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쟁선계-276화 (276/421)

(3)

“아하하! 하늘하늘한 옥접 속에 천변만화의 신묘함이 서려 있다더니 과연!”

호탕한 웃음을 터뜨린 자면철수 동무류가 검푸른 기운이 맺힌 우장을 짧게 휘둘러 속바지 한 장 외에는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무양문도의 머리통을 가격했다. 그자의 입에서 뿜어 나와 모래사장에 점점 뿌려진 핏방울이 꼭 먹물처럼 보였다.

“철소공鐵簫功과 비접공飛蝶功이 화씨세가의 양대 절기라는 말은 익히 들은 바 있지만, 직접 보니 진실로 개안을 하는 기분이외다.”

쌍산호 조방 또한 입에 발린 칭송을 늘어놓으며 왼손에 쥔 등패를 직격으로 밀어붙여 또 다른 무양문도 하나를 뒤로 날려 보냈다. 그자가 토해 낸 구슬픈 비명이 강물 속으로 아스라이 사라졌다.

‘하여튼 사내란…….’

화반경은 터져 나오는 코웃음을 애써 참으며 왼손을 가볍게 휘저었다. 붉은 머리카락을 한 애꾸눈 흉한의 옆구리에 틀어박혀 있던 금마옥접이 꼬리에 붙은 은삭에 이끌려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그렇게 되돌아온 금마옥접을 소매 속에 갈무리한 그녀가 감미로운 목소리로 두 사내에게 말했다.

“두 분의 헌신적인 보살핌이 없다면 저 같은 아녀자가 이 사나운 전장에 어찌 함부로 나설 수 있었겠어요.”

그러자 두 사내가 앞다투어 꼬리를 치기 시작했다.

“원, 화 가주께서는 겸손이 지나치십니다.”

“우리 같은 남자들 열이 있어 봤자 어디 화 가주 같은 여걸 한 분만 하겠소이까.”

전세는 고만고만했다. 선봉에 나선 적아敵我 공히 정예라고는 볼 수 없는 가운데 처음에는 사병을 통한 원거리 공격만이 그나마 위협적이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데 적의 일부가 무모하게 상륙을 시도하는 바람에 그조차도 제 효과를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런 마당에 적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애꾸눈 흉한을 금마옥접으로 암격하는 데 성공했으니, 뭍에 오른 벌거숭이 무양문도들이 핏발 선 눈으로 패악을 부리고는 있지만 용기를 얻어 뛰쳐나온 건정회 소속 녹림도들의 머릿수도 만만치 않았다. 자면철수와 쌍산호 정도면 능히 판세를 주도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승기를 잡을 정도는 되지 못하더라도 시간을 끄는 일은 어렵지 않을 터.

마음이 약간 풀어진 화반경은 두 사내가 경쟁적으로 풀어 놓는 아부의 향연을 내심 즐기면서도 겉으로는 짐짓 곤란하다는 양 매끈한 눈초리를 살짝 찌푸렸다.

“아아, 정말이지 두 분께서는 사람을 놀리시는 재주가…….”

그러나 화반경은 이 가식적인 대사를 마무리 지을 수 없었다. 혀보다는 다리에 더 신경 써야 할 상황이 닥쳤기 때문이다. 그녀가 입은 유백색 비단 경장의 외곽선이 흐릿해지며, 화씨세가 비전의 호상연파보湖上煙波步가 거친 모래 바닥 위에 두 줄기 짧은 족적을 그린 순간.

쐐애앳!

소름 끼치는 파공성이 공간을 울리고, 송곳 같은 경풍 한 줄기가 방금 전 화반경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무서운 속도로 지나쳐 삼사 장 후방에 서 있는 버드나무에 박혔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그녀의 두 눈이 실처럼 가늘어졌다.

‘화살?’

부르르 진동하는 검은 살깃이 어둠 속에서 더욱 검게 보였다.

“엇!”

“위험하오, 화 가주!”

그제야 상황을 파악했는지 자면철수와 쌍산호가 허둥거렸다. 화반경은 미간을 찡그렸다.

‘무능한 작자들!’

그러나 두 사내를 탓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화반경은 재빨리 두 걸음을 옮겨 화살이 날아온 방향과 자신 사이에 두 사내가 놓이도록 만들었다. 그러면서도 시선을 강심으로 돌려 화살을 발사한 자가 누구인지를 확인했다.

시커먼 물살이 모래톱을 두드리는 지점에서 오륙 장 떨어진 강상에서는 무양문의 궁수들이 뭍을 향해 화살을 날리고 있었다. 뭍에 지지대를 확보하지 못한 까닭에, 그들이 두 줄로 늘어앉은 통나무 가교는 하류를 향해 비스듬히 기울어진 상태였다. 아까에 비해 날아오는 화살들이 확연히 줄어든 것은 이미 상륙한 벌거숭이 동료들이 맞을 것을 걱정한 때문인 듯했다. 안개 낀 야간인 데다 흔들리는 통나무 위였다. 제아무리 뛰어난 궁수라도 그런 악조건 속에서 정확한 조준을 바라지 못할 터였다. 하지만 방금 날아온 화살은…….

‘저자다!’

가늘게 뜬 눈으로 강심을 살피던 화반경은 통나무 가교에 일렬로 세워 놓은 장방형의 방패 위로 불쑥 몸을 드러내는 어떤 사내를 발견했다. 단번에 시선에 잡힐 만큼 건장한 체격을 가졌지만 얼굴은 아직 앳되어 보이는 청년. 그 청년이 그녀가 있는 방향으로 금빛 대궁을 겨누었다.

‘저 활…….’

왠지 낯이 익다는 생각이 화반경의 머릿속을 스친 순간.

번쩍.

부벽애 위에서 일렁거리는 화광이 청년이 내민 금빛 대궁의 끝에서 짧고 강렬한 반사광을 만들어 냈다. 그 순간 화반경은 깨달았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두 번째 화살이 지금 막 발사되었다는 사실을.

전방에 두 사내를 세워 놓기는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화반경은 다시 한 번 호상연파보를 밟아 위치를 옮겼고, 금빛 대궁으로부터 발사된 화살이 자신의 얼굴이 있던 자리를 관통하는 매서운 소리를 들으며 그 판단이 옮았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위력도 위력이거니와, 발사한 곳이 출렁이는 강물 위임에도 앞뒤로 겹쳐 있는 두 개의 머리통 사이 두 뼘도 안 되는 공간 속으로 화살을 박아 넣는 놀라운 정확성이라니!

“저, 저 망할 놈이 감히 화 가주의 옥체를 해하려 하다니!”

“화 가주를 보호하는 일만 아니라면 내 당장 저리로 뛰어올라 육시를 내 버릴 텐데.”

강심의 청년을 향해 핏대를 세우는 두 사내는 화반경의 눈에 잡히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있는 쪽을 원통한 듯 노려보다가 방패 아래로 몸을 낮추는 청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솜씨에 비해 경험은 부족하군.’

청년이 만일 노련한 궁수였다면 앞선 두 발의 화살을 통해 저격 목표인 자신에 앞서 방패막이 둘부터 처리하려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늦었다. 자면철수가 화반경을 돌아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가 방심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다시는 화 가주를 번거롭게 하는 일이 없을 테니 우리들을 믿고 마음 푹 놓으십시오.”

그러면서 아래로 늘어뜨리고 있던 두꺼운 등패를 가슴 앞으로 바짝 당겨 세우니, 더 이상 화살을 날려 두 사내를 쓰러트리기란 어려울 것 같았다. 화반경은 경직된 눈초리를 부드럽게 구부리며 두 사내를 향해 말했다.

“물론이죠. 저는 두 분을 진심으로 믿고 있으니까요.”

두 사내의 얼굴에 수컷 특유의 자만심이 떠올랐다. 그러나…….

당연히 진심일 리 없었다.

자면철수와 쌍산호라면 사천 강호의 신진들 가운데 나름 명성을 얻은 자들이라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 두 사람이 자신을 지켜 주리라 믿고서 몸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아니, 화반경은 믿음이라는 덕목 자체를 믿지 않는 사람이었다.

불신을 공기처럼 자연스럽게 호흡하는 여자, 화반경.

그녀가 그런 삶을 살아오게 된 데에는, 모친이 세상을 뜬 십오 년 전 이후로 세상의 그 누구도, 심지어는 남편인 강이환조차도 알지 못하는 한 가지 비밀이 숨어 있었다. 이제는 그녀의 영혼 위에 낙인처럼 뚜렷이 찍혀 영영 떨칠 수 없을 것만 같은 비밀이.

-명심해라. 그 일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화반경이 열일곱 살이 되던 해, 그녀의 모친은 그녀가 그 비밀을 알아차린 날부터 하루도 빠짐없이 반복해 온 바로 그 말을 유언으로 남긴 채 눈을 감았다.

석년 낙일평에서 불기 시작한 치욕스러운 피바람이 호남의 유서 깊은 명문 화씨세가를 덮친 것은 그녀가 세상에 태어나기도 전인 사십여 년 전의 일. 선봉에 선 호교십군의 어떤 군장에게 극심한 부상을 입은 몸으로 가까스로 세가를 탈출하는 데 성공한 화씨세가의 젊은 가주 화연평華淵平은 부인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이듬해를 보지 못한 채 죽고 말았다. 부인에게 남겨진 것은 혈겁이 닥치기 전 화연평이 빼돌린 약간의 재물, 세가의 가전 무공이 실린 몇 권의 무경, 화씨의 적통에게만 전해지는 양대 기문병기인 봉무철소鳳舞鐵簫와 금마옥접 그리고 터무니없이 강한 원수 서문숭과 무양문을 상대로 한 복수의 책무뿐이었다.

너무도 당연한 소리겠지만, 서문숭과 무양문은 병기보다는 장신구에, 수련보다는 화장법에 더 관심이 많던 이십 대 후반의 여자가 뒤늦게 익힌 무공으로 어찌해 볼 수 있는 상대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러나 달리 방법이 없다고 여겼기에, 화연평의 부인은 그 당연한 소리를 확인하는 데 사 년이라는 세월을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것은 문자 그대로 허송세월. 그녀는 사 년의 폐관을 마친 뒤로도 별다른 성취를 보이지 않는 자신의 평범한 자질을 원망하고 저주했다. 만일 그녀가 거기서 복수를 포기하고 비탄과 절망에 잠겨 남은 생을 보냈다면, 화반경, 당금 강호에서 가장 유명세를 떨치는 용봉단의 여걸은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나보다 더 젊고 더 재능 있는 새로운 화씨가 필요해!

제자로는 이룰 수 없는 일이었다. 문파가 아닌 세가를 재건하기 위해서는 화씨 성을 가진 적통 후계자가 있어야 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처음부터 성립될 수 없었다. 세상의 어떤 여자가 아이를 혼자 낳을 수 있겠는가. 씨를 심어 줄 남편은 이미 세상에 없는 마당인 것을.

재혼은 아무런 방편이 되지 못했다. 재혼을 통해 낳은 아이는 새남편의 핏줄일 뿐, 강호의 어느 누구도 화씨세가의 적통으로 인정해 주지 않을 것이다.

한데 화연평의 부인, 근골은 평범하나 집념 하나만큼은 어느 장부에 못지않은 이 대담한 여인은 그 불가능한 계획을 현실로 옮기는 데 성공했다. 그 일을 위해 그녀가 어떤 수단을 동원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거나 그 이듬해 그녀는 한 아이를 출산하게 되었다. 아들이라면 더 좋겠지만 그녀가 나은 것은 아쉽게도 딸이었다. 젊은 시절 호남일미湖南一美로 이름을 떨친 그녀를 쏙 빼닮은, 그러면서도 그녀보다 훨씬 좋은 근골을 지닌 딸, 바로 화반경이었다.

화연평의 부인은 딸에게 친부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해 주지 않았다. 때문에 화반경은 모친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절을 올리는, 골방 속 위패 위에 적힌 화연평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이 자신의 아빠라고 철석같이 믿었다. 그러나 그 아빠의 십 주기를 맞아 모친의 손을 잡고 불공을 드리러 인근 암자로 향하던 그녀는 문득 떠올리게 되었다.

‘어라? 난 지금 다섯 살인데?’

편모슬하의 아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화반경은 조숙한 아이였고, 덕분에 다섯 살의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수태에서 출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리는지를 알고 있었다. 죽은 지 십 년이 지난 남자는 절대로 다섯 살짜리 계집애의 아빠가 될 수 없었다.

그날 밤, 친부가 누군지를 묻는 화반경의 질문에 대한 모친의 답은 무서운 매질이었다. 그리고 피투성이가 된 종아리를 감싸 안고 울먹이는 그녀에게 모친이 처음으로 그 말을 꺼냈다.

-명심해라. 그 일은 누구에게도 알려져서는 안 된다.

그 말은 모친의 생이 끝나는 날까지 반복되었다.

이제 그 말을 해 줄 모친은 이 세상에 없지만, 화반경 스스로가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화연평의 친딸이어야 하며 화씨세가의 적통이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친부의 존재 따위 영원히 비밀로 묻어 버려야만 한다는 것을. 거짓은 그녀의 숙명이었다.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는 거짓 위에 자신의 기반을 세운 여자, 화반경.

그래서 그녀는 자신 외에는 누구도 믿지 않았다. 자신의 판단 외에는 무엇도 믿으려 하지 않았다. 거짓 위에 서 있는 삶은 어떤 믿음과도 공존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 그녀가 여자의 한마디에 천당과 지옥을 수시로 오락가락하는 저따위 어리석은 사내들을 어떻게 믿을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반경이 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믿음과 무관한 두 가지 현실적인 조건이 전제되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조건은 아군의 주장인 무당파 현유진인을 위시한 건정회의 수뇌부가 곧 이 자리에 도착하리라는 것. 두 번째 조건은 저 통나무 가교를 통한 무양문의 장강 도하가 결코 순탄하게 이어지지 않으리라는 것.

그중에서도 이곳으로 향하는 강안에서 목격한 두 번째 조건이 조심성 많은 그녀로 하여금 용기를 일으키게 만든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만약 고검 제갈휘가 이끄는 무양문 본대가 별다른 장애 없이 도하에 성공한다면, 현유진인이 아니라 무당산에 웅크리고 있는 건정회주 현학진인까지 달려오는 중이라고 해도 지금처럼 앞장서서 모습을 드러내는 무모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무양문 본대는 날이 밝기 전까지 도하에 성공하지 못한다. 그것이 두 번째 조건을 목격한 뒤 그녀가 내린 판단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콰앙!

강심 어딘가에서 울린 둔중한 충돌음이 자욱한 밤안개를 뚫고 북안에 있는 화반경에게 전달되었다. 이어지는 난잡한 소음들.

쿵! 그지직! 아악! 쿠쿵!

그 여파는 통나무 부교 끝단에 있는 무양문의 궁수들에게도 미쳤다. 눈에 띄게 동요하는 그들을 보며 화반경은 나직이 중얼거렸다.

“위응양, 과연 당신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군요.”

화반경이 이번에 내린 판단은, 최소한 이 시점에서는 제대로 들어맞은 것처럼 보였다. 때문에 그녀는 면사 아래로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그러나 화반경이 간과하고 있는 사실 하나가 있었다. 자신이 내린 판단의 이면에는 어떤 사람에 대한 믿음이 깔려 있다는 것을 그녀는 미처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누구도 믿지 않는, 심지어 남편인 강이환마저도 내심으로는 믿지 않는 그녀이기에, 올봄 무당산에서 처음 인사를 나눈 어떤 백도 명숙에게 자신이 그토록 부정해 온 ‘믿음’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릴 수 없었던 것이다.

화반경은 왜 자신도 모르는 새 그 백도 명숙을 믿게 된 것일까?

불신을 공기처럼 호흡하는 여인으로 하여금 믿음이라는 낯선 감정을 일으키게 만든 두 번째 정보의 실체는 장강의 상류로부터 떠내려오는 이십여 척의 소형 선박들이었다.

건정회가 서릉협 상류 지점에 건설한 임시 포구에서 급히 출발한 그 선박들은 본래 칠성노조에게 포섭된 네 곳 수채에서 보유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선두 선박의 출렁거리는 이물에 꼿꼿이 몸을 세운 채 전체 선박들을 지휘하고 있는 사람은 수적과는 무관한, 오히려 장강 일대의 수적을 토벌하는 과정에서 혁혁한 명성을 쌓은 장강쌍절의 대형이자 건정회 십팔대 공봉 중 한 사람인 위응양이었다.

“북초北礁와 중초中礁 사이를 뚫는다! 방향을 놓치지 마라!”

위응양이 탄 선박의 키를 잡은 사람은 그의 동생인 위응호였다. 하지만 내공이 실려 거센 물소리 속에서도 또렷하게 들리는 그의 우렁찬 지시는 위응호 한 사람만을 향한 것이 아니었다. 이십여 척의 소형 선박에 나눠 탄 자들 또한 장강이라면 신물이 날 만큼 익숙한 삼협 인근의 수적들. 키를 움직여 뱃머리의 방향을 잡는 일에 실수가 있을 리 없었다.

뱃머리가 위아래로 펄떡거릴 때마다 일어나는 거센 물보라를 온몸으로 맞으면서도 위응양은 눈을 빛냈다. 뱃머리 왼편에 펼쳐진 장강 북안에는 거대한 등대 하나가 서 있었다. 화염의 왕관을 여전히 벗지 못한 부벽애가 바로 그 등대였다. 그 부벽애로부터 피어오르는 휘황한 화광은 이처럼 빠른 물살 속에서 거리를 가늠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모두 단단히 준비하라!”

고개를 돌린 위응양이 다시 한 번 내공을 실어 외쳤다. 그가 지휘하는 소형 선박들의 이물에는 커다란 충각衝角이 튀어나와 있었다. 밑변이 짧고 높이가 긴 세모꼴 철판 세 장을 삼각뿔 모양으로 이어 붙인 그 충각은 이 선박들을 징발하는 과정에서 그의 요구로 특별히 제작, 설치한 것이었다. 무양문이 장강을 건너지 않고 순순히 회군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은 그이기에, 언제고 도하에 나설 그들을 격파할 회심의 수단으로 소형 선박들을 이용한 육탄 돌격을 준비한 것이다.

단 한 번의 치명적인 타격을 위해, 다른 때라면 벌레만도 못하게 여겼을 천한 수적들과 한 몸이 되어 더러운 강물을 들이켜 가며 훈련에 매진하는 동안, 위응양은 전선의 주장인 현유진인에게 이렇게 장담했다.

-삼협의 물살이 비록 거세다 해도 장강을 건널 수단은 결국 배편밖에 없소이다. 무양문의 본대가 배편을 통해 도하를 시도할 때, 나는 상류로부터 이 선박들을 이끌고 내려와 그들을 치겠소.

그 장담은 빗나갔다. 저들이 배편 대신 나무장수들을 동원한 통나무 가교라는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도하를 시도해 올 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던 것이다. 하지만 충각으로 타격할 목표물이 강물 위를 움직이는 대신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는 점에서는 오히려 잘된 일이라고도 볼 수 있었다.

그 목표물이 마침내 위응양의 시선에 잡혔다. 물보라와 안개 너머로 솟은 세 개의 암초 사이에 걸린 길쭉한 부교들. 그는 어금니를 질끈 깨물었다.

‘역시 삼성초를 교각으로 이용했구나.’

강물 위를 떠내려가는 통나무 뗏목을 처음 발견했을 때 위응양이 머릿속에 그린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광경이었다.

“잊지 마라! 북초와 중초 사이다!”

위응양이 확인 지시를 내렸다. 개개의 이름이 붙어 있지 않은 삼성초의 세 암초를 장강의 수적들은 편의상 북초와 중초와 남초로 구별하여 불렀다. 이번 돌격 작전에서 그가 노리는 곳은 거리가 가장 긴 북초와 중초 사이 구간이었다. 그 선택에는 적진인 남안으로부터 상대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는 점도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목표한 구간을 향해 돌진하는 뱃머리 위에서 주변 상황을 살피던 위응양이 희끗한 눈썹을 꿈틀거렸다. 이제 막 남초 위를 건너 중초로 향하는 부교 위에 모습을 드러낸 기다란 행렬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개미 떼처럼 꼬리에 꼬리를 문 그 행렬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적의 본대가 마침내 도하에 나선 것이다!

반면에 아군이 지키고 있어야 할 북안은…….

“엇?”

고개를 돌려 장강의 북안을 살피던 위응양은 어느 순간 눈을 부릅뜨고 말았다. 부벽애 아래 모래톱에 펼쳐진 소규모 전장, 그 속에서 움직이는 어떤 여자 하나가 이제껏 냉정을 유지하던 그를 순식간에 당혹감 속으로 밀어 넣어 버린 것이다. 유백색 경장 차림의 그 여자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얼굴을 가린 면사가 팔락거리는 모습이 잡혔다.

“저 아이가 왜 저기에……?”

위응양은 자신도 모르게 손을 오른쪽 귓불 쪽으로 올렸다. 그 아래 선명히 찍혀 있는 까만 복점 하나. 본인이 아니라면 쉽게 느끼지 못할 그 미미한 융기를 더듬는 그의 손길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건정회가 처음 결성된 올봄.

무당파의 장문인인 현학진인의 초청으로 무당산에 오른 백도 명숙들은 서문숭과 무양문에 대적하여 호남에서 외로운 항쟁을 벌이는 용봉단의 두 단주로부터 인사를 받게 되었다. 각각 형산검문과 화씨세가의 진전을 얻은 그들 남녀 중 백도 명숙들의 눈길을 끈 것은 아무래도 남자 쪽일 수밖에 없었다. 용봉으로 함께 불리기는 해도 봉이 용을 앞설 수는 없는 법. 용봉단을 움직이는 주체는 용이었고 봉은 그다음이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백도 명숙들 중 오직 한 사람, 위응양만은 용이 아닌 봉을 주시하고 있었다. 성정이 강직하여 주색을 멀리하는 그가 다 늙은 나이에 엉뚱한 춘정을 일으켰을 리는 없고, 그는 전혀 다른 이유로 인해 여자로부터 눈길을 뗄 수 없었다.

그녀의 딸이다!

위응양은 심중을 뒤흔드는 격정이 목소리에 배어 나오지 않도록 애쓰며 여자에게 말을 걸었다.

-과거 모친을 뵌 적이 있네. 미모와 기품을 겸비하신 분이었지.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얼굴을 볼 수 있겠는가?

면사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사연이 없지는 않을 텐데도 여자는 위응양의 요청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여자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면사를 걷어 올리자 사방으로부터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오오!

-과연 호남일미의 여식이로고.

여자의 얼굴은 쉰내 나는 명숙들조차 경탄을 감추지 못할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위응양의 시야를 꽉 채운 것은 여자의 미모가 아니었다.

여자의 오른쪽 귓불 아래 찍힌 작고 까만 복점!

위응양이 떨리는 목소리로 여자에게 다시 물었다.

-자, 자네의 나이가……?

여자가 살포시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올해로 서른넷입니다.

그 순간 위응양의 시간은 삼십오 년 전의 어느 밤으로 회귀되었다…….

……밤비가 촉촉이 어둠 속으로 스미던 그 밤, 은은한 말리화茉莉花 향기와 함께 찾아온 그녀.

-나는 당신이 필요해요.

그녀가 속삭이듯 말했다. 위응양은 환상처럼 홀연히 자신의 침소에 모습을 드러낸 그녀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아마 호광湖廣(호남과 호북) 강호에서 활약하는 그와 비슷한 나이 대의 남자라면 누구나 그녀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부, 부인은 화씨세가의……?

-아무것도 알려고 하지 마세요. 오늘 밤 일을 기억하려고도 하지 마세요. 그냥…….

그녀는 옷고름으로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나를 가지세요.

경악보다 앞서 안겨 온 부드럽고 따듯한 여체가 당시 장년의 초입에 선 위응양의 견고한 자제력을 무너트렸다. 호광의 소년 기협들 대부분이 그러했듯, 한창 시절 그의 마음 한구석에는 미명으로 이름을 떨치던 한 여자에 대한 연모가 자리 잡고 있었다. 젊은 날의 치기일 뿐이라고 여기던 그 연모의 끈이 말리화의 향기에 실려 그를 사로잡아 버렸다. 그는 거미줄에 걸린 작은 벌레처럼 항거할 수 없었다.

격정은 밤새도록 이어지고, 부끄러울 만큼 투명한 아침 햇살 속에서 깨어난 위응양은 그녀가 이미 떠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어젯밤 자신이 겪은 일을 현실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화씨세가가 몰락과 함께 종적을 감춘 호남일미와 잠자리를 나누다니! 그러나 꿈은 아니었다. 그녀가 다녀간 유일하고도 뚜렷한 증거, 말리화 향기가 배어 있는 얇은 비단 이불을 망연히 내려다보던 그는 때늦은 의혹에 사로잡히고 말았다.

그녀는 자신이 필요하다고 했다.

내 무엇이 필요했을까? 그녀가 내게 바란 것은 대체 무엇이었을까?

말리화의 향기 속에서 이루어진 그 일야지정一夜之情의 의혹은 지난 삼십오 년간 위응양을 지긋지긋할 만큼 괴롭혀 온 난제로 남았다. 그런데 그 난제의 해답과 마침내 마주치게 된 것이다. 그녀와 꼭 닮은 그리고 자신과 똑같은 자리에 복점을 가진 화씨세가의 후예가 바로 그 해답이었다. 그녀는 저 아이를 잉태할 씨앗이 필요했던 것이다.

올봄, 무당산 상청궁의 대청에서 위응양은 용봉단을 이끄는 여자, 화반경을 향해 마음속으로 부르짖었다.

너는 내 딸이다!

“형님, 어서 밧줄을 붙드세요!”

뒷전에 터진 동생 위응호의 외침이 위응양을 현실로 이끌었다. 퍼뜩 정신을 차린 그는 북안 모래톱 위에 주었던 눈길을 정면으로 돌렸다.

콰콰콰콰!

귀청을 찢을 듯한 격류 소리가 사방을 가득 메운 가운데 부교를 이루는 통나무들이 어느 틈에 목전에 다다라 있었다. 위응양은 충돌에 대비해 용골 마루에 묶어 둔 밧줄을 왼손으로 단단히 말아 쥐었다. 이제 시작이었다. 그의 주름진 이마에 진득한 땀방울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콰앙!

격렬한 충돌음과 함께 엄청난 반력이 뱃머리를 버틴 발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그 반력 속에는 뱃바닥 용골이 어그러지는 진동까지도 포함되어 있었다. 충각은 부교의 교체橋體를 이루는 통나무에 정통으로 틀어박혔고, 선박을 추동하던 부유력은 고스란히 반력으로 되돌아왔다.

위응양은 천근추千斤錘의 재주를 펼쳐 반력에 맞서려는 시도 따위는 하지 않았다. 대신 그 힘에 전신을 맡긴 채 허공으로 둥실 떠올랐다. 부교 위에 있던 사내들이 측방으로부터 갑작스럽게 가해진 충격을 견디느라 밧줄과 쇠사슬에 매달리는 모습이 거꾸로 뒤집힌 시야 속에 들어왔다. 그들의 얼굴마다 떠오른 경악과 공포가 손에 잡힐 듯 생생히 느껴졌다.

충돌은 단발로 끝나지 않았다. 시야의 한 귀퉁이에서는 자신을 따르던 선박들이 부교의 측면에 저마다의 충각을 때려 넣는 호쾌한 장면이 연이어 담기고 있었다. 그때마다 울려 나오는 난잡한 소음들.

쿵! 그지직! 아악! 쿠쿵!

위응양은 선박과 연결된 밧줄을 놓으며 뒤집힌 몸을 비룡번신飛龍?身의 재주로 바로잡았다. 그러면서 오른손에 움켜쥔 자령간紫靈竿, 사십 년을 함께해 온 기물이자 애병에 공력을 불어넣으니…….

찌이이이잇-

긴 울음소리와 함께 자령간의 끝으로부터 뻗어 나간 천잠사 낚싯줄이 부교 위 쇠사슬에 휘감기고, 위응양은 야공에 커다란 반호를 그리며 부교 위에 안착할 수 있었다.

‘막는다!’

북안 강변에 자신의 딸이 있었다. 무양문의 본대를 반드시 저지해야 하는 가장 큰 이유가 생긴 셈이었다. 모든 공적 책무를 뛰어넘는 사적 결의가 위응양, 이 백도 명숙의 늙은 피를 끓어오르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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