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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2화 (12/134)

00012 그들의 사정(1) =========================

"위대하신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군, 트레온 백작."

카리나 궁의 알현실에 은은한 차 향이 감돌았다.

제국군과 반란군의 치열한 교전 때문에 제국의 영토에서는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고 피 냄새가 진동했지만, 황궁에서도 한참 후방에 떨어진 카리나 궁은 별세계인 듯 여유롭고 평화로웠다.

"자주 찾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2황자 측이 아무래도 신경 쓰여서…."

"타셀? 타셀 녀석의 눈치를 볼 필요가 뭐가 있단 말이오? 장차 귀족파를 이끌 수장이 되어야 할 사람이 그렇게 간담이 작아서야."

"최근에 평민들을 중심으로 2황자의 인기가 높아가고 있습니다. 제국군이 지나가는 영지의 귀족들도 대놓고 피력하지는 않지만 2황자에게 우호적으로 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이니 저까지 없으면 2황자가 제멋대로 설쳐 댈까봐 주의하는 것뿐입니다."

"쯧쯧. 평민들에게 인기가 있어 봤자지. 어차피 귀족들은 1황자와 우리 쪽으로 양분된 상황이오. 타셀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되니 너무 걱정 마시오. 그나저나, 저번에 말한 트레노실은 구했소?"

"예, 폐하. 황비 마마를 위해서라면 못 구할 것이 어디있겠사옵니까."

미간에 짜증이 어려있던 황제 알테리온의 표정이 그제야 밝아졌다.

"멜라니아가 입덧 때문에 먹는 게 너무 부실해 걱정이오. 그나마 트레노실은 먹을 수 있겠다니 다행이지."

트레노실은 제국에서는 나지 않는 고급 과일이었다. 과즙이 새콤달콤하고 향이 상쾌하여 황궁의 여인들이 특히나 좋아하던 과일이었지만, 내전 때문에 교역이 거의 중단된 상황이라 구하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부친인 트레온 공작에 가려 중앙 정계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다가 이번 황태자 책봉을 계기로 출셋길이 열린 알폰소 이반 트레온 백작은, 자신의 출셋길을 열어준 멜라니아 황비를 위해서라면 바다를 헤엄쳐 건너서라도 트레노실을 구해올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야 멜라니아를 황후로 올릴 수 있을 텐데…."

"황비 마마에 대한 황제 폐하의 사랑이 지극하시니, 같은 배를 빌어 태어난 자로서 감읍할 따름이옵니다."

감격해 마지않은듯한 알폰소 백작의 태도에 만족스러운 미소를 짓던 황제가 곧 물러가라는 뜻을 비쳤다.

"멜라니아가 기다리고 있으니 가서 오랜만에 회포도 풀고, 트레노실도 전해주기 바라네."

깊게 허리를 숙여 예를 차리고 자리에서 물러난 알폰소 백작이 걸음을 재게 놀려 황비가 머무는 장미정원 궁에 다다르자 시녀가 황비에게 백작이 왔음을 고했다.

제 5황비 멜라니아 아이린 이반 트레온은 제국에서도 손꼽힌다고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릴 때부터 그 미모가 눈부셔 진작부터 황태자비로 거론될 정도였다. 그런데 황태자비가 아니라 황비로 황궁을 밟을 줄이야.

황궁으로 떠나기 전까지 멜라니아는 제 방에 틀어박혀 눈물로 지새웠다. 그때에는 아직 어렸던 알폰소 백작도 제 꽃다운 누이가 다 늙은 황제가 아닌, 젊고 늠름한 황태자의 비가 되길 바랐지만,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황비가 된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그때 황제가 아니라 제 1황자나 제 2황자의 비가 되었다면 지금 그녀의 목숨 또한 오락가락했을 테니까.

황제의 비가 되기 위해 집을 떠나기 전까지는 제 신세를 한탄하며 눈가에 물기가 마를 날이 없던 멜라니아는, 황비가 되고 나자 어느새 점점 영리하고 표독스러운 황궁의 여인이 되어갔다. 황제는 제 품 안에 활짝 핀 제국 제일의 꽃이 귀여워 죽겠는지, 그녀가 해달라는 것은 대부분 다 들어주고는 했다.

"마마. 그간 안녕하셨습니까."

"오라버니! 너무너무 오랜만이에요. 얼마나 뵙고 싶었는데요."

화사하게 웃는 멜라니아의 얼굴은 갓 피어난 흰 장미 같았다. 풍성한 백금발은 언제나 반질반질했고, 하얀 얼굴 위에는 귀한 보석 같은 푸른 색 눈동자가 아름답게 반짝였다. 황비가 되었던 열여섯 살 때는 순결하고 청초한 미소녀였다면, 스물여섯의 지금은 봉오리였던 꽃이 활짝 피듯 싱그러운 아름다움이 가득했다. 얼굴만 보면 이미 정해진 황태자위를 갈아엎은 여인이라고는 보기 힘들었지만, 그것이 사실이었다.

"저보다 제가 가지고 올 트레노실을 기다리신 게 아닙니까?"

알폰소 백작은 장난스럽게 멜라니아의 앞에서 트레노실 하나를 꺼내 흔들었다.

"어머! 트레노실! 어떻게 구하신거예요? 반란 때문에 구하기 어렵다고 들었는데…."

"제가 마마를 위해 못할 일이 무어있겠습니까. 허허허."

멜라니아는 시녀를 시켜 그가 가져온 트레노실을 손질해오게 하며 나머지 시녀들도 자리를 비키게 했다.

"오라버니. 전선에서 고생하고 계시다는 말씀은 전해 들었어요. 하지만 얘기됐던 것보다 내전이 길어져 저는 너무 불안하답니다."

"마마! 그러시면 아니 되옵니다. 위대한 칼리스토니아의 황손을 잉태하신 분이지 않습니까. 마음 편안하게 드시고 태교에만 전념하십시오. 기간이 조금 길어지고는 있지만 계획과는 차질 없이 진행되고 있으니 말입니다."

"정말인가요? 저는 정말 큰 욕심 없어요. 얼른 전쟁이 끝나서 황제 폐하와 유리, 그리고 태어날 아기와 함께 행복하게 지내는 것만이 제 소망이랍니다."

멜라니아의 눈망울이 너무나 간절해 보여 알폰소 백작은 저도 깜빡 넘어갈 뻔했다.

'큰 욕심이 없다, 라…. 제 자식을 황태자위에 올리는 것보다 더 큰 욕심도 있었나보군.'

알폰소 백작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제 영악하고 욕심 많은 여동생에게 푸근하게 웃어보였다.

한편 그날 밤, 타셀의 천막에는 그들이 진군할 지역의 귀족에게 보냈던 밀사가 돌아와 보고를 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그쪽의 반응은?"

"무언가를 재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 측에 협조할 게 확실해보였는데, 그 사이 반란군 진영으로부터 어떤 제안을 받았는지, 이번에는 끝까지 확답을 피했습니다."

밀사의 말에 침묵하는 타셀과 달리 지크와 미하일의 얼굴에는 분노가 피어올랐다.

"제기랄…."

"전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이런 식으로 호의적이다가 모호한 입장으로 태세변환을 하는 게 벌써 세 번째입니다."

"그래. 알고 있다. 반란군이 마치 우리가 누구와 접촉하는지 다 알고 있는 것 같지 않으냐."

타셀은 이번 보고로 그들의 계획이 새어나가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언제가 결전일일 것 같은가."

"머지않았다는 느낌입니다만, 아직 반란군 쪽도 때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아직 시간이 있군. 알았다. 수고했네."

밀사가 나간 뒤 미하일은 타셀이 입을 열길 기다리다가 제 분을 못 이겨 버럭 성질을 냈다.

"이건 분명 황제 폐하께서 벌인 일입니다! 도와주진 못할망정, 나 참…!"

미하일은 계속 구시렁댔지만 지크와 타셀은 말없이 생각에 빠졌다.

"뭔가가 있어. 내가 여기서 패하면 반란군이 곧바로 카리나 궁을 향해 쳐들어갈 텐데, 왜 폐하께서는 반란군 진압을 막으실까…."

"확실한 건, 폐하 쪽도 반란군 쪽도 뭔가 망설이고 있다는 겁니다. 그 사이 우리도 뭔가 방책을 마련해야합니다."

"후우…. 안다. 하지만 내가 궁금한 것은, 이 상황마저 폐하께서 의도하신 건지, 아니면 그저 나를 바보 천치로 보신 건지 하는 거다. 예전부터 나에게 관심은 없으신 분이었지만, 만약 이게 의도한 상황이라면 덫에 걸리는 꼴이 되니 철저하게 파악하고 은밀하게 준비해야겠지."

달라진 눈빛의 타셀을 본 지크와 미하일은 그의 결심이 머지않았다는 것을 느꼈다.

"변방의 귀족들은 이미 타셀 전하께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명을 내리시기만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알았다. 모후의 안전만 확보되면 진행하기로 한다. 카리나 궁에서는 연락이 없나?"

"예. 아직 없습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하거나 들키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근위대가 너무도 철저히 지키고 있어…."

"알았다. 연락이 오는 즉시 알리게. 이만 해산."

텅 빈 막사에서, 타셀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황제는 끝까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욕보이고 있었다.

황제 알테리온은 새로이 정복한 땅 타르타니안의 왕녀인 엘레나를 제 3황비로 들였지만, 자신이 아끼던 장군이 타르타니안과의 전쟁에서 죽은 복수인지 그녀에게 그 어떤 따스함도 보여주지 않았다. 생각하기도 싫지만 모후는 황제에게 겁간 당하듯 초야를 치렀고, 그 이후로도 황제가 엘레나의 침실을 찾을 때면 침실 밖으로까지 그녀의 비명소리가 들렸다고 했다. 자신이 태어난 이후 황제는 곧 다른 황비를 맞아들이더니 엘레나와 타셀의 존재는 잊은 듯, 그 어떤 공식석상에서도 그들을 황족으로서 대우하지 않았다. 엘레나는 차라리 그 편이 낫다고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석해야 하는 황제 주최의 파티에서 한 눈에 보기에도 혼자만 수수하게 차려입은 제 어머니를 보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게 뱃속에서 분노가 들끓었다. 하지만 타셀이 분하다고 화를 낼 때면 엘레나는 그의 아들에게 제발 이대로 조용히 살자고 간청했다.

왕녀를 바친 덕에 목숨을 건진 타르타니안의 왕족들은 엘레나의 그 어떤 힘도 되어주지 못했다. 물론 알테리온 황제가 그럴 여지를 주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도 황제의 눈치를 보며 납작 엎드려 지냈기 때문이다. 그들은 파티에 엘레나보다 훨씬 더 화려한 복장으로 나타나 엘레나와 타셀에게 형식적인 예도 차리지 않았다. 그랬기 때문에 타셀 역시 외가에 그 어떤 기대도 없었고, 그 어떤 호의도 없었다.

떠올리고 곱씹을수록 가슴 한복판이 꽉 막히는 듯한 울분 때문에 타셀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수건을 하나 어깨에 걸치고는 야산 중턱에 있는 연못으로 향했다. 차가운 물에라도 빠지면 정신이 차려질 것 같았다.

주둔지에는 밤이 내려앉았지만 달이 밝아 주변이 꽤 환했다.

착잡한 얼굴로 산길을 타고 얼마 전에 봐둔 연못으로 다가간 타셀은 옷을 훌훌 벗어 바위 위에 걸쳐두고는 찬 연못물 한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연못은 명치까지의 깊이였다. 타셀은 숨을 멈추고 물 안으로 풍덩 빠져들었다. 차가운 물이 뜨거워진 가슴과 머리를 식혀주는 것 같아 확실히 기분이 좀 나았다.

"푸하-"

다시 물 밖으로 머리를 내민 타셀은 가만히 서서 산의 기운을 느꼈다.

환하게 비추는 달빛과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 소리, 찌륵찌륵 울어대는 벌레들의 소리는 그와 그의 부모, 이 나라의 사정과는 상관없이 늘 똑같은 모습일 것이다. 타셀은 저 혼자 아등바등 몸부림치는 것 같아 허탈해졌다.

그때였다. 누군가가 연못 쪽으로 다가오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타셀은 제 옷을 벗어둔 바위 근처까지 조용히 헤엄쳐갔다. 아군의 병사일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사실 지금에서야 누가 자신을 암살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았기에 그는 바위 뒤에 몸을 숨기고 기척을 죽였다.

"하아…. 하아…. 역시 연못이 있었구나."

타셀은 귀를 의심했다. 분명 여자의 목소리였다. 곧이어 풍덩- 하고 누군가 물에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연못에서 몸을 씻는 것 같았다.

'이런…. 몸을 숨기는 바람에 더 곤란하게 됐어.'

타셀에게 다른 의도가 없다 하더라도 갑자기 나체의 남자가 등장하면 상대방인 여성이 놀랄 것이다.

'얼른 씻고 자리를 뜨길 기다려야지, 별 수 없군.'

그렇게 생각하고 바위 곁에 몸을 숨겨 가만있으려니, 아까까지 시원했던 연못물이 점점 차갑게 느껴졌다.

차가워지는 나신으로 연못물에서 나가지도 못하고 숨어있는 제 꼴이 우스워질 무렵, 갑자기 여자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갔나…?'

타셀이 귀를 기울이다가 천천히 바위를 돌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연못물 아래에서부터 누군가 솟구쳐 올라 그의 목에 날카로운 쇠붙이를 갖다 대었다. 지독하게 단련된 그조차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순식간의 일이었다. 하지만 목에 겨눠졌던 날은 곧 거둬졌다.

"전하이신 줄 몰라뵈어 죄송합니다!"

고개를 내리자 거기에는 물에 젖은 얇은 셔츠 차림의 카시야가 당황한 얼굴로 서 있었다.

============================ 작품 후기 ============================

어제 선작이 70건이 넘어서 감사한 마음에 오늘 연참을 올립니다.

두 번째 회차는 오늘 저녁 6시쯤 올리겠습니다.

쇼에나, 성냥갑, 훗킼킼, 요우나, 아롱별자리, 너구리94, 꽁냥양, 코알라엄마님.

코멘트 정말 감사드립니다.

제가 코멘트 보는 낙으로 글써요. 헤헤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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