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진홍의 카르마-7화 (7/134)

00007 환생(4) =========================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데 더이상 물어볼 수가 없었던 타셀과 지크는 카시야에게 몸조리를 잘하라고 전하고는 막사를 나왔다.

"어떻게 생각해?"

밑도 끝도 없이 타셀이 물었지만 그와 오랫동안 합을 맞춰왔던 지크는 되묻지도 않고 대답했다.

"일단 계속 감시를 붙여둘 필요는 있겠네요.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만큼 편리한 핑계는 없을테니…. 카시야라는 기사일 확률이 높은 것 같으니 병사들 중에 그녀를 아는 자가 있는지 찾아보겠습니다."

"음. 왠지 느낌이 묘한 눈빛이었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자 치고는 상당히 침착해 보인달까."

"그러고 보니 그렇군요.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난다면 오히려 우리를 붙들고 질문을 할 법도 한데…."

"지켜보자고."

타셀과 지크가 나간 막사 안에서 카시야는 저를 간호해주던 간호병에게서 물을 얻어 마시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그녀를 간호해주는 병사는 열일곱이나 되었을까 싶은 어린 여자였다. 이름은 루나엔이라고 했다. 생긴 것처럼 마음이 여린지 온몸이 엉망진창이 된 카시야를 가엾다는 듯 지극정성으로 돌봐주고 있었다.

'이 아가씨한테 어디까지 물어볼 수 있을까….'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한 카시야는 살며시 눈을 뜨고 그녀를 불렀다.

"왜요? 소변 마려우세요?"

그녀가 근처에 있던 소변통에 손을 뻗으며 물었다.

"아, 아뇨. 그게 아니고….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제가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데…. 여, 여기가 어딘가요?"

아니나 다를까, 그녀는 불쌍하다는 듯 눈썹을 팔자로 내리고는 카시야를 향해 다가섰다.

"여기는 칼리스토니아 제국이고, 지금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역을 묻는 거라면 알로냐 백작령의 키렐 지방입니다."

"전… 쟁 중인 건가요? 누구와?"

"아…. 네. 전쟁 중이지요. 알테리온 황제 폐하의 제국군과 제 1황자 전하의 반란군 간의 전쟁이예요. 저는 평민이라 잘 모르지만, 얻어듣기로는 황태자 책봉 때문에 전쟁이 난 거래요."

기억을 아무리 뒤져도 역사상에 칼리스토니아라는 제국은 없었다. 여성들이 기사로 싸웠다던 기록도 본 적이 없다. 제국이니, 기사니 운운하면서도 그녀가 아는 세상보다 여성들이 전방위로 나서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는 상식을 써먹을 수가 없는 절망적인 상황인 것 같은데….'

어찌 보면 다행인지도 모른다. 그녀가 알고 있는 중세에서 깨어난 것이라면, 여성의 몸인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랄 게 많지 않았을 테니까.

"후우…. 아까 그 분은 누구신가요?"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자 제 2황자이신, 타셀 칸 아마리스 전하세요. 아, 옆에 계셨던 붉은 머리의 기사님은 황자 전하의 최측근이신 지크 탈리온 메레디스 경이시죠. …아니, 미하일 님이신가? 지크 경과 미하일 경께서는 쌍둥이어서 사실 구분하기가 힘들어요. 정말 똑 닮았거든요."

의젓하게 황자의 풀네임을 읊던 그녀는 쌍둥이 기사가 헷갈린다는 말을 하면서부터는 제 나이 또래의 소녀로 보였다.

"한가지만 더요…. 저는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건가요?"

"아무 기억이 안 날만도 해요. 마법사 에르논의 마력 폭발에 당했다고 들었거든요. 에르논을 잡기 위해서 신성력으로 축복받은 기사들을 뽑아 포위했다고 하던데, 에르논이 엄청난 마력 폭발을 일으키고는 홀연히 사라져버렸대요. 정말…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세요?"

"네. 아무것도…."

"가엾어라…. 사실은 제가 수간호병님께 언뜻 들은 바로는, 에르논의 공격을 받고 제정신이 아니게 된 사람도 부지기수랬어요. 기억을 잃은 거랑 미쳐버린 거랑 어느 쪽이 낫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제정신이기만 하면 앞으로 새롭게 인생을 살아나갈 수는 있잖아요. 기사님은 아직 젊으시니까 희망을 가지세요! 상처들도 곧 나을 거예요."

지금의 육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신적으로야 저보다 한참 어린 소녀에게 '희망을 가지라'며 격려를 받게 되자 새삼 자신의 처지가 한심스러워졌다. 그러다가 뒤늦게야 그녀가 마력 운운했다는 게 떠올랐다.

'중세 시대도 모자라서 마력? 전생의 기억이 있는게 정말로 아무 쓸모가 없어지는 것 같은데….'

자신이 알고 있던 상식이 허물어지는 느낌이었다.

"언제쯤이면 다 낫게 될까요…."

거의 한탄조로 흘러나온 말이었는데 소녀 간호병은 제가 죄를 지은 듯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못해도 반년은 걸릴 거라던데…."라고 우물거렸다. 안 듣는 게 나을 뻔한 대답이었다.

'반년동안 침상에 누워있으라고? 근육량도 엄청 줄어들 테고 골밀도도 덩달아 낮아지겠지. 도로 몸을 만들려면 1년은 빡세게 뒹굴어야 할 것 같은데, 그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어.'

아까까지 괜찮던 관자놀이가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하지만 확실히 내장이 심각하게 상한 것 같다는 느낌은 들었다. 겉에 난 상처들이야 꿰메고 아물어 앉은 딱지가 떨어지면 길어봤자 두 세달 안에 나을 것 같았지만, 입안에 흘려넣은 묽은 미음조차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는 위장이나 시시때때로 호흡이 가빠지는 폐를 보면 내상을 크게 입은 게 확실했다. 외과 수술이 발달한 시대도 아닌 것 같으니, 자연 치유만을 바래야 한다면 간호병이 말한 반년도 긴 게 아니었다.

'원망을 안 하려야 안 할 수가 없네.'

그녀는 이제는 희미해져가는 기억이 된 절대자의 목소리를 떠올리며 다시 한 번 화를 삭여야 했다.

"타셀 전하. 컬리넌 후작령에서 보낸 치료사가 도착했습니다."

막사에서 여느 때와 같이 회의 중이던 타셀은 자리에 앉은 채로 하얀 로브를 입은 신성 치료사의 인사를 받았다.

"타노버의 미천한 자가 위대한 알테리온 타노스 에반 아마리스 황제 폐하의 대리자께 인사 올립니다. 아르헨이라 하옵니다."

"어려운 걸음해주어서 고맙소. 그대의 이능을 다친 제국군을 위해 써준다면 그 은혜를 반드시 잊지 않도록 하겠소."

예를 위해 로브의 후드를 걷은 치료사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로 선이 곱고 아름다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그가 절을 하며 허리를 숙이자 길게 기른 금빛 머리칼이 금실타래처럼 그의 양옆으로 흘러내렸다. 그가 자신을 바라보지 못한다고 생각한 지크와 미하일이 '와우!'하는 입 모양새를 만들며 서로 과장된 눈빛을 주고 받았다. 하지만 아르헨이 고개를 들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짐짓 엄숙한 자세를 했다. 하지만 그동안 무언가를 떠올린 타셀은 고개를 들고 가벼운 미소를 짓는 아르헨의 눈을 마주보며 물었다.

"혹시 기억을 잃은 자도 치료해본 적이 있는가?"

지크와 미하일이 동시에 타셀을 바라보다가 다시 시선을 아르헨에게로 돌렸다.

"있긴 합니다만,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환자의 상태에 따라 결과가 천차만별입니다."

"그래? 그럼 내가 특별히 부탁하고 싶은 환자가 있네. 지크. 카시야 경의 막사로 아르헨 치료사를 모시게."

지크 역시 희망을 띤 눈빛으로 아르헨을 바라보며 정중히 길을 안내했다.

며칠 만에 다시 방문한 카시야의 막사 안에는 여전히 코를 찌르는 소독약 냄새와 피비린내 같은 게 떠다녔다. 갑자기 방문한 타셀 일행에 카시야는 조금 놀랐지만, 카시야 델 로만의 성격이 그대로 남아있는 그녀로서는 반쯤 죽음에 발을 담근 사람처럼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휴식을 방해해서 미안하네, 카시야 경. 그대의 치료를 도울 신성 치료사가 방문했다."

카시야는 당연하게도 신성 치료사라는 게 뭐하는 사람인지 알지 못했지만 어쨌든 '치료사'라니 반년 걸릴 내상의 치료 기간을 좀 줄여주려나 싶어 기대에 찬 눈빛을 들어 타셀의 뒤에 서있는 하얀 로브의 미인을 쳐다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아르헨은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타셀의 앞으로 걸어 나와 그녀의 이마에 손을 대었다. 서늘한 손바닥이 기분 좋았다.

"세히르 모노 알 티에라. 주신 헤바의 권능을 빌어 주의 백성을 돕도록 허락해주십시오."

그가 눈을 감고 기도문을 외우자 그의 손바닥같이 서늘한 기운이 그가 손을 댄 이마에서부터 몸 전체로 퍼져나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이것으로 뭘 어쩌려는 걸까, 하고 그를 가만 바라보고 있으려니 그는 곧 손을 떼고 타셀에게 시선을 돌려 카시야의 상태에 대해 고했다.

"이 분의 기억을 되살리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이 분의 육체의 상함은 제가 도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실, 지금 상태로만 보자면 정신보다는 육체의 치료가 더 절실한 상태입니다."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기 어렵다는 말에 또다시 타셀과 지크는 실망했지만, 타셀은 자비롭게도 아르헨에게 카시야의 치료를 부탁했다.

"그럼 이 여성분의 명예를 위해 남성분들은 막사에서 나가주시기 바랍니다."

아르헨의 요청에 타셀을 위시한 병사들은 잘 부탁한다는 말을 남기고 막사 밖으로 나갔다. 모두가 막사로부터 어느 정도 멀어진 것을 확인한 아르헨은 카시야 곁을 지키고 있던 루나엔의 도움을 받아 그녀의 온몸에 감겨 있던 붕대를 풀어냈다. 아직 진물과 피가 배어나오는 상처도 있어서 들러붙은 거즈를 떼어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남녀의 구분이 어려울 정도로 아름답긴 했지만, 아르헨은 남자였다. 그의 앞에서 카시야를 거의 알몸으로 만든 루나엔은 얼굴이 빨개지고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몰라 당황하고 있었지만, 정작 당사자인 카시야와 아르헨은 무덤덤했다.

아르헨은 들고 온 가방에서 조그만 알약이 가득 든 유리병을 꺼내 조심스레 뚜껑을 열어 알약 하나를 집어냈다. 그리고 그 알약을 카시야의 입 안으로 깊숙이 밀어 넣더니 그녀의 입에 물을 조금 흘려 넣어 삼키도록 하고는 그녀의 몸 위에 제가 짚고 온 지팡이를 길게 얹어 놓고 다시 기도문을 외웠다. 그가 뭐라고 하는지는 알아듣기 힘들었지만, 그의 목소리는 정말로 성스러운 기운이 서려 있어 그가 외우는 기도문이 마치 성가처럼 들렸다. 카시야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