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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5화 (5/134)

00005 환생(2) =========================

마비되었던 것 같은 신경이 서서히 살아났다.

덕분에 이번에는 통증으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그녀의 몸은 간호병동으로 옮겨진 듯, 주변에서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것과 똑같은 고통에 찬 신음들이 울려 퍼졌다. 어느 전장에서나 그렇듯 간호병의 수는 넉넉지 않을 것임이 틀림없었지만,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온 것처럼 보였을 그녀에게는 특별한 조치가 취해졌다. 누군가가 옆에서 물에 흠뻑 젖은 거즈를 그녀의 메마른 입술 위에 대 주었고, 그녀의 상처들 위로 소독약이 부어졌다. 물로 축여진 그녀의 입가에는 쓰디 쓴 약물이 흘러들어왔다.

이것 자체로 지옥이 아닌가 싶을 정도의 통증이었다. 반쯤 넋이 나간채로 끊임없이 신음을 흘리던 그녀는 약이 묻은 거즈가 그녀의 상처를 닦는 고통에 저도 모르게 눈을 번쩍 떴다.

"으아아악!"

갑자기 뜬 눈도, 약에 절여지는 상처도, 내상을 입은 게 분명한 내장도 모두 너무 아팠다.

다행이랄 것은 그 지독한 고통 때문에 눈물이 흘러나와 메말랐던 안구가 촉촉해졌다는 것 정도였다.

불에 지져대는 것 같았던 초기의 격통이 가라앉자 그녀는 일렁이던 의식을 붙잡을 수 있었다. 온몸의 땀구멍에서 식은땀이 솟아났다.

주변을 살피기 위해 어느 정도 상태가 좋아진 눈을 가늘게 뜨자 누런 색깔의 막사 천장이 보였다. 흐릿한 형태였지만 간호병일 게 분명한 두건을 쓴 병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고, 여기저기서 들리는 신음소리로 보아 꽤 많은 수의 병사들이 이 막사 안에서 죽음과 사투를 벌이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있던 전장의 간호막사는 아무리 최전방이라 할지라도 이것보다는 상태가 나았다.

그때였다. 저 멀리 빛이 시작되는 부근에서부터 절걱절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갑옷을 입고 걸으면 날 법한 소린데….'

그 소리는 그녀의 근처까지 계속 이어지다가 그녀의 병상 근처에서 멈췄다.

"이 병사인가?"

"네. 그렇습니다. 안개숲에서 우리 군의 피해 상황을 확인하다가 발견된 유일한 생존자입니다."

그들의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더니, 진짜로 은빛 갑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는 게 시야에 잡혔다.

주변은 어두웠고 그녀는 통증 때문에 어지러웠던 터라 그 얼굴을 자세히 살피기는 힘들었지만, 검은색에 가까운 짙은 머리카락과 자신을 꿰뚫을 듯 쳐다보는 눈빛은 알아볼 수 있었다.

'누구지…? 진짜로 갑옷이네. 말투로는 영화촬영 세트장 같진 않은데….'

카시야는 제대로 떠지지 않는 눈을 깜빡거리며 최대한 초점을 맞춰보려고 애썼다.

"아직 말을 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닌 것 같군. 제대로 정신을 차리면 곧바로 보고하도록."

내려보던 그는 근처의 간호병에게 명령을 내리고는 다시 몸을 돌려 막사 밖으로 나갔다.

갑옷에서 촉발된 불길한 느낌에 카시야는 최대한 청각을 끌어올려 주변의 소리를 귀에 담았다.

"…컬리넌 후작의 기사가…."

"황제 폐하는… 피신… 깃발이… 왜… 알 수가 없어…."

"…알로냐 백작… 성주가…."

막사 바깥을 지키는 병사들이 저들끼리 주고받는 대화에 귀 기울이자 현대에서는 듣기 힘든 단어들이 들려왔다.

'후작? 백작? 황제 폐하? 뭐야, 이건…. 주, 중세 시대로 날 보냈어?'

그녀에게 따스하게 '다시 돌아가라.'던 절대자에게 주체 못할 만큼 치솟는 분노가 느껴졌다. 그 망할 놈의 신이, 그녀에게 지옥을 선사했다. 차라리 지옥으로 떨어진다는 얘기를 들었다면 이렇게까지 화가 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망할 새끼! 도대체 왜!'

흥분한 탓에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왔다.

"쿨럭, 쿨럭!"

피가 섞인 가래가 입가로 흘러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주변에 있던 간호병이 달려와 그녀의 입가를 닦아주고 거즈를 갈아주었다.

화가 나는 건 화가 나는 거고, 어쨌든 살아나가려면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카시야는 21세기의 기억을 가진 채 중세에서 눈을 뜬 거다. 다시 한 번 되뇌어 봐도 헛웃음이 나올 만큼 황당무계했지만, 이것이 신의 뜻이라면 어쩔 수 없다. 그녀가 기억하는 시대가 절대 진리일 수는 없었다. 모든 건 다 신의 뜻대로-.

'하아-. 까라면 까야지, 어쩌겠어.'

살짝 삐딱한 마음가짐이긴 했지만 그녀는 지금 자신의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기로 했다. 일단은 최대한 휴식을 취해 빨리 회복해야 했으니 그녀는 긴장감을 풀고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그 병사가 정신을 차리는 대로 사실 확인을 해보겠습니다."

푸른색 바탕에 은실로 사자의 문양을 수놓은 깃발이 펄럭이는 막사 안에서 충성심 가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여자더군. 기사인지, 일반 병사인지는 알 수 없지만. 보고서에 따르면 진원지의 후방에서 발견됐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그렇다 해도 어떻게 혼자만 살아남았는지 의문이야."

상석에 앉은 은빛 갑옷의 남자가 까만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말했다. 낮고 굵은 음성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천운이었겠죠. 상태를 보니 죽지 않은 게 신기할 정도던데."

"맞어. 도대체 여자인 건 어떻게 아셨답니까? 성별을 알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던데 말이죠."

남자의 좌, 우에 앉아있던 붉은 머리카락의 젊은 두 기사가 서로 말을 이어받으며 장난스레 대답했다. 서로 꼭 빼다 박은 것이, 누가 보더라도 쌍둥이였다.

"지크, 미하엘. 가볍게 생각하지 마라. 그 뱀같은 작자라면, 정신지배 같은 마법으로 우리 쪽에 첩자를 심을 수도 있다."

"정신지배는 아무나 합니까? 그건 거의 전설이나 다름없는 마법이잖아요. 애초에 그걸 쓸 수 있었다면, 우리한테 기습을 당하지도 않았겠죠."

"전하께서는 의심이 너무 많으시다니까요. 겨우 죽다 살아난 병사를 너무 몰아붙이진 마십쇼."

지크와 미하엘이라 불린 기사 둘은 저들이 '전하'라고 부른 이에게 격의 없이 친근한 태도를 유지했다.

안개숲에서 생환한 병사에 대한 화제는 그 대량 학살의 원인에게로 이어졌다.

"안개숲에서 발생한 대량의 마력 폭발은 재고의 여지없이 알리스타스 공작 휘하의 마법사 에르논이겠지만, 아무리 그라 하더라도 그 정도의 마력을 터트렸으면 쓰러지는 게 당연합니다. 도대체 어떻게 우리의 포위를 뚫고 사라진 건지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포위망에 구멍이 뚫렸을 가능성은 없나?"

"이번에야말로 에르논을 잡겠다고 물샐 틈 없이 조여들지 않았습니까. 그러니까 그놈도 최후의 방법을 썼던 것일 테고요. 멀쩡한 몸으로도 빠져나가기 힘든 포위망이었을 텐데 대량의 마력을 사용한 뒤의 몸으로는 그렇게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눈에 띄지 않고 사라졌잖은가."

"그러니까 그게 납득이 안 된다는 겁니다. 어떻게 그렇게 사라져버릴 수가 있지? 물론 그 이외에도 두세 명의 마법사가 더 있었지만, 에르논도 빠져나가지 못할 포위였는데 그까짓 하급 마법사 둘, 셋이 힘을 합쳐봤자 빠져나갈 수 있었을 리가 없습니다."

세 남자는 안개숲에서 일어났던 마력 대폭발과 마법사 에르논에 대해 답 없는 회의를 이어나갈 수밖에 없었다. 어제 오후 그들은, 가장 골치 아프던 마법사 에르논을 포획하기 위해 신성력을 쏟아 부은 무기와 방패, 제국군의 마법사, 온갖 마법진을 때려 넣어 그를 포획 거점으로 유도했다. 그가 마법진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제국군의 기사들은 그를 향해 파도같이 밀려들었고, 그를 잡았다고 확신한 순간 시간이 갑자기 시공간이 늘어지는 것 같은 엄청난 마력 폭발이 일어났다. 그리고 그 결과 제국군은 엄청난 수의 기사를 잃었고, 에르논을 포함한 반란군의 마법사 3~4명이 그 자리에서 사라졌다.

에르논의 얼굴을 정확히 아는 자는 드물었지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하얗게 다 새어버린 듯한 은발에 새하얀 피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남자라고 했다. 여려 보이는 외양과는 달리 공격마법에 관해선 제국 제일의 마법사라는 게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알리스타스 공작은 뱀 같은 작자였다. 그는 이런 날이 올 줄 알고 있었는지, 자신이 소유한 이 젊은 마법사를 반란 이전에는 한 번도 내보이지 않았었다. 반란군을 진압하며 맞닥뜨린 최초의 장벽이자 최고의 난제였다. 제국군이 거의 다 이긴 전장에 에르논이 나타나 상황을 역전시킨 게 한 두번이 아니었다. 이번은 제국군이 패한 건 아니었지만 생각보다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기 때문에 승리했다고 좋아할 수도 없었다. 막판의 마력 폭발만 아니었다면 에르논을 잡아 가둔다는 계획이 성공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그렇게 강력한 폭발을 일으킬 수 있을 줄이야….

안개숲에 원형으로 퍼트려진 제국군의 시체들은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피칠갑되어 있었다. 하지만 표면적으로 보이는 상처가 사인(死因)은 아니었다. 마력 파동은 기사들의 내장을 죄다 터트려놨던 것이다.

그 와중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자가 바로 방금 간호 막사에 누워있던 여기사였다. 그녀의 곁에 신의 축복을 받은 은방패가 형태를 알 수 없을 정도로 찌그려져 있었다는데, 그렇다면 그녀가 그 방패의 보호로 겨우 살아난 것일까.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난 상처 때문에 아직 그녀의 신원조차 확인되지 않은 상태였다.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는, 그렇기 때문에 경계를 늦출 수가 없었다.

"미하일. 사망자 대조는 얼마나 진척됐지?"

"휘유…. 아직 1할도 채 안 됐습니다. 어제 오후에 끝난 전투인데 벌써 다 확인될 리가 있겠습니까? 마음 급한 거야 모르는 바 아니지만, 너무 닦달하지 마십쇼."

"여기사의 수는 남기사보다 훨씬 적으니, 일단 안개숲 생환자의 신원 파악에 주력해. 혹시 여자 종자도 있나?"

"있기는 합니다만 에르논을 포위하기 위해 파견한 병사 중에 종자는 없습니다."

"하긴, 그렇겠지. 부디 당시의 상황을 잘 설명해줄 수 있어야 할 텐데…."

그때 카시야의 상태를 보고하기 위해 서 있었던 간호병이 조심스럽게 입을 떼었다.

"저기….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그녀가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건 또 무슨 소리냐?"

갑자기 살기등등한 세 남자의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된 간호병은 떨리는 두 손을 맞잡으며 애써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전에도 에르논의 공격을 받았던 기사를 치료한 적이 있었는데, 마력으로 머리 부분을 강타당한 자들은 제정신이 아닌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번 생환자는 몸 전체가 마력 폭발의 피해를 입었으니,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정신을 차린대도 큰 도움은 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전문 치료사인 그의 말에 세 남자는 낮은 신음을 흘리며 머리를 싸맬 수밖에 없었다.

"에르논이 어떻게 사라졌는지 알아낼 수 있길 바랐는데…."

에르논을 생포하려고 이번 포획 작전을 지휘했던 지크가 특히 아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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