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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8화 (8/134)

00008 환생(5) =========================

카시야가 꿈도 꾸지 않은 깊은 잠에서 깬 것은 한밤중이었다.

보초를 서는 병사들이 때때로 바스락거리며 지나다니는 소리가 날 뿐, 사방이 고요했다.

그녀에게 듣도 보도 못한 치료를 행하던 하얀 로브의 미남은 이미 자리를 뜬 이후였고, 보조 침대에서 루나엔이 쌕쌕거리는 숨을 내쉬며 잠들어 있었다. 그동안 늘 두건을 쓰고 있어서 잘 못봤었는데, 루나엔의 갈색 머리카락은 꽤나 길었다. 짙고 가지런한 눈썹과 커다란 밤색 눈망울, 콧잔등에 내려앉은 주근깨가 귀여운 루나엔은, 자고 있는 것을 보니 영락없는 열일곱 살 소녀였다.

쌔근쌔근 자고 있는 루나엔을 미소띤 채 바라보던 카시야는 처음 눈떴을 때와 같이 손가락부터 움직여보기로 했다. 사실 신성 치료사의 치료는 미덥지가 못해서 반쯤은 격통을 예상했다.

'음?'

의외로 손가락이 그녀의 의지대로 쉽게 구부려졌다. 양손을 쥐었다 폈다 해봐도 전혀 거리낄 게 없을 정도였다.

이어서 조심스레 배에 힘을 주어봤지만 역시나 통증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라?'

온몸에 휘몰아치던 통증이 사라져있었다.

그녀는 천천히 힘을 주어 몸을 일으켰다. 늘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몸인데, 이 망할 세계에서 눈 뜬 이래 처음으로 스스로 몸을 일으킨 것이다. 막사 안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외상도 딱지가 앉아 있을 뿐, 안쪽으로는 거의 아문 것 같았다.

'그 희한한 치료가 엄청난 거였군. 하긴, 내 상식이 통하는 세계는 아닌 것 같으니까.'

그녀는 자신이 무시했던 치료사에게 마음으로나마 미안하다고 사과하고는 루나엔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침상에서 내려왔다.

땅바닥을 딛는 감각이 생소했다.

카시야 델 로만의 인생에서는 인간 중에서도 굉장히 뛰어난 신체를 지니고 있었으니 제 뜻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감사한 일인줄 몰랐다.

'다시 그 치료사를 만날 일이 있으면 고맙다고 꼭 인사를 해야겠어.'

이런 생각을 하고서 카시야는 순간, 제 성격이 조금 바뀌었음을 깨달았다.

카시야 델 로만이라면 절대 이런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녀는 남에게 도움받지 않고 남의 감사를 바라지도 않으며 자의적인 생각은 거의 배제한 채 도구로서만 살아갔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타인에 대한 감사를 느끼는 인간이 아니었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전생에서보다 인간성을 회복한 것 같다는 느낌도 들었다.

'아무래도 한 번 죽었었으니까, 환생하면서 원래의 본성을 찾은건지도 모르지.'

그녀는 마치 남일 대하듯 건조하게 추측해보면서 막사의 문을 조금 열어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온 것은, 엄청나게 반짝거리는 밤하늘의 수많은 별이었다.

물론 전생에서 온갖 오지를 뛰어다녔던 그녀이니 별이 많은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었지만, 이곳에서는 별이 훨씬 더 밝게 빛났다. 저도 모르게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예전하고 달라. 별 따위를 보면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다니.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었나?'

이제는 슬슬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잘 모르겠다 싶어지면서 갑자기 막막한 기분이 된 카시야는, 도로 침상에 돌아와 누웠다.

이런 저런 생각으로 더이상 잠을 이루지 못하고 눈만 깜빡거리고 있었더니 어느새 아침이 밝았다.

싸늘한 새벽공기와 함께 천막의 문틈 사이로 어스름한 빛이 새어들어왔다.

"으음…."

루나엔이 뒤척거리다가 조그만 신음을 내면서 몸을 일으켰다.

"안녕, 루나엔."

루나엔이 깨어나는 것을 가만 보고 있던 카시야가 처음으로 제 목소리를 내어 루나엔에게 인사를 하자, 깜짝 놀란 루나엔이 펄쩍 뛰었다.

"아, 놀라게 하려던 건 아니었는데. 미안."

귀신을 본 듯 큰 눈을 깜빡거리지도 못하던 루나엔은 떨리는 손으로 등불을 켜더니 침상에 앉아있는 카시야를 보고 입을 가렸다.

"아아…. 이게 신의 권능이군요! 저도 처음 봐요, 이런 거. 와아…. 정말 다행이에요. 정말…."

루나엔은 어느새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카시야의 곁에 다가왔지만, 혹시나 제가 손대면 또 통증이 생길까봐 카시야를 만지지도 못하고 손을 허우적댔다. 카시야도 등불 덕에 밝아진 시야로 제 몸을 살폈다. 역시나 군데군데 큰 상처부위에만 딱지가 앉아 있을 뿐, 자잘한 상처들은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조심스레 손을 들어 얼굴을 만져보니, 얼굴 역시 거의 다 아물어 딱지가 떨어지고 있었다.

"신성 치료사라는 거, 대단하네. 난 사실 내가 살아나지 못할 줄 알았어."

신이 살려준 거니까 도로 죽지 않을 거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그녀의 온몸에서 비명을 지르던 통증은 그만큼 격렬한 것이었다.

"살아날 운명이었던 거예요! 참, 가슴이나 배는 좀 어떠세요?"

루나엔이 내상을 입은 곳을 걱정했다. 카시야가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며 폐의 기능을 확인해보던 중 갑자기 배에서 꾸르르륵- 하는 소리가 울렸다.

"…배고파."

조금 민망한 듯 루나엔을 바라보았지만 루나엔은 오히려 기뻐하며 금방 아침식사를 가져오겠다고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정말 좋은 애구나. 어차피 남인데 저렇게까지 정성껏 간호해주다니….'

루나엔의 마음은 카시야로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그녀의 지극한 보살핌으로 제가 여태껏 큰 불편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에는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났다.

'전쟁터 상황이 어떤지는 몰라도, 가능하다면 저 아이만큼은 지켜주고 싶다.'

그녀로서는 처음 든, 누군가를 지켜주고 싶다는 마음이 스스로도 어색하고 간질거렸다. 하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속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서 건더기가 있는 스프와 빵을 가져와봤어요. 미음으로는 크게 힘을 낼 수 없을 테니까요."

카시야는 솔직히 말하자면 고기를 뜯고 싶을 정도로 배가 고팠지만, 제가 여기서 그런 것을 먹을 수 있는 위치가 아닐 수도 있고, 속이 완전히 멀쩡하다는 보장도 없어 루나엔이 가져다 준 아침식사를 감사히 먹기로 했다.

스프는 묽은 국물에 야채 건더기가 들어있었지만 국물 자체는 고기를 우린 것인지 감칠맛이 나고 기름이 조금 떠 있었다. 처음 먹어보는 음식인데도 왠지 굉장히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 육체가 기억하는 감각인가?'

거의 그릇에 코를 박을 듯 정신없이 식사를 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어보니 루나엔은 물과 함께 조그만 빵 하나를 떼어먹고 있었다.

"루나엔 스프는 어디 있어?"

"지금 스프는 환자들이랑 귀족 나리들만 먹을 수 있어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얼른 드세요."

루나엔의 말에 고기가 먹고 싶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한심스러워졌다. 전쟁터에서 물자가 풍족할 리가 없다. 더군다나 식량은 아끼고 아껴도 모자랄 판일 텐데….

자신의 스프는 이미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다음번에도 스프를 먹을 수 있다면 반드시 루나엔에게 반은 떼어줘야겠다고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을 달랬다.

아침식사를 하고서는 이리저리 몸을 움직여보며 자신의 신체능력을 가늠해보았다. 원래는 거즈를 갈고 약을 덧바르느라 바쁠 시간이었지만, 이미 거의 다 나은 상처에 또 약을 바를 필요는 없었으니까.

덩달아 루나엔도 한가해져서 가만 앉아있는 것을 당황스러워 하고 있었다.

"다 괜찮은데, 얼굴이 너무 가려워."

"상처가 거의 다 아물어서 딱지가 떨어지려니까 그런 거예요. 며칠만 참으시면 자연스럽게 다 떨어져나갈 테니까 손으로 자꾸 만지지 마세요."

손을 들어 얼굴을 만지작거리던 카시야에게 루나엔이 주의를 주었다. 나무껍질을 덮어쓴 것 같던 얼굴은 이제 군데군데의 작은 딱지만 남겨둔 채 매끈해져 있었다. 이전 얼굴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딱지가 떨어진 얼굴은 새 살이 올라온 듯 매끄럽고 보송보송했다. 덕분에 그녀의 얼굴은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회복된 상태였다. 치료사가 그 사실을 미리 알렸던 것인지, 사방이 환해질 때쯤 지크가 몇몇 병사를 데리고 막사를 방문했다.

"오, 생각보다 상태가 아주 좋군."

침상에서 일어나 그에게 목례하는 카시야를 보며 지크 역시 놀라워했다.

"치료를 받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카시야는 직감적으로 신성 치료사의 치료를 받는 게 누구에게나 열려있는 기회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렇게 감쪽같이 나을 수 있는 치료를 누구나 받을 수 있다면, 그 부대는 무적이겠지.

그때 지크의 뒤에서 기웃거리던 병사 하나가 그녀를 보며 "카시야!"라고 불렀다.

그쪽으로 시선을 향하니 허름한 가죽 갑옷을 입은 건장한 병사가 반가운 얼굴로 몸을 들썩거리고 있었다.

"역시 자네가 카시야 경이 맞나 보군. 신원 확인이 되지 않은 세 여기사를 아는 자를 다 데리고 와 봤거든. 카시야를 아는 자는 저 기사 하나 뿐이라더니…."

카시야를 알아보던 병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카시야를 바라보다 서서히 미소를 거뒀다.

"카시야? 이봐, 나야, 나. 쿠론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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