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3 피니셔(3) =========================
이튿날 새벽, 카시야가 사라졌다. 적진으로 침투한 것이다.
사령관실의 멤버들은 불안한 마음을 억누르며 만에 하나 그녀가 실패할 경우를 대비한 회의를 이어갔고, 상부로부터 '13일 해가 질 때까지 퇴각 준비를 완료하라'는 명령을 받은 최전방 부대에서는 눈에 띄지 않도록 퇴각 작전을 짜느라 분주해졌다.
모두들 극도로 긴장한 가운데, 카시야만이 무심했다.
움직이기 편한 작전복에 얼굴을 가리고 모래바람을 막아줄 두건을 쓴 채 어둠을 틈타 도시로 흘러든 카시야는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어 때를 기다렸다.
태양이 뜨고 모든 것을 태워버릴 듯 이글거렸지만 연합군과 ICS의 대치는 큰 변화가 없었고, 평소와 같은 긴장감이 흘렀다. 카시야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열기를 버텼다.
그러나 오후 2시, 기다렸던 모래폭풍이 시작되자 그녀는 고글을 뒤집어쓴 채 모래폭풍 안으로 뛰어들었다.
모래폭풍은 성인 남자도 멀쩡히 걸어 다니기 힘들 정도로 거셌지만, 그녀는 훈련받았던 대로, 혹은 본능에 따라 최대한 몸을 낮춰 타깃으로 접근하는 데 집중했다.
갑자기 25년 전의 모래폭풍 훈련이 떠올랐다.
캠프 X에서는 사막에서의 작전을 대비해 공, 수로 나눠 모래폭풍 안에서 서로 싸우게 했다.
한 치 앞 보기도 힘들던 그 모래바람 속에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고 피보라가 날리는 순간을 목격했다. 그녀의 옆을 따라오던 여자아이가 상대편에게 당한 것이었다. 그 여자아이가 먼저 당해준 덕에 그녀는 재빨리 그 상대편에게 치명상을 입히고 달아날 수 있었다.
모래바람이 거세어 누가 이기고, 누가 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녀는 무조건 명령받은 대로 거점을 차지하기 위해 이를 악물고 나아갔다.
거점의 깃발을 지키고 있던 저보다 덩치 큰 남자아이를 아래로 떨어뜨린 채 깃발을 사수하고 있으려니 모래바람이 점점 가라앉았고, 그 거점 위에서 내려다 본 아래는….
'역시 감이 좋지 않아. 쓸데없이 감상이 는 것을 보면….'
카시야는 잡생각을 떨쳐내었다.
그녀도 이번 작전이 미심쩍다고 느꼈다. 램버트 대령의 말이 틀린 게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도구'.
도구는 주인의 뜻에 의문을 갖지 않는 법이다. 카시야는 다만 짐작해보았다.
'어쩌면 여기서 그만 사라지라는 뜻인지도.'
물론 램버트 대령에게 했던 말처럼 호락호락 죽어주진 않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미 40대가 가까워진 그녀의 신체는 전성기를 지나 있었다. 아직도 웬만한 병사 예닐곱쯤은 맨몸으로 마주쳐도 문제없었지만, 무기를 들고 있다면 얘기가 다르다.
카시야는 제 머릿속을 비우고 감각을 끌어올렸다.
그녀가 지난 길에는 깔끔하게 급소를 찔리거나 정확히 머리에 총알이 박힌 시체가 띄엄띄엄 놓였다. 아흐마드의 본거지라기엔 병사가 묘하게 적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그저 묘하게 적은 것 같았지만 그녀는 무시하고 그저 나아갔다. 이미 그녀의 위치는 발각된 상황이었다. 뒤에서 기습해서 주저 없이 목을 그어대는 것도 한계가 있다. 그녀의 주무기는 그녀만을 위해 특수 제작된 나이프였지만 타깃에 가까워져가면서부터는 총도 쓸 수밖에 없었다.
'이 건물 지하2층….'
뒤쫓던 이들을 따돌리고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방금까지와는 다른 기운이 바닥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이 아래 뭔가가 있긴 있군.'
카시야는 살아서 나갈 희망을 버렸다. 그 대신 이 건물의 모두를 같이 데려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녀는 허리띠 위에 설치된 자폭 버튼의 보호캡을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건조한 눈빛을 하고 건물 안으로 사라졌다.
타다다당-! 탕! 탕!
그녀가 사라진지 몇 초 후 건물 안에서는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고함소리와 비명소리가 함께 뒤엉키자 그 소리들만으로도 대기가 뽀얘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카시야는 그녀의 모든 것을 다 쥐어짜내는 중이었다. 아직은 그녀의 근육이 빛과 같은 속도로 이완되고 수축하며 그녀가 원하는 형태로 움직여주었다. 불필요한 헛동작이 없는 최소한의 움직임이 정확한 경로로 인간을 죽여 나갔다. 손에 잡힌 예리한 나이프가 적의 목을 꿰뚫으며 근육과 뼈가 잘리는 감각을 전해왔다. 그녀는 제가 기억하는 절명(絶命)의 감각이 들 때까지 깊숙이 찔러 넣었다.
"그만!"
구덩이와 같은 지하 2층의 넓은 방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녀 역시 주변의 군인들을 처치하고 막 눈을 돌린 참이었다.
방 안에는 차도르를 뒤집어쓴 여자들이 서른 명쯤 앉아 있었고, 그들의 앞에 기관총을 든 군인 10여명이 아흐마드를 닮은 남자와 함께 총을 겨누고 있었다. 여자들은 급하게 끌려나왔는지 바닥에 마구잡이로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녀들의 눈동자에는 공포심이 가득했다. 그들이 인질로 잡았던 미국인들도 몇 명 끼어있는 것 같았다.
"이 여자들을 다 죽이고 싶지 않으면, 얌전히 무기를 버리고 앞으로 걸어 나와."
방금까지 시끄럽던 건물 안이 고요해졌다. 여자들 사이에서 조그마한 흐느낌이 간간히 들릴 뿐이었다. 카시야는 군인들 앞에 서 있는 그를 자세히 관찰했지만, 아흐마드인지 아닌지 확신하기가 어려웠다. 분명 아흐마드와 닮긴 했지만 그가 아흐마드라기엔 뭔가 진중하지 못한 느낌이었다. 그들이 있는 곳과 카시야 사이에는 기둥이 열 지어있었다. 카시야는 바닥에 총을 내려놓은 뒤 발로 차 그들에게 보이고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기둥 사이 사이로 몸을 가리며 앞으로 한 걸음, 한 걸음 걸어 나갔다. 30명의 여자들을 인질로 잡았다는 자신감 탓인지 그의 주변에 더 이상의 군인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천천히, 그들과의 거리를 재어가며 움직였다. 아흐마드로 보이는 자의 입가에는 만족스러운 미소가 점점 짙어져갔다.
"네 별명이 사신이라지? 큭큭. 그럼 난 사신을 죽인 사신이 되려나?"
"아흐마드 알리 모하메드?"
카시야의 짧은 물음에 그가 여유롭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내 얼굴을 보고 죽는다는 것을 영광으로 알거라."
"…그가 아니군."
카시야는 그의 태도로 확신했다. 저것은 아흐마드가 아니었다.
그녀의 단언에 그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뭐, 별 상관은 없겠지. 넌 오늘 여기서 죽을 거니까."
하지만 그것은 그의 착각이었다. 그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카시야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녀가 순간 자세를 낮추며 어마어마한 속도로 그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당황한 군인들이 총을 난사하자 차도르를 입은 여자들이 총탄에 맞고 쓰러지며 비명을 질렀다.
그들의 실수는 사신에게서 인간성을 기대했다는 점이다. 그녀에게는 이 방에 누가 인질로 잡혀있든 상관없었다. 다 죽어도 상관없었다. 임무의 완수, 그것만이 그녀의 목표였다. 카시야는 이미 고기방패가 된 가짜 아흐마드를 왼손으로 붙들고 총알을 막다가, 총보다도 빠른 나이프로 검무를 추듯 가르고 베어나갔다. 군인들이 당황한 채 질러대는 기관총은 저들끼리 상처를 입혔고 카시야가 던진 폭탄으로 사람의 팔, 다리가 여기 저기 날아갔다. 그리고 인질로 잡혀있던 여자들 역시 무참히 죽어나갔다.
6월 13일 오전 6시.
어스름을 밀어내며 밝아지는 하늘과 푸른 사막을 등지고, 카시야가 돌아왔다.
그녀도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다. 칼을 쥐었던 손은 제 것과 제 것이 아닌 피로 흠뻑 젖어있었고, 왼쪽 허벅지와 양쪽 팔뚝에 깊은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더라도 그녀의 온몸은 피로 얼룩져있어서 그녀가 정확히 얼마나 다쳤는지 알기는 어려웠다.
그녀에게 총을 들이대며 정체를 밝히라는 병사의 외침에 그녀가 암구호를 댔다. 총구는 내려졌지만 병사들의 눈에는 공포가 어려 있어, 금방이라도 다시 총을 들이댈 것 같았다.
"로만 대령이 돌아왔습니다!"
누군가가 작전 회의실로 뛰어들며 알렸다. 부대에 적막이 내려앉은 것 같았다.
"로만 장군! 수고했소! 아흐마드는, 처리한 건가?"
적막을 깨고 그녀의 생환을 반기기 위해 뛰쳐나온 한 장군이 임무의 완수 여부를 물었다.
"아흐마드가 아니었습니다. 폭격 역시 취소하십시오."
카시야는 별 일 아니라는 듯 툭 내뱉고는 보고를 위해 사령관실로 발걸음을 향했다. 사령관실에는 그녀가 떠나기 전까지는 없었던 한 남자가 조용히 앉아있었고 그의 주변으로 살기 어린 무장 군인이 두 명 서있었다.
"카시야 델 로만. 임무를 마치고 돌아왔음에 보고 드립니다."
앉아있던 그가 고개를 살짝 끄덕, 해보였다.
"요새에 숨어있던 것은 아흐마드가 아닌, 아흐마드와 닮은 가짜였습니다. 하지만 일단 처리했습니다. 저를 이끌어내기 위한 수단이었는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허술했습니다."
그녀의 보고에 무표정하던 그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걸 허술하다고 말할 수 있는 자가 흔치는 않지."
"커헉-!"
그의 말이 끝나는 순간 그녀는 등 뒤에 총알이 박혔다는 걸 느꼈다. 소음기가 달린 소형 권총이었을 것이다.
그녀는 이 방에 들어오기 전부터 이 방에서 뿜어져 나오던 긴장감과 살의를 느끼고 있었다.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이토록 명백히 그녀를 죽이고자 하는 악의를….
"거기서 죽어줬으면, 서로 이런 꼴 안 보고 좋았잖아. 시체 처리도 쉬웠을 텐데…."
그녀에게 새카만 악의를 드러내며 비릿한 웃음을 흘리는 그는, 늘 그녀에게 뒤쳐지던 캠프 X의 2인자였다. 하지만 그는 그 캠프의 아이들 중 드물게도 야심가였다. 그는 어느새 그녀에게 명령을 내리는 그녀의 주인이 되었던 것이다.
카시야는 여전히 건조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흘러나오는 피와 함께 생명도 사그라드는 게 느껴졌지만, 크게 분하거나 서러운 기분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드디어 끝이군.' 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다.
"네 그 눈이 언제나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의 얼굴에 갑자기 격한 감정이 드리웠다. 그는 제 옆에 있던 군인의 총을 꺼내 그녀를 향해 겨눴다.
"마지막으로 할 말 있으면 해. 살려달라고 빌어도 좋고. 혹시 모르잖아? 내 마음이 바뀔지."
하지만 카시야는 말이 없었다. 다만, 마지막의 마지막이 되었으니 처음으로 제멋대로 굴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방으로 들어오기 전 잇몸과 볼 사이에 끼워두었던 독극물 주머니를 혀로 빼내어 콰직, 깨물며 삐뚜름하게 웃었다. 그것은 그녀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자비인, 고통 없이 순식간에 죽을 수 있는 맹독이었다.
털썩-.
방금까지 총에 맞고도 꼿꼿이 서 있던 카시야의 몸이 한 순간에 허물어졌다.
그녀에게 총을 겨누고 있던 그의 얼굴에 낭패가 엇비치고, 곧이어 격랑처럼 몰아닥친 분노를 주체하지 못한 그가 그녀의 시신을 향해 총을 쏘아댔다.
그렇게, 카시야 델 로만은, 아군의 진영에서 기록에도 남겨지지 않을 죽음을 맞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