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09 경계(1) =========================
몸도 거의 다 나은 처지에 언제까지고 치료 막사 안에서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이제 복귀하고 싶습니다. 누워있는 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해 체력이 떨어졌으니, 훈련도 시작해야합니다."
전생과 비슷한 직업을 가진 자로 환생한 것이 정말 신의 배려였는지, 군인이었던 그녀가 기사로서의 삶에 적응하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이 세계의 예법이나 군법, 시대상을 알아가는 것이 골치가 아플 것 같았지만, 지금으로서는 모두 '기억상실자'인 그녀의 입장을 고려해 크게 문제 삼지 않았다.
"더 쉬라고 하고 싶지만 상황이 별로 좋지 않군. 쿠론 경의 부대로 소속시킬 테니 그에게 도움 받게. 내가 말은 해두지."
그녀의 상황을 보러 방문한 지크에게 복귀를 부탁하니 곧바로 부대 배치가 이루어졌다.
그녀를 보살피며 정이 들었던 루나엔이 눈물을 글썽거렸지만, 나중에 꼭 다시 보자고 약속하며 그녀를 뒤로하고 지크의 부하를 따라나섰다.
일전에 카시야를 아는 병사로서 막사를 방문했던 쿠론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는 카시야에게 엄청난 충격을 느꼈는지 사색이 되어 안절부절 못했더랬다. 덩치만 커다랬지, 순박한 눈망울을 껌뻑거리는 그가 카시야도 싫지 않았다. 그것이 육체에 남은 기억인지, 카시야 본인이 새롭게 만들어낸 감각인지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그녀의 육신은 이제 그녀의 것이니 상관없었다.
"카시야 경의 제 8부대 소속을 명한다. 쿠론 경은 카시야 경이 익숙해질 수 있도록 곁에서 도우라는 명령이다."
지크의 명을 하달한 이는 덧붙이는 말없이 돌아갔다.
8부대의 기사와 병사들은 안개숲에서 살아 돌아왔다는 소문의 그 카시야 경을 구경하느라 고개를 빼들고 기웃거렸다.
"카시야! 진짜 이제는 몸이 다 나은 거냐?"
쿠론은 여전히 걱정스런 표정으로 카시야를 살폈다.
"네. 괜찮습니다. 하지만 근육이 많이 소실되었으니 전투에 임하려면 곧바로 훈련을 시작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녀의 딱딱한 말투에 쿠론은 또 금방이라도 울 듯 미간을 찌푸렸다.
"카시야…. 너 진짜 왜 이래…? 정말로 기억이 하나도 안 나?"
"네. 죄송합니다. 그래서 말인데, 제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쿠론 경께서 자세히 좀 설명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기억을 다 잃었다는 사람보다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쿠론이 더 침착하지 못한 기묘한 상황이 벌어졌다.
"쿠론 경. 지크 님의 명도 있었으니 자네는 카시야 경에게 자세히 설명해주도록 하게. 오후 훈련은 빠지도록."
그들의 옆에서 지켜보던 8부대장이 쿠론과 카시야에게 명령했다.
"그러니까 쿠론 경과 저는 평민 출신 기사고, 같은 동네에서 나고 자란 친구라는 말씀이시죠? 저는 스물두 살, 쿠론 경은 스물네 살이시고, 기사단에는 여덟 살 즈음에 들어갔고요."
"응…. 그러니까 말 좀 놔. 남 대하듯 그렇게 딱딱하게 말하지 말란 말이야."
마치 순둥이 대형견이 저를 애타게 쳐다보는 듯한 느낌에 카시야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에 쿠론 역시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개였다면 지금 이 시점에서 꼬리를 열심히 흔들어대고 있을 것 같군.'
카시야는 저도 모르게 지어지는 미소를 굳이 지우지 않았다.
자신을 알고 있다는 사람이 쿠론이라 다행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만약 자신에게 악감정을 갖고 있는 자였다면 안 그래도 여태 친근하지 못한 이 세계에서 어떻게 휘둘렸을지 모를 일이다. 타인에게 휘둘리는 삶은 전생으로 족했다.
"저를 아는 사람이 쿠론 경밖에 없습… 아니, 없… 어?"
입에 잘 붙지 않는 평대를 억지로 내뱉으려니 말이 꼬였다. 하지만 그녀에게는 쿠론의 도움이 절실했다.
"원래 더 많았지. 하지만… 다 죽어버렸어."
풀죽은 그의 모습에 또 귀를 늘어뜨린 큰 개가 떠오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고향… 에 가면, 나를 아는 사람들이 더 있을까?"
"우릴 아는 사람이야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너나 나나 어릴 때부터 기사단에 팔려갔으니까…. 가족이랄 사람은 없지."
쿠론의 설명으로는, 이 나라에서는 아이를 먹여 살리기 힘들다고 판단되면 기사단에 입단시키는 게 보통이며, 가족의 연을 끊는 대가로 얼마간의 돈을 받는다고 했다. 그제야 여성 기사들이 많은 것도 이해가 갔다. 버릴 곳이 기사단뿐이라니, 여자아이들도 기사로 자랄 수밖에 없을 터였다.
'전생이랑 비슷한 게 많군. 또 군부대에서 자란 어린 시절이냐.'
카시야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우리 같은 사람들은 서로가 가족이야. 네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땐 얼마나 울었는지…."
쿠론은 다시 눈물이 솟는 눈가를 거칠게 문질렀다.
"그래…. 살아남는 건 중요하지…."
여전히 카시야에게 죽음은 두려운 게 아니었지만, 신이 자신을 다시 돌려보낸 것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다. 그게 무엇인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이 세계를 살아가다보면 아마도 알게 될 것 같았다.
"전투 방법과 무기, 마력 공격에 대해서도 좀 알려줘. 기껏 살아났는데 금방 죽어버리기는 싫으니까."
"너 좀 무서워졌어. 전에는 좀 더 밝았는데…."
"죽다 살아나봐. 많은 게 달라지기 마련이야."
카시야를 걱정스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쿠론에게 카시야가 무덤덤하게 내뱉었다.
"쿠론 경과 8부대원들의 도움으로 빠르게 적응해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8부대장의 말로는, 이전보다 전투능력이 상당히 상승했다고 하는데요. 혹시 마력 폭발에 노출된 것과 관련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카시야에 대한 지크의 보고를 받던 타셀의 청회색 눈이 가늘어졌다.
여러모로 이상했다.
혼자서 그 사지로부터 살아 돌아온 것도 그렇고, 감쪽같이 기억을 잃어버린 것도 그렇고, 미묘하게 침착한 것도 그렇고, 이전보다 전투능력이 좋아졌다는 것도 그렇고….
무엇보다 치료를 마친 신성 치료사가 했던 말이 신경 쓰였다.
"보통은 기억을 잃거나 정신이 망가진 환자라고 해도 그의 무의식에 침투할 수 있었는데, 그 분은 전혀 느낌이 달랐습니다. 완전히 가로막힌 느낌이었달까요. 그녀의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제가 손을 댈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에르논이 우리 측 기사들의 시체 사이에 심어놓은 첩자라고 보기에는 그녀를 기억하고 있는 쿠론 경의 증언이 문제였다. 카시야 경이 쓰러진 사이 그녀에게 정신 조작을 가했다고도 가정해봤지만, 그러기에는 에르논이 마력 폭발 이후 머무른 시간이 너무 짧았다.
"일단 계속 지켜봐. 마력 폭발 때문에 기억을 잃었을 뿐인 거라면 차라리 낫겠지만…. 혹시라도 이상한 낌새가 보이면 바로 보고하도록."
지크는 각 잡힌 경례를 하고는 막사를 나갔다.
제국군과 반란군의 대치 상태는 큰 변화가 없었다. 변화가 있다면 황제가 머물고 있는 카리나 궁에 있었다. 멜라니아 황비가 또 황손을 잉태한 것이다.
"누구는 죽네 마네 피칠갑을 하며 싸우고 있는데, 누구는 뜨거운 밤을 불사르고 계셨구만요."
미하일은 여전히 뚱한 표정으로 황제에 대한 반감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있었다.
"황가가 다복한 건 좋은 일이지 않느냐."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한숨 섞인 타셀의 말에 미하일은 불경하게 노려보며 목소리를 높였다. 타셀은 그의 태도를 문제 삼지 않고 피식 웃으며 "스페어가 많을수록 든든하지."라며 자조 섞인 미소를 지었다.
"참나. 전하는 누구 좋으라고 싸우는 겁니까? 차라리 그냥 확 뒤집어엎자니까요!"
그제야 타셀은 미하일을 매섭게 쳐다보았다.
"말조심하거라. 아무리 전장이라 하더라도 듣는 귀는 많아. 난 너를 헛되이 잃고 싶지는 않다."
미하일은 꿍얼꿍얼거리다가 입을 댓발 내놓고는 바람을 쐬겠다며 막사를 나갔다.
미하일은 제 주군이 답답했다.
자신이 보기에는 제 1황자 케일런이나 제 3황자 유리카데온보다는 황제의 자리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케일런은 오래전부터 황태자로 거론되어온 만큼 주변에 모인 사람도 많고 철저히 황제로서 교육받긴 했지만 그 성정이 제 아비와 닮은 구석이 많아 거칠었다. 황태자 책봉에서 밀려나자마자 들고 일어난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유리카데온은 거론할 가치도 없었다. 현 황제가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하일 생각으로는 길어봤자 10년이었다. 나이가 어린 것도 있지만 성정 자체가 유약한 유리카데온은 아직 제 어미의 치마폭에서 벗어나지도 못하고 있다. 10년이 지난다고 해서 제 3황자가 황제의 관을 견딜 수 있을 것이라고는 보이지 않았다. 분명 외척이 판을 칠 게 뻔하다.
그에 반해 타셀은 모후 엘레나를 닮아 온화하고 현명하면서도, 과감해야할 부분에서는 황제 알테리온의 젊은 시절을 보는듯한 결단력을 내비쳤다. 부모의 좋은 점만 쏙쏙 빼닮은 성공작인데도 황제는 왜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저보다 잘나서 질투라도 하나보지? 쳇.'
미하일은 열불이 나는 것 같은 가슴을 식히기 위해 주둔지 뒤편의 야산에 올랐다.
야산을 오르다보면 튀어나온 바위가 있었는데, 그 위에 올라가 주변을 내려다보면 그나마 속이 뻥 뚫릴 것 같았다.
한참 수풀을 헤치며 산길을 오르던 중이었다.
미하일은 미약하게 느껴지는 인기척에 저도 모르게 발을 멈췄다. 이곳까지 적이 침투했을 리는 없으니, 우리 쪽 군사이거나 민가의 백성일거라 생각했지만 그는 몸을 낮춰 소리 없이 인기척이 나는 곳으로 다가갔다.
그 인기척의 주인을 확인한 순간 미하일은 제 눈을 의심했다.
얼마 전까지 죽을 둥 말 둥 했다던 소문의 그 카시야 경이었으니까.
그녀는 가벼운 옷만 입고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중이었다. 시작한지는 꽤 된 듯, 그녀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입고 있는 허름한 셔츠의 등판 역시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후욱…. 후욱…. 아흔 아호옵…. 배액! 헉…. 헉…."
몇 번째의 백 개인지는 모르겠지만, 백을 센 그녀가 몸을 돌린 뒤 털썩 주저앉았다.
무릎을 세우고 앉아 상체를 뒤로 젖혀 하늘을 보며 한참 숨을 고르던 그녀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훔쳐보는 게 취미냐?"
미하일은 자신의 기척을 느낀 그녀에게 깜짝 놀랐지만, 서서히 몸을 일으켜 그녀에게로 다가갔다.
"엇…. 지크 경. 죄송합니다! 지크 경이신줄 몰랐습니다."
미하일을 본 카시야가 벌떡 일어나며 부동자세를 취했다.
"헤에…. 몸이 다 나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무리하는 거 아냐?"
"아닙니다. 몸은 다 나았습니다. 근육량을 늘려야 해서 가볍게 운동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왜 하필 여기야? 병영 내에 수련장도 있는데."
"…미하일 경이시군요."
미하일은 그녀에게 자꾸 놀라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가늘게 떴다.
"어떻게 알았어?"
"말투가 전혀 다르십니다. 걸음걸이나 태도도 다르시고요. 바로 못 알아봬서 죄송합니다."
지크와 미하일은 옷이나 다르게 입지 않는 한 언뜻 보고서는 구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닮아있었다. 그리고 타셀의 부대에서는 그 둘이 닮은 것을 이용해 적진에 혼란을 주기도 했다. 오래 봐 온 병사들이야 대충 그 둘을 구분했지만, 자신이나 지크를 그다지 자주 보지도 못했을 그녀가 정확하게 구분하니 신기할 정도였다.
땀으로 젖은 몸에서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 같은 그녀를 가만히 뜯어보니, 병상에서 일어난 사람치고는 확실히 탄탄한 근육이 느껴졌다. 기본적으로 남들에게 별 관심 없는 미하일이었지만 타고난 무인인 그는 이렇게 단련에 적극적인 병사에게 호감을 느꼈다.
"따라와. 좋은 구경 시켜줄게."
미하일은 앞서 성큼성큼 걸었다. 그 뒤에서 잠깐 당황하던 카시야는, 설마 총사령관의 측근이라는 자가 별 짓이야 하겠나 싶어 그의 뒤를 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