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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6화 (6/134)

00006 환생(3) =========================

빨간 머리의 쌍둥이 기사 곁에서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는 검은 머리칼의 남자, 타셀 칸 아마리스는 이 무너져가는 제국의 황자였다.

탐욕스러울 정도로 정복 전쟁을 일삼던 황제 알테리온은 미친 듯한 살육의 후유증이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급속하게 판단력이 흐려졌다. 만약 그가 제정신이었다면, 오래전부터 황태자로 거론되어 온 제 1황자에게서 황태자위를 빼앗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다섯 번째 황비 멜라니아에게 푹 빠져 그의 소생인 제 3황자 유리카데온을 황태자로 책봉했다. 유리카데온은 심지어 아직 아홉 살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러자 유력했던 제 1황자 케일런을 지지하던 세력은 마치 미리 준비했던 듯 반란을 일으키고 황성에서 케일런과 그의 모후 아나트리아를 감쪽같이 빼돌렸다.

반란군을 비웃던 알테리온은 그러나 단단히 믿었던 5대 공신가문 중 두 가문이 케일런 파로 돌아서자 불같이 분노했다. 알테리온은 대적되지 않을 정도의 강력한 군사로 반란군을 밀어버리기 위해 황제파로 남아있는 귀족들의 사병을 무리하게 차출하려 했고, 만약 그대로 이뤄졌더라면 반란군의 세력으로 돌아선 귀족이 더 많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제 2황자인 타셀이 이성을 잃은 아비를 말렸다. 이대로라면 반란군이 황성을 점령하는 것은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자신을 진정시키고자 나선 타셀을 본 알테리온은 불같이 화를 내다가 갑자기 무슨 생각을 했는지 오히려 그에게 반란군 척살을 위한 총사령관의 지위를 내린 뒤, 제 3황자 유리카데온과 그의 모후 멜라니아를 데리고 후방의 성으로 피신하여 안 그래도 모자란 병력의 반을 그의 수호대로 빼내갔다. 그리고 타셀의 모후 엘레나는 인질처럼 그들과 함께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

"정신지배 마법이 가능하다면 우리 황제 폐하부터 어떻게 좀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죠."

"미하일. 방금 그건 황실모독죄로 네 목이 떨어져도 할 말 없는 언사였다."

"그런데도 제 목이 붙어있는 이유는 전하도 그리 생각하기 때문이 아닙니까."

타셀이 서늘한 눈을 들어 미하일을 쳐다보았지만, 딱히 그를 벌할 마음이 있어보이지는 않았다. 사실 제국군의 모두가 미하일처럼 생각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전하. 잘 생각하셔야 합니다. 차라리 케일런 전하께 협상을 제안하시는 것이…."

미하일보다는 조금 진중한 지크가 입가의 미소를 지우며 말했다.

"전통적인 황제의 기사들은 너희 같은 젊은 기사들과 생각이 다르다. 그들은 무조건 황제 폐하를 수호하려 하고 있지. 그게 아니라면 내 밑으로 들어왔을 리도 없다."

젊은 시절, 황제 알테리온과 함께 전장을 누비며 제국의 영토를 넓혔던 노년의 기사들은 여전히 알테리온에게 충성을 다했다. 그들에게 알테리온은 변방의 왕국이었던 칼리스토니아를 대륙의 주인으로 만든 성웅이었고, 그들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게 해주는 태양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열렬한 충성심에 황제 역시 봉작과 봉토로서 답했다. 그런 구세력에 맞서 정복전쟁 이후 세대인 신진 세력이 저항하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수순이었다. 새로이 봉작 받았다 하더라도 이미 국토의 5할이 구세력의 소유였다. 황제의 직속령인 토지를 빼면, 아무리 높은 공을 세웠다 하더라도 구세력보다 많은 영지를 받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불만이 극에 달했던 신진세력에게 황태자 책봉건은 그저 핑계에 불과했을지도 모른다.

타셀이 보기에도 제 1황자 케일런은 준비된 황제감이었고, 유리카데온이 황제가 된다면 멜라니아와 그의 사가인 트레온 후작가가 전면에 나설 것이 분명했다. 트레온 후작은 전형적인 황제의 기사였고 그의 작위를 이어받을 멜라니아 황비의 오라비, 알폰소 트레온은 납작 엎드린 승냥이와 같았다. 이 제국이 제 앞으로 굴러 떨어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타셀 역시 트레온 후작가에 휘둘리는 제국 따위, 상상하기도 싫었다. 하지만 그의 지위가, 그의 핏줄이, 볼모로 잡혀있는 모후 엘레나가 그를 잡아끄는 목줄이었다.

"…저녁 점호가 끝나면 다시 회의를 진행하겠다. 지크, 그때까지 안개숲을 조사했던 결과를 들고 와라. 미하일은 병력을 재정비한 상황을 보고하도록. 이만 일어나지."

그로부터 일주일간 지지부진한 회의와 군사 재정비, 이후의 전투 계획에 정신없던 타셀은 제발 좀 쉬었다 오라는 지크, 미하일 형제의 간청으로 자신의 막사로 돌아가 시종의 도움을 받으며 무거운 갑주를 벗었다. 갑주를 벗듯 어깨에 진 짐을 내려놓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그는 승리 없이 돌아간다면 아비에 의해 제 목부터 떨어질 것임을 알고 있었다. 제 목이 떨어지는 것은 상관없지만, 오욕의 세월을 견뎌낸 그의 어머니는 무슨 죄로 죽어야 한단 말인가. 시종이 마련한 목욕통의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며 그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지루하게 이어졌던 전투 때문에 황자인 그도 몸을 씻는 게 오랜만이었다. 탄탄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이 갈라진 골 사이로 피가 흐른 자국이 남아있었다. 다행이 그의 피는 아니었다. 시종이 부드러운 해면으로 그의 맨몸을 닦으며 이미 물든 것 같은 핏자국을 지우려고 애썼다. 그가 머리를 물에 담가 좌우로 흔들자 목욕통 안의 물이 금방 탁해졌다. 그의 검은 머리카락도 그동안 땀과 먼지와 누군가의 피로 떡져 굳어있었던 것이다. 따뜻한 물 온도 때문에 막사 안은 금방 피냄새로 자욱해졌다.

'지긋지긋하군. 이러다 죽나 저러다 죽나 매한가진데, 내가 지금 죽는 게 백성들을 덜 죽이는 방법이 아닐까.'

타셀은 제국의 제일을 다투는 기사이자 검사였다. 그는 자신의 몸에 칼날이 닿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칼끝에서 죽어가는 반란군 역시 그의 백성들이라는 것을 잊은 적도 없었다. 누군가의 아비이고, 아들이고, 남편일 그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기 위한 자신의 신념을 위해 죽을 것을 알면서도 타셀의 칼날 앞으로 달려들었다. 그 정의로운 이들의 생명이 바스라지는 것을 보는 건, 절대 기분 좋은 일이 아니었다. 보는 눈이 없다면 밤새도록 자신이 죽인 이들의 영혼에 사죄하며 울고 싶었지만, 그는 반란군 진압대의 총사령관인 제 2황자였다. 약한 모습도, 제 행동을 후회하는 모습도 보일 수 없었다.

'반란군이든 진압군이든, 어느 한 쪽이 이기는 모양새가 되면 대대적인 숙청을 피할 수 없어. 차라리 제국을 쪼개는 게 나을 테지만, 과연 아버지나 케일런이 반쪽의 승리에 만족할 것이냐가 문제지.'

자신들의 야욕 때문에 수많은 백성이 죽어가고 있는데, 귀족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두 눈이 시퍼레서 전쟁의 승리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 사이에 낀 타셀이 오히려 괴로웠다.

그가 상념에서 벗어난 것은 막사의 밖에서 들려온 어느 병사의 다급한 보고 때문이었다.

"전하! 안개숲 생환자가 정신을 차렸습니다."

타셀은 서둘러 몸의 물기를 닦고 셔츠와 바지에 대충 몸을 꿰고는 병사들을 앞세워 간호막사로 향했다. 역시나 같은 보고를 받고 달려온 지크가 타셀의 곁에서 함께 걸었다.

"신원확인은 됐나?"

"귀족 출신의 에이린 코퍼 발메오, 쥬네브 엘 로샤스, 그리고 카시야라고만 표시된 평민출신의 기사. 이 셋 중 하나이긴 합니다. 여기사의 수가 적긴 했습니다만 도저히 신원확인이 불가능할 만큼 훼손된 여성의 사체가 2구 있어서 그 이상으로 좁힐 수는 없었습니다."

"병사들 내에서 그녀의 얼굴을 기억하는 자가 없었나?"

"저번에 보시고서도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얼굴에 온통 피딱지가 앉았는데 어떻게 구별하겠습니까? 게다가 아까 말씀드린 세 명 다 이 나라에서 제일 흔한 짙은 밤색 머리카락인데다 체형이나 키도 비슷해서 말입니다."

"후우. 수고했다."

그들은 여성 간호병을 따라 별도로 마련된 막사로 안내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말을 하긴 합니다만 아직 몸 상태가 정상적인 것은 아니니 대화가 너무 길어지지 않도록 부탁드리겠습니다."

간호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타셀이 막사로 들어서자, 온몸이 붕대로 칭칭 감기다시피 한 환자가 그를 쳐다보며 천천히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지크의 말대로 얼굴에 전체적으로 딱지가 앉아 마치 나무껍질을 뒤집어쓴 모습 같았다.

"정신이 들었나?"

타셀이 묻자 그녀가 고개를 살짝 끄덕였지만, 그 작은 움직임마저 고통스러웠는지 으윽거리며 잘 움직이지도 않는 미간을 찌푸렸다.

"무리하지 마라. 아직 전투의 상처도 다 낫지 않았는데 미안하지만, 몇 가지 물어볼 게 있네. 우선, 자네의 이름이 뭐지?"

카시야가 두려워했던 순간이 다가왔다. 그녀는 자신이 뒤집어쓴 육체의 원래 기억이 하나도 나질 않았다. 이 세계의 언어를 모국어처럼 쓰는 것만으로도 감사해야하나 싶었을 정도니, 당연히 이름 따위를 기억할 리가 없었다. 어쩔까 고민하던 그녀는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대단히 죄송합니다만, 눈을 뜨기 이전의 기억이… 나질 않습니다. 제 이름도 기억이 나질 않는데… 다만, 카시야… 라는 이름이 입에 익숙하긴 합니다. 그게 제 이름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눈을 뜨기 이전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말에 타셀과 지크는 크게 실망했다.

"자네의 이름은 카시야가 맞는 것 같네. 아직 신원확인이 안 된 명단 중에 카시야라는 이름의 평민 여기사가 있어. 얼굴의 상처가 다 나으면 정확해지겠지만 말야."

지크는 그녀에게 대놓고 실망한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하며 친절히 설명해주었다. 오히려 놀란 것은 카시야였다.

'내 이름이 있다고? 이건 우연일까, 아니면 신의 계획일까.'

============================ 작품 후기 ============================

쇼에나님, 감사합니다. 오타 수정했습니다.(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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