그 광경을 지켜보다가 아궁이 속으로 장작 몇 개를 집어넣었다.

“쿨룩! 쿨……, 크어억! 쿨룩! 쿨룩!”

돌연 기침 소리가 급해졌다.

아이는 안색이 변해 기침 소리가 울린 쪽으로 달려갔다. 그곳에는 벽돌을 엉성하게 쌓아 만든 조잡한 항(?:중국 북부의 난방용 돌 침상. 우리나라의 온돌과 비슷하나 불을 때는 아궁이가 집 안에 있는 것이 다름), 그리고 항만큼이나 부실해 보이는 노인 한 사람이 있었다.

노인은 항 위에서 상체를 반쯤 일으킨 채 기침을 억누르려 애쓰고 있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아이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노인은 야윈 볼을 움직여 뭐라 말하려 하다가 다시 숨이 멎을 듯한 기침을 토해냈다.

노인이 제 숨을 되찾은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헉, 헉! 견, 견아(見兒)야……. 모용 아우는……?”

말을 하는 노인의 이마에는 보랏빛 힘줄이 돋아 있었다. 그 몇 마디의 말과 생명의 일부를 맞바꾸는 듯한 안타까운 모습이었다. 걱정 어린 눈망울로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던 아이, 견아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노인의 등줄기를 문지르기 시작했다.

“모용 할아버지는 아직 안 돌아오셨어요.”

“클, 쿨룩! 저, 저기 있는……, 쿨룩! 쿨룩!”

견아는 노인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항에서 몇 발짝 떨어지지 않은 탁자 위엔 작은 대나무 바구니가 놓여 있었고, 그 안에는 스무 포 남짓한 약 봉지가 들어 있었다. 그중 대부분은 푸른 봉지였고, 다섯 포만이 붉은 봉지였다.

“약이요? 약을 드려요?”

견아의 물음에 노인은 제대로 대답도 하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견아는 무슨 색깔의 봉지를 꺼내야 할지를 알지 못해 잠시 망설이다가 바구니째 노인에게 내밀었다.

노인은 멎지 않는 기침으로 인해 심하게 흔들리는 왼손을 바구니 쪽으로 내밀었다. 본디 오른손잡이인 노인이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익숙한 오른손은 어깨 어림에서 뭉텅 잘려 나간 뒤였으니 말이다.

노인이 서툰 손길로 바구니로부터 꺼낸 것은 붉은 봉지. 그는 그 안에 든 내용물을 입안으로 털어 넣었다. 견아가 노인에게 황급히 물을 가져다주었다.

약 가루와 물을 입 안에 머금은 노인은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약 삼키기가 저토록 고통스러운 것을 보면 노인의 식도는 이미 제 기능을 못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노인의 얼굴에 불그레한 화색이 감돌기 시작했다.

“후우! 이제 좀 살겠구나.”

노인은 길게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견아의 눈망울에 어린 안타까운 기색은 사라지지 않았다. 견아는 모용 할아버지가 이 목옥을 떠나기 전에 한 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네 할아버지의 병을 고칠 용한 의원을 데려 오마. 먼 길이니까 한 달 가까이 걸릴 게다. 그사이 할아버지께 약을 드리는 건 견아가 맡아다오. 약은 가급적 안 드시는 편이 좋으니까 많이 아파하실 때만 드리거라. 특히 붉은 봉지에 담긴 약은 절대로 많이 드시면 안 되는 것이니 각별히 유의하고.

약초에 대한 지식이 있을 리 없는 견아였지만, 심각하게 굳은 모용 할아버지의 표정으로 미루어 붉은 봉지에 담긴 것이 양약(良藥)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뒤 얼마 동안, 견아는 할아버지가 약을 달라고 할 때마다 푸른 봉지만 건넸다. 할아버지가 아무리 괴로워해도 양약이 아닌 것을 드릴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푸른 봉지의 약은 갈수록 효력이 줄어들었다.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지 열흘 째 되는 날 밤, 할아버지는 창자를 쏟아낼 것 같은 기침과 함께 검은 피를 토하기 시작했다. 그대로 놔두면 할아버지는 금방이라도 죽을 것처럼 보였다. 겁이 덜컥 난 견아는 할아버지에게 붉은 봉지를 건넬 수밖에 없었다.

붉은 봉지는 요술 봉지였다.

그것을 먹자마자 할아버지의 토혈은 거짓말처럼 멎었고, 견아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그때부터 시작되었다. 일단 붉은 봉지를 사용하자 푸른 봉지는 전혀 듣지 않았다. 그날 이후 할아버지의 발작에는 오직 붉은 봉지만이 효과가 있을 따름이었다.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붉은 봉지를 쓰는 주기는 점점 짧아졌다. 발작의 주기가 짧아진 것이다.

그리고 모용 할아버지가 목옥을 떠난 지 한 달이 다 되가는 지금. 할아버지는 하루에도 두어 번씩 붉은 봉지를 비워야만 하는 처량한 신세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봐! 배 형(裵兄)! 이쪽이야, 이쪽!”

견아의 표정이 변했다. 매서운 바람소리에 실려 걸걸한 사내의 외침이 들려온 것이다. 이곳은 워낙 깊은 산골이라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이처럼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날씨라면 더욱 그랬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목옥 문이 활짝 열렸다. 견아는 겁먹은 얼굴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때를 기다렸다는 듯이 집 안으로 밀려들어오는 눈보라, 그것을 등진 채 서 있는 시커먼 그림자 하나.

“우라질! 곱살한 계집애라도 하나 있길 바랐는데, 이건 다 죽어 가는 늙은이하고 애새끼뿐이잖아?”

대뜸 귀에 거슬리는 육두문자를 퍼붓는 사람은 세모난 가죽 모자를 깊숙이 눌러쓴 사십 대 장한이었다. 하지만 가시처럼 숭숭 돋아난 턱수염에 허연 눈가루가 얼어붙어 있어서 마치 환갑을 지난 늙은이처럼 보였다.

“늙은이하고 애라고? 젠장!”

턱수염 사내 뒤로 한 사람이 더 나타났다. 어깨에 바람막이를 두른 그 사람 역시 턱수염 사내와 비슷한 나이로 보였다.

“아, 아저씨들은 누구신데 남의 집에 막 들어오시는 거예요?”

견아가 묻자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껄껄 웃기 시작했다.

“꼬마야! 여기 서 계신 이 어르신들은 원래 네 집 내 집 가리지 않는 분들이시다!”

“게다가 지금은 무척이나 배가 고픈 분들이기도 하고!”

턱수염이 말하자 바람막이가 받았다. 그러자 다시 턱수염이 말했다.

“맞아, 배가 무척 고프지! 꼬마야! 네 야들야들한 골통을 와작와작 씹어 먹기 전에 어서 술과 고기를 대령하거라!”

견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애써 흉악한 인상과 거친 말투를 들먹일 필요가 있을까? 허리춤에 찬 두툼하고도 길쭉한 물건이 칼이라는 것을 굳이 확인할 필요가 있을까? 이런 날씨에 산중을 헤매는 사람이라면 절대 평범한 양민일 리가 없는 것이다.

턱수염과 바람막이는 정말로 네 집과 내 집을 가리지 않는지, 목옥 안을 활개를 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선반과 문갑, 항아리 안을 뒤지는 품이 뭔가를 찾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견아는 저들이 곧 실망할 것임을 알고 있었다. 이 목옥 안에 저들의 눈에 찰 물건 따위는 애당초 존재하지 않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과연 턱수염과 바람막이의 얼굴은 금방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뭔 놈의 집구석이 이 따위야? 벌써 어느 놈이 털어 갔나?”

턱수염이 투덜거리자 바람막이가 이죽거렸다.

“잘하는 짓이다! 뭐? 이 길로 가면 국경까지의 노자는 염려가 없다고? 장 형(莊兄)은 항상 이런 식이란 말이야! 쥐뿔도 모르면서 곧 죽어도 아는 척 하기는!”

핀잔을 들은 턱수염의 얼굴이 열병에 걸린 사람처럼 붉으락푸르락해졌다. 그는 바람막이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고개를 홱 돌려 견아를 향해 소리쳤다.

“이 새끼야! 나이도 어린놈이 귀가 먹었냐? 술, 고기를 가져오라는 어른 말씀이 안 들려?”

턱수염은 금방이라도 후려갈길 듯이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견아는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하지만 그때뿐이었다.

견아는 움츠렸던 어깨를 활짝 폈다. 이 흉악한 인간들로부터 병든 할아버지를 지킬 사람은 자기밖에 없음을 깨달은 것이다.

“여기가 술집인가요? 왜 여기서 술, 고기를 찾아요? 그리고 남에 집에 함부로 쳐들어와서 주인에게 이게 무슨 행패죠?”

턱수염의 눈이 왕방울처럼 커졌다. 아이의 당돌한 반응에 놀란 것이다.

“똑똑한 아이로군, 똑똑한 아이야! 장 형보다 훨씬 똑똑한 것 같군! 아주 말 잘했다!”

바람막이는 천성이 원래 그 모양으로 생겨 먹었던지, 또 한 번 야비한 웃음을 지으며 이죽거렸다.

“이……, 이…….”

턱수염은 어깨를 부르르 떨다가 목옥이 떠나가라 큰 소리를 질렀다.

“이 육시를 낼 쥐새끼 같은 놈! 감히 어디서 눈깔을 치켜뜨고 쫑알거리는 거야!”

욕설과 동시에 무자비한 발길질이 견아의 가슴에 꽂혔다. 견아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한 채 허공을 붕 날아 노인이 누운 항에 부딪쳤다.

“이 새끼야! 내가 누군지 알아? 한번 화나면 직정부(直定府) 오만 호(戶)가 벌벌 떠는 장태(莊兌)님이 바로 이 몸이시다! 감히 누구 안전에서 지랄을 떠는 거야, 지랄을!”

턱수염은 한 번 발길질로는 분이 풀리지 않은 듯 계속 씨근덕거렸다.

“괜찮니, 견아야?”

머리 위에서 들려온 할아버지의 놀란 목소리가 견아의 오기를 부채질했다. 견아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하얀 이마에서는 붉은 피가 번지고 있었다. 발길에 채어 나가떨어질 때 항의 모서리에 찧은 것이다.

하지만 주먹을 꼭 말아 쥔 견아의 눈동자에서는 분노의 불똥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가져가고 싶은 건 마음대로 다 가져가! 하지만 할아버지한테 손대면 가만히 있지 않겠어!”

견아는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 늠연한 태도가 턱수염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것일까? 턱수염은 이를 갈며 아이를 향해 다가갔다.

“이 새끼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오냐! 그러면 이 어르신께서 네놈에게 늙은이 모가지를 비틀 때 무슨 소리가 나는지 알려주마!”

아이는 품에서 길이가 반자가량 되는 단검을 꺼냈다.

“멈춰! 다가오면 찌를 거야!”

순간, 턱수염과 바람막이의 눈가에 이채가 스쳤다.

아이가 꺼내 든 단검은 예사로운 물건이 아니었다. 금빛 찬란한 손잡이와 요기가 어린 듯한 검신. 일견하기에도 쉽게 만나보기 힘든 귀물임에 분명했다.

“이것 봐라? 이게 웬 횡재야?”

갑자기 일어난 탐심 때문인지, 턱수염은 어울리지 않는 웃음을 벙긋 지으며 견아를 향해 왼손을 뻗어냈다. 직정부 오만 호를 벌벌 떨게 만드는 장태의 이름이 그저 허풍만은 아닌 듯, 기묘한 각도로 휘어져 날아드는 금나수법은 제법 현란한 것이었다.

“에익!”

견아는 눈을 질끈 감고 단검을 휘둘렀다. 쉭, 쉬익, 하는 매서운 파공성이 단검 끝에서 울려나왔다.

하지만 아무리 단금절옥(斷金切玉)의 보검이라고 해도 열두 살 아이의 손안에 있을 때에는 무딘 나무칼과 별반 다름이 없었다.

턱수염의 왼손이 갈고리처럼 구부러지며 견아의 손목을 낚아챈 순간, 견아는 손목이 부러지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단검의 손잡이를 놓을 수밖에 없었다.

“흐흐! 어때? 내 말이 맞지? 이쪽으로 오면 돈 될 만한 게 생긴다고 말했잖아?”

턱수염은 아이에게 빼앗은 단검을 요리조리 살피며 헤벌쭉이 웃었다. 뜻밖의 횡재에 덩달아 기뻐하던 바람막이는 문득, 손목을 잡고 아파하는 견아를 일별한 뒤 턱수염에게 말했다.

“포쾌가 쫓아올지도 모르는데 이름을 덜컥 밝히면 어떻게 하려고? 국경까지 며칠이 걸리는지도 모르는 판국에…….”

턱수염은 별걱정을 다한다는 듯한 표정으로 바람막이를 바라보았다.

“흐흐, 이 새끼가 내 이름을 고자질할 상대는 포쾌가 아니라 염라대왕일걸?”

턱수염과 바람막이는 동시에 견아와 노인을 바라보았다. 길게 찢어진 그들의 눈초리에는 진득한 살기가 묻어 나왔다.

“보검은 피가 묻지 않는다는데, 어디 한 번 시험해볼까?”

턱수염이 견아를 향해 한 걸음 다가서자, 견아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한 걸음 물러섰다. 도와줄 사람 없는 눈 덮인 산중에서 흉악한 살인대도를 둘씩이나 만났으니, 병든 할아버지를 보호하고자 하는 효심으로 버티는 데에도 한계가 있었다.

이때, 하나의 앙상한 손이 견아의 어깨 위에 얹혔다.

견아는 고개를 돌렸다. 어깨를 짚은 손의 임자는 다름 아닌 노인이었다.

“할아버지……?”

견아의 눈이 커졌다.

할아버지가 모용 할아버지의 등에 업혀 이 목옥에 온 지도 벌써 두 달. 하지만 할아버지는 혼자 힘으로는 전혀 운신할 수 없어 대소변을 처리하는 것조차 견아의 손을 빌려야만 했다. 그런데 지금 이 순간, 할아버지는 혼자 힘으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비록 하나 남은 손으로 견아의 어깨를 짚고 있긴 하지만…….

“대견하구나. 악인들을 앞두고 용기를 내기란 네 나이로는 어려운 일이지. 이젠 됐다. 이제부터는 이 할아버지가 알아서 하마.”

견아에게 다정한 말을 건네는 노인은 놀랍게도 기침을 전혀 하지 않았다. 항상 흐리멍덩하게 풀어졌던 두 눈에서도 은은한 정광이 감돌고 있었다.

“허……, 허허…….”

노인의 등장을 멍청히 바라보던 턱수염이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노인의 신색은 보는 이의 비웃음을 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홀쭉한 양 뺨은 두개골 모양이 그대로 드러날 지경이었고, 아이의 어깨를 짚은 하나 뿐인 손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것처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게다가 다리도 하나뿐이어서, 만일 아이가 어깨를 뺀다면 금방이라도 나동그라질 것처럼 보였다.

“배 형, 저 병신이 하는 말 들었어? 이제부터는 자기가 알아서 한대네.”

하지만 바람막이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는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대감도(大?刀)를 뽑아들었다.

“조심하게. 보통 늙은이가 아닌 것 같아.”

바람막이의 경고가 객쩍은 잔소리로 들렸던지 턱수염은 차갑게 코웃음을 쳤다.

“흥! 배 형은 조심성이 너무 많아 탈이야. 다 죽어 가는 송장을 보고도 벌벌 떨다니.”

턱수염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바람막이는 여전히 신중했다. 강호에서는 노인과 아이, 여자를 조심하라는 격언이 있었다. 바람막이는 지금 이 순간 그 격언을 떠올리고 있는 듯싶었다. 그것으로 미루어 그의 경험은 턱수염보다 훨씬 풍부한 것이 분명했다.

“늙은이! 강호 물을 먹어본 자라면 이름이나 밝혀봐라! 나는 직정부의 배칠락(裵七樂)이다!”

호기롭게 들리는 문성명(問姓名)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일언반구 대꾸도 없이 견아를 향해 말했다.

“저들을 보지 말고 돌아서 있어라.”

견아는 노인의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노인은 사랑하는 손자에게 앞으로 일어날 끔찍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예, 할아버지.”

견아는 노인이 짚고 있는 어깨가 흔들리지 않도록 조심조심 몸을 돌렸다. 그러자 견아의 시선에 노인이 누워 있던 항이 들어왔다.

조잡한 벽돌, 절반쯤 젖혀진 이불…….

어느 순간, 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불 위에 떨어진 몇 개의 붉은 종이들!

그것은 분명히 바구니 안에 들어 있던 약 봉지였다. 모용 할아버지가 함부로 드리지 말라던 바로 그 붉은 봉지였다. 할아버지는 남아 있던 붉은 봉지를 한꺼번에 다 드신 것이다!

“할아버……!”

“돌아서 있으래도!”

견아의 목소리는 노인의 호된 일갈에 쑥 들어가 버렸다.

‘아아!’

견아는 눈앞이 하얘지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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