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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4화 (4/134)

00004 환생(1) =========================

죽음은 지친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데인 것처럼 뜨겁던 상처도, 혹사당한 근육이 내지르던 비명도, 입 안에서 씹히던 모래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다.

'편안해. 이게 죽음이라는 거구나.'

지독한 고생과 고통으로 점철되었던 인생을 마치고 맞이한 만큼, 달콤한 휴식이었다.

의식은 내 것이되 내 것이 아닌 듯 일렁였고, 육신의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다만 기억과 자아는 그 어느 때보다 또렷이 남아, 어느새 잊고 있었던 과거가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태어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됐던 내전, 아직 어린 그녀를 안고 피난길에 오른 부모, 조그만 보트에서 제발 아이만은 무사히 데려다달라고 애원하며 대신 바다에 뛰어들었던 어머니, 부모를 잃은 난민 아이들에게 의식주를 제공한다며 손을 뻗은 군인, 그렇게 시작된 지옥과도 같은 인간병기 육성캠프인 '캠프X'에서의 나날들…. 그리고 그 이후는 그저 살육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너무 많아 잊고 살았던 살인의 기억이 물방울처럼 몽글몽글하게 솟아나 슬로우 모션처럼 재현되었다. 자신이 누군가를 죽이는 순간을 제3자가 되어 바라보는 감각은 기묘했다. 아무것도 모르고 그저 어제와 똑같은 삶을 살아가던 누군가의 뒤에서 숨죽여 기다리다가 그의 목을 팔로 감아 시퍼렇게 빛나는 칼날로 깊숙이 긋는 자신의 모습은 자신의 별명인 ‘사신’을 떠올리기 충분했다. 순식간에 그었던 경험과는 달리 기억은 천천히 흘렀다. 칼날이 펄떡펄떡 맥이 뛰는 목줄기에 깊숙이 박힌 뒤 망설임 없이 오른편으로 내닫는다. 경동맥에서 뿜어져 나온 검붉은 피가 공기 중에 분수처럼 분사된다. 단단히 붙든 자신의 팔에 위쪽을 향한 얼굴이 순간 경직되며 동공이 물 위에 떨어트린 먹처럼 확 커진다. 피와 함께 육신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생명이 느껴졌다.

어떤 이는 온몸의 신경을 마비시키는 독을 바른 칼날에 당했고, 어떤 이는 두개골을 정확히 꿰뚫은 총알에, 또 어떤 이는 목뼈를 으스러뜨리는 로프에 당했다. 자신이 던진 폭탄으로 몇몇의 육체가 공중 폭파당하기도 했고,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던 누군가는 살점을 저미는 고문을 당하다가 죽기도 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살육의 기억은 어느 새 그들이 느꼈던 고통을 카시야의 영혼에 그대로 전해주었다. 육체는 이미 없는데다 살아있을 때에도 그와 같은 육체적 고통은 질릴 정도로 겪어봤던 카시야였지만 그녀가 느끼게 된 고통은 정신적인 고통이었다. 그들이 죽는 순간 떠올린 생각들. 그것은 카시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이었다. 그녀의 손에 죽은 모든 이는 죽는 순간 다른 누군가를 떠올렸다. 그것은 부모이기도 했고, 자녀이기도 했으며, 연인이기도 했다. 그들을 떠올리며 그들에게 더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했던 것을 후회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자기 자신의 삶 그 자체를 아쉬워하거나 한스럽게 여기는 이들은 아주 극소수였다.

그들의 생각을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들이 느꼈던 통렬한 회한과 사랑하는 이를 남겨두는 슬픔이 쇠꼬챙이가 관통하는 것처럼 영혼을 파고들어 고통을 주었다. 카시야는 오랫동안 뭍에 던져진 물고기처럼 퍼덕거리며 고통스러워야 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 고통 속에서도 알 수 없었다. 왜 그들이 그런 감정을 느끼는지,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숨보다 남겨질 이들을 더 걱정케 하는 것인지.

오랜 시간이었다. 아주, 아주 오랜 시간이었다.

언제 그 고통에서 놓여났는지 깨닫지 못할 정도로 오랜 시간을 시달렸다. 침묵과 고요의 풍랑에 숨 막힐 것 같던 그녀의 영혼은 긴 조난 끝에 다시 따스한 피안의 해변에 닿았다. 그녀는 그저 다 부서져가는 난파선처럼 지쳐있을 뿐이었다.

밝지만 뜨겁지는 않은 햇살과 꽃향기가 어린 부드러운 바람, 밀려들었다가 물러나는 청량한 파도의 환상 속에서 발가벗은 그녀의 영혼은, 그제야 진한 눈물을 흘렸다. 이유도 알 수 없는 울음이었다. 갓 태어난 아기가 호흡하기 위해 울듯, 그렇게, 존재하기 위해 울었다.

몰아치는 슬픔과 서러움을 달래주는 것은 햇살과 바람과 파도 뿐,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는 또다시 그제야 외로움을 느꼈다. 살아있는 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그 많은 감정의 소용돌이는 다시 그녀의 육체를 구성해갔다.

“다시 돌아가라.”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없는 음성이 울려 퍼졌다.

두려우면서도 그립고 애틋한 목소리였다.

방금까지 느껴지던 따스한 온기와 밝은 빛이 사라졌다. 그리고 벗어났다고 생각했던 육신의 느낌이 다시 서서히 온몸에 휘감겨 들어왔다. 그러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또다시 수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안 돼! 싫어!'

그녀는 몸부림쳐서 그 느낌을 떨쳐내고 싶었지만 가닥가닥 이어지는 신경의 느낌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죽음에게도 받아들여지지 못했다는 깊은 절망감에 빠졌다. 또 카시야 델 로만처럼 개 같은 인생을 살아내야 한다면, 눈을 뜬 즉시 도로 목을 매 자살해버리는 게 나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의 오감과 육신은 착실히 재구성되어 또다시 카시야라는 인간을 만들어냈다. 심장이 쥐어짜낸 피가 혈관을 질주하며 불 꺼진 공장의 전원을 올리듯 감각을 일깨웠다.

처음 깨어난 감각은 후각이었다. 그녀의 코에 잊고 있었던 시체의 썩는 냄새가 훅 끼쳤다.

'욱….'

몸을 돌려 냄새를 피하고 싶었지만, 그녀의 육체는 돌덩이처럼 꿈쩍하지 않았다. 육체에 힘을 실어보려 마음먹은 순간, 온몸에 격통이 느껴졌다.

"끄으… 윽…."

메말라 터진 입술 사이로 고통을 이기지 못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치 성대를 긁어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그녀는 자신이 새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이미 성인인 인간의 몸에 들어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온몸에 연결된 신경이 갓난아기의 것이라기엔 너무도 섬세하게 통증을 느꼈고, 방금 낸 목소리는 아기의 칭얼거리는 소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리고 연이어 깨달았다. 자신이 전생과 죽음의 기억을 온전히 다 갖고 있음을.

다시 몸을 움직여보려고 고통을 참고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굳어있던 것 같은 뼈마디에서 끼긱거리는 감각이 느껴지다가 어느 순간 툭, 손가락 한 마디가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이마에서 땀이 솟는 것 같았다. 손가락이 움직인 데 용기를 얻은 그녀는 눈에 힘을 주었다. 감은 눈꺼풀 아래로 안구를 좌우로 움직였더니 곧 사포로 눈알을 밀어댄 듯한 따가움이 느껴졌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그녀의 육체가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캠프 X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며칠간 굶고 탈수에 시달려 쓰러졌었는데 그때도 눈 뜨기가 정말 힘들었다.

'그 정도로 안 좋은 상태면 곤란한데….'

탈수와 기아에서 회복되는 데에는 기간이 꽤 걸렸었기 때문에, 지금 자신의 상태가 그 정도로 좋지 않다면 모르긴 몰라도 좋은 꼴 보기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생전의 카시야 델 로만이었을 때와는 다른 육체의 느낌이 들었다. 이 육체는 그녀가 오랜 세월 갈고 닦아 익숙해진 자신의 육체가 아니었다. 군인이자 암살자로 살아온 본능은 자신의 신체 상태를 재빨리 파악하게 만들었다. 현재 육체의 상당부분이 정상이 아니었다.

"으으… 으…. 도… 와…."

지금 자신이 어디에 누워있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자신이 죽었던 그 자리 같지는 않았다. 영안실인지도 모른다. 주변에 누가 있을지 말지 모르지만, 일단 도움을 요청해야할 것 같았다. 만약 주변에 그녀를 죽이지 못해 안달인 누군가가 있다면 치명적이겠지만, 성치 않은 감각이나마 집중을 해보니 주변에서 살기는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녀는 최대한 목소리를 끌어올렸다.

"어! 여기!! 살아있어! 어이! 간호병!"

누군가가 간호병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또 전쟁터냐….'

누군가 자신을 발견해줬다는 기쁨보다는, '간호병'이라는 존재가 불리는 전쟁터에 자신이 돌아왔다는 데 또다시 절망감을 느꼈다.

하지만 곧이어 격렬한 분노가 이어졌다. 왜 또다시 전쟁터인가. 왜 또다시 수라의 삶을 살게 만드는 것인가. 신은 나를 살인귀로 만들어 낸 것인가.

혼자서 차오르는 분노에 몸을 떨고 있으려니 곧 누군가가 그녀의 곁으로 다가와 눈꺼풀을 벌리고 빛을 비추었다. 갑자기 눈이 부셔 몸이 움찔했다.

"기적이군. 정말 살아있어! 이봐! 들것 갖고 와!"

그녀는 일단 안도했다. 이렇게 자욱한 시체 냄새라면, 자신은 아마도 영안실같이 시체를 쌓아두는 어떤 곳에 누워있던 게 분명하다. 시체가 널린 전장 한 가운데였을지도 모른다. 만약 최초로 그녀를 발견한 누군가가 보지 못했다면, 이 지독한 냄새 속에서 또다시 기절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신이 돌려보내준 거니 설마 곧바로 죽지야 않았겠지만, 그래도 괴롭기야 했을 테지.'

조심스레 들어올려져 들것에 실리고 들것을 든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자 곧 신선한 공기가 들이켜졌다. 하지만 그녀의 전쟁터에서 구르던 기억이, 그 공기 속에 섞여있는 희미한 화약 냄새를 감지했다.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그녀의 얼굴이 육체의 고통 때문인지, 전쟁터라는 절망 때문인지 심하게 일그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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