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1 경계(3) =========================
"그렇죠? 그런데 아까 뒷산을 오르다가 인기척이 나서 몰래 다가가보니, 아 글쎄, 카시야 경이 팔굽혀펴기를 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도 맨손체조 수준이 아니라 옷이 땀으로 흠뻑 젖을 만큼요. 더 대단한건, 내가 기척을 숨겼는데도 바로 알아챘다는 거죠. 그렇게 헐떡대고 있으면서도."
"네 놈이 분명 부스럭거렸겠지." 지크가 이죽댔다.
"아버님의 명예에 걸고 맹세하건대, 난 충분히 경계하고 있었어. 그 여자가 보통이 아닌 거야. 내가 한 번 더 시험해봤으니까 확실해."
미하일은 하산하던 길에 그가 그녀를 공격했던 것과 그녀가 멋지게 반격했던 일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카시야 경에게도 말했지만, 안개숲 작전 이전에 그런 수준의 여기사가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 없습니다. 하지만 마력에 노출돼서 달라졌다고 하기도 애매하게 됐죠. 스스로 단련하고 있었으니까. 저절로 좋아진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반대로 말해서, 다른 여기사들도 노력하면 충분히 능력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건데…. 어쨌든 카시야 경은 앞으로 꽤 활약해주지 않을까 싶은 기대가 들더군요."
미하일의 얘기에 집중하며 스프를 뜨는 둥 마는 둥 하던 타셀은 그녀를 다시 한 번 만나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섬세하지 않은 미하일은 체력단련을 열심히 해서 전투능력이 좋아진 거라고 맘 편하게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갑작스런 전투능력의 향상은 단지 체력단련의 결과라고 하기는 어려웠다. 물론 기존에 갖고 있던 전투능력이 조금 나아질 수는 있겠지만, 방금 미하일이 얘기한 카시야의 반응은 그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온몸이 붕대투성이에다 얼굴은 딱지로 가득했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타셀은 그녀가 나은 뒤로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문득, 그렇게 의심스러워하면서도 제 눈으로 확인하지 않은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얘기만 전해 듣기보다는 직접 한 번 보는 게 낫겠지. 내가 너무 예민한가 싶긴 하지만….'
***
카시야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취침점호 전까지 쿠론에게서 원래 몸 주인인 카시야에 대한 얘기를 듣곤 했다.
마흔이 될 때까지 살았던 전생의 기억을 갖고 있었지만 워낙에 비정상적인 삶이었기 때문에 쿠론이 얘기해주는 그들의 어린 시절은 흥미로웠다.
"각 귀족의 성에는 영지 최대의 기사단이 있고 지역별로도 지역 기사단이 있는데, 우리 고향인 아루엘로는 너무 시골이라 기사단이 작았거든. 다들 같은 지방 출신이고 하니까 모두가 친하게 지냈지. 종자들은 다들 형, 누나, 동생 하면서 지냈고, 모두 서로를 가족처럼 생각했고 말야. 기사님들도 우릴 귀여워해주셨어. 물론 귀족이랍시고 우릴 막 대하는 기사가 아예 없는 건 아니었지만 여기 와서 들어보니 그 정도는 약과더라고. 하아…. 얘기하다보니 정말 그립다, 아루엘로 기사단…."
쿠론의 눈빛이 아련해졌다.
"거기서 제국군에 편입된 기사는 몇 명이었어?"
"열다섯 명."
"날 알고 있는 사람이 너 밖에 없다는 말은 그럼, 그 열다섯 명 중에 우리 둘 빼고는 전부 다 죽었다는 말이야?"
카시야의 지적에 쿠론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둘을 포함해 기사 열 명, 종자 다섯 명이었어. 그런데 반란이 일어난 뒤 10개월동안 다 죽었지. 그러니 너까지 죽었다고 전해 들었을 때 내 기분이 어땠을지 생각해봐. 정말…. 세상에 나 혼자 남는 것 같았어."
또다시 그의 눈이 촉촉해진다.
카시야의 전생에서도 이런 적이 있었다. 캠프 X에서는 조를 나눠 훈련을 하곤 했었는데 최종적으로 캠프X를 졸업할 수 있게 된 건 150여명의 아이들 중 단 17명뿐이었다. 그 중 부동의 1등이 카시야였고, 카시야 조의 아이들 중 함께 졸업한 아이는 3명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졸업 후 투입된 실전에서 한 명씩, 한 명씩 사라져갔다. 하지만 그녀는 그들이 전부 사라졌다고 해서 슬픔을 느끼지는 않았다. 제 목숨이 붙어있는지, 제가 임무를 성공하는지가 중요했지, 남들이 어쩌고 있는지는 관심 밖이었다.
쿠론의 얘기를 들으며 자신의 결여된 부분을 하나씩 깨닫게 되는 건 불편하면서도 신기한 경험이었다. 확실하게 인지한 부분이 있다면, 그녀가 전생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녀에게 '약점'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쿠론처럼 사랑하는 이가 많으면 반대로 그게 그의 약점이 된다.
'나에게도 이미 루나엔과 쿠론이라는 약점이 생겨버린 거겠지. 더 늘지 말아야 할텐데….'
생각에 잠겨있던 카시야에게 어느새 눈물을 닦아낸 쿠론이 짐짓 밝은 체하며 이야기를 이었다.
"참, 너는 우리 아루엘로 기사단의 꽃이었어. 기사들 중에서도 널 마음에 들어 하는 분이 꽤 있다고 했어. 시골 아이 같지 않게 너는 얼굴이 하얬으니까 말야."
"훈련을 열심히 하지 않았나보군. 뙤약볕 아래서 훈련을 열심히 했다면 하얬을 리가 없는데."
아무리 기억이 나지 않는다지만 자신에 대한 얘기를 남 얘기하듯 툭툭 내뱉는 카시야가 쿠론은 안타까웠다. 그가 아는 카시야는 말수가 적고 모든 일에 열심이었다. 소리 내어 웃는 것을 잘 보지는 못했지만 지금의 카시야보다는 밝았고, 돈이 없어 옷이나 화장품을 사지는 못했지만 제 하얀 피부를 소중히 여기던 천생 여자인 아이였다.
그런 여동생 같던 아이가 죽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는 얼마나 억장이 무너졌던가. 그리고 죽은 줄 알았던 아이가 살았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얼마나 기뻤던가.
그런데 사신을 겨우 피하고 돌아온 여동생 같던 아이는 과거를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전혀 모르는 남처럼 서늘하고 강인해져있었다. 전에는 카시야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제 손바닥 위를 보듯 훤했는데, 지금은 저 작은 머릿속에 뭐가 들어있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뭐, 어쨌든, 이제 서로를 기억하는 건 우리 둘뿐이라는 거네. …그럼 되도록 살아남자고."
카시야가 쿠론을 향해 싱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그 잠깐의 미소 사이에서 쿠론은 그가 아는 카시야의 편린을 찾아낼 수 있었다.
"그래. 우리 꼭 살아서 돌아가자." 쿠론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카시야 경, 황자 전하께서 찾으신다고 합니다."
쿠론과 카시야의 곁에 8부대장의 종자가 다가와 전언했다.
높으신 분이 찾는다는 말에 쿠론은 불안해했지만 카시야는 여전히 무심한 얼굴로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나 쿠론에게 내일 보자는 인사를 하고는 종자를 따라 나섰다. 종자를 따라 8부대장의 막사에 닿자 이번에는 그가 카시야를 데리고 총사련관의 막사로 향했다.
"전하. 제 8부대장 아론 막스입니다. 명하신대로 카시야 경을 데려왔습니다."
"들어오게."
막사 안에서 입장을 허하는 목소리가 떨어지자 막사의 출입구를 지키던 병사 둘이 천막을 걷었다. 부대장을 따라 막사로 들어간 카시야는 부대장이 하는 것을 따라 제 앞에 앉은 사람들에게 경례했다.
"막스 경은 밖에서 잠깐 기다려주겠나?"
타셀의 말에 아론은 가볍게 목례하고 바로 돌아 밖으로 나갔다.
막사 안에는 이제 타셀과 지크·미하일 형제, 카시야만 남았다.
"늦은 시간에 갑자기 불러 미안하네, 카시야 경."
"괜찮습니다."
"여전히 과거에 대한 기억은 전혀 떠오르는 게 없나?"
"네. 없습니다."
카시야의 말투는 짧고 간결했다. 타셀은 거기에서도 잘 훈련된 병사의 느낌을 받았다.
"카시야 경. 단도직입적으로 묻겠네. 막스 경의 말로는 자네가 안개숲으로 가기 전까진 굉장히 평범한 여기사였다던데, 안개숲에서 살아 돌아온 뒤 자네의 능력이 엄청나게 향상되었다더군. 이 변화에 대해 납득시켜줄 수 있겠나?"
"죄송합니다. 저 역시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다만 깨어난 뒤로부터는 무조건 강해져야겠다는 강박이 생겼습니다."
사실을 말하자면 그저 그녀가 전생에 체득한 게 드러난 것뿐이지만, 지금은 이 정도로 둘러댈 수밖에 없었다.
"그래? ‘강해져야겠다는 강박이 생겼다.’라…. 역시, 지나치게 강력한 힘 앞에 죽을 위기를 맞았던 것 때문일까…."
타셀은 조용히 중얼거리며 제 앞에 부동자세로 서있는 여기사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짧게 자른, 까맣게 보일 정도로 짙은 밤색의 머리칼, 녹색을 띠는 눈동자, 흰 피부에 대비되는 붉은 입술, 홀쭉한 뺨…. 외모로만 보자면 여린 편에 가까운 보통의 여기사였다. 하지만 품은 넉넉하고 소매는 짧은 상의 덕에 드러난 그녀의 팔뚝에는 보통의 여자에게서 볼 수 없는 멋진 잔근육이 은근히 드러나 있었다.
"말은 탈 수 있겠던가?"
"네. 탈 수 있습니다."
"검은 어느 정도 다루지?"
"검은 8부대에 소속된 이후로 수련을 시작했습니다. 초보자나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미하일의 말로는, 단검은 꽤 쓸 것 같던데…. 마치… 암살자처럼 말야."
"호신용 칼을 휘두르는 수준입니다."
그녀를 암살자로 의심하는 타셀의 질문을, 카시야는 모른 척했다. 그녀의 전 직업이 암살자였으니 그녀의 움직임이 암살자와 비슷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이 세계에서 암살자라는 존재는 환영받지 못할 것임에 틀림없다. 하긴, 전생에서도 환영받는 존재는 아니었지만.
"…자네의 실력이 일취월장해서 우리 군의 든든한 병력이 되어주길 바라겠네. 이만 돌아가 봐도 좋네."
카시야는 다시 다리를 모으고 주먹 쥔 오른쪽 팔을 제 가슴 앞에 갔다대어 상체를 살짝 숙이는 예를 취하고는 뒤돌아 막사를 나왔다. 밖에는 부대장이 서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부대장과 함께 8부대로 돌아오며 그녀는 타셀이 제 적이 될 인사는 아닐지 고민해야했다.
"아무리 그래도 죽다 살아난 우리 병사한테 암살자가 뭡니까, 암살자가."
카시야가 나간 막사 안에서 미하일이 불퉁한 얼굴로 타셀을 타박했다.
"미하일. 너는 이상하지도 않아? 네가 말했듯 여기사 중에 네 뒤를 잡을만한 실력을 지닌 자는 없었어. 그런데 침상에 오래 누워있던 여자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마자 갑자기 그 정도의 실력자가 되었단 말이지."
"아아니, 그거야 내가 봐줬으니까 그렇죠."
"만약 그때 그녀의 손에 들린 게 예리한 단도였다면 어땠을 거 같아? 너를 죽이는 건 어려울지 몰라도, 치명상은 입힐 수 있었을 거야. 너한테 치명상을 입힐 수준이라면, 웬만한 부대장급은 순식간에 해치울 수 있지 않을까?"
"그, 그거야 뭐…. 아니, 그래도 말입니다. 본인도 왜 저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데 갑자기 암살자 운운하면, 카시야 경도 섭섭하지 않겠습니까?"
타셀의 말에 꿍얼거리는 미하일의 맞은편에서 곰곰히 생각에 잠겨있던 지크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우리로서는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녀가 소속된 8부대가 고급 정보에 접근할 수 있을만한 곳도 아니고, 증거도 없는데 병사를 의심하면 군 사기만 떨어질 뿐입니다."
"하아. 그래, 내가 너무 예민해져있는지도 모르지. 나흘 전에 보낸 밀사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나?"
피곤한 눈 주변을 문지르며 타셀은 카시야에 대한 대화를 끝냈다.
"아직입니다. 저쪽에서도 고심하는 것 같습니다."
"알았다. 이만 일어나지."
잠시 후 막사의 등불이 꺼졌다.
============================ 작품 후기 ============================
Jin9 님 > 말씀주신 부분은 아예 삭제해버렸어요. 의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