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3 그들의 사정(2) =========================
"…."
"…."
타셀은 이만큼 당황스러운 상황은 아마 머리털 나고 처음일 거라고 생각했다. 카시야가 알몸이 아닌 것은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자신은 여전히 알몸이었다. 서서히 하반신에서 냉기가 올라오고 있는 참이기도 했다.
하지만 어쩐지 카시야에게 들러붙어버린 시선은 좀처럼 떨어트릴 수가 없었다. 차마 알몸의 황자를 똑바로 바라볼 수 없어 고개를 모로 돌린 그녀의 목에 젖은 머리카락이 찰싹 달라붙어 물방울을 또르르 흘리고 있었고, 물기 어린 피부가 달빛에 반짝였다. 당황한 눈빛은 어지러이 흔들렸고 뭐라고 말을 꺼내야할지 몰라 꼭 다문 입술 안에서는 아마 욕설을 짓씹고 있는지도 모른다. 물에 젖어 몸에 달라붙은 얇은 셔츠 아래로 그녀의 굴곡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는데 넋이 나간 와중에도 차마 쇄골 아래로는 시선을 내리기가 민망했다.
"크흠…. 오해는 하지 말았으면 좋겠군. 내가 먼저 와 있었어."
"미처 알아뵙지 못해 죄송합니다."
"…아니, 솔직히 어떻게 알아챘는지가 더 궁금한데?"
"물 안에 있다 보니 느껴졌습니다."
"느껴졌다고? 나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고 기척을 죽이고 있었네만…. 자네, 정말…."
"불경한 말씀입니다만 가까이 오지 않으시는 게 서로 좋을 것 같습니다."
타셀이 저도 모르게 카시야에게 다가서자 카시야가 한 발 물러서며 황급히 저지했다. 그제야 타셀도 정신을 차렸다.
"아, 이런…. 일단 옷부터 입고 얘기 좀 하지."
그는 다시 바위 뒤로 돌아가 널어두었던 수건으로 몸을 닦고 옷을 입었다. 발이 살짝 저릴 정도로 차가워져 있었다. 몸을 닦고 있으려니 저쪽에서도 찰박 찰박 연못을 벗어나는 소리가 들렸다.
"옷 다 입었으면 이쪽으로 잠깐 와보겠나?"
혹시라도 그녀가 남에게 보이기 힘든 모습일까 봐 그쪽으로는 고개도 돌리지 못한 타셀이 목소리만 돋웠다.
그러자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그녀의 목소리에 이어 빨랫감을 짜는 소리가 들렸다. 한참 차르륵- 차르륵- 하며 물 떨어지는 소리가 나더니 곧 팡팡 터는 소리가 들린다.
한참 뒤 그가 있는 바위까지 걸어온 그녀의 셔츠는 여전히 젖은 채였다. 바지는 벗어뒀었는지 그나마 나았지만 젖은 몸을 제대로 닦지 않고 입은 탓에 점점 젖어 들어가고 있었다.
"수건도 없이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뛰어들었나?"
"운동을 했더니 더워서, 빨래도 한꺼번에 할 겸 그랬습니다."
"뭐?"
어이없다는 눈으로 카시야를 바라보던 타셀은 저가 썼던 수건을 건넸다.
"내가 닦았던 거긴 하지만 그래도 머리카락 정도는 좀 말리는 게 좋겠네."
젖은 그녀의 머리카락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져 도로 셔츠를 흥건히 적시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수건을 받아든 카시야는 흠뻑 젖은 머리카락을 꾹꾹 누르다가 탈탈 털어 물기를 말렸다. 푸르르 머리를 털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는 타셀의 청회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 까만 머리카락과 청회색 눈동자는 우아한 짐승을 떠올리게 했다.
카시야가 도로 건넨 수건을 받아든 타셀은 그녀를 다시 찬찬히 살피다가 뭔가 결심한 듯 입을 뗐다.
"카시야 경. 자네의 몸놀림은 아무리 생각해도 특별한 훈련을 받은 몸놀림이야. 자네가 생각하기에도 그렇지 않은가?"
"죄송합니다.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 건지, 숨기는 건지 이젠 상관없어. 방금 자네의 행동을 보고 자네를 믿기로 했네. 날 죽이러 온 암살자라면 아까 확실히 죽일 수 있었으니까 말야. 그리고 자네가 나의 사람이라면… 자네에게… 부탁을 좀 하고 싶은 게 있네."
"말씀하십시오."
하지만 타셀은 또 한참 망설였다. 그녀를 믿기로는 했지만, 과연 그녀가 해낼 수 있을지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제 시간이 별로 없었고, 그의 군대에 카시야보다 더 이 일에 적합해 보이는 자는 없을 것 같았다.
"카시야 경. 카리나 궁을 혹시 알고 있나?"
"들은 적 있습니다. 현재 황제 폐하께서 머물고 계신 궁이 아닙니까."
"맞아. 거기에서 누굴 좀 빼내왔으면 해."
"…엘레나 황비 마마 말씀이십니까."
"…어떻게 알았지?"
"타셀 전하께서 빼오고 싶으신 분이 황비 마마 말고 누가 있겠습니까. 모두가 알고 있는 사실 아닙니까."
"하…. 그래, 그렇지…."
타셀은 마치 오랫동안 그와 작전회의를 해온 기사를 보는 것 같았다. 타셀이 무엇을 생각하는지 한발 먼저 집어내어 귀찮은 설명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그녀가, 신기하면서도 믿음직스러웠다.
"자네가 생각하기엔, 어머님을 탈출시킬 수 있을 것 같은가?"
"거기까지 잠입하는 건 가능하겠지만, 모시고 돌아 나오는 게 문젭니다."
"그건 걱정 마. 잠입한 뒤 어머님과 둘만 남는 것까지만 가능하면 되네. 돌아오는 건 공간 이동 마법을 쓰면 돼."
역시 카시야의 생각처럼, 이 세계에서의 예외조건은 바로 마법이다. 이것만은 그녀가 예상할 수가 없다.
"혹시 그 외에도 마법으로 가능한 부분이 있습니까?"
"원래는 어머님이 계신 곳을 대충이라도 파악할 수 있었는데, 어머님을 가둔 방에 방해 마법이라도 걸어뒀는지 오래전부터 어머님의 기척을 느낄 수가 없네."
"그 방에서 공간 이동 마법은 쓸 수 있는 겁니까?"
"음. 방해 마법은 상대 마법과 동급이거나 고위 마법이어야 하는데, 내가 알기론 공간 이동 마법의 방해 마법을 걸만한 자가 카리나 궁에는 없네. 하지만 사람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 정도는 간단한 마법이라서, 그 정도는 쉽게 방해할 수 있지만 말이야."
카시야는 이 세계의 마법에 대해 언제 한 번 자세히 배워둬야겠다고 생각했다.
"한 가지만 더 여쭙겠습니다. 카리나 궁을 지키는 이는 아무나 다 죽여도 됩니까? 혹시 건들지 말아야 할 사람이 있습니까?"
그녀의 말은 또다시 놀라웠다. 그럼, 어떤 수준의 병사가 와도 다 죽일 수는 있다는 말인가.
"아무나 다 죽일 수 있다니…. 어디 믿는 구석이라도 있나?"
"저는 저 자신 말고는 아무도, 아무것도 믿지 않습니다."
"대단하군. 실제로 싸우는 걸 봐야 정확하게 알 수 있겠지만, 자네의 역량은 이미 여기사 수준이 아냐. 여하튼, 카리나 궁에 이미 내가 심어놓은 첩자가 있네. 하지만 그 역시 삼엄한 경비 때문에 어머님의 방까지 접근하지도 못하고 있지. 뭐, 그들을 빼면 내가 챙길 사람은 없네."
타셀의 얼굴에 진한 그리움과 비탄이 드리웠다.
달빛의 탓인지, 그의 얼굴이 지나치게 아름답게 느껴졌다. 엄청난 수의 제국군을 이끄는 제국 제일검이 아닌, 숲에서 산다는 전설의 엘프 같았다.
카시야는 아까 그의 맨몸을 본 충격이 오래 간다 생각하며 서둘러 제 머릿속에 떠오른 이상한 망상을 털어냈다. 그리고는 그녀가 전부터 생각해왔던 것을 조심스레 입에 담았다.
"전하께서 엘레나 황비 마마를 빼내 오실 생각을 하셨다면, 황제 폐하께 등을 돌릴 마음을 드신 것입니까."
타셀의 눈이 커졌다. 하지만 어금니를 꽉 깨문 그는 나직하게 속삭였다.
"경. 어디에나 눈과 귀가 있어. 그런 말은 함부로 입에 올리지 말게."
카시야는 그가 뭔가 계획하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긴, 자신이 타셀이었어도 저토록 적나라하게 악의를 드러내고 있는 황제를, 아비라는 이유만으로, 황제라는 이유만으로 참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탈출시키는 게 불가능하다면, 안전하신지만이라도 확인해줬으면 좋겠네."
"알겠습니다. 저도 준비가 필요하니 3일 뒤 출발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정말 괜찮은가?"
타셀은 그녀가 이렇게 쉽게 받아들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의아하게 쳐다보는 것은 카시야도 마찬가지였다.
"명령을 내리시니 따르는 것이 당연합니다."
"…자네의 목숨이 위험할 수도 있네."
"전시(戰時)에 위험하지 않은 목숨이 어디 있겠습니까."
타셀은 그녀가 정말로 신기했다. 그의 명령을 목숨처럼 받드는 기사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처럼 무심하게 제 목숨을 거는 이는 본 적이 없었다.
"자네는… 목숨이 아깝지 않은가?"
카시야는 그의 질문에 즉답할 수 없었다. 좀 생각해봐야할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죽었고, 죽음의 기억까지 온전히 지니고 있어서 지금의 삶이 마치 보너스처럼 느껴지기는 했다. 전생에서 워낙에 '죽는 게 나을' 삶을 살다보니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다시 살아난 지 겨우 한 두 달 만에 또 죽지는 않을 것 같다는 묘한 자신감도 있었고 말이다. 하지만 다시 죽게 된다고 해도 별 감정은 들지 않을 것 같았다.
'살고 싶다는 욕망은 어떤 걸까.'
물론 '캠프 X'에서 훈련을 받던 초기에는 살아야한다는 강한 의지 때문에 살아남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속적인 세뇌는 인간으로서의 감각을 갉아먹었다. 캠프 X에서 살아남고, 많은 작전에서 살아남았던 건 그녀의 생존본능 덕분이었지만 그 생존본능을 끌어올린 힘은 '살고 싶다'는 생각이 아닌, '임무를 완수해야한다'는 의무감이었다.
"저는 안개숲에서 이미 한 번 죽었습니다. 살려주신 것은 전하이시니, 그 목숨을 도로 취할 수 있는 분도 전하이십니다."
그녀는 오랜 생각 끝에, 그나마 먹힐 법한 대답을 입에 올렸다.
다행이 그녀의 생각은 적중했는지, 타셀은 순간 감격한 듯한 기색을 드러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곧 깊게 가라앉았다.
"나란 인간은 정말 많은 이에게 목숨을 빚지는군."
그것은 굳이 카시야에게 하는 말 같지는 않았다.
그는 저로 인한 죽음이 누적될수록 속이 바싹바싹 탔다. 가끔은 피 웅덩이에서 허우적대는 꿈을 꾸다가 온몸이 땀에 흠뻑 젖어서 깨기도 했다. 그의 괴로움 가득한 눈은, 아직은 공감에 미숙한 카시야조차 그의 괴로움을 느낄 수 있게 했다.
"아직 저는 죽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죽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타셀은 그녀의 말에 방금까지 위태로웠던 자신의 마음이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자네는 참으로 신기해.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마저 들어. 마치… 그래, 신이 보낸 사자인 것 같기도 하다니까."
그의 말은 어설프게나마 정답에 근접했다.
'감이 좋다고 해야 하나…?'
카시야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다시 그를 바라보았다. 그는 이 전쟁에서 유일하게 책임 없는 황족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는 자의든, 타의든 가까운 시일 내에 자신의 태도를 정해야 할 것이다.
"내일 오전, 막사로 찾아뵙겠습니다. 카리나 궁의 내부와 미리 심어놓으신 자들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래. 내일 보지."
그 말을 끝으로 타셀은 자리를 떴다. 카시야는 많은 짐을 진 그의 뒷모습을 보며 처음으로 누군가를 돕고 싶다는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