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북경 보운장의 주인 왕고는 천하제일 거상답게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라서 다음 대에도 자신의 후손들이 천하 상권을 좌지우지하는 데 부족함이 없도록 각종 장치들을 안배해 놓았다. 그중 대표적인 장치가 전국 각지의 머리 좋고 패기 있는 청년 상인들을 자신의 보운장에서 추진하는 사업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는데, 강서성의 젊은 미곡상 이사홍李思弘은 그 과정에서 특별히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이사홍의 능력을 일찌감치 알아본 왕고는 보운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자신의 호화로운 침실에서 그가 무릎을 꿇고 복종과 충성을 맹세한 시점부터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금전적, 물질적인 보조는 물론이거니와, 상리商理에 밝고 기장記帳에 능한 서기와 사교계 진출을 위해 필수적이라 할 수 있는 시서가무詩書歌舞 방면의 이름난 풍류 선생들까지 보내 줌으로써 그가 운영하는 대풍곡회大豊穀會가 강서성 굴지의 상회로 성장하는 데 커다란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그가 왕고로부터 받은 가장 큰 지원이라면 뭐니 뭐니 해도 혼맥婚脈이라고 봐야 했다. 왕고의 중신에 힘입어 자그마치 강서성 도지휘사都指揮使씩이나 되는 사람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도지휘사, 혹은 도사都使라면 해당 성의 위소衛所를 총괄하는 군무의 총책임자. 품작도 까마득 높아 정이품이나 되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조금 잘나가는 후발 상인들 중 한 명에 불과하던 이사홍은 그 한 번의 결혼으로써 강서성 권력층의 최중심부로 단숨에 진입하는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이사홍은 영리하면서도 사려 깊은 사람이었다. 비록 천하제일 거상의 중신이 있다 한들, 그의 됨됨이가 변변치 않았다면 심기 깊고 야심 많기로 소문난 강서성 도지휘사가 어찌 자신의 고명딸을 선뜻 내주었겠는가. 그는 자신의 결혼에 깔린 은밀한 내의內意를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고, 이후 여섯 해 반이라는 긴 시간이 흐르는 동안 상위와 장인 간에 오가는 정기적이고도 상례적인 교류를 이용해 북경의 거상과 강서의 군벌을 잇는 암중 가교 역할을 훌륭히 수행해 왔다.
치이-
물기 머금은 생가지가 풀벌레처럼 울었다. 불꽃을 배 밑에 깐 나무껍질 위로 작은 방울들이 고통스럽게 도드라졌다 갈라지고, 그때마다 뿜어진 연기가 모닥불을 시허옇게 맴돌다 여덟 자 위에 넓게 쳐진 검은 유포油布에 부딪쳐 어둠 속으로 스러졌다.
싸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
적석망積石莽이라는 이름이 붙은 붉고 황량한 벌판에는 돌밭을 뚫고 드문드문 자란 몇 그루의 나무들과 그보다 많은 수의 대나무 장대들을 버팀목 삼아 쳐진 십여 장의 유포들이 하룻밤 야숙을 위한 크고 작은 임시 지붕들을 만들고 있었다.
그 유포들 아래에는 한 대의 덮개 있는 마차와 아홉 대의 덮개 없는 수레, 그리고 오늘 하루 그것들을 이끌고 온 이십여 명의 고단한 남자들이 비를 피하고 있었다. 공간이 부족해 유포 아래 들이지 못한 마소들은 인근의 적당한 나무나 돌기둥에 몸뚱이를 바짝 붙인 채 불편하나마 이 밤을 보낼 채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렇게 초경 무렵에 이르자 유포마다 피운 모닥불은 대부분 꺼져 흐릿한 깜부기불만 남은 뒤고, 그나마 모닥불이라 부를 만한 제대로 된 불길을 피워 올리고 있는 것은 가장 큰 유포 아래에 있는 하나에 불과했다. 그 모닥불 가에 둘러앉은 두 사람 중 하나가 갑자기 유포 바깥에 대고 크게 소리를 질렀다.
“오소삼吳小三, 이놈! 지금 졸고 있는 게냐!”
스무 걸음쯤 떨어진 으슥한 곳, 교대 시간이 되는 바람에 방금 잠자리에서 불려 나온 이십 대 땅딸막한 청년이 화들짝 놀란 얼굴로 마차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황급히 떼어 냈다.
“그제 불침번 때도 병든 닭 새끼처럼 꾸벅거리더니만, 이놈이 여전히 정신을 못 차리고!”
팔소매를 둥둥 걷어붙이며 자리에서 일어서려는 그 덩치 좋은 털보를, 모닥불을 공유하고 앉아 있던 염소수염의 초로인이 점잖게 만류했다.
“눅눅한 날씨에 다들 어렵사리 잠든 눈칠세. 혼낼 일이 있거든 지금 큰소리 낼 게 아니라 날이 밝은 연후에 하도록 하게.”
털보는 사색이 된 청년을 향해 ‘아침에 두고 보자’는 식으로 주먹을 흔들어 보인 뒤 치켜든 엉덩이를 다시 바닥에 붙여 놓았다. 그 큼직한 주먹으로부터 적지 않은 것을 배운 듯, 청년은 마차 벽에 기대 세워 둔 불침번용 홍모창紅毛槍을 움켜잡고 숙영지 주위를 부리나케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비가 오니 눅눅하긴 해도 덥지는 않아서 다행입니다. 어젯밤에는 어찌나 지랄 맞게 덥던지, 원.”
털보가 투덜거리자 염소수염이 양손을 반대쪽 겨드랑이 아래에 찔러 넣으며 그 말을 받았다.
“말복이 지났으니 더위도 수그러들 때가 되었지. 그나저나 비 때문에 행보가 더뎌지지는 않을까 걱정이네.”
털보는 유포 너머를 힐끗 올려다보았다. 젖은 양털처럼 무겁고 축축한 밤하늘이 손에 잡힐 듯 낮게 깔려 있었다.
“길게 내릴 비 같지는 않군요. 게다가 여기서 십여 리만 더 가면 잘 닦인 관도가 나오니, 진창에 수레바퀴 빠질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될 겁니다.”
자신 있게 대답한 털보가 모닥불 가장자리에다 걸쳐 말려 놓았던 장작 하나를 불길 속에 꽂아 넣었다. 불길이 새로운 제물 위로 붉고 노란 혓바닥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다행이고.”
하지만 말과는 달리 염소수염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해 보였다. 기다란 나뭇가지로 모닥불을 쑤석거리던 털보가 그 기색을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풍곡창의 주인인 이사홍, 이 대인이 우리 표국에게 가장 중요한 고객들 중 하나라는 점은 잘 알지만 그래도 국주님까지 이렇게 따라오실 줄은 몰랐습니다. 혹시 이번 표행에 제가 모르는 뭔가라도 숨어 있나요?”
염소수염, 강서 일대에서 십칠 년간 표기?旗를 내걸어 온 남창표국南昌?局의 국주 진이립秦理立은 주위를 재빨리 둘러본 뒤 털보에게 속삭이듯 반문했다.
“위소로 올라가는 이번 군량미에 이 대인이 도지휘사 영감께 보내는 생신강生辰綱(생일 선물)이 끼어 있다는 사실은 자네도 알고 있겠지?”
이 반문을 들은 털보, 남창표국의 수석표두이자 진이립의 오랜 심복인 감용甘用이 어이없다는 듯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이 대인이 결혼을 한 이후로 육 년간 말복이 지날 때마다 이번과 똑같은 표물을 운반한 게 바로 전데, 제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똑같지 않네.”
“예?”
“이번에 올라가는 표물은 앞서 올라간 것들과 성격이 조금 다르다는 얘길세.”
“다르다니, 어떻게 다르다는 말씀입니……?”
“목소리를 낮추게. 표사들과 쟁자수들이 들어서 하등 좋을 것이 없을 테니까.”
감용에게 주의를 준 진이립이 엉덩이를 슬쩍 들어 자리까지 가까이 옮기더니 더욱 낮은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소문나면 곤란한 얘기니 자네만 알고 있게나. 이번 생신강에는 북경 보운장에서 보낸 물건이 포함되어 있다네.”
감용의 고리눈이 더욱 휘둥그레졌다.
“보운장이면 천하제일 거상이라는 그 왕고 대인의……?”
“맞아, 바로 그 보운장이지.”
왕고라는 이름에 담긴 무게에 잠시 버거워하던 감용이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하지만 보운장은 자체적으로 표국을 여럿 운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중에는 천하 삼대 표국에 꼽히는 금마표국金馬?局 같은 쟁쟁한 곳도 있는데, 왜 하필 우리 같은…….”
“지방의 군소 표국에게 표물을 맡긴단 말입니까?”라는 뒷말을 생략한 것인 국주인 진이립의 체면을 고려한 때문이리라. 그 속내를 알아챈 진이립이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그만큼 은밀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겠지. 그래서 사위가 장인에게 정기적으로 올리는 생신강에다가 포함시켰을 테고.”
“대체 무슨 물건이기에?”
“금붙이들이 들어 있는 것 같은 패물함 한 짝과 편지 한 통인데, 금붙이들 따위야 왕고 같은 위인에게는 그저 인사치레에 불과할 테고, 정작 중요한 것은 편지 쪽이 아닐까 싶네. 그래서…….”
말을 멈춘 진이립이 입고 있는 무복의 가슴 자락을 슬쩍 들춰 보였다. 무복에 가려진 그의 배 윗부분에는 말가죽으로 만든 복대가 단단히 감겨 있었다. 문제의 편지가 담긴 복대였다.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네만, 우리 표국의 존망이 걸린 일이라는 판단에서 국주인 내가 직접 표행에 따라나서게 된 걸세. 사안이 사안인지라 자네에게도 사전에 귀띔 주지 않은 점, 미안하게 생각하네.”
감용은 호걸풍의 생김새답게 이런 종류의 일로 꽁해지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너털웃음을 흘렸다.
“하하, 그래서 이 고생을 사서 하시는 거였군요. 사안이 중요하면 보안에 주의를 기울이는 게 당연한 일인데 저한테 미안해하실 건 또 뭡니까.”
진이립이 앞섶을 오므리며 빙긋 웃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안 그래도 자네를 위해 따로 생각해 둔 것이 있으니, 감사는 이번 표행을 무사히 끝낸 연후에 하기로 하지.”
“아이쿠, 그래 주시면 저야 고맙……. 엇?”
갑자기 파라락, 하는 날갯짓 소리가 두 사람이 지붕 삼은 유포 자락 아래로 들어왔다. 감용이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며 모닥불을 쑤석거리던 나뭇가지를 허공에 대고 휘저었다. 하지만 유포 아래로 들어온 새까만 덩어리는 불붙은 나뭇가지를 요리조리 피해 가며 두 사람의 머리 위를 맴돌고 있었다.
“저, 저게 대체 뭔가?”
“까마귀……, 아니, 박쥐로군요. 하! 저 정신 나간 놈이 여기가 제집인 줄 알고 기어들어 왔나 봅니다.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당장 쫓아내겠습니다.”
박쥐가 좀처럼 유포 밖으로 나가려 들지 않자 감용이 인상을 쓰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수더분한 인상과 달리 그의 손속은 당초처럼 매운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손때 묻은 자오봉子午棒 대신에 부젓가락으로 쓰던 나뭇가지를 쥐고 있긴 해도 길 잃은 박쥐 한 마리를 쫓아내는 것은 일도 아닐 터였다.
그러나 그 박쥐가 한 마리가 아닌 수백 수천 마리라도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파라라라라라라라락!
가늘게 이어지던 싸리비 소리를 순식간에 덮어 버린 요란한 날갯짓 소리가 남창표국의 야숙지로 밀려들었다.
“기상! 모두 기상!”
밖에서 불침번을 서던 오소삼의 고함 소리마저도 순식간에 먹힐 만큼 엄청난 기세였다.
“이런!”
사태의 심각성을 그제야 깨달은 진이립과 감용이 개인 봇짐에 꽂아 두었던 병기를 뽑아 들고 유포 밖으로 달려 나갔다. 유포 바깥쪽 비구름 덮인 밤하늘은 작고 까만 폭군들에 의해 이미 점령당한 뒤였다.
“어이쿠!”
“저, 저게 다 뭐야?”
난데없는 소동에 놀란 표사와 쟁자수 들이 병기를 뽑아 들고 잠자리에서 속속 뛰쳐나왔다. 그들을 향해 진이립이 외쳤다.
“박쥐 떼다! 잠자리를 찾아 날아온 모양이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대처하라!”
“창이나 봉처럼 긴 무기를 사용해!”
감용이 뒤따라 외치며 일곱 자 길이의 자오봉으로 허공을 힘껏 휘저으니 철썩, 하는 묵직한 소리와 함께 갓난아기 몸통만 한 박쥐 한 마리가 봉대에 걸려 곤죽이 되어 버렸다. 여기에 용기를 얻은 표사와 쟁자수 들이 저마다 쥐고 있던 병기들을 닥치는 대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쥐새끼 같은 놈들이 감히 어르신들의 단잠을 방해해!”
“에잇! 죽어라, 요놈!”
야심한 시각에 갑작스럽게 닥친 일이라 놀랍고 두려웠을 뿐이지, 머릿수가 아무리 수십 배에 이른다 한들 벌레들이나 잡아먹고 살던 조그만 미물이 어찌 훈련받은 인간을 당할 수 있으랴.
빨래를 후려치는 듯한 철썩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분주히 이어지더니, 얼마 후 야숙지 위를 가득 메우던 박쥐 떼는 백여 마리의 동족들을 바닥에 버려둔 채 나타날 때와 마찬가지로 밤비 속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시간으로 따지면 반각이나 채 되었을까. 그리 길지 않은 소동이었지만 인간의 정신을 쏙 빼놓는 데에는 부족함이 없었다.
‘아차!’
얼굴에 묻은 박쥐 피를 소매로 닦아 내던 진이립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이사홍의 생신강과 보운장의 패물함이 실린 마차 쪽으로 급히 달려갔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만에 하나 조금 전의 박쥐 소동이 누군가에 의해 의도적으로 조장된 것이라면, 그자의 목적은 저 마차에 실린 표물에 있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마차 안의 표물들은 무사해 보였다. 그것들 중에서 가장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그래서 생신강 궤짝들 틈바구니 깊숙한 곳에 눈에 잘 띄지 않도록 끼워 넣은 보운장의 패물함을 꺼내어 겉을 감싼 오색의 비단 보자기까지 열어 본 진이립은 패물함의 뚜껑을 봉한 대풍곡회의 인장이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다시 보니 약간의 변화는 있는 듯했다. 패물함 바닥과 비단 보자기 사이에 깔린 넓적한 물체를 발견한 진이립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게 뭐지?”
패물함을 들춰 보니 전표만 한 크기의 넙데데한 판때기 하나가 나왔다. 하지만 표면에 얇은 밀랍 막이 도포되어 있어서 안에 든 것이 무엇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진이립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패물함은 생신강 중에서도 특별히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대풍곡회의 주인 이사홍은 표국주인 자신이 보는 앞에서 봉인지를 붙인 뒤 오색의 비단 보자기를 꺼내어 손수 포장하기까지 했다.
‘그때 이 밀랍 판때기도 함께 포장했던가?’
필시 주의를 기울이고 봤을 터인데도 알쏭달쏭, 있던 물건 같기도 하고 없던 물건 같기도 했다.
사실 표국과 협의하여 장부에 기재하지 않은 물건은 표물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것이 이 바닥의 오랜 관행이었고, 그래서 누군가 저 물건을 슬쩍한다고 해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을 터였다. 하지만 진이립은 감히 그럴 수 없었다. 물건을 보내는 사람이나 물건을 받는 사람이나, 그의 입장에서 보면 허튼수작을 부려 볼 만한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마차의 열린 문밖에서 감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왜 그러십니까, 국주님?”
“음, 아무것도 아닐세. 다행이 표물에는 별문제 없는 것 같군.”
진이립은 풀어헤친 비단 보자기로 판때기와 패물함을 꼼꼼히 재포장한 뒤 본래 있던 자리에 끼워 넣었다. 그의 오랜 경험으로 미루어 보면, 장부에 기재된 물건이 사라지지 않은 이상 별문제 없는 것이 맞았다. 장부에 없던 물건이 생겨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생각해 보니 그 또한 문제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의 입장에서는 받은 대로 가져다주면 될 뿐.
“그놈의 박쥐들 때문에 욕봤네. 어서 주변을 정리하고 사람들을 다시 재우도록 하게. 내일은 오늘보다 먼 거리를 움직여야 할 것 같으니까.”
“알겠습니다.”
진이립의 말에 감용이 싹싹하게 대답했다. 따로 지시를 내리지도 않았는데 표사와 쟁자수 들은 진창에 널려 있는 박쥐의 사체들을 알아서 치우는 중이었다. 하긴 비 냄새에 섞인 고약한 피비린내만으로도 머리가 아플 지경이었으니, 저 구역질나는 물건들 틈바구니에서 눈을 붙이고 싶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육벽陸碧은 한 성의 군무를 총괄하는 도지휘사답게 더위가 가시지 않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번쩍거리는 전포 차림으로 진이립을 맞이했다. 그런 육벽을 향해 장황하지는 않지만 공손하다는 느낌은 충분히 받을 만한 정중한 인사를 올린 뒤, 진이립은 말가죽 복대 속에 품어 가져온 두 통의 편지를 꺼내 눈썹 높이로 내밀었다. 한 통은 대풍곡회의 젊은 미곡상이 존경하는 장인에게 보내는 것이요, 다른 한 통은 북경의 천하제일 거상이 강서성의 군권자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육벽은 굳이 자리를 비켜 달라고 하지 않았다. 진이립을 앞에 세워 두고 두 통의 편지를 읽는 내내 그의 각진 얼굴에는 아무런 변화의 기미도 떠오르지 않았다.
잠시 후 육벽은 실내등으로 서탁 위에 밝혀 둔 유리 등롱의 뚜껑을 열고 두 통의 편지를 가져다 댔다. 여름철 습기에도 먹물이 번지지 않도록 동백기름을 얇게 먹인 유선지油扇紙는 금세 불길에 휩싸였다. 불길이 두 통의 편지를 남김없이 집어삼키는 모습을 묵묵히 내려다보던 육벽이 이윽고 진이립을 향해 몸을 돌렸다.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 위로 사무적인 친근함이 떠올랐다.
“원로에 수고가 많았네.”
진이립은 다시 한 번 허리를 굽혔다.
“표기를 내건 사람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 수고라고 하시면 황송할 따름이지요.”
“연말쯤에는 거처를 남창으로 옮길 듯하니 내년부터는 진 국주가 일 보기에 한결 쉬워질 걸세.”
육벽은 남창에서 멀리 떨어진 이곳 위소 인근에 거처를 두고 있었다. 만일 저 말대로 남창으로 이사를 한다면, 군량미를 운반하는 일감이야 그대로겠지만 생신강을 운반하는 일감은 날아가게 되는 셈이었다. 배보다 큰 배꼽이 떨어지게 되었으니 서운하지 않다면 거짓이겠지만, 진이립은 그런 마음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도록 주의하며 육벽의 말에 호응해 주었다.
“축하드립니다. 마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군요.”
“안 그래도 그 사람 때문에 결정한 일일세. 늘그막에 외지고 거친 곳에다가 데려다 놨다고 어찌나 등쌀이 심하던지, 원. 다행히 북문로 인근에 저택을 마련할 수 있을 것 같으니, 이제는 그 사람도 별소리 못하겠지.”
남창성 북문로라면 세도가들만이 모여 사는 부촌 중에서도 부촌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번 생신강을 보낸 이사홍의 부귀가富貴家도 바로 그 북문로에 자리 잡고 있었다.
진이립은 육벽의 말을 들으며, 지금은 재로 변해 버린 보운장의 편지에 무슨 내용이 적혀 있는지 짐작하게 되었다. 장사란 주는 것이 있으면 받는 것도 있는 법. 왕고는 북문로의 저택을 제공하는 대가로 강서성 도지휘사에게 무엇을 요구했을까?
“사위가 편지에 쓴 물건이 바로 이건가?”
바닥에 놓인 다른 궤짝들과는 달리 서탁 위에 얌전히 올려놓은 비단 보자기 꾸러미 위에 슬쩍 손바닥을 얹으며 육벽이 물었다. 물론 이사홍이 쓴 편지를 직접 읽어 보지는 않았지만 저 말의 행간을 읽어 내기란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흠.”
육벽이 비단 보자기의 매듭을 풀자 보운장에서 보낸 패물함과 그 밑에 깔린 밀랍 판때기가 모습을 드러냈다. 진이립이 그랬던 것처럼 후자는 무척 의외인 듯, 육벽의 눈썹이 미간 쪽으로 모였다.
“무슨 물건인데 이리 밀랍봉까지 해 놓았을꼬?”
붓통 안에 들어 있던 절지용切紙用 대나무 칼로 판때기 위에 도포된 밀랍의 가운데 부분을 조심히 그어 내린 육벽이 어느 순간 나직한 탄성을 흘렸다.
“호오.”
“엇!”
하지만 이를 지켜보던 진이립은 조금 다른 의미에서 짤막한 경호성을 터뜨리고 말았다. 밀랍이 떨어져 나가며 모습을 드러낸 물건의 정체가 황금으로 만든 박쥐였기 때문이다.
그 금편복金??을 보고 있노라니 진이립으로서는 이틀 전 적석망에서 표국 사람들의 잠을 설치게 만든 박쥐 소동이 자연스럽게 떠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박쥐 소동 다음에 나타난 물건이 하필이면 박쥐 모양을 한 금붙이라니, 무척이나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음? 표정이 왜 그런가?”
육벽의 물음에 진이립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예상치 못한 시점에 대면하게 된 금편복으로 인해 지금 자신이 강소성의 실세와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을 잠시 망각했던 것이다. 그는 경직된 입가를 얼른 풀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집안에 거는 종이 박쥐는 많이 보았지만 황금으로 만든 박쥐는 처음 보는지라…….”
“아하, 괘복자掛?子, 掛福子로 쓰라고 보낸 물건이었나? 그래서 수실이 달린 게로군.”
괘복자는 복을 부르기 위해 집 안에 걸어놓는 장식물로서, 복을 뜻하는 ‘복福’ 자와 박쥐를 뜻하는 ‘복?’ 자의 발음이 같다는 점에 착안한 어떤 옛사람이 만들어 낸 일종의 미신이요, 부적이기도 했다. 육벽은 정교하게 세공된 금편복의 다리 부분에 걸린 색색의 수실을 손가락으로 펼쳐 보았다.
“세심도 하지. 박쥐처럼 거꾸로 걸어 놔라 이 뜻이겠지?”
괘복자란 게 원래 거꾸로 매다는 물건이었다. 그래서 장사를 하는 가게의 입구나 웬만큼 산다는 사람의 침실에 들어가 보면 거꾸로 매달린 박쥐 ‘복’ 자나 복 ‘복’ 자를 흔히 발견하게 된다. 이를 형상화한 종이 박쥐도 물론 거꾸로 매단다.
“황금으로 만든 괘복자라니, 침실에 매달아 놓으면 안사람 눈이 휘둥그레지겠군. 흐음, 내 취향은 아니네만 수실에 배여 있는 사향 냄새도 여자들에게는 꽤나 먹혀들 테니 말일세. 안 그런가?”
“그렇군요.”
진이립이 코를 조심히 벌름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실을 사향 향수에 절였는지, 금편복이 등장한 뒤로 실내에는 날콩 비린내를 닮은 기묘한 향기가 감돌고 있었다. 천하제일 거상으로부터 받은 귀하면서도 세심한 선물에 기분이 고양된 듯, 표정 없기로 유명한 육벽의 입가에 흡족한 미소가 걸렸다.
이유야 어떻든 간에 고객이 저리도 즐거워하고 있으니 진이립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럼 다른 표물들도 확인해 주시겠습니까?”
진이립이 표물의 목록들이 적혀 있는 장부를 내밀며 청하자 육벽이 손을 가볍게 내둘렀다.
“진 국주와 한두 해 거래해 온 것도 아닌데 번거롭게 확인은 무슨. 알아서 잘 가져왔겠지. 수령증이나 주시게.”
“도지휘사님의 뜻이 그러시다면…….”
진이립은 미리 준비해 온 수령증 두 장을 서탁 위에 나란히 펼쳐 놓았다. 육벽은 그것들의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일필휘지로 써 넣음으로써 수결을 마쳤다.
두 장의 수령증을 꼼꼼히 살펴본 진이립은 한 장을 육벽 쪽으로 밀어 놓고, 남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장부 사이에 끼워 넣었다.
“이것으로 금번 양곡 운송 표행을 마무리하겠습니다. 저희 표국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진이립은 사무적이면서도 정중한 말로써 업무가 끝났음을 고했다. 육벽이 서탁 서랍에서 비단 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덕분에 매년 이맘때마다 사위 자식의 효도를 받는 복을 누리는군. 남창으로 돌아가거든 고생한 아랫사람들에게 술자리라도 한번 열어 주게나.”
엉겁결에 받아 보니 묵직한 무게가 은정전恩情錢치고는 예사롭지 않은지라 진이립은 두어 차례 사양하는 시늉을 보여야만 했다. 물론 예의상 해 보는 것이 너무도 확연한 그 사양이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덕분에 진이립은 육벽만큼이나 흡족한 마음으로 도지휘사의 집무실을 나설 수 있었다.
다음날 인시寅時(오전 3시~5시) 초.
위소 인근 마을에 자리 잡은 도지휘사의 사택이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로 허름한 이륜 수레 한 채가 삐거덕거리는 바퀴 소리를 내며 올라가고 있었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체구가 작고 등이 조금 굽은 사내였다. 커다란 방갓을 깊숙이 눌러쓴 탓에 사내의 얼굴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내가 끄는 이륜 수레 위에는 가운데 부분이 불룩한 둥근 나무통 하나와 서궤처럼 보이는 네모난 상자 하나가 실려 있었다.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인지 그것들은 굵은 동아줄과 수레 양 측면에 달린 여섯 개의 쇠고리들에 의해 단단히 고정되어 있었다.
언덕 마루에 다 오른 사내는 인근에 웃자란 억새 수풀 속에 수레를 감춘 뒤 동아줄을 풀기 시작했다. 반 각가량을 허비하여 동아줄을 다 푼 사내는 우선 둥근 나무통을 수레에서 내렸다. 나무통이 흔들릴 때마다 그 안에서는 쥐의 울음소리를 닮은 찍찍거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울려 나왔다.
나무통을 땅바닥에 세워 놓은 사내가 손바닥으로 나무통의 뚜껑을 탁탁 내리쳤다.
“보채지 마라, 이놈들아. 조금만 기다리면 너희들을 미치게 만들어 줄 그 여왕님을 만나게 될 테니까.”
이 소리를 알아들었는지 찍찍거리는 소리가 잦아들었다. 어쩌면 나무통의 흔들림이 멈춰서일지도 몰랐다.
다시 수레로 돌아간 사내가 앞서와는 판이한 조심스러운 손길로 네모난 상자를 들더니 나무통 옆에 있는 편편한 바위 위에 내려놓았다.
“슬슬 시작해 볼까.”
사내가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밀폐된 공간 안에 갇혀 있다가 공기 중으로 확 풍겨 올라온 짙은 초석과 유황 냄새가 사내의 코를 벌름거리게 만들었다.
상자 안에는 기다란 끈에 어른 주먹만 한 가죽 주머니가 묶여 있는 기이한 물건들이 잔뜩 들어 있었다. 얼핏 보면 애꾸가 상한 눈을 가릴 때 쓰는 안대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사실 그 물건의 용도는 복대였다. 복대는 복대이되 인간보다 훨씬 작은 짐승의 배에 두르도록 만들어진 특수한 복대.
사내는 상자에서 꺼낸 복대들을 바위 위에 죽 늘어놓았다. 다음은 나무통. 사내가 나무통의 뚜껑을 열었다. 서늘한 새벽 공기가 나무통 안으로 흘러들자 찍찍거리는 울음소리가 다시 한 번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자, 누구부터 할까.”
손바닥을 비비며 나무통 안을 들여다보던 사내는 이윽고 오른손을 통 안에 집어넣어 작은 짐승 하나를 꺼냈다. 머리 부분에 두꺼운 공단으로 만든 주머니를 뒤집어쓴 그 짐승의 정체는 다름 아닌 박쥐였다.
나무통 바깥으로 꺼내진 박쥐는 땅바닥 위에 내려놓아도 날개를 접은 채 얌전히 앉아 있을 뿐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사내는 그 이유를 잘 알고 있었다. 반향정위反響定位라 하여, 박쥐는 외부를 향해 특수한 소리를 발사한 뒤 그 반향을 통해 자신의 위치를 결정한다. 때문에 지금처럼 두꺼운 천으로 머리를 덮어 놓으면 반향을 포착하는 능력이 사라져 본능적으로 움직이려 들지 않는 것이다.
사내는 박쥐의 몸통에다 복대 하나를 묶기 시작했다. 가죽주머니가 배 부분에 오도록 고정시킨 뒤 몸통과 양 날갯죽지에 끈을 친친 감아 매듭까지 동이자, 갑갑함을 느꼈는지 박쥐가 낮은 울음소리를 몇 차례 냈다. 그러나 박쥐가 보인 저항은 그게 전부였다.
“하나는 됐고…….”
시간이 갈수록 머리에 공단 주머니를 쓰고 배에 복대를 두른 박쥐의 수가 늘어났다. 인형에게 옷을 입히는 소꿉장난 같은 그 작업에 사내는 온 심혈을 기울였고, 그로 인해 나무통 안에 있던 스무 마리 박쥐 모두에게 복대를 다는 데에는 반 시진에 가까운 시간이 소요되어야만 했다.
작업을 다 마친 사내가 구부리고 있던 허리를 오랜만에 펴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묘시로 접어드는 시각. 앞으로 반 시진 후면 동이 틀 터였다. 생각보다 시간이 걸리기는 했지만 위소의 기상 시간까지는 아직 반 시진이 남았으니 때를 놓친 것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잠에서 깨어나기 반 시진 전이 가장 흐트러지기 쉬운 시간이니 오히려 적기라고도 할 수 있었다.
사내는 가까운 곳에 앉아 있는 박쥐 한 마리를 붙잡아 머리에 씌워 놓은 공단 주머니를 벗겨 냈다. 개와 돼지와 쥐의 특징들을 한데 섞어 놓은 것 같은 작고 사악한 얼굴이 미명의 어둠 속에 모습을 드러냈다.
갑작스러운 환경 변화에 놀란 듯 잠시 굳어 있던 박쥐가 완두콩만 한 눈알에 비해 지나치게 커 보이는 코와 귀를 부산스럽게 쫑긋거리기 시작했다. 사내는 놈이 저러는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놈과 같은 날짐승의 입장에서는 그리 멀다 할 수 없는 곳으로부터 풍겨 오는 어떤 냄새를 맡았기 때문이리라.
카악!
박쥐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며 몸뚱이를 세차게 뒤챘다. 냄새가 놈을 슬슬 미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가라.”
사내가 움켜쥐고 있던 손가락을 펼치자 손 안에 있던 박쥐가 기다렸다는 듯이 밤하늘로 날아올랐다. 몇 번의 거친 날갯짓으로 자유를 확인한 놈이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날아가는 방향에는 강서성 도지휘사가 새벽잠에 빠져 있는 커다란 사택이 자리하고 있었다.
“너희들도 뒤처지고 싶지는 않겠지?”
사내는 자비심 많은 판관처럼 남은 열아홉 마리 박쥐들에게도 차례대로 자유를 안겨 주었다. 머리를 덮고 있던 공단 주머니가 제거된 놈들은 뒤처지면 큰일이라도 날세라 첫 번째 박쥐를 좇아 역동적인 비행을 시작했다.
서역의 사막 지대에 사는 박쥐들 중에는 특이하게도 개미나 벌처럼 한 마리 여왕 박쥐를 중심으로 군락을 이루는 종이 있다. 여왕 박쥐를 포함한 암컷들은 그 두 배가 넘는 수의 수컷들과 구별된 다른 동굴에서 살아가는데, 이는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새끼들을 포악한 아비 군群들로부터 보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번식기는 일 년에 두 차례. 이때가 되면 여왕 박쥐는 배설물을 통해 독특한 분비물을 내보내고, 이에 자극받은 수컷들은 오랜 금욕 생활을 깨트리고 암컷들이 머무는 동굴로 날아들기 시작한다. 여왕 박쥐의 분비물이 암수 박쥐들의 합방을 알리는 환합주歡合酒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여왕 박쥐의 분비물은 사향노루의 그것만큼이나 강렬하면서도 자극적이어서 사막 지대의 여인들에게는 가장 인기 좋은 향수 재료로 알려져 있다. 하여 공처가를 왕으로 둔 어떤 왕국에서는 군대를 정기적으로 파견하여 박쥐의 서식지를 수색한다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바로 그 분비물에 오랜 시간 절여 놓은 수실이 언덕 아래 도지휘사의 사택 안에 있었다. 어제 하루 강서성 도지휘사 육벽의 기분을 흡족하게 만들고 그 마나님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든 박쥐 모양의 황금 괘복자는, 기실 그 수실을 침실 안에 자연스럽게 들여놓도록 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물건이었다.
부차적으로 딸린 재료가 황금인 만큼 제작비는 만만찮게 들었지만 사내는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사내가 주인으로 섬기는 산로의 뒤에는 그만한 제작비쯤 가볍게 지원해 줄 수 있는 든든한 후원자가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사내가 날려 보낸 스무 마리의 발정 난 박쥐들은 그 수실에 생식기를 꽂아 넣기 위해 맹목적으로 돌진할 것이다. 그것은 말 그대로 목숨을 건 구애. 왜냐하면 놈들이 두르고 있는 복대의 주머니 안에는…….
쾅! 퍼퍼펑!
스무 마리 박쥐들을 삼킨 사택의 중심부에서 요란한 폭음과 함께 시뻘건 불길이 솟구쳐 올랐다. 스무 개의 복대들에 채워져 있는, 동서양을 망라한 각종 화기술에 달통한 사내가 발명한 황린소이분黃燐燒夷粉에는 열 근도 안 나가는 박쥐가 몸을 부딪치는 충격에도 어김없이 반응할 만큼 감도 높게 제작된 기폭 장치가 연결되어 있었다. 오늘밤 박쥐들을 미치게 만든 번식 본능의 대가는 이렇듯 값비쌌다.
도지휘사의 사택에서 폭음과 불길이 치솟자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던 위소 둔영이 막대기로 쑤셔 놓은 벌집처럼 소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나팔소리와 북소리가 요란히 울리는 가운데 수십 개의 횃불들이 어지러이 움직이더니, 잠시 후 둔영의 목책이 열리고 십여 기의 기마들과 그 다섯 배가 넘는 병사들이 허둥지둥 달려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언덕 위에 앉아 그 모습을 감상하던 사내가 엉덩이를 툭툭 털며 일어나 빈 나무통과 상자를 다시 수레에 싣기 시작한 것은 그 즈음이었다.
정리해 보면, 사내가 육벽을 노리기 시작한 것은 무양문이 발호한 직후인 이달 초순 무렵이었다.
육벽은 사내가 주인으로 섬기는 산로에게, 보다 정확히 말하면 산로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후원자에게 위험 요소가 될 공산이 큰 인물이었다. 그는 몇 년 전부터 북경의 보운장과 선이 닿아 있었고, 보운장의 주인 왕고가 그를 상대로 수차례 크고 작은 성의를 보인 데에는 지금과 같은 격변기에 적절한 군사적 도움을 받으려는 의도가 숨어 있었다. 산로와 산로의 후원자는 왕고의 안배가 현실로 이어지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내를 파견했다.
사내는 언덕 아래 불타는 사택을 다시 한 번 돌아보았다. 불길은 오래지 않아 잡힐 것이다. 저만한 양의 황린소이분이면 황제와 황후가 잠자는 교태전交泰殿이라도 한 식경 안에 능히 전소시킬 수 있었고, 위소 인근에 지어진 도지휘사의 사택이란 게 추가로 태울 만한 건물들을 주렁주렁 달고 있을 만큼 호화롭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황린소이분의 폭발적인 화력이 장마철 홍수만큼이나 모든 것들을 무자비하게 쓸어가 버린다는 사실은 사내가 이전에 행한 몇 차례의 작업들을 통해 훌륭히 입증된 바 있었다. 때문에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원형을 파악할 수 없는 잿더미 외에는 어떠한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폭약을 안고 뛰어든 조그만 구애자들의 사체도, 그 구애자들을 끌어들인 향기로운 수실과 황금 괘복자도,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사내가 지난 스무 날 동안 목표로 삼아 온 강서성 도지휘사의 목숨까지도.
억새 풀숲에 숨겨 두었던 이륜 수레를 끌어내던 사내는 잠시 손길을 멈추고 생각해 보았다. 지방 관아의 어수룩한 추관이며 포쾌들 따위가 이번 화재 사건의 이면에 누군가 오랜 시간 공을 들여 추진한 정교한 살인 계획이 감춰져 있다는 사실을 알아낼 수 있을까? 사내가 씩 웃었다. 그들로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짐작하기 힘든 일. 결국 강서성 도지휘사의 사인은 원인 불명의 폭발과 그에 따른 화재로 마무리될 것이다.
응소가 자랑하는 사씨 남매의 둘째, 사복査?이 목표물을 제거하는 방식은 이렇듯 체계적이면서도 기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