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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홍의 카르마-14화 (14/134)

00014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자(1) =========================

아침이 밝자 타셀이 보낸 종자가 카시야를 찾았다.

카시야는 또다시 불안한 눈빛을 하는 쿠론을 달랜 뒤 종자를 따라 타셀의 막사로 향했다.

막사 안에는 늘 타셀과 함께 하는 지크와 미하일 형제도 없었다.

테이블 위에 몇 개의 지도를 펼쳐놓은 타셀이 아무 말도 없이 고개를 끄덕여 카시야를 막사 안으로 들였을 뿐이다.

"카리나 궁까지 가려면 이 길이 최단거리이긴 하지만, 중간 중간 통행인을 확인하는 문이 있어 경의 신원이 카리나 궁에 먼저 알려질 위험이 있네. 그러니 조금 멀더라도 이쪽 산길을 통과하거나, 바닷가에 가까운 마을들을 통과하는 길이 안전해."

지도를 짚어가며 타셀이 설명했다.

하지만 카시야의 생각은 달랐다. 타셀에게는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카시야가 떠나면 타셀은 곧바로 주변 귀족들에 대한 포섭 작전에 나서야 한다. 자신이 엘레나의 신변을 확보하는 게 빠르면 빠를수록 타셀에게 유리해진다.

"시간이 부족합니다. 최단거리를 돌파하겠습니다. 절대 들키지 않을 테니 걱정 마십시오."

의심하는 자신의 앞에서도 처음부터 자신의 능력을 숨길 생각이 없었던 것 같은 이 여기사에게 타셀은 여전히 놀랍다는 인상을 받았다.

"경이 자신 있다니, 나도 경을 믿겠네. 혹시… 바라는 게 있다면 말해보게. 위험한 일에 경을 내모는 마음이 편칠 않으니."

"바라는 것이라면… 앞으로의 방향을 잡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타셀이 물었던 것은 물질적인 보상을 원하느냐는 말이었는데 카시야는 전혀 다르게 받아들였다.

"앞으로의 방향이라면…?"

"황제 폐하께 등을 돌린 이후의 방향 말씀입니다. 엘레나 황비 마마를 모시고 온 뒤 어떻게 하실 생각인지 듣고 싶습니다. 대단한 이유 때문은 아니고, 그걸 알면 제가 움직일 방향을 정하는 게 좀 더 편해질 것 같습니다."

"지금 경이 입에 담은 소리가 반역이라는 것은 알고 있나?"

"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이지 않습니까?"

타셀은 말문이 막혔다.

카시야의 말은 사실이다. 그가 엘레나 황비의 탈출을 도모한다는 것은 황제와 전쟁을 벌이겠다는 얘기나 다름없다. 그리고 그런 의도가 없다고도 말할 수 없다.

카시야의 말이 아니더라도 타셀은 이미 주변의 귀족을 포섭해나가는 중이었다. 물론 많은 중앙 귀족들은 황태자위에서 거리가 먼 그에게 관심이 없었지만, 변방에서 지속적인 전투에 허덕이면서도 중앙의 관심을 받지 못한 지방 귀족들은 타셀에게 기대에 찬 눈을 하고 손을 잡았다. 사실 이제 와서 황제에게 반기를 들지 않겠다고 한다면, 지방 귀족들마저 타셀을 죽이려들지 모를 일이었다.

마음은 이미 먹고 있던 일이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기억나는 게 없다던 여기사가 당당히 반역을 입에 올리자 타셀은 순간 조심스러워지면서도 아랫배에서부터 뜨겁게 투지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후…. 자네는 정말 여러모로 날 놀라게 하는군. 우리는 변방의 귀족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네. 아마 아바마마와 형님의 연합 세력이 우리를 치려들 확률이 높아. 우리로서는 수적으로 불리한 상황이지만, 내 휘하의 기사들을 믿고 있네. 그러니 부디 자네도 무사히 돌아와 나를 도와주길 바라네."

"알겠습니다. 그럼, 카리나 궁에 있는 우리 측 첩자에 대해서 알려주십시오."

카시야는 또다시 무심하게 작전에 집중했다.

타셀은 처음으로 암살을 당할뻔했던 열두 살 때,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동원해 '섀도 워커'라는 집단을 만들었다. 아직 변성기도 오지 않은 어린 아이였지만, 죽음을 간발의 차로 피했던 경험은 어린 아이에게서 유년기를 빼앗아가 버렸다.

엘레나 황비의 기사에서부터 시작한 섀도 워커는 타셀의 성장과 발맞춰 점점 커나갔다. 믿을 수 있는 자를 선별하기가 어려웠지만, 타셀에게 자신이나 제 가족의 목숨이 구해진 자들이 가담하면서 세력은 점점 넓어져, 지금은 이 제국의 곳곳에서 그의 눈과 귀가 되어주고 있었다.

"어머님의 처소를 지키고 있는 병사 중 한 명, 황제 폐하의 시녀 중 두 명, 근위대에 두 명이 섀도 워커의 일원이네. 어머님의 처소를 지키는 병사가 지속적으로 때를 기다리며 어머님을 탈출시키려고 하지만 쉽지가 않아. 방을 드나드는 이는 폐하의 최측근 시녀 1명으로, 드나들 때도 황제 휘하의 근위대의 호위를 받아 다른 병사들은 다가갈 수도 없다더군. 그야말로 어머님의 눈과 귀와 입을 빼앗아버린 거나 다름없지."

"그들에게 제가 간다는 정보를 비밀리에 전해주실 수 있으십니까? 혹시라도 도움을 받아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르니까요."

"음. 그건 걱정 말게."

"그럼 출발하기 전까지 몇 가지 무기를 챙기고 싶습니다만…."

"원하는 무기를 말하게. 지크에게 말해 확보해둘 테니."

하지만 타셀은 자신이 원하는 무기를 차분하게 설명하는 카시야의 말을 듣고 점점 그녀가 암살자가 맞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단검, 짧은 단도, 표창, 로프, 독, 강철 스트링…. 자넨 정말 숨길 생각도 없는 것이군. 어린 시절부터 평범하게 커왔다는 쿠론 경의 말도 이젠 믿지 못하겠어."

"쿠론은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도, 저도 왜 이렇게 된 것인지는 모릅니다. 제가 드릴 수 있는 약속은, 절대 배신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쿡쿡. 이미 말했지 않은가. 숨기는 것이라도 상관없다고. 긴장하지 말게. 그럼 이것들은 내일 저녁까지 준비하도록 하지. 그 외에도 필요한 것이 있으면 지크에게 얘기하게."

타셀에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하고 돌아 나온 카시야는 부대로 돌아가 쿠론에게 당분간 자신이 후방 보급로 지원을 나가게 됐다고 얘기했다. 또 한참을 달래야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오히려 그는 반가운 표정을 지었다.

"다행이다. 보급 쪽이 안전하니까 말야. 그래도 몸조심해."

그의 끝모를 애정에 카시야는 할 말을 잃었다.

'가족 간의 정이라는 게 이런 건가? 하지만 내가 봐온 모든 가족이 그러지는 않았는데…. 아니면 이 세계는 뭐가 다른 걸까?'

쿠론과 예전의 카시야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지만 쿠론의 태도에 그녀를 이성으로 생각하는 듯한 끈적임이 없는 것으로 봐서는 정말로 가족 간의 정을 나눴던 것 같았다. 하지만 가족도, 친구도 없었던 카시야로서는 피를 나누지도 않은 이에게 어떻게 저런 깊은 애정을 보일 수가 있는지 납득하기가 어려웠다. 그를 될수 있는 한 지켜주자고 마음은 먹었지만, 그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만큼의 애정은 그에게 돌려줄 수 없었다. 애초에 그녀는 그런 감정 자체를 생산해본 적이 없었으니까.

쿠론에게 얘기를 한 이후 그녀는 다시 간호막사로 찾아가 루나엔을 만났다.

오랜만에 만나는 듯한 루나엔은 여전히 피곤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지만, 카시야가 일부러 그녀를 찾아왔다는 것에 대해 감동한 눈치였다.

"후방으로 가게 됐다니 다행이에요. 하지만 기사님인 이상 몸이 상할 일을 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러니까 이거 챙겨가세요."

루나엔이 건네준 것은 말린 약초 주머니였다. 전에 카시야가 병상에 누워있을 때, 매일 루나엔이 물과 섞어 빻은 뒤 거즈에 묻혀 붙여주던 약초였는데, 시원한 느낌이 들면서 상처 부위의 열을 내려주고 소독을 해주어 이 세계에서 가장 광범위하게 쓰이는 약초 같았다. 아마 루나엔이 제 위치에서 얻을 수 있는 약이라곤 그게 최고였을 것이다. 쿠론에 이어 루나엔에게도 걱정과 염려의 인사를 받게 된 카시야는 굉장히 묘한 느낌이 들었다. 무력으로 따지자면 카시야가 그들을 염려해 마땅한데, 지금 상황에서는 오히려 그들의 염려 덕에 자신이 무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장 안쪽이 간질간질한 것 같았다.

카시야의 출발 준비는 순조로웠다.

카시야가 카리나 궁으로 향하게 된 사정을 전해들은 지크는 놀란 눈을 했지만, 그래도 별 말없이 무기고에서 최고의 무기들을 꺼내 챙겨주었다. 하지만 다혈질인 미하일은 금방 흥분해서는, 밤마다 카시야가 체력단련을 하는 뒷산의 공터에 찾아와 한참 떠들었다.

"그래, 자신 있어? 대장님은 너를 거의 마지막 카드로 보시는 것 같던데…."

"성공하기위해 노력은 하겠습니다."

"이봐. 이틀밖에는 안 남았지만, 내가 검술 좀 봐주지."

미하일은 그녀와 대련을 하며 장검술을 살펴봐주었다.

지크와 미하일 형제는 체구가 장대하지는 않았지만 근육으로 차 있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지독하게 몸을 만들어, 휘두르는 칼에 실린 힘이 어마어마했다. 전생의 카시야라 하더라도 그런 무지막지한 힘에는 정면으로 맞서기가 힘들었다.

지크는 자신의 약점을 알려주는 것이면서도 주춤거리는 기색 없이 힘이 센 남성과 대적할 때 어떻게 피하고 맞서야할지 세세히 가르쳐주었다.

장검술은 긴 검을 잡아본지 오래지 않은 카시야보다 미하일이 월등했지만 단검술에 대해서는 카시야가 한 수 위였다. 미하일은 진심으로 놀라워했다.

"몸집이 작고 가벼운 여성이 휘두르기에는, 확실히 단검이 유리할 수 있지. 하지만 근접해야하는 게 위험한데, 경이 움직이는 속도는 가히 최고 수준이야. 정말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미하일 역시 그녀가 어떻게 갑자기 이런 경지에 다다랐는지 궁금해 하는 것 같았지만, 카시야에게 물어봐도 돌아올 대답이 빤하니 묻지는 않았다.

출발하기 전날 밤에는 자정까지 대련을 마친 미하일이 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로 카시야에 부탁해왔다.

"진심으로 네가 성공하길 빌어. 이 썩어빠진 나라를 구할 수 있는 건 타셀 전하뿐이다. 그리고 그걸 떠나서 나는, 그 분이 괴롭힘 당하는 꼴은 이제 그만 보고 싶다."

그래서 타셀이 어떤 괴롭힘을 당했기에 그러냐고 물었더니 미하일은 씩씩대면서 그의 과거를 줄줄이 읊었다. 다 듣고 나자 타셀의 괴로운 입장이 좀 더 확실히 인식되었다.

'거의 성인군자 수준인데? 어떻게 다 죽여 버리지 않을 수가 있지?'

하지만 순간, 전생의 그녀도 엄청난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캠프 X의 교관이나 그녀의 목줄을 붙들고 있던 주인을 죽이지 않았던 게 떠올랐다.

'학습된 복종인가….'

그녀는 씁쓸하게 웃었다.

만약 타셀이 그의 목줄을 끊고 반란에 성공한다면, 자신도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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