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쟁선계-116화 (116/421)

(2)

꼬질꼬질한 승포의 소맷자락과 좋은 쇠를 여러 번 정련한 도검이 부딪칠 때마다 쩡쩡거리는 금속성이 터져 나왔다.

“철포수(鐵布袖)에…….”

굳은살이 잔뜩 박인 한 쌍의 주먹은 은은한 금광을 동반한 채 위력적인 경풍(勁風)을 뿜어내고 있었다.

“십 성(十成) 화후의 금강나한권(金剛羅漢拳)이라…….”

마척은 함선육합진(陷仙六合陣) 안에서 살 맞은 멧돼지처럼 좌충우돌하고 있는 추면 걸승을 유심히 바라보며 이렇게 중얼거렸다.

함선육합진은 보운장의 호장대가 자랑하는 대(對) 일인진법(一人陣法)이었다. 보운장을 경호하는 무사 집단 호장대에 이 진법을 처음으로 도입한 사람은 현임 호장대주인 마척이지만, 창안한 사람은 그가 아니라 무양문의 호교십군 중 사군장인 마경도인(魔鏡道人)이었다.

마경도인은 백련교에서 잔뼈가 굵은 원로의 한 사람으로서 성정이 올곧고 문무에 두루 달통하여 교단 내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실로 막중했다. 마척은 그 마경도인의 수제자였고, 지닌바 능력과 스승의 후광에 힘입어 삼십 대 초반부터 사군의 부군장 직에 오를 수 있었다.

그런 마척이 보금자리를 떠나 이 보운장까지 오게 된 것은 순전히 무양문주인 서문숭의 지시 때문이었다. 보운장은 친(親) 무양문 노선을 표명함에 따라 백도의 과격파들에게 표적이 되었고, 이에 서문숭은 책임감 두터운 마척과 사군의 무사 이십 명을 보운장으로 파견, 경비를 담당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따라서 지금 마척의 눈앞에서 어지럽게 돌아가고 있는 함선육합진은 무양문이 자랑하는 절진(絶陣)이라 할 수 있었고, 진법을 펼치고 있는 여섯 명의 무사 또한 무양문이 자랑하는 정예라 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일 각이 지나도록 상처 하나 입히지 못했다 이거지? 과연 달라도 뭔가 다르군. 소림은…….”

이렇게 혼잣말을 중얼거린 마적은 길쭉한 하관 가득 웃음을 지으면서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유달리 팔다리가 긴 탓에 몇 걸음 내딛지 않고도 싸움판에 이른 그는 함선육합진을 구성하고 있던 여섯 명의 수하들에게 짤막한 지시를 내렸다.

“물러서라.”

비록 추면 걸승의 심후한 공력에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긴 했지만, 상관의 지시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형을 학익(鶴翼)으로 변화하며 추면 걸승의 진로를 차단하는 것으로 미루어, 무양문도들이 평소 얼마나 혹독한 단련을 거쳤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진형이 급변함에 따라 추면 걸승과 호장대 사이에는 삼 장 가까운 거리가 생겨났다. 마척은 그 사이로 여유 있게 걸어 들어가며 추면 걸승을 향해 히죽 웃음을 지어 보였다.

“불법을 계도하는 스님마저 자객질에 나서다니 요즘은 참 세상 살기 힘든 모양이외다.”

추면 걸승은 마척을 노려보며 짧게 대꾸했다.

“나는 자객이 아니다.”

대뜸 튀어나온 하대에도 마척은 그다지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에게 하대를 한 적은 무수히 많았지만, 그들 중에서 지금까지 숨 쉬고 있는 자는 극소수에 불과했다.

“호오! 그러면 무슨 이유로 본 장에 난입해 사람을 다치게 했단 말이오?”

“장주를 만나러 왔다. 길을 막으니 힘으로 뚫었을 뿐이다.”

마척은 손가락으로 길쭉한 턱을 북북 긁었다.

“쯧쯧! 그동안 찾아온 자객들도 하나같이 장주를 만나러 왔다고 하더이다. 그래, 천하에 대명이 자자하신 소림에서 장주는 왜 만나려 하시는지?”

소림이라는 말에 추면 걸승은 순간적으로 당황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그는 곧 어깨를 벌리며 사납게 외쳤다.

“나는 오직 내 뜻에 의해 이곳에 왔다!”

“뭐, 그렇다고 칩시다. 그건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니까. 하긴, 자객인지 아닌지도 중요한 것이 아니지.”

마척은 또 한 번 히죽 웃으며 어깨 위로 튀어나온 칼자루를 천천히 잡아갔다.

“중요한 것은 스님께서 와서는 안 될 곳에 왔다는 점이오. 장원에 난입한 백도인은 무조건 베는 것이 내 임무니까.”

비파를 뜯는 듯한 스르릉, 소리가 울리며 사 척이 넘는 장도의 도신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대기 속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그와 동시에, 마척이 지금까지 풍기던 유들유들한 분위기는 서서히 자취를 감추었다. 칼날이 뿜는 예기에 전염되기라도 한 것일까? 마척은 그대로 한 자루의 칼이 되어버렸다.

마척은 거짓말처럼 변모된 얼굴로 추면 걸승에게 선언했다.

“나, 마척이 지금 스님을 베겠소.”

이것이 천지역벽(天地力劈)이란 별호로 복건 지방을 진동해온 마척의 본색. 칼자루를 잡기 전에는 뒷골목 왈패처럼 건들거리지만, 일단 칼자루를 잡은 뒤에는 제 아무리 폭급한 사람이라도 단번에 압도해버리는 무서운 예기를 뿜어낸다.

마척이 본색을 드러내자 추면 걸승의 표정은 조금 어두워졌다.

“나는……, 나는 반드시 왕고를 만나야 한다.”

이 다짐은 너무 나직하여, 마척을 향한 것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향한 것 같았다. 이어, 추면 걸승은 부리부리한 두 눈 가득 정광을 띄며 임전의 태세를 갖췄다.

마척의 눈초리가 조금씩 매서워졌다.

정문에서 이 내원 입구까지의 거리는 어림잡아 백 장. 그 거리 내에 겹겹이 펼쳐진 호장대의 저지선을 뚫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터이다. 그런데도 추면 걸승은 이제 막 싸움을 시작한 사람처럼 강렬한 기파를 풍기고 있었다. 자세를 조금 낮춰 기마세를 취하는 그에게선 수면 위로 갓 끌려나온 잉어 같은 싱싱함을 느낄 수 있었다. 바로 그런 점이 마척의 호전성을 도발하고 있었다.

“차앗!”

격보(擊步).

발끝으로 땅을 찍으며 짧고 강하게 도약하는 동작이었다. 허공에 머무는 동안 극대화시킨 기세는 발이 땅에 닿는 것과 동시에 격렬하게 발출된다. 이른바 하늘과 땅의 힘을 빌려 적을 쪼갠다는 이 천지역벽(天地力劈)의 수법은, 마척이 마경도인에게 전수 받아 수없이 많은 실전을 통해 갈고 닦은 십팔 초 살인도법의 기초였다.

“비키지 않겠다면 힘으로 뚫겠다!”

패앵, 소리와 함께 추면 걸승의 양 소매가 철판처럼 빳빳해졌다. 오른발을 진각(震脚)으로 강하게 굴리며 두 소매를 가위처럼 교차하여 적의 측면을 베어 가는 초식은 철포수의 절기인 심마횡단(心魔橫斷)이었다.

수직으로 떨어지는 장도와 수평으로 교차하는 철포수가 허공의 한 점에서 충돌했다.

까앙!

고막을 찢을 듯한 쇳소리에 주위를 둘러싼 호장대 무사들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찔거렸다. 새파랗게 튀어 오른 불꽃 속으로 마척과 추면 걸승의 얼굴이 악귀처럼 일그러지는 광경이 드러났다. 이어,

빠박! 까가각!

사 척 장도와 철포수는 순식간에 다섯 번이나 부딪쳤다. 쌍방의 기세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뒤엉킬 때마다 불꽃이 폭죽처럼 허공을 수놓았다.

격렬한 첫 합, 그리고 질풍 같은 다섯 합.

도합 여섯 합이 끝나자 두 사람은 사전에 약속이라도 돼 있던 것처럼 한 걸음씩 물러났다. 공교롭게도 쌍방 모두 초전(初戰)을 위해 끌어올린 진기가 소진된 것이다. 이 결과는 두 사람의 공력이 별 차이 없음을 의미하는데, 기세 면에서는 아무래도 실전 경험이 풍부한 마척이 한 수 위였다.

마척은 뒤로 물린 왼발로 땅을 박차며 힘차게 몸을 날렸다. 아무런 변화도 없이 오직 일직선으로 찔러 가는 수법은 응축된 예기를 단숨에 폭출하는 후예사일(后?射日)의 일 초. 공기 흐름의 갑작스런 변화로 인해 칼끝에 작은 회오리가 맺힐 만큼 신쾌하기 이를 데 없는 진격이었다.

급박한 국면을 맞이한 추면 걸승은 합장이라도 하듯 양팔의 하박을 빠르게 모아 인후를 노리고 날아 들어오는 마척의 칼끝을 막았다. 비록 얇은 소맷자락에 불과했지만, 철포수가 운용된 이상 등나무를 세 겹 포개 만든 등패(藤牌)보다 견고하면 견고하지 무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나 찔러온 칼은 점(點)이요, 막아간 소맷자락은 면(面)이었다. 공력의 차이가 없다면, 면으로써 점을 방어하는 일이 효율적일 리 없었다.

쩡!

돌 깨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며, 두 폭을 겹쳐 막은 철포수의 한가운데가 꼬치에 꿰인 산적처럼 통렬하게 꿰뚫렸다.

“어헉!”

추면 걸승은 황급히 상체를 뒤로 젖혔다. 소름끼치는 경풍을 동반한 칼끝이 아슬아슬하게 그의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 순간, 마척의 두 눈에 승리감 어린 살기가 희번덕거렸다. 비록 후예사일의 일 초가 적을 격살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적의 운신을 제한하는 데에는 성공한 셈이다. 이제 초식을 바꿔 칼날 아래 위치한 적의 얼굴을 내리찍기만 한다면, 싸움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그런데 추면 걸승의 대응은 놀랍도록 기민했다. 그는 포개 있던 양팔 하박의 거리를 재빨리 반 자 가량 벌림으로써 상대의 초식 변화를 방해했다. 한 개의 구멍에 걸린 물체는 그 구멍을 지지대 삼아 상하좌우 어느 방향으로나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지만, 반 자 거리를 둔 두 개의 구멍 사이에 걸린 물체는 오직 진퇴밖에 할 수 없음을 활용한 임기응변이었다. 그러면서 오른발을 내질러 마척의 하체를 맹렬하게 쓸어가니, 소림 외가의 관음족(觀音足)이 바로 이것이었다.

권장지퇴(拳掌指腿)의 강맹함으로 말할 것 같으면 천하에서 소림에 필적할 문파는 그리 많지 않았다. 더구나 마척의 장기는 사 척 장도를 통해 발휘되는 장쾌한 도법이었으니, 장도가 봉쇄된 상태로 적의 반격에 대응할 만한 뾰족한 수단이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마척은 장도를 회수하며 두어 발짝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선기를 취한 추면 걸승은 마척을 추격하며 금광이 일렁이는 두 주먹을 번갈아 뻗어냈다.

쏴우우!

문풍지 울리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리는 가운데 금강나한권의 탁세항마(濯世降魔), 사고산문(師叩山門), 불타심인(佛陀心印)의 세 초식이 마척의 요혈을 휩쓸어왔다.

“쳇!”

장도를 요란하게 휘저어 추면 걸승의 권풍을 흩뜨리는 마척의 이마에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묵직하게 밀려오는 주먹 하나하나에는 그야말로 배산도해(排山倒海)의 위력이 실려 있어, 아차 하다가는 뼈가 으스러지기 십상이었다.

그러나 마척이 수비에 치중한 것은 반드시 그 이유 때문만이 아니었다.

아무리 강렬한 기파를 유지하고 있다 한들, 추면 걸승은 이미 한 시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한 차례의 휴식도 없이 악전고투를 치른 몸이었다. 체내에 축적된 피로가 적을 리 없을 텐데, 그런 몸으로 공력 소모가 극심한 금강나한권을 저토록 맹렬하게 전개하고 있으니, 시간이 흐를수록 불리해지리라는 것은 불문가지. 다시 말해 마척의 입장에선 수비가 곧 공격인 셈이었다.

과연 마척의 이런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십여 초의 금강나한권으로도 마척을 쓰러뜨리지 못하자, 추면 걸승은 어쩔 수 없이 공세를 멈추고 폐에 가득 찬 탁한 호흡을 풀어야만 했다. 그 시간은 매우 짧았지만 마척은 결코 놓치지 않았다.

공수가 눈 깜빡할 사이에 전환되었다.

쫙! 쫙!

칼바람 소리가 비단 찢는 것 같았다. 이참에 아예 끝장을 보려는 듯 마척의 장도는 공간을 매섭게 쪼개며 수직으로 떨어졌고, 그것은 철포수의 수비벽을 조금씩 압도하기 시작했다.

칼날이 소맷자락에 걸릴 때마다 추면 걸승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소매 밖으로 드러난 손등에는 지렁이 같은 힘줄이 돋았고, 굳건해야 할 두 무릎은 바람을 만난 버들가지처럼 휘청거리고 있었다. 한 시진의 악전고투로 쌓인 피로감이 마척이라는 강적을 만나 한꺼번에 밀려들었던 것이다.

꽝!

공수 전환 이후 마척으로부터 날아든 일곱 번째 칼질은 마침내 추면 걸승의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리고 말았다. 거무튀튀한 얼굴이 핼쑥하게 질리고, 너덜너덜해진 소맷자락이 양팔에 힘없이 휘감겼다. 내기가 진탕되며 철포수 공력이 풀어진 것이다.

“이제 끝내주겠소!”

마척은 싸늘하게 웃으며 장도를 머리 위로 번쩍 치켜 올렸다. 칼날 아래 놓인 것은 무엇이라도 쪼갤 듯한 자신감에 찬 동작이었다.

패배를 눈앞에 둔 시점, 그 뒤에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추면 걸승은 포기하지 않았다.

사부에게도 알리지 않고 혼자 떠난 길이었다. 보운장 정문 앞에 당도한 뒤에도 닷새씩이나 망설일 수밖에 없었다. 사십 년이란 장구한 세월 동안 그토록 잊으려 애썼던 과거의 흔적을 이제 와 애써 더듬으려 한 까닭은, 옛 영화에 대한 미련 따위가 결코 아니었다. 굶주리는 어린 제자들을 보며 안타까운 눈길로 한숨을 쉬던 사부의 주름진 얼굴이 그로 하여금 머나먼 북경까지 오게 만든 것이다.

생명을 구해주신 은혜도 가없거니와, 부귀와 권세라는 속된 욕망이 골수까지 스며 있던 그가 미처 생각해보지도 못한 삶의 진리를 대자대비의 불심으로써 깨우쳐주신 사부……. 보은이란 말은 언감생심 입 밖에 꺼낼 수도 없었다. 그는 이제껏 사부를 위해 단 한 가지의 일도 해드린 것이 없었다.

여기서 단념할 수는 없었다!

“우와아악!”

추면 걸승은 광인처럼 괴성을 지르며 정수리로 떨어져 내리는 칼날을 향해 두 손을 세차게 휘둘렀다. 전신의 혈맥이 일제히 들끓어 오르며 믿을 수 없을 만치 막강한 경파가 그의 양 소맷자락으로부터 뿜어 나왔다. 수직으로 떨어져 내리던 마척의 장도는 그 경파 사이에 끼여 부러질 것처럼 진동하다가 퉁, 하고 튕겨나갔다.

“어엇!”

칼자루를 타고 올라온 진동이 손목과 팔꿈치는 물론이거니와 어깨 관절까지 일시에 마비시켰다. 마척은 반탄력을 이기지 못하고 주춤주춤 물러나면서도 경악을 금할 수 없었다.

거의 폐인과 다름없다고 여긴 추면 걸승이 무슨 조화로 이런 괴력을 발휘한단 말인가!

“끄아아!”

추면 걸승은 또 한 번 괴성을 내지르며 물러서는 마척을 향해 몸을 던졌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은 이미 그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님을 말해주고 있지만, 그는 추호도 개의치 않는 듯했다. 목구멍 안까지 환히 들여다보일 정도로 입을 쩍 벌린 채 육탄 돌격하는 그의 모습은 승려라기보다는 상처 입은 맹수에 가까웠다.

“미친……! 같이 죽자는 건가!”

마척은 시야를 꽉 채우며 날아드는 추면 걸승을 향해 죽을힘을 다해 일 도를 내리찍었다.

꽝!

엄청난 폭음과 함께, 반짝거리고 자잘한 금속 조각들이 저물어 가는 노을 속으로 비산했다. 그와 함께 마척의 후리후리한 몸뚱이가 시위를 떠난 화살처럼 뒤로 쭉 밀려나갔다. 그의 오른손에 들린 장도는 손잡이 위로 한 뼘 길이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그 위는 동귀어진을 불사한 추면 걸승의 필사적인 공격에 산산조각 나버린 것이다.

싸움은 이렇게 일단락되었다.

추면 걸승은 전장 한가운데 우뚝 서 있었고, 마척은 그로부터 삼 장쯤 떨어진 석등 아래 휴지처럼 처박혀 있었다. 이것만 놓고 본다면 싸움은 추면 걸승의 승리인 것 같았다. 아까 함선육합진을 구성했던 여섯 명의 호장대 무사들도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빠르게 앞으로 달려 나가 추면 걸승을 포위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싸움의 결과는 무승부였다.

“크으……! 큭……!”

기침인지 웃음인지 구분되지 않는 소리가 울리더니, 석등 아래 쳐 박혀 있던 마척의 몸이 꿈틀거렸다.

“대주!”

남아 있던 호장대 무사 몇이 급히 달려가 부축하려 했지만, 마척은 모든 손길을 뿌리치며 오직 자신의 힘만으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의 얼굴엔 몇 개의 자잘한 칼금들이 새겨져 있었다. 칼의 파편에 긁힌 상처였다. 그러나 정작 심각한 것은 해진 옷 사이로 드러난 우측 흉부였다. 추면 걸승이 최후로 전개한 권력은 그의 애도를 박살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오른쪽 갈비뼈마저도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것이다.

“허파도…… 다친 모양이군. 흐으, 흐으……! 숨쉬기가 영…… 거북한데? 하지만…… 스님께서도 무사하신 것 같진 않소이다.”

허파를 다쳤다는 것이 거짓이 아닌 듯, 마척의 말 중간 중간에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섞여 나왔다.

여섯 명의 무사들에게 포위당한 추면 걸승은 마척의 말에도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저 두 눈을 부릅뜨고 입술을 꾹 다문 채 석상처럼 서 있을 뿐이었다.

“대답하기도 힘든 지경인가……? 하긴 그럴 만도 하지…….”

마척은 추면 걸승의 상태를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있었다.

아까의 싸움에서 추면 걸승은 도저히 마척을 이길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 상황에서 추면 걸승이 떠올린 것은, 소림사 내에서도 그 괴이함으로 인해 종종 논란의 대상이 되어온 척마동장(斥魔同葬)의 출잠기(出潛氣)였다. 이 출잠기는 체내의 진원지기(眞元之氣)를 일시에 격발시킴으로써 평소의 갑절이 넘는 힘을 발휘하는 괴공(怪功)이었다. 그러나 동장(同葬)이라는 말이 암시하듯 시전자에게 돌아가는 피해는 막대했으니, 진원에 손상이 가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자칫하면 주화입마에 이를 수도 있는 것이다.

“만일 평범한 비무였다면 이쯤에서 무승부를 인정하고 후일을 기약하는 것이 도리겠지만, 맡은 임무가 엄중하여 도리를 따르지 못하는 것을 이해해주기 바라오.”

마척은 왼손을 천천히 치켜들었다. 그러자 포위해 있던 무사들이 일제히 자세를 낮추며 추면 걸승에게 달려들 태세를 갖추었다. 살기 어린 눈동자와 번쩍이는 창검은 당장이라도 추면 걸승을 난도질해버릴 것 같았다.

추면 걸승의 몸이 가늘게 흔들거렸다. 어깨를 움찔거리는 품이, 아마도 팔을 치켜들어 싸울 자세를 갖추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리였다. 그는 싸울 자세를 갖추기는커녕 만취한 노인처럼 앞뒤로 휘청거리다가 결국 땅바닥에 털버덕 주저앉고 말았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입가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마척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본 장에 난입한 자객들은 하나같이 참수되어 관아로 보내졌지만, 스님만큼은 좋은 관에 넣어 소림으로 보내드리리다. 그 점만큼은 이 마척이 이름을 걸고 약속드리겠소.”

그러고는 치켜든 왼손에 힘을 주니, 이제 저 왼손이 아래로 떨어지면 여섯 자루의 날카로운 병기들이 추면 걸승의 육신으로 후비고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때, 나직하면서도 위엄이 담긴 음성이 마척의 왼손을 멈추게 만들었다.

“마 대주, 잠깐만 기다리게. 저자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군.”

사람들의 시선이 소리가 울린 방향으로 돌아갔다. 내원과 외원을 경계 짓는 태고교(太鼓橋: 북의 표면처럼 상부가 둥글게 휘어진 다리) 위. 머리가 하얗게 센 금포 노인과 머리에 푸른 유생건을 쓴 수재풍의 중년인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었다. 추면 걸승과 마척의 싸움에 사람들의 신경이 온통 쏠린 사이, 싸움판 부근까지 당도한 왕고와 신걸용이 바로 그들이었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호장대 무사들은 왕고를 향해 일제히 허리를 굽혔다. 마척은, 비록 자신의 행사가 방해받은 것에 대해 불만이 없진 않았지만, 두말없이 몇 걸음 비켜섬으로써 왕고의 지시에 따랐다.

왕고는 태고교를 유유히 지나 추면 걸승을 향해 다가왔다. 두 명의 호장대원이 빠른 걸음으로 달려가 왕고의 좌우를 호위했다. 추면 걸승과의 거리가 예닐곱 발짝까지 가까워졌을 때, 왕고는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소림에서 왔다고?”

추면 걸승은 땅을 향해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그 용모의 흉측함이 왕고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들었다.

그런데 한 가지 이상한 점이 있었다. 추면 걸승의 얼굴형, 툭 불거진 뒤통수와 초승달처럼 휘어진 하관이 왕고의 눈에 왠지 낯설지 않게 다가오고 있었다. 그러나 단지 낯설지만 않을 뿐 언제 보았는지, 또 어디서 보았는지는 도무지 기억나지 않았다.

‘중요하지는 않겠지.’

왕고는 가벼운 헛기침으로 심중의 의혹을 가라앉힌 뒤, 조금 큰 목소리로 다시 말했다.

“헐벗고 굶주린다는 것이 그렇게도 견디기 힘든 일일까? 고고하신 소림승까지 참지 못하고 나선 것을 보면 말일세.”

추면 걸승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기이한 감회가 어린 눈빛으로 왕고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할 따름이었다.

저만치 비켜서 있던 마척이 입을 열었다.

“문답이 불필요한 자입니다. 처리는 제게 맡기시고 안으로 드시지요.”

왕고는 마척을 바라보았다. 마척의 심기는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이름도 모르는 침입자와 싸워 불승불패를 이뤘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느낀 듯, 사건 자체를 빨리 끝내버리고 싶은 눈치였다.

사실 왕고에게 있어서 마척이란 존재는, 일면 부담스럽고 일면 고마운 임시 고용인이었다. 그래서 왕고는 마척의 뜻을 존중해주기로 마음먹었다.

“알겠네. 위로금을 따로 지시해놓을 테니 오늘 애쓴 수하들과 술자리라도 마련하게나.”

왕고는 마척과 호장대의 노고를 치하한 뒤, 몸을 돌려 내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추면 걸승의 입에서 쉬고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소림은 영식의 죽음과 아무런 상관이 없소. 소림에 내린 경제 봉쇄를 거둬주시오.”

왕고의 걸음이 우뚝 멈췄다.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추면 걸승을 바라보았다. 추면 걸승의 눈 속에는 여전히 기이한 감회의 빛이 어려 있었다. 그 점이 왕고의 마음을 몹시 불쾌하게 만들었다.

“참으로 간사하군. 막상 먹고살기가 힘들어지니 발을 빼겠다는 얘기인가?”

“영식을 죽인 것은 용봉단이오. 소림은 용봉단과 아무런 연고도 없소.”

왕고는 코웃음을 친 뒤, 곁에 있던 신걸용을 바라보았다.

“신 총관, 소림과 용봉단이 진실로 아무런 연고도 없는가?”

신걸용은 또박또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용봉단이 처음 발호할 때, 소림은 화씨세가의 청년 무사 십 인의 수련을 위해 나한당의 십팔방(十八房) 여섯 군데를 베푼 적이 있습니다. 당시의 교두로는 나한당주 적오를 비롯해 해담(海潭), 해지(海知), 해광(海光), 해장(海藏) 등 해 자 배의 다수가 참가하였지요. 또한, 소림의 속가제자 중 건곤수(乾坤袖) 최위(崔衛), 옥불서생(玉佛書生) 유대선(劉大宣), 관음선자(觀音仙子) 등이 용봉단의 행사에 간접적으로 관여했으며, 소림과 같은 항렬을 사용하는 남파(南派) 보은사(報恩寺)는 금번 무당파에서 회동한 반(反) 무양문 연합에 참가, 향후 용봉단과 생사를 같이 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왕고는 추면 걸승을 향해 냉소의 눈길을 던졌다.

“나, 왕고는 아들의 복수가 끝나기 전까지 상인임을 포기했다. 상인임을 포기한 이상, 이해득실을 따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 그러나 사사로운 복수를 위해 무고한 문파에 피해를 끼칠 만큼 용렬하지는 않다.”

추면 걸승은 말문이 막혔다. 신걸용이 열거한 사항 중 소림이 직접적으로 나선 것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소림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만큼은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저 간인(奸人)이 더 이상 내 집의 공기를 마실 수 없도록 처리하게. 나는 들어가겠네.”

왕고는 마척에게 지시를 내린 뒤,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추면 걸승은 멀어지는 왕고의 등위에 갈등에 찬 시선을 얹었다. 그러다가 마침내 큰 한숨을 내시더니, 그가 과거에 부르던 왕고의 다른 이름을 입 밖으로 꺼냈다.

“보귀(寶鬼)!”

그 짧은 부름은 시퍼런 벼락이 되어 왕고의 정수리에 내리꽂혔다. 왕고의 뇌수는 그 벼락에 의해 잿더미가 돼버린 것 같았다.

왕고는 잠시 동안 아무 생각도 떠올릴 수 없었다.

“바, 방금…… 뭐라고…… 했소?”

한참 만에 추면 걸승을 향해 돌아선 왕고가 가까스로 꺼낸 말이었다. 말투도 어느새 변해 있었다.

추면 걸승은 양 손바닥으로 바닥을 짚고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피와 먼지로 더럽혀진 얼굴을 소매로 스윽 훔친 뒤, 옷매무새를 정히 가다듬었다. 그러자 그로부터 기이한 위풍이 풍겨 나왔다. 호장대의 저지선을 뚫을 때와도 다르고 마척과 박투를 벌일 때와도 다른, 후천적이라기보다는 선천적인 것에 가까운 무엇인가가 다부진 어깨 위로 떠오른 것이다.

“그럴 리…… 없어. 이건……, 이건 아니야.”

왕고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까 추면 걸승으로부터 비롯된 심중의 의혹이 순식간에 격랑처럼 불어나, 이젠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만큼 사납게 그의 영혼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추면 걸승은 깊은 바다처럼 많은 사연이 담긴 눈동자로 혼란에 빠진 왕고를 응시하다가 입술을 떼었다. 그의 비틀린 입술 사이로 흘러나온 것은 한 수의 시였다.

태어나 반 줄 글도 읽지 않은 몸이

그저 움켜쥔 황금으로 귀함을 샀구나.

소년이 언제까지 소년일 수 있으랴.

흰머리 주름진 얼굴이 기다릴 따름인데.

生來不得半行書 只把黃金買身貴

少年安得長少年 髮白面鄒專相待

왕고의 전신이 풍이라도 맞은 늙은이처럼 와들와들 떨리기 시작했다. 그가 저 시를 처음 들은 것은 지금으로부터 사십여 년 전인 홍안의 시절이었다. 매우 오랜 세월이 흐른 뒤였지만, 그는 저 시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또한 누가 저 시를 읊었는지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천하에 무서울 것이 없던 청년 거상 왕고 앞에서 저런 지독한 풍자시를 태연히 읊을 수 있는 존재는 결코 여럿일 수 없기 때문이다.

추면 걸승은 잠시 두 눈을 감고 아련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뒤틀린 입술이 다시금 달싹거렸다. 그것은 왕고의 귀에만 들리는 전음이었다.

-보귀, 금릉의 만금연(萬錦淵)을 기억하는가? 낙조가 드리울 때면 수면 전체가 만 폭 비단을 펼친 것처럼 황홀한 빛을 머금던……. 그 만금연이 바라보이는 풍정루(風情樓) 위에서 우리는 바둑을 둔 적이 있었지. 우리는 수가 비슷했어. 정신없는 싸움 끝에 아마 내가 두 집을 남겼지? 맞아, 두 집이었어. 하지만 자네도 알고 있었을 거야. 내가 죽은 돌을 세 개 속였다는 사실 말일세. 당시 자네는 구렁이처럼 시치미를 뚝 떼며 오직 진 것만이 억울하다는 듯, ‘졌습니다.’라고 말했지. 교활한 친구 같으니라고. 나는 자네의 속내를 환히 들여다보고 있었어. 내 비위를 거슬러 득 될 것이 없다는 장사치 특유의 셈 빠른 속내를. 그땐 참 자네가 얄미웠네. 속인 건 내 쪽이면서도 오히려 자네를 미워했으니, 나도 그때는 참 어렸지. 그 얄미운 마음으로 지은 시가 바로 그 생래부득반행서(生來不得半行書)였어. 후후! 그 시를 듣던 자네의 얼굴이 참 가관이었던 것으로 기억나는군.

추면 걸승은 감았던 눈을 떴다. 그러고는 이어 말했다.

-그런데 결국 그 시구대로 되어버렸지 뭔가! 나도, 그리고 보귀 자네도 이렇게 발백면추(髮白面鄒)로 늙었으니까.

왕고는 이제 더 이상 몸을 떨지 않았다.

심중의 의혹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러나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의혹보다 훨씬 무서운 것이었다. 천하의 상인 중에서 가장 배포가 크다고 알려진 왕고였지만 이 진실만큼은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무엇보다도, 지금 이 순간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할지를 알지 못했다.

“아미타불!”

왕고를 혼란에 빠뜨린 사람이 추면 걸승이라면, 왕고를 혼란으로부터 구해준 사람도 추면 걸승이었다. 추면 걸승은 이제까지의 태도를 고쳐 왕고를 향해 정중히 합장을 올렸다.

“한번 끊어진 연을 억지로 이으려 한 과오를 용서해 주시길……. 소승의 이름은 망아(望我), 연로하신 사부께서 근심하시는 것을 보다 못해 사바세계의 자비를 구하는 속되고 어리석은 시주승에 불과할 따름이오.”

왕고는 자신을 향해 합장하고 있는 추면 걸승, 망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저 몇 마디 말로써 스스로를 잊은 자, 망아의 내심을 헤아릴 수 있었다.

세상은 이미 오래 전에 변했다. 과거를 되돌릴 수 없는 바에야 망아의 말대로 이미 끊어진 연이라고 생각하는 편이 옳았다. 억지로 이으려 하는 것은 망아에게도, 그리고 왕고 본인에게도 어리석기 짝이 없는 일이다. 망아는 바로 그 점을 깨우쳐주고 있었다.

왕고는 나직이 신걸용을 불렀다.

“신 총관.”

“예.”

신걸용이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금 스무 관을 나귀에 실어 정문 앞에 준비해 두게나.”

“분부대로 시행하겠습니다.”

신걸용은 이의를 달지 않고 즉시 복명한 뒤 자리를 떴다. 영민한 그는 이미 두 사람의 과거 인연이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왕고는 망아를 향해 말했다.

“청하신 대로 본인은 앞으로 소림사를 건드리지 않겠소.”

“대인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망아는 보일 듯 말 듯 웃으며 왕고에게 사례했다. 그 웃음이 왕고의 눈에는 무척이나 허허롭게 보였다. 어쩌면 자신의 허허로운 마음 탓일지도 모른다.

“정문에 가시면 신 총관이 준비한 물건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오. 지난날의 인연에 대한 작은 우의(友誼)로 여겨주시오. 가시는 길, 배웅치 않겠소.”

“아미타불…….”

망아는 들릴 듯 말 듯한 불호를 작별 인사 삼아 몸을 돌리더니, 아직도 어리둥절해 있는 호장대원 사이를 천천히 지나갔다. 부상을 억지로 참고 있었던 탓에 그의 운신은 매우 불편해 보였지만, 얼굴에 감도는 기운만큼은 큰 짐을 벗은 사람처럼 홀가분해 보였다.

“장주! 대체 저자가 누구이기에……?”

마척이 의혹에 찬 목소리로 물어왔지만 왕고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망연한 시선으로, 휘청거리는 걸음걸이로 멀어지는 망아의 뒷모습을 지켜볼 따름이었다.

四十五章 人頭珠珞破三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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