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구와 화왕성을 잇는 길목에 설치된 관문은 현재 금부도에 떨어진 경계령이 얼마나 삼엄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었다.
우선 지형부터가 절험했다. 이제까지 완만히 이어지던 경사가 관문 앞에 이르러 급작스럽게 가팔라지는 탓에 아래로부터의 침입을 방비하는 데 큰 이점이 있을 것 같았다. 또한 길 양쪽에는 인위로 조성한 듯한 둔덕이 담벼락처럼 이어졌고 그 위에는 봉화를 올릴 수 있는 석정(石鼎)이 여러 군데 마련되어 있어, 포구로부터 올라오는 병력이 있다면 관문 앞에 이르기도 전에 그 움직임이 화왕성의 뇌문 수뇌부에게 샅샅이 보고 될 것이다.
그뿐이랴? 급경사를 이용해 아래로 굴리게끔 마련된 통나무들이며 바위들, 그리고 지금은 비록 한편에 가지런히 쌓아놓았지만 유사시 관문의 전방 십여 장을 창칼의 밭으로 만들 수 있는 숱한 거마창(拒馬槍:짧은 창들을 서로 엇갈려 엮어 인마의 통행을 막는 방어용 무기)들은 관문을 깨뜨리는데 커다란 장애로 작용할 것이 분명했다.
이 살벌한 풍경을 살피던 허봉담은 곁에 있는 금청위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소감이 어떤가? 내가 보기엔 고생 좀 하겠는걸?”
금청위는 아무런 대답 없이 발치에 튀어나온 돌부리만 툭툭 걷어차는데, 그 표정이 찌푸린 하늘을 바라보는 노파처럼 의기소침해 보였다. 허봉담이 픽 웃으며 금청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이 사람, 시시하게 이까짓 관문에 주눅 든 건가?”
금청위는 어깨에 얹힌 허봉담의 손을 밀어내며 투덜거렸다.
“내가 주눅 들어 이런 줄 아시오?”
“아니면?”
“저기 아리수가 상대하는 사람이 누구 같소?”
허봉담은 전방을 바라보았다. 관문의 입구에 서서 아리수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람은 각진 얼굴에 왕방울 같은 눈을 지닌 이십 대 중반의 청년이었다. 온화한 낯의 아리수와 상반되게 청년의 표정은 지극히 사무적이었다.
“어제 환영연에서 본 것 같기도 하군. 누군가?”
허봉담이 묻자 금청위가 대답했다.
“고파(古波), 지마한의 큰아들이자 광마대의 부대주이기도 하오.”
“그래? 그러고 보니 눈매가 지마한과 많이 닮았어.”
고개를 끄덕이던 허봉담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게 어쨌다고 이렇게 죽을상인가?”
“젠장! 그러니까 여기는 지마한의 광마대가 담당하는 관문이라 이거요! 가급적 그와는 부딪치고 싶지 않았는데…….”
금청위는 말꼬리를 흐리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허봉담도 한숨을 쉬었다. 그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살다보면 하기 싫은 일과 마주치기도 하지. 지마한을 아끼는 자네 심정이야 이해하고도 남네. 나라고 안 그런 줄 아는가? 하지만 어쩌겠나? 태원부를 출발할 때부터 정해진 일인 것을. 부딪치지 않는다면 다행이고, 만일 부딪친다면 그저 두 사람의 인연이 기구한 탓이거니 생각해야지.”
금청위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땅바닥만 바라보았다. 허봉담은 끌끌, 혀를 차다가 그의 등을 두드려주었다.
“힘내게! 누가 죽고 누가 살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아닌가? 지마한이 그렇게 죽을 수도 있듯이 자네 또한 그렇게 죽을 수도 있는 거야. 그게 바로 강호인이고.”
금청위는 고개를 치켜들고 허봉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만일 지마한과 부딪치는 일이 벌어진다면 단번에 숨통을 끊어주겠소. 남자의 우정을 저버린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선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을 테니까.”
이 말이 어찌나 비장하게 들리던지 허봉담도 울적해지고 말았다. 독하지 못한 남자가 억지로 독해지려고 애쓰는 것은 비극이었다. 하지만 강호란 그런 비극들이 모래알처럼 널린 비정한 백사장. 은인과 원수가, 친구와 적이, 생과 사가 손바닥 뒤집듯 간단히 바뀌는 곳이었다. 강호인에게 있어서 비극은 떨칠 수 없는 업이나 마찬가지였다.
‘망할 놈! 그게 싫으면 밭뙈기나 부쳐 먹고 살 것이지, 애당초 칼자루는 왜 쥐었누?’
관문 입구에서 아리수가 손짓하고 있었다. 까다롭던 통관 절차도 얼추 끝난 모양이었다.
관문은 북쪽 해안으로 통하는 길목에도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체항은 관문과 제법 거리가 떨어진, 차마 길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비탈을 타고 수구산을 내려갔다. 수직에 가까운 가파른 비탈을 폴짝거리며 내려가는 그의 신법은 뇌문 내의 어느 누구와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큼 훌륭했다.
그렇게 수구산을 내려온 체항이 도착한 곳은 섬의 북쪽 해안. 소나무 방풍림을 잰 걸음으로 지나친 그는 곧바로 백사장으로 들어섰다.
낙조가 시작된 백사장은 아름다웠다. 시시각각 짙어지는 노을은 서쪽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해안선을 두드리는 파도는 하얀 포말로 부서지고 있었다.
그 백사장 한복판에 걸음을 멈춘 체항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백사장 끝에 자리 잡은 암석 지대 쪽으로 다가갔다.
체항이 다시 걸음을 멈춘 곳은 촛대처럼 우뚝하게 생긴 커다란 바위 앞이었다. 그는 다시 한 번 주위를 둘러본 뒤 그 자리에 무릎을 꿇었다. 기도라도 드리려는 것일까?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그의 두 손은 바위 아래 흙을 파헤치고 있었다.
하루를 마치는 물새 울음소리가 구슬피 울렸다. 파도 소리는 계속 백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어느 순간, 체항은 땅파기를 멈췄다. 멈추고 싶어 멈춘 것이 아니었다. 목덜미에 들이밀어진 차가운 칼날이 그의 모든 움직임을 멈추게 만든 것이다.
“내 칼보다 빠를 자신이 있다면 허튼 수작을 부려도 좋소.”
체항의 뒤통수 위로 칼날만큼이나 차가운 목소리가 실렸다. 그리고 그것이 절대 불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닭 껍질처럼 쭈글쭈글한 체항의 목 거죽 위에 한 줄기 가느다란 혈선이 새겨졌다.
체항은 시선을 천천히 돌렸다.
“자네…… 살륭하로군.”
차가운 칼날과 차가운 목소리의 주인, 살륭하가 차갑게 웃었다.
“그렇소.”
“그런데 이게 무슨 짓인가! 무엄하게 장로에게 칼을 들이밀다니, 대장로께서 그렇게 가르치시던가!”
딴에는 위엄을 부린 호령이었지만 살륭하는 차가운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러는 장로야말로 여기서 뭐하는 거요?”
체항은 말문이 막힌 듯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살륭하는 칼의 넓은 면으로 체항의 목덜미를 슬슬 문지르며 비아냥거렸다.
“나이도 지긋하신 어른이 두더지처럼 땅굴이나 파고 있다니, 혹시 보물이라도 찾는 중이오?”
“그, 그게 무슨 소린가? 이런 곳에 무슨 보물이 있다고?”
살륭하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는 손을 번개처럼 움직여 칼의 손잡이로 체항의 목 뒤 대추혈(大椎穴)을 내리찍었다. 체항은 헛바람을 들이키며 자신이 판 구덩이에 머리를 처박고 말았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장로는 살 수 있을 것이오. 물론 그럴 리 없겠지만…….”
살륭하는 체항의 혈도 다섯 군데를 연이어 점한 뒤 뒤편 백사장에 던져놓았다. 그러고는 체항이 파던 구덩이 앞에 엎드려 조금 전 체항이 그러했듯 흙을 정신없이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리수마저도 높이 평가해 마지않던 귀인 살륭하.
본래 그는 냉정한 판단력과 끈질긴 인내심을 겸비한 인물이었다. 거기에 오랜 세월 동안 암흑 속에서 도를 수련한 까닭에, 날카로운 안력과 예민한 청력까지도 함께 갖출 수 있었다. 이런 여러 가지 강점들을 골고루 갖춘 그이기에 남을 기만할지언정 남으로부터 기만당하진 않았다. 남을 떠밀어 추락시킬지언정 남의 손에 떠밀려 추락 당하는 일은 겪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한 물건에 대한 욕망은 그의 판단력과 인내심을 송두리째 집어삼켰다. 날카로운 안력과 예민한 청력까지도 마비시켜버렸다. 오늘 그는, 그가 평소 경멸하던 형 치아눈보다 훨씬 어리석고 훨씬 조급했으며 훨씬 부주의했다.
그것은 치명적이었다.
“……!”
정신없이 이어지던 손놀림이 거짓말처럼 멈췄다. 살륭하는 고개를 조금 더 숙여 자신의 아랫배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상하군.”
이상한 일이었다. 이 백사장에는 그와 체항 두 사람뿐이었고, 체항에게 가한 점혈은 믿어도 좋을 만큼 철저했다. 그런데 저게 뭔가? 아랫배를 뚫고 삐죽 튀어나온,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자신의 복강(腹腔)에 들어 있었으리라 여겨지는 피와 살점이 점점이 달라붙어 있는 저 시커멓고도 예리한 쇠붙이는 대체 어디서 연유했단 말인가?
다음 순간, 고통이 시작되었다. 얼음으로 만든 수만 개의 바늘들이 내장 속을 헤집고 다니는 것 같은 무시무시한 고통이었다. 살륭하의 아래턱이 안면에서 떨어져나갈 것처럼 요란하게 떨렸다. 착탈(着脫)이 교차되는 입술 사이로 비명도 아니고 신음도 아닌 괴이한 울부짖음이 끈적끈적한 타액에 뒤섞여 흘러나왔다.
그때 그의 등 너머에서 높낮이가 거의 없는 목소리가 울렸다.
“인체에 있어서 복부는 고통의 바다라고 할 수 있지. 내장이란 눈동자만큼이나 예민한 기관이거든.”
살륭하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온몸의 혈관이 동파되는 지독한 고통 속에서도 저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살륭하는 떨리는 손을 내밀어 곁에 놓아둔 칼을 움켜잡았다. 그에게 귀인이라는 무서운 별호를 안겨준 무서운 칼이었다. 그러나 그 무서운 칼이 지금은, 혼자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가련한 노파의 지팡이처럼, 그저 몸을 일으키는 데 쓰였을 뿐이다.
칼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몸을 일으켜 돌아서는 단순한 동작이 살륭하에게 안겨준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극심한 것이었다. 땀방울이 맺혀 가물거리는 그의 시선 속으로 한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깡마른 체구를 헐렁한 흑포로 가린, 나무껍질처럼 메마른 피부에 터럭 한 올 없는 맨송맨송한 얼굴이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기괴한 사내. 살륭하가 짐작했던 바로 그 사내였다.
“포리……기……하…….”
살륭하가 힘겹게 사내의 이름을 불렀다. 음절 하나를 내뱉을 때마다 혈관이 하나씩 끊어지는 것 같았다.
포리기하라 불린 사내는 한 손에 검은빛이 감도는 단극(短戟) 한 자루를 쥐고 있었다. 한 자 반 남짓한 짤막한 길이에 한쪽 끝에는 날카로운 창날이, 반대쪽 끝에는 보기에도 섬뜩한 갈고리가 달린 괴이한 형태의 저 단극은 이 금부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한 기문병기였다. 정련한 묵철(墨鐵)에 북해에서 생산되는 빙정(氷晶)을 더해 만들었다고 했던가? 본디 두 자루가 한 짝을 이룬다던데 지금 포리기하는 한 자루밖에 지니고 있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한 자루는 어디 있는 것일까?
살륭하는 그 해답을 알고 있었다. 포리기하가 지니지 않은 다른 한 자루의 묵빙단극(墨氷短戟)은 지금 이 순간, 그를 꼬치에 꿰인 산적 신세로 만들어 놓은 것이다.
“자네 같은 사람이 두더지처럼 땅굴이나 파다니, 혹시 보물이라도 찾고 있었나?”
포리기하가 물었다. 아까 살륭하가 체항에게 던진 것과 동일한 질문이었다. 이는 그가 제법 오랜 시간 살륭하의 행동을 지켜보았다는 증거였다.
“네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살륭하가 헐떡거리며 물었지만, 포리기하는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백사장에 널브러져 있는 체항에게 다가갔다.
포리기하가 체항을 일으켜 앉혀놓고 목덜미를 몇 차례 주무르자 체항은 곧 의식을 되찾았다. 의식을 되찾은 뒤에도 얼마 동안, 체항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눈을 끔뻑거렸다. 그러다가 단극에 꿰인 채 힘겹게 서 있는 살륭하를 발견하고는 포리기하를 향해 환호를 질렀다.
“자네 예상대로야! 유인계가 적중했군!”
살륭하는 피가 역류하는 느낌을 받았다. 유인계라니! 누가 누구를 유인했단 말인가?
체항이 살륭하에게 다가왔다. 원숭이처럼 오종종한 얼굴엔 득의의 빛이 가득 차 있었다.
“혹시 낚시를 좋아하는가? 나는 매우 좋아한다네. 특히 물고기가 미끼를 덥석 물었을 때의 기분은 정말로 기가 막히지. 낚시를 안 해본 사람은 절대로 알지 못할 걸세. 한데 오늘 미끼 신세가 되고 보니, 앞으로 낚시를 그만 둬야겠다는 생각이 드는군. 그 심정이 보통 조마조마한 게 아니라서 말일세.”
살륭하는 눈앞에서 오락가락 하는 꼴 보기 싫은 원숭이를 단칼에 베어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쓰러지고 싶은 욕구를 억지로 참으며 체항에게 물었다.
“내 미행에는…… 실수가 없었을…… 텐데……?”
“맞는 말이야. 자네의 미행 솜씨는 아주 훌륭했다네. 어찌나 감쪽같던지 이곳까지 오는 동안 헛수고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더라고.”
“그러면 대체 어떻게……?”
체항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반색을 했다.
“오! 마침 저기 오는군!”
체항을 따라 시선을 돌리던 살륭하는 눈을 부릅떴다. 백사장을 가로질러 오는 험상궂은 인상의 독목(獨目) 중년인, 그 어깨 위에 축 늘어진 여인을 발견한 것이다.
“오례해?”
“피붙이라서 그런지 금방 알아보는군.”
부들부들 떨리던 살륭하의 손목이 툭 꺾였다.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무시무시한 통증이 아랫배로부터 치밀어 올랐지만 그에겐 비명을 지를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 그에게 체항이 말했다.
“나도 아까 신전에 들렀을 때에야 안 일이지만, 오늘 새벽 소집령이 내리기 직전 저 아이가 신전으로 숨어들었다고 하더군.”
“저 아이가…… 왜 그런 짓을……?”
“어? 자네도 몰랐던 모양이지? 제사장 곤필과 저 아이가 예사로운 관계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딴에는 정랑(情郞)을 구출하기 위해 그런 모양이야. 그나저나 자네 질녀는 참 솔직하더군. 포리기하가 솜씨를 보이기도 전에 필요한 정보들을 술술 털어놓았으니 말이야. 덕분에 우리는 자네가 어제 신전에서 뭔가를 알아갔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
살륭하의 두 눈에 시뻘건 핏발이 돋았다. 고통마저 초월하는 거대한 분노에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어리석은 질녀로 인해 자신의 모든 것이 일거에 무너지게 된 것이다. 손톱만큼의 애정도 느끼지 않던, 밉살스러운 형의 씨를 이어받은 질녀로 인해!
“으아악!”
살륭하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대성일갈, 몸을 벌떡 일으켰다. 코앞에 있던 체항이 기겁을 하며 펄쩍 뛰어 물러섰다.
하지만 그것은 살륭하가 할 수 있는 최후의 저항이었다. 분노는 솜뭉치처럼 그의 몸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한 방울의 기력마저 빨아먹었고, 그는 실 끊어진 인형처럼 그 자리에 허물어지고 말았다. 그의 입에서 검붉은 핏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몹쓸 사람 같으니라고. 대화 도중에 그렇게 소리를 지르면 어떻게 하나? 하마터면 간 떨어질 뻔했네.”
체항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태연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자네도 생각했겠지만 나란 사람, 신전이란 곳을 별로 안 좋아하지. 전대 제사장과도 사이가 좋지 않았고 새 제사장과도 마찬가지였지. 그런 내가 이런 시기에 신전으로 들어갔으니 자네의 눈에 예사롭게 비칠 턱이 없었겠지. 암, 그랬을 게야.”
체항은 생각만 해도 즐겁다는 표정으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하지만 이건 몰랐겠지? 우리는 이미 자네가 수상하게 생각하리라는 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포리기하가 그러더군. 해변으로 내려가 적당히 수상한 행동을 해주면 자네가 제 발로 나타나줄 거라고. 덕분에 이 나이에 보물찾기 시늉을 해야만 했지. 솔직히 겁도 났네. 자네의 칼에 목숨을 맡긴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하더군. 그래도 어쩌겠나? 호랑이 새끼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하듯, 자네 정도 되는 사람을 잡으려면 그 정도 위험은 감수해야겠지. 어쨌거나 우리의 예상은 그대로 들어맞았네. 그러고 보면 제 꾀에 제가 넘어간다는 말은 살륭하 자네를 두고 나온 것 같군. 으헤헤!”
하고 싶은 말을 폭포수처럼 지껄인 뒤, 끝내는 내심을 숨기지 못하고 쾌소를 터뜨리는 체항. 그때 포리기하가 물었다.
“할 말이 아직 남았소?”
우쭐해하던 체항은 어깨를 찔끔 움츠리더니, 이내 겸연쩍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포리기하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러면 먼저 곤필에게 가시오.”
“나더러 그냥 가라고? 이자는 어쩌고?”
체항이 살륭하를 가리키며 물었다.
“내가 처리하겠소.”
그 ‘처리’란 단어가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체항을 포함하여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알고 있었다. 체항은 안색이 창백해졌지만 포리기하의 말에 따르지는 않았다.
“아니야. 나도 여기 있어야겠네. 뒤처리를 확인할 필요도 있거니와, 자네가 너무 시간을 끌지 않도록 일깨워줄 사람은 나밖에 없지 않겠나?”
만일 살륭하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정보가 있다면 그것을 들을 권리가 자신에게도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포리기하는 순순히 허락했다.
“좋을 대로 하시오.”
포리기하는 살륭하에게 다가와 마디가 유달리 도드라진 손가락을 뻗어 살륭하의 턱을 움켜잡았다. 살륭하의 얼굴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묵빙단극이 뿜어내는 한기는 이미 장기의 대부분을 얼려버린 뒤였다. 분노의 불꽃마저 소진한 살륭하는 이때에 이르러 도살장에 끌려온 돼지와 다를 바 없는 몰골로 변해 있었다.
포리기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러면 곤란해. 음뢰격의 둘째 아들이 세상에서 찾아보기 힘든 강골이란 얘기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왔는데…….”
포리기하는 붉은 혓바닥을 내밀어 윗입술을 슬쩍 핥더니, 살륭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부탁이야. 내 기대를 저버리지 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