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5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자(2) =========================
카시야가 떠나는 날 아침이 밝았다.
그녀는 후방 보급로에서 근무하던 병사들과 교대하는 조에 편입된 채 황궁과 현재 제국군 주둔지의 중간 지방까지 갔다가, 거기서 조용히 사라질 계획이었다.
그녀가 챙겨갈 무기도 다른 병사들의 무기와 함께 마차에 실렸고 모두 같은 차림을 하고 있어 누가 누군지 금방 알아보기 힘들었다.
카시야는 지도에서 카리나 궁까지의 길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자금과 비상식량도 꼼꼼히 챙긴 뒤 로브를 뒤집어 썼다.
'이번에 가면 또 신나게 죽여댈텐데…. 죽어서 또 고통스러울까?'
그 부분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어차피 전쟁터의 기사로 환생시킨 것은 신이니 반쯤은 제 책임이 아니라 믿으며 카시야는 이 세계의 역사의 흐름에 몸을 맡기기로 했다.
교대되는 후방지원군으로 뽑힌 병사는 한 부대 인원 정도로, 대부분 부상을 입어 병력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 자나 많이 지친 여기사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카시야도 죽을만큼 큰 부상을 입었었으니 후방지원군으로 뽑히는 데 서류상의 문제는 없었다.
타셀을 대신한 지크의 격려사를 듣고 주섬주섬 짐을 챙겨 출발한 그들은 그나마 안전한 후방으로 빠진다는 데 대한 기쁨으로 표정이 밝았다. 그 중 카시야만이 언제나와 같은 무표정일 뿐이었다.
"전 이번에 뽑히지 않으면 어쩌나하고 며칠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저도 마찬가지예요. 안 그래도 너무 힘들어서 피부가 엄청 상했는데 잠까지 못자서 꼴이 말이 아니예요."
"경. 경은 여기에 어떻게 뽑히신 거예요? 너무 멀쩡해보이시는데요?"
저들끼리 이 후방지원군에 뽑히기 위해 얼마나 애썼는지 떠들어대던 여기사 무리 중 하나가 카시야를 흘끔거리다가 용기를 내어 물었다. '너무 멀쩡해보인다'는 말 안에는 '너한테는 어떤 뒷배가 있느냐'는 말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카시야는 신경쓰지 않았다.
"안개숲 작전에 나갔다가 가까스로 생환했습니다."
'안개숲 작전'이라는 말에 모두 입을 다물었다.
주변에서 "그럼 저 사람이 그 유명한 안개숲 생환자야?"라는 속삭임이 언뜻 들렸다.
"실례지만, 진짜예요? 안개숲 생환자는 거의 죽다 살아났을 정도로 상처가 심했다던데…."
"외상은 거의 다 아물었습니다만, 내상이 심해서."
"아…."
내상이 심하다는 말에 다들 고개를 주억거렸다. 안개숲에서 에르논의 공격을 받은 자들은 죄다 내장이 터졌다더라, 하는 소문은 다들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이내 카시야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들었고 카시야도 더이상 자신에 대한 말을 꺼내지 않았다. 교대조는 후방에 넓게 퍼져 배치될테니 이들과 다시 만날 일이야 없겠지만, 지나치게 눈에 띄어서 좋을 것은 없었다. 그저 나중에 카시야가 후방지원군이었다는 것을 증언을 해줄 정도로만 기억되면 족했다.
제국군에게 수복된 지역을 지나가고 있으려니 호의를 갖고 다가오는 지역 주민들이 간간히 있었다.
반란군이 점령했을 때에는 군부대의 물자를 비축하느라 민가에 약탈을 일삼았는데, 타셀의 제국군이 수복한 뒤로는 망가진 밭을 회복시키고 무너진 민가와 목책을 다시 갖춰주며 일시적으로 세금을 감면해주었기 때문이다.
작고 벌레먹었지만 그들에게는 소중한 양식일 과일을 자루에 가득 담아 후방지원군 인솔대장에게 전해주고 가곤 했다.
'타셀은 귀족보단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군.'
하지만 전생처럼 민주주의 사회가 아닌 이 세계에서 백성에게 인기가 많아봤자 정권을 쥐는 데는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알테리온은 초대 황제이긴 했지만 그 이전부터 존재해왔던 칼리스토니아 왕국의 왕이라는 지위를 갖고 있었으니, 카시야가 알고 있는 중세 유럽 사회처럼 태생과 핏줄이 아주 중요한 것 같았다.
'뭐, 뒤집어 엎으면 그만이지만.'
카시야는 타셀의 태생적 한계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지나는 지역을 잘 살폈다.
그녀가 눈 뜬 이 세계는 그녀가 아는 중세 유럽의 모습과 비슷하면서도 또 달랐다. 다행인것은 전쟁이 일어나고 있는 중인데도 사람들에게서 생동감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많은 전쟁 지역을 다녔기 때문에 죽음이 이미 드리운 사람들을 잘 알았다. 살아있으면서도 내일에 대한 희망 없이 암울하게 하루 하루 그저 숨쉬고 있을 뿐인 사람들 말이다. 그런 지역은 전쟁이 끝나고서도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
'타셀이 사라진다면, 이 지역 사람들도 곧 현 황제나 제 1황자의 폭정에 금방 지쳐가겠지….'
그게 타셀이 황제나 왕이 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칠지 곰곰히 생각하다보니 어느새 그녀가 사라져야 할 테르미안 지방에 도착했다.
후방지원군은 여기서 3개의 그룹으로 나뉘어 각 보급로로 흩어지게 되어 있었다. 그러니 여기에서 사라지는 게 가장 안전했다. 각 보급로에서 나온 인계담당자들에게 전해진 병사의 목록에는 그 어디에도 카시야의 이름은 없었다. 그녀와 함께 3일간을 걸어왔던 이들은 카시야가 어디로 가게 되는지 관심도 없을테니 상관없었다. 카시야는 병사들의 인수·인계로 번잡해진 틈을 타 조용히 그림자 속으로 몸을 숨겼다.
테르미안은 황성의 남서쪽에 있는 지역으로, 북서쪽으로는 탈레란 산맥이 끝나고 동남쪽으로는 에르탈레란 산맥이 시작되어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병목형태의 지역이었고, 양쪽의 산맥 사이에 장벽을 세워 그 사이를 드나드는 사람들은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철저히 신원을 확인했다.
군사적인 요충지인 테르미안이 제국군 진영이라는 것은 꽤나 다행이었지만 타셀이 제 3세력이 되기로 마음먹은 이 시점에서야 카시야에게 중요한 사항은 아니었다.
그녀는 옷을 갈아입고 미리 약속된 시간까지 기다렸다.
후방지원군의 인계가 다 끝나고 인적이 사라진 막사에는 카시야의 무기와 짐이 놓여있었다. 막사를 지키고 있던 병사에게 타셀이 준 패를 보이자 각잡힌 태도로 정중히 그녀의 짐을 건네주었다.
카시야는 제 몸에 단단히 두른 띠에 작은 무기들을 하나 하나 숨기고 해가 떨어지는 것을 확인한 뒤 곧 막사를 떠났다.
테르미안 관문은 밤이 되어도 활활 타오르는 횃불로 꽤나 밝았다.
관문을 바로 통과하는 것은 곧 그녀가 두른 무기들을 다 확인당한다는 말과 동일했다. 그녀는 당연히 산맥의 끝자락을 타기로 했다. 물론 그 근처에도 관문을 지키는 병사들이 순찰을 돌겠지만 지금은 전시라 병사가 많이 차출된 관계로 잘만 피해다니면 사람을 죽이지 않고도 관문을 통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되도록 죽이지 않는 방향으로 가고 싶긴 한데 말이지….'
울창한 숲의 커다란 나무를 타고 올라 내려다보니 생각보다 순찰병이 많았다.
사실 멋대로 죽이면서 돌파한다면 순식간에 뚫고 지나갈 수 있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러면 일도 너무 커지는데다 그녀의 어깨에 쌓이는 업보가 계속 늘어날 것이다. 순찰병들은 자신들의 임무를 열심히 수행하는 선량한 사람들이니까.
'쯧. 아깝긴 하지만 무엇보다 시간이 촉박하니 별 수 없군.'
그녀는 어깨에 맨 작은 가방에서 조그만 폭탄 하나를 꺼내 자신이 지나온 쪽으로 던졌다.
콰과과광-!!!!!!!
폭탄은 그녀가 주문한대로 크기는 작으면서 소리와 불빛은 화려해 순찰병들의 시선을 한 번에 잡아끌었다. 사실 폭탄이라기보단 폭죽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녀가 폭죽을 연상하며 주문을 했으니까.
다행이 깜짝 놀란 순찰병들이 소리가 난 근처로 빠르게 사라져갔다.
카시야는 전속력으로 달려 관문 성벽의 건너편 근처까지 닿았다. 하지만 폭탄의 영향은 거기까지 닿지는 않은데다 수상쩍은 움직임이 있다는 보고로 인해 관문 경비병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이제부터는 무력 행사를 좀 해야할 것 같네.'
최대한 소리를 죽여 산 비탈길 근처로 다가가보니 비탈길 아래쪽에 병사 두 명이 왔다 갔다하며 보초를 서고 있었다. 카시야는 제 손에 감긴 붕대를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피고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다가 그들이 서로 멀어진 순간 비탈길을 미끌어져 내려갔다.
비탈길 근처에 있던 병사가 "어!"하며 그녀의 존재를 알아챈 순간, 그는 명치쪽에 강한 충격을 느끼고 고꾸라졌다가 목을 내리친 손날에 정신을 잃었다.
"어이! 무슨 일이야? 무, 무섭게 그러지 마!"
멀어졌던 병사가 이상을 느끼고 머뭇거리며 다가왔다. 병사라고 해봤자 아직 얼굴에 홍조도 가시지 않은 열 일곱 정도의 소년들이니 무섭기도 할 터였다.
카시야는 쓰러진 병사를 부축해 얌전히 바닥에 눕히고는 다가오는 병사에게 달려가며 다리를 걸어 넘어뜨리고는 목을 졸라 기절시켰다.
'흐음. 여기까지는 괜찮은데, 이제 이 녀석들이 깨기전에 여길 완전히 벗어나야해.'
그녀는 맞은편에 있던 큰 나무의 기둥 뒤로 숨어 다시 그 근처로 다가오는 병사들을 하나, 둘 기절시켰다.
사람을 죽이지 않고 움직이려니 아무래도 불편해서 골반 근처에 달린 단검 쪽으로 자꾸 손이 가려고 했지만 그녀는 자신이 저지른 살인의 기억으로 고통받던 죽은 후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참았다. 욕설을 낮게 짓씹긴 했지만.
다시 빠르게 어둠속을 달려 테르미안 관문 맞은편의 마을에 닿자 그녀는 다시 태연하게 그 지역을 지나는 평범한 기사를 연기했다.
그런 식으로 거의 쉬지도 않고 일주일간 관문 두 개를 더 지나 황성 바로 앞의, 크고 번성한 도시 피엔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녀가 테르미안 관문을 지나며 벌인 소동으로 그 다음 관문들의 경비가 더 삼엄해질 줄 알았는데 예상외로 평범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 몰래 관문을 지나는 사람이 꽤 많거나, 관문 사이를 오가는 전령이 없는 것 같았다.
일주일간 제대로 쉬지 못하니 아직 단련이 덜 된 육체가 꽤나 피곤해져서, 그녀는 피엔에서 하룻밤 정도 쉬기로 했다.
도로는 어설프게나마 포장이 되어 있었고 말과 마차, 수레와 행인이 뒤엉켜 번잡했다. 변두리의 눈에 띄지 않는 여관에 묵을까 하다가 황성의 소문을 좀 더 수집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어 꽤 번듯한 여관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어서오세요, 기사님! 식사를 하시나요, 묵을 방을 찾으시나요?"
"하루 쉬어갔으면 합니다. 물론 식사도 할 거고요."
"아유, 잘 오셨어요. 방부터 안내해드리죠. 이쪽으로 오세요."
여관의 안주인으로 보이는 중년의 여인은 2층으로 카시야를 안내했다.
복도를 따라 방문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고 화장실과 목욕탕이 바깥에 있어 여관에 묵는 이들이 수시로 들락거렸다. 안주인은 복도 끄트머리 쪽의 방문을 열고 카시야에게 보였다.
"이 가격에 이만한 방 얻기 쉽지 않아요. 마침 딱 하나 남았네요."
"얼마죠?"
"하룻밤에 2실버고요, 식사는 아래 식당에서 하시면 되는데 메뉴별로 가격이 달라요."
생글생글 웃으며 말하는 여인이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그녀도 아직 이 세계의 물가나 화폐개념에 익숙하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사치를 할만큼 넉넉한 건 아니었으니 시험삼아 흥정을 해보았다.
"2실버는 좀 비싼 것 같은데 1실버 50코퍼만 하시죠."
"네? 그… 건 좀 곤란해요."
"흐음. 그럼 다른 곳을 알아봐야겠군요."
"어머, 어머, 기사님. 호호호. 괜히 고생하지 마시고…. 1실버 80코퍼면 어떠실까요옹?"
"1실버 60코퍼."
"아… 아휴…. 1실버 75코퍼! 이 이하로는 정말로 어려워요."
"으음... 그럼 식사는 다른 곳에서 해야겠군...."
"아니, 이 기사님이 정말…. 좋아요. 우리 여관에서 식사를 다 하시는 조건으로 1실버 70코퍼에 해드릴게요." 그제서야 카시야는 살짝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주인은 혀를 내두르며 1층으로 내려갔다.
방에는 1인용 침대, 탁자와 의자, 소지품을 정리해놓을 수 있는 선반 하나가 놓여 있었고 창문도 달려 있어 나쁘지는 않았다. 사실 전장의 막사보다야 훨씬 나은 잠자리다. 특히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는 자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기습을 대비해 동굴벽이나 나무기둥에 기대 자거나 나뭇가지 위에 로브를 해먹처럼 연결해 잤기 때문에 솔직히 침대의 매트리스가 반가웠다.
'일단 좀 씻고 식사를 하면서 귀동냥이나 해볼까.'
카시야는 수건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바깥의 목욕탕으로 향했다.
============================ 작품 후기 ============================
쇼에나 님, 후쿠 감사합니다.
글 열심히 쓸게용~!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