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쟁선계-345화 (345/421)

(1)

산이 보인다.

수목의 초록색이라고는 한 점도 찾아볼 수 없는, 얼음 거인처럼 우뚝 선 화강암 봉우리들과 그 위를 새하얗게 덮은 만년설로 이루어진 산이다.

산 밑에는 넓은 호수 하나가 자리 잡고 있다. 수은으로 만든 거대한 거울처럼 모든 것을 반사시키는 호수의 수면에는 눈 덮인 산과 그 위에 펼쳐진 하늘이 아래위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칭을 이루며 그대로 담겨 있다.

하늘은 지나치리만치 깨끗한 느낌을 준다. 산등성이와 맞닿은 부분은 노란빛을 머금은 연청색이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비현실적으로 농도가 짙어져 종래에는 밤처럼 완강한 군청색을 이루고 있다.

눈길이 미치는 곳 어디에도 구름 한 점 보이지 않고, 그래서인지 바람마저 불지 않는 것 같다.

화폭 속의 그림처럼 완벽히 정지된 산.

그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차가워 보이고, 그래서 언젠가 그곳에 가게 되리라는 근원 모를 예감만으로도 목덜미 위에는 소름이 돋는다.

그 순간 문득…….

작은 결정 하나가 가지에서 떨어진 얇은 꽃잎처럼 나풀거리며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호수와 그 위의 화강암 봉우리들과 그 위의 만년설과 그 위의 하늘이 가느다란 끈들로 올올이 풀리더니 아스라이 사라지고, 캄캄한 방에서 갑자기 솟구친 불길을 본 것처럼 환몽에서 퍼뜩 깨어난 석대원은 뭔가에 홀린 듯이 왼손을 내밀어 가슴 앞으로 떨어져 내리는 결정을 손바닥 위에 받았다.

고사목의 껍질처럼 보기 흉하게 갈라진 손바닥 위에서 작은 물 얼룩으로 녹아 사그라지는 눈송이.

석대원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산이 사라진 시야 위에 어느새 복원된 현실의 공간을, 위압적인 오동나무 금장 현판이 걸린 커다란 대문과 그 양옆으로 완강하게 이어진 붉은 기와를 얹은 높은 담벼락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사는 집이었다. 아니, 그녀가 살았던 집이었다.

석대원은 그녀와 가까워졌다는 생각만으로, 마치 눈도 뜨지 못한 어린 강아지가 어미 개가 곁에 있다는 본능적인 느낌만으로 안도하며 귀엽게 고갯짓을 하듯이, 늑대 탈의 그늘에 가려진 메마른 입술 위로 미소 비슷한 것을 떠올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미소가 머문 시간은 무척이나 짧았다.

목소리.

-이리 와요.

장난치다 깨트린 벼루를 들켜 엄마의 꾸중을 기다리는 아이처럼 엉덩이를 빼고 주춤주춤 다가간 그를 살며시 끌어안으며, 그녀는 조금 쉰 듯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보고 싶었어요.

그가 내민 비단 채대를 보고서 웃음을―어쩌면 울음을― 감추려는 듯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던 그녀. 그런 그녀가 너무도 사랑스러워 힘껏 끌어당긴 그. 그녀와의 마지막 입맞춤. 그리고…….

-당신…… 지금…… 울고 있나요……?

그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가 무슨 대답을 할 수 있었을까?

-불쌍한…… 사람…….

붉은 검을 배에 박은 그녀. 웃음 짓는 눈에서 꺼져 가는 마지막 생기.

석대원은 두 눈을 감았다.

그녀가 더 이상 저 집 안에 없다는 사실을, 이 세상 어디에서도 그녀의 모습을 두 번 다시 볼 수 없다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되새기는 일은 무문관에서 겪은 수많은 윤생을 통해 사막의 폭양 아래 버려진 뼛조각처럼 말라 버린 석대원으로서도 견디기 힘든 고통이 아닐 수 없었다. 사리문 이빨이 아랫입술을 파고들며 쇠의 비린 맛과 소금의 짠맛이 감돌았다. 그날 그의 얼굴에 뿌려진 그녀의 피 맛 또한 이랬다는 기억이 났다.

기억.

슬픔이 낙인처럼 새겨진 장소 앞에 이르자 어떤 종류의 기억은 인위로 단절시키는 것이 아예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윤생과 현실의 접점이던 무문관에서 막 빠져나온 때조차도, 삶의 허망함에 가장 망연해진 시점에서조차도 뼈저리게 느꼈던 사실이었다.

그날 이 단천원에서 벌어진 비극에 대한 기억은 끈질긴 빚쟁이처럼 지치지도 않고 석대원을 찾아왔고, 매 순간 그에게 갑작스럽고 새로운 타격을 가했다. 비극의 근원이 자신에게 있다는 사실은 마치 해가 뜨고 달이 뜨는 자연법칙처럼 확고하기만 하여, 그는 한시라도 그 점을 잊을 수 있기를 감히 바랄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자신은 여전히 살아 있다는 죄책감이 너무나 크고도 깊어 그 죄책감을 조금이라도 덜 수만 있다면 ‘살아 있다’는 전제조건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던질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렇게 하는 것만이 유일한 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독뱀처럼 문득문득 고개를 들었다. 충동, 혹은 집착과도 같은 그런 자멸적인 생각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그는 그 비좁은 토굴을, 그곳에서 들은 광비 대사의 마지막 당부를, 그 당부로부터 가까스로 끌어 올린 그 자신의 다짐을 죽을힘을 다해 곱씹어야만 했다.

세상 속에서, 삶 속에서, 답을 구하라…….

그러나 답은 보이지 않았다. 답이 있으리라는 기대조차 품기 힘들었다. 석대원은 울고 싶었다. 하지만 그 어떤 순간에도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래서였을까? 폭풍우 치는 바다 위 낡고 좁은 선실 안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언제일지 모르는 그날, 상대의 죽음 앞에 흘려 줄 눈물이 남아 있기를…….

박탈당한 비탄은 석대원을 차지한 또 다른 요소인 무감無感에 잠식되어 눈물도 없고 울음소리도 들리지 않는 공허한 메아리로 스러졌다. 무문관에서 나온 그가 범제 대사의 주행칠보와 연대구품 속에서 창안해 낸 심동공허心動空虛에는 무공 이름을 뛰어넘는 신랄한 은유가 담겨 있었다. 그날 이후 그는 공허 속에서 깨어나 공허 속에서 숨 쉬고 공허 속에서 달리다가 공허 속에서 잠들어야만 했다. 그는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무슨 생각을 그리하는 게냐?”

눈송이를 나부끼게 하는 작은 바람에도 스러져 버릴 듯한 맥없는 목소리가 등 뒤에서 울렸다. 석대원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한숨이 절로 나올 만큼 폭삭 늙은 대머리 노인 하나가 양쪽에 바퀴를 붙인 나무 의자에 앉아 고개를 삐뚜름하게 꺾고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나이테 같은 주름살로 빽빽이 뒤덮인 노인의 얼굴은 춥고 지치고 음울해 보였지만, 그를 향한 눈길에서는 일말의 따스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석대원은 대머리 노인, 운리학의 무릎을 덮은 잿빛 털가죽 위에 놓인 둥그스름한 광목 꾸러미를 잠시 내려다보다가 이제는 어린 시절 동생들과 함께 터뜨리던 웃음소리만큼이나 익숙해진 무감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말소리의 일부가 늑대 탈의 주둥이 부분 안쪽을 맴돌며 어눌한 사람의 후음喉音 같은 기이한 울림을 만들고 있었다.

“어찌 아무것도 아닐꼬. 수대를 이어 온 악연의 종착지를 목전에 두었거늘.”

운리학의 탄식에는 오랜 세월의 더께가 쌓여 있었지만 미안하게도 석대원은 전혀 공감할 수 없었다. 수대를 이어 온 악연 따위란 노인의 발치에 뒹구는 자갈만큼이나 그와는 무관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는 운리학의 바람대로 비각의 근거지인 이 단천원을, 그로서는 두 번 다시 되새기고 싶지 않은 끔찍한 비극의 무대를 다시 찾아왔다. 그가 구하던 답의 어떤 실마리가 이곳에 있을 거라는 기대는 물론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운리학의 말에 순순히 따른 까닭은, 그렇게 함으로써 두 가지 악연을, 운리학이 말한 것과는 전혀 다른 그만의 악연들을 매듭지을 작정에서였다. 하나는 저 커다란 대문 안에 사는 강요당한 적들과의 악연이었고, 또 하나는 당초 그로 하여금 비틀린 운명의 길로 걸어가게끔 만든 장본인들 중 한 사람인 운리학과의 악연이었다. 그러므로 연극 무대에서 뛰쳐나온 듯한 붉은 장포와 붉은 가면을 뒤집어쓰고 이 무의미한 광대놀음에 장단을 맞춰 주는 것도…….

‘이번이 마지막이겠지.’

늙은 연출자를 굽어보는 석대원의 눈길 속으로 서늘한 기운이 어렸다. 아마도 연을 끊고 떠나는 그를 막지는 않을 것이다. 이곳에서의 일이 끝난 뒤로는 그럴 명분도, 이유도 없을 테니까.

석대원의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운리학은 눈구름이 더욱 어두워지는 서쪽 하늘을 슬쩍 올려다보았다.

“섬서로 간 네 형 걱정은 안 드느냐?”

운리학은 석대원의 대답을 기다리듯 잠시 짬을 두었다가 주름진 미간을 모으며 다시 한 번 근심의 기색을 드러냈다.

“서장과 천산에 녹림까지 손을 잡았으니 필시 쉬운 싸움은 아닐 텐데…….”

“형님은 괜찮을 겁니다.”

석대원이 말했다. 운리학의 눈길이 늑대 탈 위로 돌아왔다.

“어찌 그리 자신하는 게냐?”

“장성한 뒤로 한 번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남에게 걱정을 끼칠 만큼 약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는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군조를 막기 위해 강동에 갔을 당시 석대원은 형 석대문에게서 반석처럼 흔들림 없는 ‘중심’을 보았다. 중심이 잘 잡힌 배는 여간해서는 가라앉지 않는 법. 비각의 지원군을 끊기 위해 섬서로 간 사람들은 모든 것의 중심이 되는 석대문으로 인해 더욱 강해지고 더욱 굳건해질 것이다.

그때 운리학이 앉은 바퀴 달린 의자 부근에서 서성거리던 폐의 청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회주님이 대단하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우리 사부님을 빼놓으시면 안 되네요.”

운리학이 무슨 부당한 일이라도 당한 사람처럼 가뜩이나 큰 콧구멍을 더욱 벌름거리는 폐의 청년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개방 방주도 물론 대단한 사람이지. 그래, 그런 사람들이 한마음으로 힘을 합쳤으니 곤란은 있을지언정 낭패를 보는 일은 없을 것 같구먼.”

‘우리 사부님’ 얘기는 끼어들 핑곗거리에 지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폐의 청년, 개방의 후계자인 황우는 대화가 두 사람 위주로 돌아가기 전에 얼른 석대원을 돌아보며 말했다.

“묻고 싶은 것이 두 가지 있네요. 한 가지는 사적인 것이고, 한 가지는 공적인 것이네요.”

석대원의 시선이 황우를 향했다. 칠 척 장신에 으스스한 늑대 탈까지 뒤집어쓴 그가 이리 마주 보면 켕기는 마음이 들 법도 하건만, 개방의 후계자에게는 과연 담대한 면이 있었다. 황우는 조금도 주눅 들지 않고 하고 싶은 말을 꺼냈다.

“우선, 지난 동짓날에 옥천관에서 그 많은 사람들을 죽인 것이 지금 여기 오신 분들의 짓이 맞는지 궁금하네요.”

황우의 질문에 대답해 준 사람은 석대원이 아니라 운리학이 앉은 바퀴 의자를 밀고 있던 중늙은이였다.

“맞네.”

다부진 체격과 오래된 가죽처럼 거칠고 잔주름 낀 얼굴을 가진 그 사람은 시장에서 고약을 팔다가 올 초 혈랑곡에 합류한 금철하후가金鐵夏候家의 후예 하후봉도였다.

황우가 소의 것을 닮은 눈알을 뒤룩뒤룩 굴리다가 말했다.

“이곳에 온 삼십 명 남짓한 인원으로 오백 명이 넘는 사람들을, 그것도 내로라하는 백도의 강호인들을 죽이는 게 어떻게 가능한지 모르겠네요.”

하후봉도가 고개를 저었다.

“옥천관으로 들어갈 당시 우리는 곡주님을 포함, 오십 명이었네.”

“그럼…….”

“우리 측에서도 스물에 가까운 형제들이 죽거나 몸을 움직이지 못할 중상을 입었다는 뜻이지. 그리고 그날 우리가 죽인 자들의 수는 오백이 아니라 삼백 조금 넘는 정도에 불과하다네. 본래 관문을 지키던 수비병들을 포함해 많은 자들이 달아났지. 그들이 두렵고 부끄러운 마음에 수를 부풀리는 바람에 옥천혈효니, 일 검에 오백 명이 죽어 나갔느니 하는 말도 안 되는 소문이 나돌게 된 걸세.”

혈랑곡주가 휘두른 일 검에 옥천관의 새벽이 피로 물들었다는 옥천혈효에 관한 소문은 석대원도 들은 바 있었다. 소문 속에 등장하는 혈랑곡주는 피에 굶주린 악마인 동시에 천하제일검이기도 했다.

‘하긴 그 노도사도 그렇게 말했었지.’

-무당의 현학이 천하제일검을 시험해 보리다.

오 척을 조금 넘는 볼품없는 체구와 원숭이를 닮은 오종종한 얼굴을 가진 늙은 도사가 석대원의 앞길을 가로막은 것은 그가 첫 번째 제물의 목을, 황상의 위엄이니 정난칙사의 권한이니 가소로운 소리를 늘어놓으며 한껏 거들먹거리던 흑포 관원의 목을 가차 없는 일 검으로 날려 버린 직후였다.

무당파 장문진인의 검법은 ‘인상적’이었다. 석대원은 사천의 적심관에서 수련하던 시절 무당검법을 비롯한 천하의 몇 가지 이름난 검법들에 대한 평가를 증조부에게서 들은 적이 있었다. 도도하고 끊임이 없다. 이것이 무당검법에 대한 증조부의 촌평이었다. 과연 옥천관에서 몸소 겪어 본 무당검법은, 도도하고 끊임없는 태극의 현기가 깊게 밴 그것은 석대원에게 범제 대사의 소림 공부로부터 받은 것에 버금가는 감흥을 주었다. 덕분에 석대원은 무문관을 나온 이후 처음으로, 비록 짧은 시간에 불과했지만, 검객으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맛볼 수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보답으로 상대의 뜻에 부응해 주었다. 혈랑검법과 연가비검, 거기에 바즈라-우파야의 공능이 실린 벼락의 검까지 불러냄으로써 무당파 장문진인이 시험하고자 한 천하제일검의 경지를 여실히 보여 준 것이다.

-이건 대체……. 허허.

십 초의 ‘시범’이 모두 끝나고, 왼팔은 잘려 나가고 오른팔은 벼락에 타 붙어 사라진 상태에서, 심동공허의 구부러진 공간 너머로 환상처럼 튀어나온 붉은 검을 바라보며 현학은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웃었다. 스스로가 걸어온 길을 풍자하는 듯한 그 허망한 웃음은 몸통에서 떨어진 자그마한 머리통이 차가운 돌바닥에 떨어지는 순간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날 새벽 옥천관에서 석대원에 의해 행해진 살인은 그것 말고도 무수히 많았지만, 공허해진 머릿속에 최소한의 의미라도 부여받아 기억의 형태로 남겨진 것은 그 정도에 불과했다.

“두 번째로 묻고 싶은 건 공적인 일인데, 음, 제가 이곳에 온 이유이기도 하네요.”

잠시의 회상을 밀어내며 의식 속으로 파고든 황우의 목소리에 석대원이 외면했던 시선을 그에게 주었다.

“사부님께서 석 소협께 물건은 언제 돌려줄 생각인지 여쭤 보라고 하셨네요.”

“물건?”

“소림에서 받아 가신 철포 말이네요. 음, 누르스름한 색깔에, 사부님이 여기다 두르고 다니시던.”

황우는 허리띠를 대신해 동이고 있던 새끼줄에 양손 엄지를 끼우더니 두어 번 당겨 보였다.

‘그 물건 얘기였군.’

개방 방주가 알면 화를 낼지도 모로는 일이지만, 석대원은 무문관에서 나온 그날 이후 개방 방주에게서 받은 철포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날 무문관 밖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매불 대사는 그에게 ‘한 가지 약속을 얻어야 하고 한 가지 짐을 내려놓아야 하고 한 가지 악연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었다. 그중 한 가지 약속에 해당하는 것이 바로 개방 방주에게서 받아 한로에게 보관시킨 문제의 철포였던 것이다.

앞날을 예견할 줄 아는 그 기인은 대체 무엇을 보고서 거지의 허리띠를 석대원에게 가져가라 한 것일까?

문득 매불 대사가 개방 방주에게 한 말이 떠올랐다.

-이번 추위가 풀리기 전, 저 시주에게는 방주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일이 반드시 생기게 될 걸세. 그때 귀찮다 말고 도움을 주시게나.

동지를 훌쩍 넘긴 겨울은 이미 깊어져 있었고, 매불 대사가 말한 시한은 그리 오래 남지 않았다. 그러나 개방으로부터 도움을 받아야 할 일에 대한 조짐은 여전히 찾아볼 수 없었다. 인연을 맺기보다는 끊는 쪽에 더 무게를 두어야 하는 앞으로도 그러하리라.

석대원은 잠시 생각하다가 황우에게 말했다.

“이곳에서의 일이 끝나는 대로 돌려주겠소.”

황우의 얼굴에 반색이 떠올랐다.

“잘됐네요. 사부님께서 무척 기뻐하시겠네요.”

그때 정면에 서 있던 단천원의 대문 안쪽에서 무거운 나무가 끌리는 둔탁한 소리가 울렸다. 누군가 빗장을 푸는 듯. 그러더니 잠시 후 사두마차가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대문이 양쪽으로 활짝 열리고, 팔다리가 유난히 긴 노인이 말상의 얼굴을 드러냈다. 혈랑곡에서 전령의 임무를 맡고 있는 양각천마 최당이었다.

경공의 대가답게 대문 너머에서 훌쩍 몸을 날려 사람들 앞에 가볍게 내려서는 최당에게 석대원이 물었다.

“어찌 되었소?”

막내아들뻘밖에 되지 않는 주군인데도 최당은 지나치리만큼 깍듯하게 고개를 꺾었다.

“정문 부근은 대충 정리했습니다만 안쪽 상황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석대원은 무심히 추궁했다.

“이유는?”

“부지가 너무 넓었습니다.”

운리학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만 오천 평이나 되는 곳이니 그럴 만도 하지.”

석대원은 지난가을 단천원에 잠입했을 때 방향을 제대로 찾지 못해 곤란했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다. 북변을 지키는 대규모 군사시설로 축조되어 역사가 사백 년에 이르는 단천원은 그 정도로 광활했다.

“왕 노인과 수 노인은 무엇을 하고 있소?”

석대원의 이어진 질문에 최당이 보고했다.

“왕철창王鐵槍은 노사부님의 지시대로 이비영이라는 자가 기거한다는 동쪽 전각들로 갔습니다. 그리고 고자 놈은 역천뢰가 있는 북쪽 언덕으로 올라갔고요. 아, 한자고는 아이가 역천뢰에 있을 가능성이 있다면서 고자 놈을 따라갔습니다.”

‘왕철창’은 취설천월 왕구연, ‘고자 놈’은 엄공 수여쟁의 별명이었다. 그들은 혈랑곡도들 중에서 가장 무공이 고강한 다섯 사람을 가리키는 오대낭아의 일원이었다. 그리고 한로가 찾으려 하는 아이란 물론 서문숭의 손녀 서문관아를 가리켰다.

건정회가 옥천관에서 괴멸된 뒤 제갈휘가 이끄는 무양문 삼로군은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정난칙사의 죽음에 대한 연대책임에서 벗어나기 위해 장강 전선을 정리하고 본거지가 있는 복건으로 귀환했지만, 출정의 가장 큰 원인이었던 서문관아의 신병 확보에는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텅 비어 버린 석대원에게 있어서 서문관아는 세상과 그를 이어 주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끈 중 하나였다. 석대원은, 만일 서문관아의 납치에 비각의 마수가 작용한 것이 분명하다면, 그래서 그 신병이 비각의 그늘 아래 감춰져 있다면, 오늘 이 단천원에서 아이를 찾게 되리라고 믿었다. 비각을 멸살하려는 운리학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그러한 믿음은 그가 이 비극의 무대에 다시 발을 들이려 마음먹은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다.

석대원이 최당에게 다시 물었다.

“적의 저항은 어떠했소?”

“머릿수는 제법 되었지만 왕철창과 고자 놈을 어찌할 만한 인물은 없었습니다.”

석대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각은 소수 정예의 전형이라고 할 만한 집단이었다. 하지만 지난 일 년여 기간 동안 외부에서 모색한 각종 사업의 여파로 그 정예 중에서도 핵심이라고 할 만한 강자들의 반수 이상을 잃고 말았다. 그런 만큼 오대낭아의 두 사람을 곤란하게 만들 인물은 한 손에 꼽을 정도에 불과할 터였다.

하나 썩어도 준치라는 말이 시사하듯 비각을 만만히 봐서는 안 된다. 무력과 계략을 관장하는 일비영과 이비영이 여전히 건재한 이상은, 무엇보다도 어둠 속에서 수십 년간 웅크린 채 정계와 강호 양면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해 온 잠룡야 이악이 숨 쉬고 있는 한은.

“잠룡야는 어디 있는지 파악했소?”

“저, 그게…….”

무슨 까닭인지 이번 질문에 대해서만큼은 즉답을 못하고 머뭇거리던 최당이 석대원이 아닌 운리학을 향해 답을 내놓았다.

“잠룡야는 현재 단천원을 비웠다고 합니다.”

가늘고 하얗고 올이 성근 운리학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그게 무슨 말인가? 춘절春節(정월 초하루)까지는 이곳에 머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틀 전만 해도 이곳에 있었다고 합니다. 한데 북경으로부터 무슨 연락을 받고 팔부중의 수좌와 함께 급히 길을 떠났다고……. 고자 놈이 하급 비영 중 한 명에게서 알아낸 정보입니다.”

잠룡야의 부재가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최당의 목소리는 점점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운리학의 바퀴 의자 뒤에 서 있던 하후봉도가 무거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엄공이 캐냈다면 사실일 겁니다.”

석대원은 하후봉도의 말뜻을 곧바로 알아들었다. 엄공 수여쟁은 온갖 종류의 고문과 형벌로 악명을 떨치는 동창 출신이었다. 그의 손에 걸린 이상 끔찍한 고통 속에서 머릿속에 담고 있던 모든 것을 털어놓고 넝마처럼 해진 몰골로 죽어 가는 것은 예정된 수순이나 마찬가지였다.

운리학은 찌푸린 얼굴로 혀를 차다가 허벅지 위에 올려놓은 광목 꾸러미를 내려다보았다. 오랜 준비와 계획과 기다림이 담긴 ‘비각 멸살’의 꿈을 마침내 실행에 옮기기 위해 강동제일가를 떠난 노인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산동성 제남에 위치한 신무전이었다. 노인은 그곳에서 지난가을 비각의 공작에 의해 목숨을 잃은 아들 운소유의 유골을 수습했다. 저 광목 밑에 감춰진 작은 오지단지 안에는 바로 그 유골이 담겨 있었다.

“호연晧衍이 자리를 비운 점이 아쉽긴 하지만, 그 후손과 이비영이라는 자가 저 안에 남아 있는 만큼 이 아이에게 체면치레는 할 수 있겠지.”

운리학이 아들의 유골이 담긴 광목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쓸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호연은 잠룡야 이악의 자字였다. 이름 대신 자로써 부른다는 것은 그만큼 가까운 사이였다는 뜻. 실제로 석대원의 증조부와 그 의동생인 운리학이 비각의 일비영과 이비영으로 활약하던 시절, 이악은 바로 다음 서열인 삼비영의 자리에 앉아 문무 양면으로 경탄할 만한 비범함을 보이던 두 사람을 앙모하고 시기하고 견제했다고 한다.

운리학이 시선을 들어 석대원을 바라보았다.

“그의 수명이 우리의 예상보다는 조금 긴 것 같구나.”

노예에게 계약 기간이 연장되었음을 통보하는 듯한 그 눈빛과 말투가 석대원에게 작은 혐오감을 불러왔다. 어린 시절부터 운리학을 집안의 큰 어른으로, 또 스승으로 좋아하고 따르던 노인이었지만, 부친의 거짓 죽음에 대해 책임이 상당 부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지금은 많은 것이 바뀔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유한한 존재였고, 그 유한함의 일부인 과거 한 시절의 관계란 아무리 아름다운 기억으로 치장되었다 한들 불변이 아닌 가변적일 것일 수밖에 없었다. 하물며 십이 년 전에 벌어진 그 사건으로 말미암아 유복하던 유년을 박탈당하고 향후의 인생 전체가 완전히 바뀌어 버린 석대원에게는 더더욱 그러했다.

“음험함을 좋아하는 자들은 대개 오래 살더군요.”

석대원이 음울하게 말했다. 선의善意에 반하는 이 무자비한 역설이 경향을 넘어 규칙처럼 작용하는 세상은, 그러므로 온갖 불행이 곰팡이처럼 들끓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역설의 본보기 중 하나인 운리학은 세상에서 짝을 찾아보기 힘든 천재답게 석대원의 말속에 담긴 중의重義를 금방 알아차린 눈치였다.

“아원…….”

선명한 빛을 거의 잃고 이제는 돌멩이처럼 잿빛에 가까워진 운리학의 늙은 눈동자가 늑대 탈의 눈구멍을 지나 석대원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안에 담긴 애절한 기운은 동정심을 유발하기에 충분했지만, 석대원의 혐오감을 씻어 갈 정도는 아니었다.

석대원이 추궁하듯 물었다.

“제가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신지요?”

운리학은 석대원을 잠시 더 바라보다가 고개를 힘없이 내저었다.

“그랬구나. 역시 그랬어.”

목구멍을 긁으며 흘러나온 듯한 그 작은 목소리에는 당연하리라고 믿었던 기대가 무너진 자의 우울한 체념이 담겨 있었다. 석대원은 귀퉁이에 구멍이 나 바람이 갑자기 빠져 버린 주머니처럼 바퀴 의자 위에 어깨를 한껏 쪼그라트리고 앉아 있는 노인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에게 무슨 요구를 할 수 있겠느냐? 네가 더 이상 호연을 찾아 나서지 않는다고 해도 너를 탓하지는 않으마.”

운리학이 처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지만 석대원은 개의치 않았다. 오늘이 지나면 운리학에 대한 모든 것에 대해, 심지어 그것이 생사와 관련된 문제라도 일절 개의치 않을 생각이었다. 그는 이미 묘비처럼 차가워져 있었다.

“저는 오늘 이후에 대해 아무 말씀도 드리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이 지난 뒤 잠룡야를 만나건 만나지 않건 그것은 노사부님의 뜻이 아닌 제 뜻으로 결정될 겁니다.”

석대원이 말했다. 그의 목소리를 감싸고 있는 무형의 냉기를 감지한 듯, 황우는 눈을 끔뻑거렸고 하후봉도는 표정을 굳혔다.

“곡주님, 아무리 곡주님이시라도 노사부님께…….”

“아닐세.”

운리학이 의자 등받이 너머로 오른손을 들어 하후봉도의 뒷말을 막았다.

“네 뜻이라. 그래, 그래야겠지.”

석대원을 향해 고개를 주억거린 운리학이 말을 이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제발 내 뜻에 따라 다오. 형님과 내가 너를 키운 것은 바로 오늘을 위해서였다. 네가 있음으로 형님과 나의 의도가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니. 이 순간만을 염원하며 긴 세월을 기다려 온 늙은이를 위해, 아니, 자식의 원수를 갚고자 하는 늙은 아비를 위해서라도 오늘만큼은 네 힘을 빌려 다오.”

석대원은 말을 이어 가던 중 갑자기 격정에 휩싸인 듯 앙상한 손바닥을 들어 올려 앞으로 내미는 운리학을 잠시 동안 내려다보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앉아 있는 초라한 노인과 서 있는 붉은 거한 사이에 불편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점점 부풀어 오르고 무거워져서 종래에는 두 사람을 영원히 단절시킬지도 모르는 그 침묵을 깨트린 것은 단천원의 열린 대문 앞에 서서 안쪽의 동정을 살피던 최당의 목소리였다.

“이제 슬슬 들어가 보실 때가 된 것 같습니다.”

긴 팔을 흔들어 신호를 보내는 최당을 일별한 석대원이 낮은 심호흡으로 딱딱하게 굳은 어깨를 풀고는, 바퀴 의자 뒤에 버티고 서서 여전히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하후봉도에게 말했다.

“노사부님을 모시고 따라오시오.”

하후봉도의 회흑색 눈동자가 잠깐 흔들렸다. 그러나 혈랑의 곡도는 언제 어디서건 혈랑곡주의 명에 따라야 했다. 그것이 바로 혈랑의 율법이었다. 결국 하후봉도는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무겁게 끄덕였다.

심중의 불경함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는 수하의 태도에도 석대원은 개의치 않았다.

‘결국 한시적인 것. 찰나의 놀음에 불과한 것.’

오늘이 지나면 저들은 새로운 곡주를 구해야 할 터였다. 삼 대 혈랑곡주는 저들 중에서 나올 수도 있고, 석대원이 전혀 짐작조차 못 한 새로운 누군가를 데려올지도 모른다. 뭐, 운 노사부의 신통방통한 수완이야 익히 아는 바니까. 그러나 오불관언吾不關焉,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든 그와는 이미 무관한 일이리라.

석대원은 대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런 다음 조금씩 쌓이기 시작한 함박눈 위에 단호하지만 쓸쓸한 족적을 남기며 그녀의 피로 얼룩진 비극의 무대를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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