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쟁선계-351화 (351/421)

?19권

한산 (一)

(1)

조심당操尋堂 북쪽 담벼락 아래 뚫린 그 비좁은 개구멍을 마지막으로 통과하던 날, 소소의 형편은 그리 좋다고 할 수 없었다.

중양절을 며칠 앞둔 구월 초순의 어느 밤, 창건 이래 강북제일세의 명성을 단 한 번도 내준 적이 없었던 북악 신무전은 주력의 대부분이 집을 비운 상황에서 정체 모를 괴 집단의 침입을 받았고, 주인인 신무대종 소철을 비롯한 주요 수뇌부들이 목숨을 잃는 비극을 겪었다. 잠자리로 들이닥친 큰올케 당가영의 피에 전 모습에서 집에 심각한 변고가 벌어졌음을 알게 된 소소는 뒤이어 밀려든 적도들을 피해 개구멍으로 달아났고, 금랑호가 멀지 않은 수풀 속에 숨어 얇은 침의 바람으로 밤비를 맞으며 병아리처럼 몸을 떨었고, 작년 여름 사천에서 만난 의수신안륜 부대연이란 악당에게 발각당해 끔찍한 꼴을 당할 위기에 처했고, 어둠 속에서 나타난 초면의 남자―제비 반지의 원주인이자 검에서 시허연 벼락 줄기를 뿜어내는 무시무시한 고수―로부터 구함을 받았고, 절망과 두려움에 허덕거리며 비극의 밤에서 벗어났다.

그로부터 백 일이 지났다. 그사이 소소와 신무전에는 실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그중 가장 극적인 일은 영웅처럼 귀환한 그녀의 대사형이 배신한 호랑이를 때려죽이고 신무전을 되찾은 것. 그 결과로 이씨에 넘어갈 뻔한 신무전이 다시 소씨에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녀는 충분히 만족하고 기뻐할 수 있었다, 도씨가 신무전의 새 주인이 되는 것은 그녀의 할아버지께서도 바라셨던 일이었기에.

신무전의 새 주인이 된 철인협 도정은 하루에도 몇 차례씩 ‘저 사람이 내가 알던 그 미욱스러운 대사형이 맞나?’라는 의문을 그녀에게 던져 줄 만큼 놀라운 수완과 과감한 결단력을 발휘하며 뿌리까지 흔들렸던 신무전을 다시 일으켜 세웠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오랜 평화기를 거치며 노화될 대로 노화된 조직을 더 팔팔하고 의욕 넘치는 조직으로 바꿔 놓았다는 점이었다. 단적인 증거가 엄청나게 젊어진 사방대주의 연령인데, 평균 연령이 일흔에 육박하던 것이 이제는 절반, 아니 삼분의 일이 겨우 넘는 이십 대까지 낮춰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작고한 증천보의 뒤를 이어 청룡대주가 된 증혁만이 삼십 대일 뿐, 현무대주가 된 셋째 사형 구양현은 이십 대 중반, 백호대주가 된 증가사소룡의 막내 증훈은 이십 대 매우 초반, 거기에 얼마 전 주작대주로 내정―까지는 아니더라도 꽤나 유력한 후보에 올랐다―된 천추백가千秋白家의 막내아들은…… 그러니까 대사형의 말을 빌자면, 제 형을 닮아 정말 늠름하고 잘생긴 강호 기협이 될 거라던 그 미래의 강호 동량은…….

“내가 미쳐.”

좁고 퀴퀴하고 어제 내린 눈 때문에 질척해지기까지 한 개구멍 안으로 백 일 만에 머리통을 집어넣으며, 소소는 입술을 일그러뜨렸다. 이 개구멍을 포함한 조심당은 비극의 밤 이전까지는 그녀가 사는 집이었고, 대사형이 귀환한 뒤로 다시 그녀의 집이 되었다. 뭐, 자발적으로 하는 짓인 데다 예전에도 종종 하던 짓이니만큼 주인 체면에 개구멍 출입이 웬 말이냐고 투덜거릴 입장은 아니지만, 그래도 일 각 뒤에 방문하기로 예정된 열 살짜리 꼬맹이를 피하기 위해 할 짓은 아니라는 생각이 개구멍을 통과하느라 용을 쓰는 내내 그녀의 머릿속을 가시처럼 찌르고 있었다.

절반은 지면 위 담벼락에, 나머지 절반은 지면 아래 흙바닥에 뚫린 개구멍을 지나기 위해서는 지네처럼 엎드린 몸뚱이를 활 모양으로 휘어 바르작거릴 수밖에 없었다. 자체로도 용이한 동작이 아니거니와 오랜만에 해 보는 짓이라 그런지 더더욱 힘들게 느껴졌다. 반쯤 녹은 얼음덩이처럼 차갑고 축축한 흙바닥을 얼굴과 가슴과 아랫배와 허벅지 등 열일곱 살 처녀에게는 소중하기 이를 데 없는 부위들로 밀고 당기고 비벼 대는 것은 그리 깔끔한 성격이 아닌 그녀로서도 절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그런 만큼, 욕이 절로 나왔다.

“나쁜 새끼.”

누구를 향한 욕이냐 하면, 대사형 도정을 향한 욕이었다.

관동에서 백호대를 휘몰아 영웅처럼 귀환한 일은 멋졌다. 할아버지가 살아 계시던 시절에도 자타 공인하는 신무전 최강 전사였던 독안호군 이창과 일대일로 붙어 노지심이 개 잡듯 때려죽인 것은 멋진 걸 넘어 진짜 끝내주는 사건이었다. 그 대단한 결투를 관전하는 동안 상복 속곳에 오줌까지 몇 방울 지릴 만큼 흥분해 버린 소소는 배신한 호랑이에게 합당한 벌을 내리는 도정을 향해 아낌없는 찬사와 환호를 보냈다.

-와! 역시 우리 대사형이 최고야!

……그런데 그 최고의 대사형이 소소를 배신했다. 개구멍의 침침한 그늘에 덮인 소소의 커다란 두 눈이 도둑고양이의 것처럼 새파랗게 번득였다.

뭐? 나더러 열 살짜리 꼬맹이에게 시집을 가라고? 그래서 코흘리개 신랑이랑 알콩달콩 소꿉놀이나 하면서 주작대를 잘 이끌어 보라고? 사부가 베푸신 하늘같은 은혜에 대한 보답이란 게 그 손녀딸을 정략결혼 시키는 거야?

소소는 기품 있고 친절한 둘째 사형 백운평을 누구 못지않게 좋아했지만, 그래서 백운평 같은 남자가 어느 날 자신의 앞에 나타난다면 한 해 넘게 이어 온 가망 없는 짝사랑을 접고 새로운 인연을 시작해 볼 용의도 있지만, 그 남자가 열 살짜리 꼬맹이라면 얘기가 전혀 달랐다. 문득 어제 들은 대사형의 능글능글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러니까 이번 기회에 해 버리는 거야. 알겠지?

끙, 하고 마지막 용을 쓰면서 양 손바닥으로 흙바닥을 힘차게 밀어낸 소소가 개구멍 바깥으로 고개를 쭉 빼내며 부르짖었다.

“내가 할까 보냐!”

그 순간 소소가 마주친 것은, 아리도록 새파란 겨울 하늘을 배경으로 서서 나이에 걸맞지 않게 만사 달관한 듯한 표정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는 한 소년의 눈이었다. 맑고 총명해 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눈은 등딱지 바깥으로 목을 빼낸 거북이처럼 담벼락 밑에서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그녀를 향해 이렇게 묻고 있었다.

‘또…… 당신입니까?’

소소는 소년의 눈을 올려다보며 힘없이 반문했다.

“또…… 너냐?”

소년, 과홍견은 ‘애늙은이’라는 소소의 핀잔에 걸맞게 언제나 예의를 잃지 않았다. 그는 두 주먹을 앞으로 모으며 공손하게 허리를 숙였다.

“사저를 뵙습니다.”

“치워라. 인사받을 기분 아니다.”

개구멍을 마저 기어 나온 소소는 흙물로 더러워진 앞섶을 손바닥으로 탁탁 털면서 과홍견에게 물었다.

“대사형이 시켰니?”

그러리라고 생각했다. 익숙한 상황이었으니까. 하지만 뜻밖에도 과홍견은 고개를 젓는 것이었다.

“아닙니다.”

“아니야? 정말로?”

“예.”

새삼스러운 눈으로 다시금 과홍견을 살펴보니 옷차림이 평소와는 무척 달랐다. 삼절각에서 운 사부에게 수학하던 시절, 과홍견은 꼬마 유생처럼 늘 유복만 입고 다녔다. 한데 지금은 아니었다. 두더지 가죽으로 만든 모자와 두툼한 솜옷, 손목과 발목을 단단히 동인 투수와 각반, 등에는 큼직한 나무 서궤를 지고 허리 뒤춤에는 짚신을 여러 켤레 매단 품이 어디 먼 길이라도 떠나는 상인 같은 차림이었다.

“어디 가니?”

과홍견은 조금 쑥스러워하는 듯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소소가 미간을 좁히며 다시 물었다.

“묻잖아, 어디 가냐고?”

“예.”

“어딘데?”

“어딘지는 소제도 모릅니다.”

과홍견의 이 막연한 대답이 소소의 귀에는 기이할 만큼 단호하게 들렸다. 소소는 심각해졌다.

“어딘지도 모른다면서 왜 가는 건데? 뭘 하려고?”

“새 스승님을 찾으려고 합니다.”

“새 스승? 무슨 스승?”

과홍견은 소소의 발치 어딘가를 내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시잖습니까, 소제가 배울 수 있는 것이 바둑밖에 없다는 사실을요.”

“아, 맞다. 네 할아버지가…….”

소소는 아차 하며 입을 닫았다. 자신이 하려던 말이 과홍견 앞에서 꺼내서는 안 되는 것임을 떠올린 탓이었다. 사실 저 애늙은이를 얄미워하면서도 대놓고 괴롭히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그녀는 유일한 피붙이인 할아버지를 여의고 하루아침에 천애고아가 된 가엾은 아이를 못살게 구는 악당이 되고 싶지는 않았었다. 하물며 동병상련의 처지가 된 지금에 이르러서는 더더욱 그랬다. 그러자 갑자기 할아버지가 사무치도록 보고 싶어졌다.

-어허, 걸음걸이하고는. 이 망아지를 누가 데려갈꼬.

운 사부도 보고 싶었다.

-여계와 열녀전을 왜 외워야 하냐고? 다 외우면 까닭을 얘기해 주마.

말년에 와서는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그녀를 시집보내지 못해 안달을 내던 두 사람. 그래서일까? 대사형도 그 두 사람이 사무치도록 그립기 때문에 그녀를 시집보내려고 이렇게 귀찮게 구는 걸까?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열 살은 좀…….

“몇 살이니?”

소소가 불쑥 물었다. 과홍견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소제요?”

“그럼 너지, 내 나이를 물었겠니?”

“지난달에 생일이 지나서 이제 열세 살입니다.”

“어어, 생일이었구나. 축하도 못 했네. 아무튼, 그렇구나, 열세 살.”

굳이 손가락을 꼽아 보지 않아도 열세 살이면 열 살보다 세 살이 많았다. 이런, 무려 세 살이나!

그러고 보니 덩치도 커졌다. 처음 보았을 때는 자신의 어깨에도 미치지 못하던 놈이 한 해 사이에 부쩍 자라 지금은 귓바퀴 어름까지는 충분히 올라온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얼굴은…….

‘뭐, 이목구비 또렷하고 눈동자가 맑으니 저만하면 잘생긴 편이라고 할 수 있겠지. 늘 우거지상을 하고 있는 게 흠이라면 흠이지만, 그런 일을 겪고서도 히죽거리고 다니면 그거야말로 소름 끼치는 일일 테지.’

과홍견의 구석구석을 살피는 소소의 눈이 수풀 속에 숨어 토끼를 노려보는 여우의 것처럼 점점 더 갸름해졌다. 하지만 그런 속셈을 알 턱이 없는 과홍견은 그녀의 뜬금없는 질문을 무안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편으로 오해했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소제가 갑자기 나타나서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냐, 아냐, 나 별로 안 놀랐어.”

손사래를 치는 소소에게 과홍견이 말을 이었다.

“이 집 식구가 된 지 일 년도 채 안 되는 소제지만, 그래도 떠나기 전에 인사는 드리는 게 도리라고 생각했습니다. 다른 분들께는 모두 인사를 마쳤고, 마지막으로 사저를 뵈려고 이렇게 찾아온 겁니다.”

이 말에 소소는 심기가 조금 뒤틀렸다. 이 빌어먹을 자식은 왜 나를 맨 마지막 순번에 놓았담. 내가 그렇게 못되게 굴었나? 하지만 이어진 과홍견의 말에 그녀의 뭉친 눈매가 스르르 풀렸다.

“아무래도 소제와 가장 가깝게 지낸 분이 사저시지 않습니까. 돌아가신 사부님을 빼면 소제를 가장 어여삐 여겨 주신 분도 사저시고요. 그래서 길 떠나는 소제를 기꺼이 배웅해 주시리라 믿었습니다.”

“맞아, 내가 정이 좀 많은 편이지.”

“그런데 막상 조심당에 들어가 보니, 조금 뒤에 천추백가의 막내 도령과 만나실 약속이 잡혀 있어서 지금은 사저를 뵐 수 없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겁니다.”

“음? 왜 하필 여긴데?”

과홍견이 계면쩍은 웃음을 지었다.

“어린아이는 질색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그런 사저께서 의관 정제하고 얌전히 방에 앉아 천추백가의 막내 도령을 맞이하실 리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잘생긴 사제는 심지어 영민하기까지 했다. 과홍견을 향한 소소의 눈이 더욱 부드러워졌다. 이제 보니 얘 제법 괜찮잖아? 그제야 뭔가 수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조심성 많은 새처럼 어깨를 흠칫 떠는 모습마저 귀여워 보였다.

그즈음 담벼락 너머가 부쩍 소란스러워졌다.

“아씨, 어디 계셔요?”

점점 커지는 웅성거림 속에는 소소를 찾는 시비의 당황한 부름 소리도 간간 섞여 나오고 있었다. 여기서 어정거리다 들키는 날에는 산통 깨지기 십상. 소소는 왼손을 뻗어 과홍견의 손목을 답삭 움켜잡았다.

“너, 나랑 좀 가자.”

“예? 어디를…….”

소소는 반사적으로 두 다리를 뻗대는 과홍견을 향해 눈을 부릅떴다.

“어른이 가자면 예, 하고 따라나설 것이지 어딘지는 알아 뭐 하게? 잔말 말고 냉큼 따라와.”

말은 따라오라 해 놓고 실제로는 끌고 가다시피 하여 당도한 곳은 신무전 정문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골목에 자리 잡은 작은 주루였다. 산동의 특산품인 연대주煙臺酒의 맛이 일품인 그 주루는, 호방한 강호 여협을 자처하는 소소에게는 주인과 얼굴을 익힌 지 두 해가 넘는 단골집이기도 했다.

마수걸이가 손님이 누구인지 알아보고 다소 과장되게 웃는 주인에게 내가 온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한 소소는 과홍견을 끌고 별실로 들어갔다. 물론 상등품 연대주 한 병과 그녀가 특별히 좋아하는 달콤새콤한 오이 무침―가장 빨리 나오는 안주였다―을 주문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혹시 상중喪中이 아니시냐는 주인의 조심스러운 질문 따위는 못 들은 척했다. 누군가에게 할아버지에 대한 효심을 의심받는 것은 분명 불편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호방한 강호 여협에게 삼년상은 너무 길지 않은가.

연자주색 휘장이 드리운 자그마한 별실은 아늑한 동시에 운치 있었고, 술과 안주는 즉시 마련되었다.

“받아.”

“예?”

소소가 탁자 맞은편에서 어리둥절해하는 과홍견을 향해 눈썹을 찡그리며 다시 말했다.

“술 주잖아. 얼른 안 받고 뭐 해?”

“아, 예.”

그제야 소소가 치켜 내민 오른손과 그 끝에 들린 술병의 의미를 알아차린 과홍견이 자신의 앞에 놓인 조그만 술잔을 눈썹 높이로 들어 올렸다. 조륵조륵. 우윳빛 자기 술병의 긴 목을 타고 투명한 술 줄기가 떨어지는 것을 지켜보던 소년이 무슨 대단한 선물이라도 받은 양 감격한 얼굴로 말했다.

“술은 한 번도 안 마셔 봤지만 사저께서 따라 주시는 이별주이니만큼…….”

“이별주, 음, 그래, 이별주. 뭐, 나중에 가서 다른 주酒가 될지도 모르지만.”

“예?”

“아니야. 자, 나도 한 잔 줘 봐.”

그 비극의 밤, 적도들에게 독살당한 삼절각의 운 사부는 생전에 호주가 소리를 들을 만큼 술을 즐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풍류를 완전히 외면하는 벽창호 또한 아니었다. 그래서 소소는 볕이 꺾어지는 봄날 오후나 보슬비가 소슬히 내리는 가을날 저녁, 운 사부의 곁에 술병을 들고 서서 술시중을 드는 과홍견의 모습을 가끔 목격할 수 있었다. 그런 이력 덕분인지 소소의 술잔을 채워 가는 과홍견의 손놀림에는 제법 노숙한 면이 엿보였다.

보란 듯이 단숨에 술잔을 비워 낸 소소가 입술만 찔끔 적시고 자탁자 위에 술잔을 내려놓는 과홍견에게 궁금히 여기던 점을 물어보았다.

“우리 신무전에 삼절 사부 말고는 바둑을 가르칠 만한 고수가 없는 건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 갑작스럽잖아. 혹시 공밥 먹는다고 누구한테 구박이라도 받은 거야?”

과홍견은 ‘그럴 리가요’라는 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 애늙은이다운 모습이 마뜩잖아 소소는 콧등을 찡그렸다.

“좋아, 그럼 네가 찾는다는 새 스승이 대체 누군데?”

“아직 모릅니다.”

“몰라?”

“이제부터 찾아봐야지요. 그래서 떠나는 겁니다.”

소소는 팔짱을 끼고 턱을 살짝 올린 뒤 마치 철부지 자식을 마주한 부모님 같은 눈길로 과홍견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세상 무서운 걸 아직 모르는 모양인데, 목적지도 없이 무작정 길을 떠났다가 어느 산길에서 산적이라도 만나는 날엔 너 같은 어린애는 그냥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야. 운 좋게 살아남는다고 해도 죽는 날까지 산채에 붙잡혀서 산적들의 속옷만 빨아야 할걸.”

과홍견이 또 한 번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앞서의 것과 비슷한, ‘설마요.’라는 뜻이었다. 소소는 묘하게 건방진 느낌을 주는 어린 사제에게 꿀밤 한 대 먹이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고 말을 이어 갔다.

“너, 일전에 삼절 사부의 유골을 수습하러 강동에서 올라오신 부친분하고 만났잖아. 그 무지무지 나이 많은 할아버지 말이야.”

“운 노사부님이십니다.”

“그래, 운 노사부. 그분한테 가는 건 어때? 지란 언니의 어릴 적 글 선생님이었다니 글도 잘 아실 거고, 삼절 사부의 부친이니 바둑도 잘 둘 거 아냐.”

“안 그래도 강동제일가로 가는 게 어떠냐는 제안을 그분께서도 하셨습니다.”

“잘됐네, 그럼 그리 가라고!”

그러나 쓸쓸히 고소를 짓는 과홍견을 본 순간 소소는 잘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왜? 강동에는 왜 안 가는데?”

과홍견은 애늙은이다운 차분함을 유지한 채 대답했다.

“운 노사부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강동으로 따라가면 제 기예를 단련해 주실 수 있느냐고요. 운 노사부님께서는, 사부님의 높은 기예는 사부님 스스로 얻은 것이지 당신께서 물려주신 것이 아니라고 하시더군요. 그러시면서 기예를 쌓고자 한다면 소제 또한 사부님처럼 스스로 길을 찾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소소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겨우 그런 이유로 자식의 하나뿐인 제자―운 사부를 ‘사부’라고 부르는 사람은 많지만 진짜 제자는 과홍견 하나뿐이었다―를 거두지 않았다고? 생전의 운 사부에게는 다소 쌀쌀맞은 면이 있었는데, 아마도 부친에게서 물려받은 모양이었다.

“좋아, 그럼 모용풍 대협은? 그분이 널 이리로 데려왔다며? 그러니까 내 말은, 그분이 데려왔으니까 그분이 다시 데려가 주실 수도 있잖아? 지금은 황서계도 재건됐으니까…….”

“이미 한 번 큰 폐를 끼친 분입니다. 염치없는 짓을 되풀이할 수는 없지요.”

“이 고집불통 자식.”

소소는 답답한 마음에 연대주 한 잔을 재차 비운 뒤 젓가락으로 집은 오이 무침을 입안에 욱여넣고 신경질적으로 우적거렸다. 그사이 숙수가 바뀌기라도 했는지 오늘따라 달콤새콤한 맛이 덜한 것 같았다. 탁, 소리 나게 젓가락을 내려놓은 그녀가 과홍견에게 다시 물었다.

“그래서, 정말로 너 혼자 떠나겠다는 거야,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누군지도 모르는 바둑 스승을 찾아서?”

과홍견이 옆자리에 풀어 둔 집신 꾸러미를 손바닥으로 툭툭 두드리며 대답했다.

“이놈들이 다 닳도록 돌아다니다 보면 그런 분을 찾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아, 잘났어, 진짜.”

소소는 짜증을 내며 의자 등받이에 털썩 등을 기댔다. 조실부모에 조부를 잃고 지금은 사부마저 잃은 저 가엾은 사제에게선 나이에 걸맞은 귀여운 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건방지고(남자답고), 고집 세고(굴강하고), 애늙은이 같고(듬직하고)…… 그리고 잘생기고…….

갑자기 허리를 앞으로 당긴 소소가 술병을 낚아채 한 잔을 마시고, 한 잔을 마시고, 또 한 잔을 마셨다. 그렇게 석 잔을 연거푸 넘긴 뒤에야 비로소 말을 꺼낼 용기가 생겼다.

“얘.”

소소의 부름에 과홍견이 제 술잔에 얹어 두었던 시선을 들었다.

“너 나한테 장가올래?”

이 폭탄 발언에 대한 상대의 반응은 소소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것이었다. 과홍견의 고개가 아주 살짝 옆으로 기울어졌다. 마치 날개가 여섯 개 달린 신기한 잠자리를 발견한 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젠장.’

소소는 귓바퀴 뒤 여린 살갗 아래로 핏물이 고동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하지만 이미 칼집에서 뽑힌 칼이라, 그녀는 목소리가 떨려 나오지 않도록 턱에 한껏 힘을 주며 말을 이어 나갔다.

“너도 잘 알겠지만 요번에 전주가 된 우리 대사형, 좀 막가는 면이 있긴 해도 쩨쩨한 사람은 아니야. 저번에 만났을 때, 소씨에서 받은 것은 무공이든 재물이든 전부 소씨에 돌려주겠다고 약속하더라. 네가 내 신랑이 되면 무극팔진기를 비롯해서 우리 할아버지의 무공 전부를 배울 수 있다는 뜻이지. 생각해 봐, 보통 무공이 아니야. 자그마치 ‘신무대종’의 무공이라고. 그리고 우리 집, 제법 부자이기도 하거든. 청룡대에서 운영하는 사업체의 대부분이 소씨 소유지. 네가 만일 나한테 장가와서 소씨의 대를 이어 준다면, 그게 모조리 네 것이 된다는 얘기야. 어때, 이만하면 지참금치고는 썩 훌륭한 편 아닌가? 그리고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음, 너는 어려서 아직 잘 모르겠지만, 강호에서 미명이 자자한…….”

내용은 휘황찬란하건만, 무슨 이유인지 그 내용을 담은 목소리는 빛을 싫어하는 벌레처럼 점점 목구멍 안으로 기어들어 가고 있었다. 소소는 자신의 얼굴이 지금 얼마나 빨개졌을지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런 몸이시지. 게다가 딱히 경쟁할 만한 상속자도 없어요. 너도 알지, 우리 아빠? 그 일 겪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방랑벽이 도져서 종적을 감추셨잖아.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어디 경치 좋은 데다 도관 한 채 지어 드리면 그걸로 만족하고 물러앉으실 거야. 원래부터 그런 분이었으니까. 음, 이제까지 내가 한 말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어? 그러니까…….”

소소는 심호흡을 한 뒤 열세 살 소년을 향한 장황한 혼인 요청을 마무리 지었다.

“다 때려치우고 나한테 장가와라, 이거야.”

그러자 과홍견이 풋, 웃었다. 소소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거렸다. 너무 좋아서 웃은 건가?

“사저께서는 여전하시네요. 다행입니다.”

“응?”

뭐가 여전하고 뭐가 다행인데?

“솔직히 소제는 걱정을 많이 했습니다. 노전주님께서 그렇게 세상을 떠나시고 신무전에 많은 변화들이 생기는 바람에 사저께서 슬픔에서 쉬 벗어나지 못하시면 어쩌나 하고요.”

술잔을 들어 조금 마신 과홍견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사저께서는 하나도 달라지신 것 같지 않네요. 짓궂은 농담으로 소제를 놀리시고……. 아, 압니다. 먼 길 떠나는 소제의 울울한 기분을 이런 식으로라도 풀어 주려 하신다는 점을 말입니다.”

얼굴 살갗 밑에 숯불이라도 지펴 놓은 것 같았다. 소소는 화끈거리는 뺨을 주체하지 못하고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마, 맞아! 내가 농담을 한 줄 어떻게 알았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런 엄청난 말을 어떻게 진담으로 여기겠습니까.”

“그, 그렇지? 네가 듣기에도 좀 그랬지? 아, 몇 달 쉬었더니 농담하는 실력이 많이 줄었나 봐.”

얼굴에 손부채질을 하며 너스레를 떤 소소는 과홍견이 알아차리지 못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두 어깨가 안주 접시에 담긴 절인 오이처럼 아래로 처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과홍견의 말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말고 강호를 멀리하라는 것은 할아버지의 유언이었습니다. 비록 사부님의 기예를 배우기 위해 북악의 처마 아래 들어오기는 했지만, 그 말씀은 한시도 잊은 적이 없지요.”

과홍견이 옆자리에 놓인 서궤를 들어 탁자에 올려놓았다. 그 서궤 안에는 서너 벌의 옷가지를 비롯해 행장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몇 가지 담겨 있었고, 그 위에는 헝겊으로 감싼 두툼한 책 같은 물건이 놓여 있었다. 과홍견은 헝겊 뭉치를 꺼내 탁자 위에 펼쳤다. 소소는 단순히 헝겊이라고 여긴 것이 사실은 넓은 보자기 위에 가로세로 먹줄을 그린 천 바둑판이라는 사실을 그제야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천 바둑판으로 싸여 있던 네모난 물건은 그녀가 짐작한 대로 책이었다. 각각이 그리 두껍지 않은 두 권의 책. 과홍견은 그 책들을 양손에 나눠 쥐고 그녀를 향해 하나씩 들어 보였다.

“이것은 할아버지께서 정리하신 과씨의 기예고, 이것은 사부님께서 물려주신 운씨의 기예입니다. 하나는 가장 날카로운 창이고 하나는 가장 단단한 방패지요. 이 두 가지를 하나로 융합하여 ‘완벽’한 기예를 만들겠다는 것이 소제가 정한 삶의 목표입니다.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미숙한 소제를 다듬어 주시고 단련시켜 주실 새로운 스승님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말을 마친 과홍견은 입술을 꾹 다물고 양손에 들린 두 권의 책이 무슨 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열세 살 소년이 설파한 비장하고도 단호한 인생관에 숙연해진 듯, 별실 안에 잠시간 무거운 정적이 내려앉았다. 그 틈을 타 달아오른 얼굴을 식힐 수 있었으니 소소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수치심으로 뜨거워졌던 피가 식자 우울함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소소는 손가락 끝으로 술잔의 가장자리를 쓸며 맥없이 중얼거렸다.

“그렇구나. 다들 가는구나.”

서궤를 닫던 과홍견이 소소를 돌아보았다.

“소제 말고 또 길 떠나는 사람이 있나 보죠?”

소소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는 과홍견의 말 중에 나온 짧은 단어 하나를 입속으로 곱씹어 보았다.

‘길.’

앞을 다투는 자들의 길.

소소에게는 세 명의 사부가 있었다. 할아버지, 삼절각의 운 사부 그리고 배신한 호랑이에 의해 현무대주로 내정되었다가 함께 몰락의 길을 걸어야만 했던 현무대의 전임 부대주 절검선자 요수향.

청룡, 백호, 주작, 현무의 사방대는 철인협 도정이 신무전의 신임 전주로 등극한 즉시 대대적인 개편에 들어갔다. 도정은 이창의 배신에 한 톨이라도 부응한 인물은 단 한 사람도 조직 내에 남겨 두려 하지 않았다. 물론 숙청의 정도에는 차이가 있어서 목이 잘리는 극형을 당한 자가 있는가 하면―백호대에 특히 많았다― 전에서 추방되는 경형輕刑에 그친 자도 있는데, 그중에서 가장 처리 곤란한 인물이 바로 소소의 세 번째 사부이자 진정한 무공 사부인 요수향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요수향은 이창의 시커먼 속을 인지하지 못했을 공산이 컸다. 그런 상황에서 현무대를 이끌던 만린선생 종청리가 제남혈사 때 사망하고 말았으니, 현무대 부대주였던 요수향이 그 자리를 물려받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계제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도정은 요수향에 대해 선처의 뜻을 내비쳤다. 백 일 근신 뒤에 금번에 새로 만들어진 장로원―실제로는 물갈이를 통해 떨려 나간 노인네들을 모아 놓는 허울뿐인 조직이긴 하지만―으로 자리를 옮기는 것이 그녀에게 내려진 처분이었다. 팔다리의 근맥을 끊고 가차 없이 추방해 버린 전임 주작대주 염위의 경우에 비춰 보면 실로 관대하기 이를 데 없는, 전임 전주의 혈육인 소소와의 관계가 십분 반영된 가벼운 처분임이 분명할 터였다.

그러나 요수향은 신임 전주의 처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소소가 전에서 달아난 며칠 사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것일까? 제자이자 선주先主의 혈육인 소소에게 큰절을 올림으로써 이창에게 현혹되어 배신의 길에 동참한 잘못을 사죄한 그녀는, 사람을 볼 줄 모르는 눈은 존재할 필요가 없다며 스스로 두 눈을 파냄으로써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장님이 된 절검선자는 머리를 깎고 노산魯山의 작은 비구암으로 출가했다. 노산의 산자락 밑까지 따라가 사부를 배웅한 소소는 그녀의 부축으로부터 벗어나 지팡이를 더듬거리며 속인으로서의 마지막 길을 비척비척 걸어가는 사부의 초라하고도 쓸쓸한 뒷모습에 처량한 심정을 가누지 못했다.

요수향은 그렇게 ‘길’을 떠났다. 그러나 이후에 다른 사람들이 경쟁하듯 올라선 길은 그녀가 밟은 고적한 길과는 사뭇 달랐다.

‘정말 다들 그랬어.’

소소는 며칠 전 단봉당 앞뜰에서 목격한 막내 올케 석지란의 모습을 떠올렸다.

수선화처럼 곱기만 하던 올케 언니가, 봄볕처럼 따사롭기만 하던 올케 언니가, 그런 선녀 같은 지란 언니가 현무대 무사들이 입는 투박한 검은 무복을 입고서 물풀처럼 풀어 헤쳐진 머리카락을 얼굴에 휘감은 채 나찰처럼 사납게 목검을 휘두르는 광경은 놀라움을 넘어 비현실적인 것이 아닐 수 없었다.

지란 언니의 상대는 소소의 셋째 사형이자 언니에게는 지아비가 되는 구양현이었다.

-일어서!

빡!

-흥, 얕보지 말아요!

-검을 뻗을 땐 입 다물고!

빠박!

-다시!

목검을 가지고 펼치는 부부간의 대련이기는 했지만 그 형국은 어떤 실전 못지않을 만큼 험악했다. 평소의 다정함과 온화함은 어디다 감춰 두었는지, 셋째 사형은 돌처럼 굳은 얼굴을 하고서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정말로 인정사정없이 부인인 지란 언니를 찌르고 때리고 몰아붙였다. 남편의 목검이 두드리고 지나간 지란 언니의 몸뚱이 위로 시퍼런 멍 자국이 부풀어 올랐고, 심지어는 얼굴도 얻어맞아 위아래 입술이 함께 터지기까지 했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오그라드는 치열한 대련이 끝났을 때, 지란 언니는 소소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상상하지 못했던 놀라운 모습을 보여 주었다.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고 피와 침과 위액이 섞여 무슨 색인지 꼬집어 말하기 힘든 액체를 왝왝 토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황급히 달려가 부축하는 소소를 향해 지란 언니는 엉망으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비틀며 힘없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간 너무 놀았나 봐요. 몸이 어째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를 않네요.

대사형은 현무대주가 된 구양현을 가장 잘 보필할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지란 언니를 현무대의 부대주에 임명했다. 하지만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러한 파격적인 인사 이면에는 대사형 특유의 음험한 정치적 계산―어마어마한 소문을 몰고 다니는 이 대 혈랑곡주 석대원과 충천하는 기세로 성장하는 강동제일가와의 관계를 더욱 돈독히 하기 위한―이 깔려 있음을. 문무 양면에 별다른 능력도 없는 소소를 주작대 부대주로 임명하고, 그 남편으로 천추백가의 열 살짜리 꼬맹이를 들이려 한 것도 따지고 보면 같은 맥락이었다. 둘째 사형 백운평의 사망이 공식적으로 확인된 뒤 자칫 떨어져 나갈지도 모르는 하북과 북경의 지지 세력을 다잡기 위함일 테니까. 그래서 소소는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 신임 전주가 과거 ‘냉혈왕’이라 불리던 노전주의 심성을 그대로 빼다 박았다는 소리를 듣고 저도 모르게 어깨를 떨어야만 했다. 뭐, 아무튼.

지란 언니는 그래서 수련에 돌입한 것이라고 했다. 신무전으로 시집온 뒤로 등한시했던 가전의 검법을 단련해 현무대 부대주 자리에 부끄럽지 않은 무인이 반드시 되어 보이겠다면서.

-내 부족함이 내가 맡은 자리에 누가 돼서는 안 되겠지요.

이렇게 말하는 지란 언니는 같은 여자라도 반할 만큼 멋지고 꿋꿋해 보였지만…… 그러나 소소와 자오란주를 나누어 마시며 밤새도록 수다를 떨던 살가운 올케 언니는 아니었다. 지란 언니가 이때처럼 멀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나는 언니처럼 못 할 거 같아요.

처량하게 흘러나온 소소의 말에 지란 언니는 빙긋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소소를 향한 언니의 눈은 ‘결국 아가씨도 하게 될 거예요.’라고 예언하고 있었다. 소소는 까닭 모를 비참한 심정에 사로잡혀 언니의 눈길을 외면할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길에 오르고 있었다.

저마다 앞으로 나아간다고 확신하는 길.

확신도 없고 그래서 나아갈 방향도 알지 못하는 소소 혼자만을 과거의 한 자리에 그대로 남겨 둔 채로.

나도 가야 하는 걸까? 그 길을 찾아 올라야 하는 걸까?

그러나 소소는 자신의 앞에 놓인 미래에 대해 어떠한 믿음도 품을 수 없었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섬에 홀로 버려진 것처럼 외로워졌다.

과홍견이 천천히 자신의 잔을 비웠다. 첫 잔은 그대로 마지막 잔이 되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소년이 짚신을 뒤춤에 차고 서궤를 등에 짊어졌다.

“아마도 소제는 죽을 때까지 이보다 좋은 송별연을 경험하지 못할 겁니다. 감사합니다, 사저.”

이별이 기정사실이 되었음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그 순간이 닥쳐오니 견디기 힘들었다. 소소는 오이 무침 국물에 소맷자락이 쓸리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 채 탁자 위로 팔을 뻗어 과홍견의 손을 붙잡았다. 그녀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크고 단단한 손. 이 아이는 언제 이렇게 자랐을까?

“나를 위해 이곳에 남아 주면 안 되겠니?”

소소가 물었다. 목소리가 떨려 나오는 것을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과홍견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자신의 왼손을 붙잡은 소소의 손 위에 오른손을 살며시 포갰다.

“사저, 할아버지와 사부님의 유품이 이곳에 남아 있지 않습니까. 그것들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소제는 반드시 돌아올 겁니다. 그날이 오면 지금처럼 좋은 환영연, 꼭 부탁드리겠습니다.”

맞잡은 손과 손이 떨어지고, 탁자 맞은편에 앉은 처녀를 향해 어른처럼 듬직하게 포권을 올린 소년이 별실을 떠났다.

또 한 사람이 자신만의 쟁선지로爭先之路에 올라선 것이다.

“아.”

소소는 불붙은 듯 뜨거워진 눈알을 가리기 위해 눈꺼풀을 감았다. 투명한 물방울이, 남겨진 자의 외로운 눈물이 사과 속살처럼 하얀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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