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0 경계(2) =========================
성큼성큼 걸어나가는 미하일의 뒤를 따라 산을 오르자 나무들이 드문드문해지며 산 중턱에 갖다 박아놓은 듯한 바위에 다다랐다.
그 바위 위에 올라서니 주둔지 막사들이 한 눈에 내려다보였다. 하늘은 이미 짙어질 대로 짙어진 노을에 붉게 물들어 있었지만, 이 시간대가 그렇듯 어두워지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다. 하늘에는 이 세계의 유달리 반짝거리는 별들이 하나, 둘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사의 사이사이에서 모닥불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고, 언뜻 스프의 냄새가 나는 것도 같았다. 전쟁 중이라기엔 너무도 평화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어때? 멋있지? 스으읍…. 하아아…."
미하일은 마치 제가 가진 보석을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이더니 깊게 심호흡했다.
"답답한 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아래를 내려다보던 카시야는 한숨 내쉬듯 심호흡을 해대는 미하일에게 예의상 물었다.
그러자 미하일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머리를 박박 긁으며 답답한 제 주군에 대해 종알댔다.
"답답하지~. 안 그러겠냐? 나라는 두 망나니 덕에 쪼개질 위험에 처했는데 가장 황제감인 우리 대장님은 곧 죽을 사람처럼 아무 욕심도 없이 이 답도 없는 싸움을 하고 계시잖냐. 솔직히 너도 우리 대장님이 차라리 황제가 되는 게 낫다고 생각하지 않냐?"
분하다는 듯 가슴을 팡팡 내리치며 얘기하던 미하일은, 아무런 울분이나 감정도 엿보이지 않는 카시야의 눈동자를 보고 깨달았다.
"맞다. 넌 아무 기억도 안 난댔지."
"죄송합니다."
"죄송할 게 뭐가 있어. 기억을 잃고 싶어서 잃은 것도 아닌데."
카시야는 다시 무심한 얼굴을 돌려 주둔지를 내려다보았다.
루나엔이나 쿠론, 방금 미하일에게 들었던 이야기나 몰래 엿들은 주변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이 나라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놓인 것 같았다. 황제라는 작자는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이 전쟁에서 이기려는 의지가 엿보이질 않고,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제 1황자는 이 나라를 폐허로 만들더라도 제국의 황제 자리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인다. 모두가 바라는 황제감인 제국군의 총사령관 타셀은 그 사이에 끼어 이 답 없는 전쟁을 이어가고 있는데, 전생 내내 전쟁을 경험했던 카시야의 느낌으로는 이 전쟁 자체가 뭔가 석연치 않았다.
귀동냥한 황제의 성격이 사실이라면, 그는 제 둘째아들이 전쟁을 종식시키고 영웅이 되는 상황을 달가워할 리 없다. 이 세계에 떨어진지 한달 남짓한 그녀가 파악할 정도의 사실이라면, 이 나라의 귀족들은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그러니 하나의 결론에 다다를 수 밖에 없다.
'황제가 제 둘째아들을 해치우려고 마음먹었군. 그리고 총사령관도 그 사실을 알고 있어.'
이겨도 문제, 져도 문제다. 이기면 감히 황제의 자리를 탐한다며 누명을 뒤집어 쓸 확률이 높았고, 제 1황자의 강력한 세력을 숙청한 이후에는 제 2황자의 목을 베는 것 정도야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면 당연히 적에게 죽든, 패전의 책임자라고 목이 베이든 둘 중 하나일 테고. 그러니 함부로 움직일 수 없는 것일 터이다.
'황제는 정말 뭔가 꿍꿍이가 있는 것 같군. 전쟁에서 패하면 2황자의 목을 베기 전에 제 목과 황태자의 목부터 떨어질 텐데…. 그가 노리는 게 정확히 뭐지? 아니, 그것보다는 왜 굳이 2황자를 쳐내려고 하는지가 의문이야.'
카시야는 나름대로 머리를 굴렸지만, 명확한 답을 내리기에는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도 부족했다. 막말로 황제가 쌈빡하게 미쳤을 수도 있으니까.
"이제 내려가서 밥 먹자. 운동도 꽤 오래 한 것 같던데, 배고프지 않냐?"
미하일이 카시야 쪽으로 몸을 돌리며 하산을 권하자 카시야도 순순히 발걸음을 돌렸다.
하산을 할 때에는 카시야가 앞, 미하일이 뒤에서 걷게 되었다. 미하일은 제 앞에서 걷는 카시야의 뒷모습을 보며 내심 감탄했다. 그녀의 자세에는 군더더기라든가 빈틈이 없었다.
'거의 완벽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야….'
뒤에서 그녀를 공격하는 것을 여러모로 상상해봤지만, 어떤 상상을 하든 그녀가 순식간에 대응하는 것이 그려졌다.
'시험해볼까?'
장난스런 미소를 머금은 미하일은 바위를 조금 내려온 시점에서부터 지팡이처럼 짚고 있던 나뭇가지를 조심히 들어 그녀의 등판 한가운데를 찔렀다. 아니, 찌르려고 했다.
그의 공격이 시작된 바로 그 시점에 카시야는 재빨리 몸을 낮추고 산길의 옆을 돌아 순식간에 미하일의 뒤를 잡고 그의 목에 뾰족한 무언가를 댔다. 산길을 휘돌며 주웠는지, 그녀의 손에는 날카롭게 꺾인 짧은 나뭇가지가 들려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순식간에 엄청난 에너지를 썼을 텐데 그녀의 호흡은 안정적이었다.
"이거, 대단한데?"
미하일의 입가에는 미소가 짙어졌다. 그는 정말로 즐거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
미하일의 목을 잡고 있던 카시야는 곧 손을 풀었다. 그녀 역시 그가 장난친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미하일 정도의 기사가 정말 사람을 죽이려고 했다면, 아무리 카시야라고 해도 지금의 몸으로는 위험했을 것이다.
"…내가 알고 있기로는, 안개숲 작전 이전에 이 정도로 엄청난 움직임을 보이는 여기사는 없었어."
방금 목을 따일뻔한 사람치고는 여상하게 말을 이어가는 미하일이었다.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고개를 돌려 카시야를 바라보는 미하일의 눈빛은 참을 수 없는 호기심과 흥분으로 붉게 일렁이듯 보였다.
"저도 궁금합니다. 침상에서 손 하나 까딱 못할 때부터 고민했습니다만, 답이 안 나오더군요. 어쨌든 이렇게 된 거, 어쩌겠습니까."
손에 쥐고 있던 짧고 뾰족한 나뭇가지를 길 옆에 툭 버린 카시야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시 미하일을 앞서 걷기 시작했다.
제 8부대의 막사로 돌아가니 쿠론이 그녀의 몫까지 저녁식사를 배식 받아놓고 있었다.
"이럴 필요까지는 없는데…."
"무슨 소리야? 빨리 받아놓지 않으면 남는 게 없다고. 배고프지? 얼른 먹어."
하긴, 건장한 젊은이들이야 하루 종일 배가 고플 테니 음식이 남을 리 없다.
"고마워, 쿠론."
감사의 인사를 하자 쿠론은 다시 배시시 수줍게 웃고는 그녀의 맞은편에 자리 잡고 앉아 빵을 뜯었다.
식사를 하려고 내려다보니 스프에는 고기 건더기까지 들어 있었다.
"웬일로 고기가 들어있는 스프지?"
"후방에서 지원물품이 도착했대. 이 근처는 사냥감도 적어서 고기 구경 못한지 오래됐는데 다행이지."
스푼도 없어 그릇채 스프를 들이키자 입안에서 고소한 고기의 질감이 뿌듯하게 씹혔다.
'고기 맛도 전생이나 다를 게 없군. 그나저나, 근육을 키우려면 단백질이 더 필요한데….'
카시야는 전생보다 한참 약해빠진 육체를 단련하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기본적으로 잡혀 있는 기사들의 훈련시간 이외에도 시간이 날 때마다 제 몸을 못살게 굴었다. 하지만 그동안 먹었던 음식들로는 근육을 키우는 데 영양소가 부족해보였다. 오늘 낮까지 거무튀튀한 빵 한 덩어리와 묽은 야채수프, 육포 조금이 다였다. 그나마 그녀가 기사이니 그 정도의 식사가 배급되는 것이지, 몸 쓸 일이 적은 행정병이나 간호병에게는 육포가 지급되지 않았고, 그들이 급이 낮은 평민이라면 수프도 배급되지 않았다.
"혹시 흉년이라도 들었어? 아니면 원래 이런 식사를 하는 거야?"
카시야가 묻자 쿠론이 고개를 들었다.
"요만큼 먹고 어떻게 싸우냐? 다 놈들이 보급로를 차단해서 그랬던 거지. 걱정 마. 보급로가 다시 확보됐다니까 곧 넉넉히 먹을 수 있을 거야. 이거 좀 더 먹어."
쿠론은 카시야가 배가 고파 묻는 줄 알고 남아있는 제 빵을 카시야에게 건넸다.
"…아니, 양이 모자란 건 아냐."
카시야는 자기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쿠론의 눈망울이 부담스러웠다.
전생에서는 어머니를 잃은 뒤론 누군가가 제 식사를 걱정하고, 제 몫을 넘겨주는 경험을 해 본적이 없다. 저 큰 덩치에 제대로 못 먹으면 밤새 뱃속에서 그르렁거릴 게 뻔한데도 쿠론은 망설임 없이 제 것을 카시야에게 주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카시야가 끝끝내 거절하자 하는 수 없이 다시 빵을 뜯어먹는 쿠론의 눈빛은 여전히 걱정이 가득하다.
'부담스러워. 부담스러운데… 싫지는 않아. 흐음…. 좋아. 루나엔이랑 쿠론은 지켜내자.'
그녀의 '지켜야할 사람' 목록에 쿠론이 추가되었다.
한편, 8부대로 돌아가는 카시야의 뒷모습을 확인한 미하일은 빠른 걸음으로 타셀의 막사로 뛰어들었다. 마침 타셀과 지크가 식사 중이었다. 미하일은 시종에게 자신의 식사를 가져오도록 시키고는 흥분된 얼굴로 타셀을 돌아보았다.
"내가 아까 바람 쐬러 뒷산에 올라갔다가 누굴 만난 줄 아십니까?"
타셀과 지크는 이놈이 또 왜 이러나 싶었다. 하지만 엄청난 반응을 기대하는 미하일의 눈빛을 모른 척 하기 어려웠던 타셀이 졌다는 듯 "누굴 만났는데?"하고 응대해줬다.
"소문의 그 카시야 경을 만났단 말입니다! 으하하. 그런데, 이 여자, 보통이 아니에요."
카시야의 이름을 들은 타셀과 지크의 눈빛이 비로소 미하일이 바라 마지않던 날카로운 눈빛이 되었다.
"무슨 소린지 자세히 얘기해봐."
타셀이 낮게 명령했다.
"여기사들이라고 하면 솔직히 여러 면에서 남자 기사들보다 나은 게 없잖아요? 귀족이 아닌 이상, 아니, 귀족이라 하더라도 여자가 기사를 한다는 게 결국 집안에서 버려졌다는 얘기고, 그들이 원해서 되는 경우는 거의 없으니 기사가 되고서도 고생을 자처하는 경우는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20대 중반에 들어서기 전에 적당한 남자를 잡아서 결혼하는 경우가 많지 않습니까?"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지크, 넌 형님 말 좀 얌전히 들어라, 좀. 여하튼, 어디까지 말했지?"
타셀은 한숨을 내쉬며 "기존 여기사들에 대한 얘기였지."하고 답해 주었다.
"아, 그렇지. 제가 이때껏 살아오면서 여기사가 자발적으로 추가 훈련을 한다거나 자신의 무공을 연마하는 꼴은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습니다. 너는 있냐? 전하는 있습니까?"
미하일이 지크와 타셀을 번갈아 쳐다보며 물었다.
미하일의 말대로 칼리스토니아에 여기사는 많았지만, 그들이 제대로 된 병력이냐 묻는다면 그것은 좀 다른 문제였다. 기사인 이상 전쟁이 나면 무조건 차출되기 때문에 병력을 늘리기 위해 여아들까지 기사단의 종자로 받아들였으나, 대부분의 여자들은 나이가 차는 대로 결혼을 해서 기사단을 나가버렸다.
남자들의 세계에서야 강하고 용맹한 기사가 동경의 대상이니 기사로서 향상심을 갖는 게 자연스러웠지만, 아름답게 치장한 가녀린 영애가 동경의 대상인 여자들로서는 여기사의 모습이 그닥 매력적이지 않았다. 그게 또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라서 보통 군대에서는 여기사를 물품 보급병이나 행정병으로 활용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런 경우가 드물긴 하지."
미하일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하던 타셀이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