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초야의 어스름이 어둠으로 덧칠되는 시간이었다. 수풀 속 산비둘기의 울음소리도 어느 결엔가 구슬퍼지고, 밤은 시나브로 단천원의 드넓은 부지 위로 깔리고 있었다.
오늘 하루 은신처로 삼았던 밀짚 창고를 벗어나 지금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진 한 무리의 호송인들을 미행하던 석대원은 머릿속으로 문득문득 떠오르는 회의에 내딛던 발걸음을 수차례나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음을 던졌다.
‘정말로 그런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가능성은 없었다. 아니, 그 일에 가능성이라는 잣대를 적용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었다. 십이 년 전에 살해당한 아버지가 지금껏 살아 있다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 아버지가 원수의 소굴이나 다름없는 이곳에서 죄인의 신분으로 끌려간다는 것은 그 어떤 상상력으로도 그려 내지 못할 터무니없는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 만일 누군가 농담으로라도 그와 비슷한 소리를 꺼냈다면, 석대원은 그 농담이 악몽으로 끝나도록 만들어 주었을 것이다.
‘어리석은 짓, 내가 지금 있어야 할 곳은 여기가 아니다.’
석대원은 자신이 단천원에 온 목적을 잊지 않았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도 그는 당장 밀짚 창고로 돌아가야 했다. 그곳에서 쥐 죽은 듯이 몸을 숨긴 채 진금영과 약속한 자정이 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발길은 지극히 이성적인 판단에 의해 내려진 당위를 매번 외면하는 쪽으로만 향하고 있었다. 석대원은 돌아가지 않았다. 차마 돌아갈 수 없는 무언가가 그의 마음을 꽁꽁 묶어 줄기차게 잡아당기고 있는 것 같았다. 결국 그는 머리와 마음, 당위와 즉감 사이에서 부즉불리不卽不離의 합의를 봐야만 했다.
‘자정까지는 아직 여유가 있다. 얼른 확인만 하고 곧바로 돌아오자.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아무리 길눈이 어둡더라도 동 틀 녘에 한 번 와 본 길이었다. 특이한 지형지물 몇 군데를 순차로 기억해 놓는다면 돌아오는 일에 큰 애를 먹을 것 같지는 않았다.
‘그래, 그러면 되는 거야.’
석대원은 느슨하게 흘러내린 양쪽 소맷자락을 팔꿈치 위 알통이 잡히는 부위까지 둘둘 걷어붙인 뒤 걸음을 떼어 놓았다.
잔불처럼 들썩이던 회의를 억누르자 비로소 본격적인 미행을 시작할 수 있었다. 조건은 나쁘지 않았다. 새벽까지도 충충하던 날씨가 낮을 보내며 제법 개는 것 같더니, 노을과 함께 밀려온 구름이 지금은 밤하늘 전체를 무겁게 뒤덮고 있었다. 구월 열엿새면 달이 충분히 차 있는 시기인 만큼 석대원으로서는 무척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이기혼연…….
지난밤에도 그랬거니와, 지금도 기척을 감춘 채 어둠에서 다른 어둠으로 이동을 거듭하다 보니 자꾸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그냥 움직이면 주위와 자연스레 어우러지는 것 같은데, 애써 숨으려 하면 그렇게 동화된 경물로부터 오히려 벗어나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수족보다 쓸모 많은 노복을 어릴 적부터 가까이 둔 덕분에 석대원이 손수 칼을 잡고 요리를 할 기회는 없었지만, 아마 숙달된 요리사가 칼질을 할 때 이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까 싶었다. 수중의 칼을 의식할수록 오히려 칼질의 박자가 어긋나는 기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무양문을 떠나 태원까지 오는 동안 여러 차례 느꼈다. 도가에서 말하는 이기혼연이란 곧 무위無爲. 진정한 집중이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처럼 진정한 경지 또한 무위로부터 가능해진다는 것인데, 내가 ‘있고[在]’ ‘움직이는[行]’ 모든 것이 유위有爲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바에야, 무위란 신기루처럼 공허한 개념에 지나지 않을 터였다. 이것은 무공의 이치라기보다는 인간의 존재와 행동에 대한 정의였다. 천선기를 오랜 기간 수련하며 도가 사상을 자연스럽게 접할 수 있었던 석대원이지만 이런 식의 철학적 고찰 앞에서는 바다를 접한 아이처럼 막막해질 수밖에 없었다. 좋은 스승이 있어 선각에서 나온 가르침을 받는다면, 혹은 결정적인 단서를 얻게 해 줄 특별한 경험이 주어진다면 이토록 막막하지는 않으련만.
그러던 어느 순간, 석대원은 발길을 우뚝 멈췄다. 후방으로부터 다가오는 어떤 기척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확인시켜 주듯 멀리서 여인네의 교소가 까르륵 들려왔다. 시간과 장소 모두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잘못 들은 것은 분명히 아니었다. 뜬금없건 그렇지 않건 이곳에 우두커니 서서 저 교소를 맞이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거구가 어둠 속으로 스르르 녹아들었다. 사실 유위로 마음먹은 모든 일에 실패한다면, 이기혼연은 상승으로 나아가는 심득이 아닌 한낱 걸림돌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기척이 가까워짐에 따라 방약무인한 교소는 더욱 커져 갔다. 하기야 방약무인한 상황이기는 했다. 근처에 훔쳐보는 거한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터이니.
“아이, 가마 위에서까지 이렇게 점잖지 못하게 구시면 어떡해요.”
교태가 뚝뚝 떨어지는 저 말처럼, 후방으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앞뒤로 두 사람이 받쳐 들도록 만들어진 덮개 없는 가마였다. 가마를 든 사람도 둘, 가마를 탄 사람도 둘. 둘이 둘을 들어 옮겨야 하는 탓인지 가마가 나아가는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이를 우려한 듯, 가마에 탄 두 사람 중 이제껏 들려온 교소의 주인공임에 분명한 젊은 여인이 동승자의 가슴 위에 옆머리를 기울여 얹으며 말했다.
“한데 법왕 마마, 우리도 이제부터는 조금 서둘러야 하지 않겠어요? 앞서 출발한 패륵 법왕은 어쩌면 지금쯤 이비영 전에 당도했을지도 모르는데.”
그 여인의 차림새는 태원의 쌀쌀한 가을밤과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풍만함을 넘어 약간 뚱뚱하다 할 수 있는 몸뚱이를 감싼 것은 매미 날개처럼 얇은 망사의網紗衣 한 장이 전부였다. 게다가 부끄러움도 모르는지, 허옇고 피둥피둥한 젖가슴과 더 허옇고 더 피둥피둥한 엉덩이는 망사의 밖으로 그대로 드러낸 상태였다. 그렇게 드러난 여체의 비소들은 동승자의 털투성이 손 두 개에 의해 점령당해 있었다. 여인이 뭐라고 말하든 그 손들을 부단히 꿈지럭거리던 동승자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패륵도, 그리고 이비영이란 자도, 감히 본 법왕을 재촉할 수 있는 위치는 못 된다.”
머리털 없는 승려의 나이를 눈대중으로 알아맞히기란 본래 쉬운 일이 아니지만, 저 법왕이라는 자는 짙은 구릿빛 광택이 흐르는 팽팽한 살갗을 가진 탓에 그런 면이 더욱 심한 것 같았다. 다만 짐작할 수 있는 점은, 관자놀이 너머로 창처럼 솟구친 흰 눈썹으로 미루어 젊다 할 수 있는 나이는 오래전에 넘어섰으리라는 것. 거기에 불룩하니 튀어나온 안와상융기眼窩上隆起 (눈구멍 위쪽에 있는 수평 방향의 융기)는 저 승려의 출신이 중원에 멀리 떨어진 서역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는 대법왕께서도 오신다…… 하아!”
여인의 입에서 농익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동승하고 있던 흰 눈썹의 서역승이 여인의 비소를 농락하던 두 손을 거두며 근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감수甘水가 다시 솟으매 갈곡渴谷이 새로이 트였구나. 본 법왕의 대락륜大樂輪은 언제나 준비되어 있도다. 여시주는 이리 오라.”
“설마 또?”
그러면서도 여인은 나란히 기대고 있던 몸을 서역승의 앞쪽으로 옮기더니 두 손으로 가마 바닥을 짚고 짐승처럼 엉덩이를 들어 올리는 것이었다.
“옴, 오옴, 오오옴…….”
입으로는 낮게 웅얼거리면서도 두 눈은 지그시 감은 채 여인의 엉덩이를 털투성이 양손으로 어루만지던 서역승이 어느 순간 금란 가사의 아랫자락을 훌떡 젖히더니 여인의 엉덩이에 하체를 힘차게 밀어붙였다.
‘이런…….’
공교롭게도 그들이 탄 가마가 석대원으로부터 가장 가까운 곳을 지나칠 때 벌어진 일이었다. 가마가 출렁거리기 시작함에도 앞뒤의 가마꾼들은 전혀 개의치 않는 눈치였다. 그들의 표정이 어찌나 덤덤한지 마치 흙으로 빚어 놓은 인형을 보는 것 같았다.
“아! 그, 그렇게 기, 깊이……. 하악!”
“옴 예 다르마 헤뚜 쁘라마와 헤뚬 떼샴…….”
살끼리 철썩거리는 얄궂은 소음 속으로 여인의 교성과 서역승의 진언이 어우러지다가, 점차 앞쪽으로 멀어져 갔다.
‘황당한 일을 겪었군.’
미행 중 접하게 된 음탕하고도 어처구니없는 광경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석대원이 억누르고 있던 날숨을 풀고 은신해 있던 수풀 밖으로 나가려 할 때였다. 모기 소리보다도 작은 전음이 그의 귓속으로 흘러들어 왔다.
ㅊ-판다라의 황룡호불공을 만만히 봐선 안 돼. 너는 그대로 조금 더 있는 게 좋겠구나.
경호성을 지르지 않은 스스로를 칭찬할 만한 일이었다.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상황. 하지만 전음에 담긴 무엇인가가 놀란 석대원을 부드럽게 다독여 주었다. 그것은 아마도…… 친근함인 것 같았다. 그러자 놀람보다 의구심이 일었다. 단천원은 물론이거니와 산서 땅 전체를 통틀어도 그에게 저런 식의 친근함을 보여 줄 사람은 진금영 한 사람밖에 없을 터였다. 진금영 외에 유일한 후보로 꼽을 사람이 있다면 이 장원 내 어딘가에 머물고 있을 외삼촌인데…….
‘그는 여자가 아니잖아?’
하지만 방금 날아든 전음의 주인공은 분명히 여자였다, 그것도 나이를 제법 먹은.
-이제 됐다. 나오렴.
해답 없는 의구심 속에서 허덕거릴 때 예의 전음이 다시 들려왔다. 석대원은 은신을 풀고 수풀로부터 천천히 걸어 나왔다. 이번 전음의 밑바닥에도 친근함이 여전히 깔려 있었고, 그 친근함에 작위나 가장은 끼어 있지 않은 듯했지만, 그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석대원은 어느 틈엔가 자신의 전면에 모습을 나타낸 인물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얼굴에는 복면, 일신에는 먹물 같은 야행복을 차려 입은 인물이었다. 하지만 부착성이 좋은 야행복 위로 드러난 신체의 굴곡은 저 인물이 남자가 아님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느 순간, 그의 시선이 복면 여인의 눈을 향했다. 복면의 눈구멍 안으로 드러난 눈은 매서워 보이는 눈매와 달리 모종의 정감이 어려 있는 듯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경계심을 풀기에는 일렀다. 몇 번을 강조해도 부족하거니와, 지금의 그는 적진 한복판에 떨어진 고군孤軍의 신세였다.
“좋은 은신술이다. 하마터면 나도 못 알아차릴 뻔했구나.”
복면 여인이 말했다. 만만치 않다는 판다라도 눈치 못 채고 지나친 석대원의 은신을 그녀가 알아챘다는 것은, 그녀의 경지가 판다라를 뛰어넘거나 혹은 그녀가 은신 방면에 전문적인 수련을 쌓았음을 의미했다. 그중 어느 쪽이냐 하면…….
‘후자인 것 같군.’
복면 여인이 입은 야행복이 낯설지 않았다. 신응소라고 했던가. 그곳에서 나와 사효와 정사 중인 석대원을 암격하다가 목숨을 잃은 자객이 저것과 같은 종류의 야행복을 입고 있었던 것이다. 사효의 것과 더불어 그자의 시신도 수습한 석대원은 그 점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나를 아시오?”
석대원이 복면 여인에게 물었다. 복면 여인은 대답 대신 고개를 아래위로 살짝 움직였다.
“이 장원 사람 중 나를 아는 거의 전부가 내게는 적이라고 생각하는데, 내 생각이 틀렸소?”
“틀리지 않은 것 같구나.”
석대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우리가 적이라는 대답으로 받아들이면 되겠소?”
이번에는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석대원이 다시 물었다.
“적이 아니라는 뜻이오?”
“그렇단다. 나는 이 장원 사람이 아니니까.”
저 말인즉 자신은 신응소에서 나온 사람이라는 뜻일까? 그렇다면 별 의미 없는 말장난에 불과했다. 비각과 신응소는 이를테면 심장과 혈관 같은 관계니까.
그런 석대원의 내심을 아는지 모르는지, 복면 여인은 가마가 간 방향을 일별한 뒤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 우리가 만난 것이 행운인지 불운인지 알 수 없구나. 어쨌거나 너는 지금부터 내가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다.”
눈살을 찌푸린 석대원이 차갑게 반문했다.
“내가 왜 당신이 시키는 대로 움직여야 한단 말이오?”
“너는 나를 믿어야 한다.”
“나는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자를 믿지 않소.”
냉소하는 석대원을 잠시 바라보던 여인이 오른손을 얼굴 쪽으로 들어 쓰고 있던 복면을 벗었다. 그 순간 석대원은 그녀가 복면을 쓰고 있는 이유를 알게 되었다. 추면, 아니, 파면破面이었다. 설령 남자라도 저렇게 훼손된 얼굴의 소유자라면 복면을 쓰고 다닌다고 비난할 수는 없을 터였다. 끔직한 파면을 복면으로 다시 가린 그녀가 석대원에게 물었다.
“이제는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석대원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얼굴 얘기를 꺼낸 것은 미안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당신을 믿을 수 있게 된 것은 아니오.”
“아까 말했지, 나는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비각의 인물들 사이에서 석대원은 이 대 혈랑곡주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석대원은 복면 여인의 입에서 그 이름이 흘러나오리라 예상했다. 그러나 그녀가 입에 담은 이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는 외삼촌을 제외한 비각의 인물에게서 그 이름으로 불리게 되는 일이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원, 그분 말씀대로 너는 정말로 고집이 센 아이구나.”
석대원은 누군가에게 머리를 세게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아원이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를 수 있는 사람은 천하를 통틀어 다섯 명도 채 되지 않는다고 믿고 있었다. 이제는 아련하기만 한 그의 유년을 따듯한 눈길로 지켜봐 준 사람들.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더듬어 봐도 그중 얼굴이 망가진 중년 여인은 끼어 있지 않았다.
“다, 당신은 누굽니까?”
당혹감이 그대로 묻어나는 중에도 말투가 정중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석대원에게, 복면 여인이 뾰족한 눈초리를 둥글게 휘어 내리며 대답했다.
“사람들은 나를 여러 이름으로 부른단다. 하지만 네게는 화고華姑(화 고모)라고 불리면 가장 기쁘겠구나.”
고모는 아버지의 여자 형제를 가리키는 호칭이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석대원은 가마가 멀어진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마에 앞서 저 길을 간 일행 중에는 아버지의 뒷모습을 가진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고모라는 호칭. 그리고 아버지의 뒷모습. 그는 복면 여인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네가 무엇을 묻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구나.”
복면 여인이 한숨을 쉰 뒤 작게 덧붙였다.
“네 짐작이 맞다.”
그 순간 석대원은 주춤 뒷걸음질을 쳤다.
‘내가 무슨 짐작을 하고 있었지?’
갑자기 바보 천치가 되어 버린 양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멀쩡히 돌아가던 머릿속이 별안간 새하얗게, 혹은 새까맣게 변해 버린 것 같았다. 어쩌면 보호 본능의 발로인지도 모른다. 너무도 놀랍고 너무도 두려운 진실로부터 스스로를 지키려는 본능. 그러나 본능의 얇은 장벽은 금세 찢어지고, 미친 말처럼 날뛰는 사고가 그 자리를 차지했다.
“내 짐작이…… 맞다고요?”
맞아서는 안 되었다. 만약 그 짐작이 맞는 것이라면, 자신이 겪어야 했던 지난 십이 년의 고통은 근거를 잃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러나…….
복면 여인이 말했다.
“그분은 살아 계신다.”
허탈감이 홍수의 수면처럼 마음 위로 차올랐다. 그 위로 번져 나가는 것은 물안개처럼 자욱한 분노였다. 붉은 분노!
“……살아 계시다고? 그분이 살아 계시다고?”
석대원은 다시 한 발짝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다면…… 나는…… 그리고…….”
아침, 뇌옥, 들보, 대롱거리는 신발, 그리고…….
어머니.
붉게 변해 가는 시야 속으로 지긋지긋한 그날의 악몽이 재현되려 하고 있었다. 그러나 놀랍고 두려운 그 진실이 가리키는 대로라면 그 악몽은 벌어져서는 안 되었다. 멀쩡히 살아 있는 자의 죽음에 대한 책임 따위는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앞니가 파고든 아랫입술에서 핏물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붉은 분노에 사로잡힌 석대원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바로 그때였다.
짝.
석대원의 고개가 옆으로 팩 돌아갔다. 어느 틈엔가 앞으로 다가온 복면 여인이 그의 따귀를 세차게 때린 것이다. 판다라의 황룡호불공을 염두에 두었는지 소리는 크게 울리지 않았다.
“네 심정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구나. 그분은 지금 위험에 빠졌다.”
복면 여인의 말을 들으며 붉어진 시야가 점차 본래의 상태로 회복되는 것이 느껴졌다. 석대원은 옆으로 돌아간 고개를 그녀에게로 향했다. 뭐라고 불러 달라고 했지? 맞아, 화고.
석대원이 화고에게 물었다.
“그분이 위험에 빠지셨다고요?”
“너도 보았으니 알 테지. 판다라가 그렇게 만들었다.”
복면 여인, 화고가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 판다라는 도구에 불과하겠지. 그분을 위험에 빠트린 것은 이비영일 것이다. 그리고 지금 그분은 이비영에게 끌려갔다.”
석대원은 공황에 빠진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멀쩡히 살아 있으면서도 죽음을 가장한, 그럼으로써 어머니를 자진하시게 만들고 어린 그로 하여금 황량한 심산에서 십일 년을 보내게 만든 이유가 미치도록 궁금했지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서라도 지금 당장은 현실적으로 행동할 필요가 있었다.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
석대원이 묻자 화고가 잠시 궁리하는 시늉을 하다가 대답했다.
“이 장원 내에는 비밀한 장소가 몇 군데 있지. 그곳에서 사람들의 주의를 돌릴 만한 일을 벌여 보겠다. 너는 아까 그자들의 뒤를 추적하여 그분이 계신 곳으로 가거라. 그곳에서 기다리다가 일이 벌어지는 기미가 보이면 그분을 구출해라.”
말을 마친 화고가 석대원의 어깨에 오른손을 얹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팔을 올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발돋움까지 해야 했지만, 불편한 자세로도 그녀의 목소리는 따듯하기만 했다.
“아원, 예전부터 네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단다.”
“무슨……?”
복면의 눈구멍 속 눈초리가 다시 한 번 따듯한 곡선을 그렸다.
“고맙다, 아전이를 언제나 잘 돌봐 줘서.”
석대원이 아전을 돌봐 준 것은 까마득한 시절의 일이었다. 그렇다면 화고는 그 시절부터 그의 형제를 지켜보았다는 것일까? 대체 무슨 관계인데?
“그 말씀은…….”
석대원이 뭐라 물으려는 순간, 화고가 발돋움을 하던 땅을 가볍게 찍고 몸을 날렸다. 그녀의 뒷말은 전음으로 들려왔다.
-네가 그분을 원망하지 않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하지만 다음 말은 이어지지 않았다.
* * *
연벽제는 기계적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정리 정돈에 철저한 사람이었다. 그것은 멸족의 화로부터 요행히 살아남아 한 자루 철검에 일신을 의지한 채 강호를 떠돌던 시절에 생긴 습관이었다. 당시의 여러 경험을 통해 그가 배운 사실은, 스스로 챙기지 않는 물건은 결코 자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주의를 기울여 자기 물건을 챙기기 시작했고, 그것이 자연스레 몸에 배어 어느 때부터인가는 습관으로 굳어졌다.
정리 정돈에 철저한 사람일수록 물건들의 위치에 신경을 쓴다. 어떤 물건이 본래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을 발견하면 마치 식사를 한 후에 입가심을 빠트린 듯 찝찝한 기분을 지우지 못한다. 지금 연벽제의 기분이 그랬다. 그리고 이번에 제자리를 지키지 않은 것은 물건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큰 쟁반을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원탁 위의 빈 그릇들을 수습하는 늙은 시녀에게 연벽제가 물었다.
“두전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가?”
시녀가 손길을 멈추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습니다, 원주님. 따로 분부하실 일이라도 있으신지요?”
검왕 연벽제가 이 장원 내에서 얻은 정식 호칭은 삼비영이지만, 최소한 이 집에서는 원주로 불렸다.
“아닐세.”
쟁반을 들고 방을 나서는 시녀의 뒷모습을 보는 동안에도 연벽제의 찌푸린 미간은 펴질 줄 몰랐다. 저녁상을 물릴 때까지도 두전이 자리를 비우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아니라면 이런 적이 없었고, 여기서 특별한 일이란 연벽제로부터 모종의 임무를 내려 받았음을 의미했다.
사실 두전에게 하나의 임무를 주기는 했다. 그러나 그 임무는 비교적 간단한 것이어서 정상적으로만 진행되었다면 이미 마쳤어야 했고, 두전은 날이 저물기 전에 연벽제가 기다리는 이곳으로 복귀했어야 마땅했다. 한데 그러지 않았다. 이는 간단할 것이라 여겼던 그 임무에 뭔가 심상치 않은 문제가 발생했음을 뜻했다.
시녀가 원탁 위에 밝혀 놓고 간 궁촉의 불꽃처럼 마음이 흔들렸다.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었다.
‘무슨 문제일까?’
한때 강호에서 마조, 혹은 청강마조라는 별호로 불리던 두전과 주종의 인연을 맺은 것도 어언 이십 년. 비록 피는 한 방울도 섞여 있지 않지만 연벽제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은 누가 뭐래도 두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연벽제로서는 이제는 주종의 관계를 뛰어넘어 지음의 관계에까지 이르렀다고 여기고 있지만, 관계의 한쪽을 차지한 두전은 언제나 이를 부정했다. 추종자의 신분으로 연벽제를 우러르는 것이 이십 년 전에 결정한 삶의 목표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래서 더욱 조심스럽기도 했다. 우상을 위해서는 목숨마저도 흔쾌히 내던질 극단적인 인물이 바로 두전임을 알기 때문이었다.
‘내가 나섰어야 했나?’
그러나 두전이 말렸다.
-속하의 기우일지도 모르지만 분위기가 심상치 않습니다. 팔부중 중 최강자 셋이 이곳에 머물고 있는 것도 그렇고요. 그런 마당에 원주께서 움직이신다면 심상치 않은 눈으로 보는 자가 나올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평소 그곳 왕래가 잦았던 속하라면 그렇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
어지러운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검을 닦기로 했다.
벽에 걸린 검가에서 야뢰를 내린 연벽제는 방석에 정좌한 뒤 준비한 마른 헝겊을 기름에 적셨다. 남방으로부터 어렵게 공수해 온 상품의 동백기름을 약한 불에 장시간 졸여 기름 속 수분을 증발시킨 이 세검유洗劍油에도 주인을 지극으로 받드는 두전의 정성이 담겨 있었다. 야뢰를 얻기 전까지는 그 정성이 과하다 여겼는데, 지금은 아니었다. 야뢰는 성질 나쁜 귀부인만큼이나 까다로운 검이었고, 입맛에 맞는 기름이 아니면 당최 받아들이려고 하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검신 양쪽으로 삼 회에 걸쳐 세검유를 먹인 직후, 연벽제는 이 집 안으로 누군가 들어섰음을 알아차렸다. 야뢰 위로 기름 헝겊을 문지를 때만 해도 명경처럼 잔잔하기만 하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늘이 엷게 깔렸다. 온 사람은 두전이 아니었다. 하지만 모르는 사람도 아니었다.
“원주님, 장주님께서 왕림하셨습니다.”
이 집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연벽제지만, 이 집을 품고 있는 전체 장원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시녀의 목소리에 전에 없는 공경이 담긴 것은 그 때문이리라.
“들어오시라 아뢰게.”
연벽제는 밤이 되면 더욱 생기를 띠는 야뢰의 검날을 검갑 안으로 감춘 다음 방석에서 일어섰다. 이윽고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검을 닦고 계셨구려. 방해한 것은 아닌지?”
공식적으로는 이 장원의 장주요, 비각의 편제로는 사십구비영의 수좌인 이명이 특유의 근엄한 목소리로 연벽제에게 물었다. 연벽제는 고개를 저었다.
“막 마친 참이니 괘념치 마시오. 이리로.”
검가에 야뢰를 건 연벽제가 이명을 원탁 쪽으로 안내했다.
은행나무를 통으로 다듬은 원탁 양쪽에 두 사람이 자리를 잡은 뒤, 연벽제가 이명에게 물었다.
“늦은 시각인데 무슨 일로 찾아오셨소?”
각 내 서열을 감안하면 지나치게 직선적인 질문이지만 이명은 개의치 않는 듯했다.
“연 형께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어서 찾아왔소.”
연벽제는 침묵으로 이명의 뒷말을 재촉했다. 이명은 그에 응했다.
“연형께서는 십여 년 전 이 집에 둥지를 틀며 새로운 현판을 올린 것으로 기억하고 있소.”
“분명히 그랬소.”
“그날부터 궁금히 여기던 점이오. 참을 ‘인’ 자, 검 ‘검’ 자의 인검원忍劍院. 연 형의 검은 대체 무엇을 참고자 하는 것이오?”
원탁 위 한 점에서 연벽제와 이명, 두 사람이 눈길이 소리 없이 부딪쳤다. 그때 연벽제는 이명의 흑백이 분명한 눈 속에서 짙은 아쉬움을 보았다. 그러자 문득 궁금해졌다. 이명은 과연 그의 눈 속에서 무엇을 보았을까?
‘아마 비슷한 것을 보았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연벽제가 입을 열었다. 그러나 그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이명의 질문에 대한 답이 아니었다.
“두전이 돌아오지 않았소.”
이번에는 이명이 침묵으로 연벽제의 뒷말을 재촉했다. 연벽제는 그에 응했다.
“그가 돌아오지 않은 것과 이 형이 방금 하신 질문 사이에 어떤 관련이라도 있는지?”
이명은 한참을 더 침묵하다가 짧지만 고통스럽게 내뱉었다.
“있소.”
연벽제는 천천히 허리를 폈다. 굳이 눈을 돌리지 않아도 검가까지의 거리는 몸이 알고 있었다. 그는 찰나라고 불러도 될 만큼 짧은 시간 안에 그 검가에 걸린 야뢰를 뽑아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 맞은편에 앉은 이명이 비록 천하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숨은 고수라 할지라도 그가 죽일 수 있는 범주에서는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연벽제는 가볍게 편 두 손을 원탁 위에 얹었다. 그럼으로써 자신에게는 이 방 안에서 살인을 행할 뜻이 없음을 암묵적으로 드러냈다. 그는 검왕이었다. 그에게는 어느 순간이든 제 한 몸을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시정잡배처럼 방 안에서 피를 보고 싶지도 않았거니와, 저 이명이 십이 년이라는 긴 세월에 걸쳐 그에게 보여 주었던 극진함과 정중함을 시정잡배의 죽음으로써 갚아 주고 싶지는 않았다. 그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씀이 있다면 지금 하시오. 오늘 이후 우리에게는 대화를 나눌 시간이 그리 많을 것 같지 않으니까.”
연벽제의 말에 이명은 이제껏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모습을 보였다. 어깨를 떤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은 아닌 것 같았다. 아쉬움. 이명의 어깨를 떨리게 만든 것은 그가 지금까지도 두 눈을 통해 짙게 풍겨 내는 아쉬움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연 형께서 가 보셔야 할 곳이 있소. 하지만 연 형께서 내 청을 거부한다 해도 탓하지는 않으리다.”
이명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연벽제는 그를 잠시 올려다보다 뒤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 형이 내게 한 유일한 청은 군영이를 옥방에서 나오게 해 달라는 것이었소. 하지만 그 아이는 내 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옥방을 나왔지.”
당시의 일을 떠올렸는지 검은 수염에 덮인 이명의 입가가 작게 실룩거렸다. 그런 이명에게 연벽제가 말했다.
“이번만큼은 이 형의 청을 들어 드리고 싶소.”
이명이 고개를 슬쩍 숙였다.
“고맙소.”
연벽제는 검가가 달린 벽 쪽을 돌아보며 이명에게 물었다.
“검을 가져가도 되겠소?”
거절해 봐야 소용없다고 여긴 것일지도, 이명은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검왕에게는 언제 어디서건 검을 가질 가격이 있겠지요.”
“고맙소.”
기다렸다는 듯 검가에서 훌쩍 몸을 날린 야뢰가 연벽제의 왼손 안으로 빨려들어 왔다.
인검원 정문 앞에는 몇 명의 사내들이 횃불 빛을 받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그중에 눈길을 끄는 인물을 들라면, 굳이 그 자리가 아니라도 눈길을 끌 수밖에 없는 거경 제초온이 있었고, 횃불과 거경이 함께 만들어 낸 넓은 그림자 안에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는 귀문도 우낙도 보였다.
“연 모 하나를 데리러 많이도 오셨구려.”
연벽제와 그의 왼손에 들린 야뢰를 번갈아 쳐다보던 사내들이 인검원 정문 문턱을 넘어서면서 던진 연벽제의 이 한마디에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예외가 있다면 가장 선두에 서 있던 거경 정도. 연벽제의 얼굴에 고정된 거경의 두 눈은 당장이라도 불똥을 뿜어낼 듯이 이글거리고 있었다. 연벽제는 거경의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후 그토록 이글거리던 거경의 눈빛이 소낙비라도 맞은 듯 빠르게 누그러졌다.
“제기랄, 내가 가장 싫어하는 일 생기겠군.”
그러나 그 일이 무엇인지 설명하는 대신 거경은 발치에 가래침을 퉤 뱉었다.
거경으로부터 눈길을 돌린 연벽제는 자신을 뒤따라 인검원 문턱을 넘어서는 이명에게 말했다.
“갑시다.”
먹구름이 낮게 깔린 밤하늘 아래로 몇 개의 횃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