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016 그림자를 밟고 다니는 자(3) =========================
목욕탕은 남, 여로 분리되어 있고 욕장 가운데의 큰 욕탕은 둘로 나뉘어져 한 쪽에는 몸을 담글 수 있었고, 나머지 한 쪽의 물은 바가지로 떠서 몸에 끼얹는 용도였다.
"생각보다 꽤 괜찮군."
카시야는 짐에서 꺼내온 비누에서 거품을 내어 꼬질꼬질해진 머리를 감고, 흘러내리는 거품으로 열심히 몸을 문질러 씻고는 욕조에 몸을 담갔다. 몸을 담글 수 있는 탕이 크지는 않았지만 목욕탕을 이용하는 여성이 없어 카시야는 전세 낸 듯 편안하게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수 있었다. 주둔지였던 키렐 지방은 그렇지 않았지만, 이곳은 온천이 나오는 지역이라 욕탕에 뜨거운 물이 나왔다. 거기에 찬물이 섞여 들어가며 적당한 온도의 탕이 되는 구조였다.
카시야는 탕에 몸을 담그고 자신의 몸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사실 죽음에서 눈을 뜬 이후 자신의 새로운 몸을 제대로 관찰할 기회가 없었는데, 지금 자세히 보니 스물두 살의 육체는 확실히 생기와 활력이 넘쳤다. 물론 아직은 죽기 전의 카시야 델 로만의 육체를 따라가기엔 무리였지만, 부지런히 몸을 괴롭힌 결과 그저 미끈미끈하기만 하던 몸 곳곳에 단단한 근육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안개숲에서 다쳤던 곳도 신성 치료사의 덕분인지 자잘한 상처들은 흉터 하나 남아있지 않았다. 전사로서의 육체가 아닌, 여체로서의 매력을 따진다고 해도 나쁘지 않았다. 근육이 없고 훨씬 말랑말랑했던 애초의 육체가 여성으로서는 더 어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카시야는 어차피 자신이 여성성을 내세울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전생에서도 여성으로서의 삶은 누려본 적도, 꿈꿔본 적도 없었으니까.
젊은 육체의 회복능력에 감탄하던 그녀는 이내 뜨거운 온천수에 풀어지는 근육을 하나하나 느끼며 다시 한 번 엘레나 황비 구출 작전에 대해 되짚어보았다.
이 작전의 가장 어려운 부분은 엘레나 황비의 방에 잠입해 그녀와 둘만 남는 것이었다. 환생 이전의 세계였다면 단련되지도 않은 그녀를 데리고 나오는 것이 가장 어려웠을 테지만, 이곳은 마법이 존재하는 세계. 돌아 나오는 것을 염려하는 카시야에게 타셀은 호두알 크기의 둥그런 황금구를 건넸다.
"어머님과 둘만 남게 되면 최대한 몸을 가까이 붙이고 그 사이에 이것을 바닥에 내려쳐 깨트려라. 그러면 내가 있는 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 거다."
이미 전생의 상식을 버린 카시야는 되묻지도 않고 그 사실을 믿기로 했다.
하지만 안개숲 작전 때 마법사들이 순식간에 사라진 일을 떠올리고는 그들도 이것으로 빠져나간 게 아니냐고 묻자 타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 마법을 시전할 수 있는 마법사는 몇 되지 않아. 에르논이나 그와 함께 왔던 마법사들은 불가능한 마법이다. 그리고 이 마법을 이런 식으로 아티펙트에 가둘 수 있는 자는, 내가 알기로는 단 한 명밖에 없지. 그가 그들에게 도움을 줬을 리는 없어."
그는 그 마법사가 누군지는 말하지 않았고 카시야 역시 당장은 알 필요가 없다 생각했지만, 앞으로도 계속 타셀을 돕게 된다면 이 세계의 마법사들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이 세계에서 마법이라는 것은 카시야에게는 중요한 변수였다. 몸과 물리적인 무기로 맞붙는 것은 대충 예상이 가능한 전투지만, 마법이 끼어들면 그녀로서도 전투가 어떻게 흘러갈지 예상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었다.
카시야는 근육의 피로가 적당히 풀린 듯하자 욕조에서 빠져나와 몸을 닦았다. 딱 맞춰 배에서 꾸르륵거리는 소리가 나며 허기가 졌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는 그 나름의 멋이 있었다.
전생에서 보던 화려한 조명의 도시보다는 어둡지만, 노란 불빛이 밝히고 있는 자그마한 건물들이 모여 있는 작은 도시는 훨씬 낭만적이고 친근하게 느껴졌다.
머물고 있는 여관 1층 구석의 식탁을 잡고 앉아 여관의 별미라는 닭고기 요리와 야채수프를 시키고 기다리는데 저쪽 구석에 몰려있는 남자들이 술에 취해 어깨동무를 한 채 저들만이 알고 있는 노래를 불러댔다. 그게 시끄럽다기보다는 흥겨워서 카시야도 듣기에 나쁘지 않았다. 식당에 남자들만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다들 평민인지 옷들은 고급스럽지 않았고, 타인과 거리를 두거나 로브로 얼굴을 가린 사람이 없었다. 사람 사는 곳이 다 그렇듯 서로 얽히고설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다들… 살아 있구나.'
카시야는 그런 평범한 모습을 보며 '살아있는 사람'의 기운을 느꼈다.
여주인이 가지고 나온 닭고기 요리는 훌륭했다. 닭다리 한쪽과 가슴살 한 덩이에 특제 소스를 발라 바삭하게 구워낸 뒤 샐러드 야채 조금과 소금을 곁들여 나온 요리였다. 기름기가 쪽 빠진 바삭하고도 촉촉한 닭고기와 묽은 야채수프를 같이 먹으니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그러고 보니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먹어본 것도 상당히 오래된 것 같군.'
역시나 전생을 포함해 따지게 되는 카시야였다.
천천히 음식을 먹으며 귀를 열었다. 노래를 불러대던 남자들이 다시 왁자지껄하게 저들끼리의 얘기를 떠들었고, 몇몇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도 식사를 하며 대화에 열중하고 있었다.
웅성웅성.
"요즘에는 황성으로 들어가는 물건이 많다는데 도대체 뭐하느라 그렇게 물건들을 사들이는지 모르겠어. 뭐, 우리야 돈을 버니까 좋긴 한데, 시국이 이러니 뭔가 좀 불안하달까."
"설마 무슨 일이야 있겠어요? 황제 폐하가 카리나 궁에 옮겨가 계시니 거기서 쓸 물건들이 부족한가부죠."
웅성웅성.
"제기랄. 여기서 떠나고 싶지가 않다니까! 토부 만에는 먹을 것도, 입을 것도 부족한데 여기는 이렇게 풍족한 거 보면 부아가 치밀기도 하고."
"네 놈한테는 안 된 얘기지만 모레면 배 수리가 끝난댄다. 우리 같은 놈들이 별 수 있냐? 선장이 가자고 하면 가는 거지."
웅성웅성.
"황제한테는 전설의 검이 있어서, 그게 있는 한 절대 패하지 않는다는 거야. 그러니까 이번에도 황성 근처에만 있으면 걱정 없다니까."
"전설의 검 같은 소리 하네. 아, 그러면 왜 아직까지 이 망할 놈의 전쟁을 하고 있는 거냔 말야!"
사람들이 제멋대로 지껄이는 모든 얘기들이 카시야의 귀로 흘러들었다.
그녀는 민간의 소문이 얼마나 중요한 정보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지금도 '황제가 갖고 있는 전설의 검'이라는 정보를 주워들었으니까 말이다. 저잣거리의 소문이 사실일 확률은 반반, 그리고 그게 제대로 된 얘기일 확률도 반반이다.
'하지만 황제가 이 전쟁에서 절대로 패하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면, 그리고 그게 그가 갖고 있는 무언가 때문이라면 지금 황제가 벌이는 이 이상한 행태도 조금은 이해가 가지….'
그가 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무언가를 갖고 있다면 왜 이 전쟁을 아직까지 끌고 있는가가 의문이지만 말이다.
'그걸 사용하지 못할 사정이 있다든가, 타셀이 이 전쟁에서 죽어줘야 할 이유가 있을 수도 있지. 전설의 검 얘기가 아주 헛소리일 수도 있지만 말야.'
저녁식사를 마친 카시야는 방에 올라가 오랜만에 편한 잠을 누렸다. 편하게 잔다고 해도 몸에 배인 암살자로서의 긴장감은 제 근처에 사람의 기척이 나거나 핀이 떨어지는 소리만 나도 번쩍 눈을 뜨이게 했지만 말이다.
다음날 아침, 카시야는 1층에서 작은 빵과 차로 아침식사를 하고 여관 밖으로 나와 도시를 거닐어보았다. 큰 거리에는 음식점과 옷집, 철물점과 대장간, 식육점과 빵집, 채소상과 과일상 등 사람들이 살아나가는 데 필요한 상점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전생에서도 중동 교전지역이나 제 3세계쯤 되면 보기 힘들 정도의 번화한 거리였다. 사람들은 부지런하게 제 가게 앞을 쓸고 매대에 물건들을 진열해놓는 중이었다. 어디선가 갓 구운 빵의 고소한 냄새가 흘러나왔고 거리에는 수레와 사람들의 통행이 많아지고 있었다.
"비켜라! 에톨렌 백작가다! 모두 비켜!"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마부의 고함 소리에 거리의 사람들이 재빨리 길 한가운데를 비켜주자 곧 금박 장식이 된 검정색 마차가 도로를 빠르게 질러 성문 쪽으로 사라졌다.
카시야는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근처 과일가게에서 사과를 한 알 사서 와삭 깨물었다. 크기는 주먹보다 작았지만 단 음식이 적은 이 세계에서는 참으로 훌륭한 맛이었다.
카시야는 오늘 저녁나절까지 이 도시를 계속 맴돌아볼 생각이었다. 물론 눈과 귀를 열어두고 말이다.
일반 백성들이 살고 있는 골목 안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그녀가 전생에서도 가본 적 있는 남미 어느 나라의 뒷골목과 흡사한 광경이 펼쳐졌다. 건물들 사이에 걸쳐져있는 빨랫줄과 거기에 빨래를 너는 아낙들, 서로 어울려 뛰노는 아이들과 집 앞에 내다놓은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아이들 노는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는 노인들.
'사람 사는 데는 다 마찬가지네.'
이세계(異世界)에서까지 똑같은 광경을 보고 있노라니 그런 생각이 안 들래야 안 들 수가 없었다.
일반 민가들이 있는 구역을 지나 더 안쪽으로 들어가니 빈민가가 형성되어 있었다. 건물들이 점점 허름하고 작아지더니 어디선가 이상한 냄새도 나는 것 같았고 무엇보다 사람들의 얼굴이 눈에 띄게 무표정해졌다. 그들보다는 좋은 옷을 입고 있는 카시야에게 의심과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기도 했다.
그때, 그녀가 골목에 들어설 때부터 눈이 마주친, 아직 소년티를 벗지 못한 비쩍 마른 남자가 그녀에게 집요한 눈길을 보내는 게 느껴졌다. 카시야는 모른척하고 점점 빈민가의 안쪽으로 파고 들었다. 역시나 그 시선은 그녀를 계속 쫓아왔다.
'단순 강도일까, 뭔가를 노리는 자일까.'
카시야는 어느 골목길에 들어서자 곧바로 그 근처의 건물 벽을 타고 올라 건물에 튀어나온 차양 옆으로 몸을 숨겼다. 아니나 다를까, 아까의 그 비쩍 마른 남자가 골목으로 따라 들어왔다가 갑자기 사라진 카시야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다. 그 외의 다른 사람의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가 차양 근처를 지나며 두리번거리던 순간 그의 바로 뒤쪽으로 뛰어내린 카시야가 그의 목을 팔로 조이며 짧은 단도를 목줄기에 겨눴다.
"아까부터 나한테 볼 일이 있는 것 같던데…. 무슨 일이지?"
자신의 목에 바짝 붙어있는 날카로운 쇠붙이의 감각에 그는 옴짝달싹하지 못하고 '어… 어…'하는 신음 비슷한 소리만 낼 뿐이었다. 막상 곁에 붙어보니 생각보다도 더 말라있었다. 이 몸에 힘을 써봤자겠다 싶었던 카시야는 칼날을 살짝 떼면서 다시 물었다.
"대답하지 않으면 죽인다. 나한테 무슨 볼 일이냐고 물었어."
"어… 어… 투… 툴라가 데… 데려오라고…."
"툴라? 그게 누구지?"
"바, 밤의… 지배자…."
"알 수 없는 얘기만 지껄이는군. 툴라가 뭐라고 하면서 날 데려오라든?"
"아, 알뤼 여관에 무, 묵는 검은 머리의 여기사를 데, 데, 데려오라고 했어요."
확실히 그녀가 묵었던 여관은 알뤼 여관이었고, 그 여관에 그녀 이외의 '여기사'는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 도시에 묵기로 한 것은 충동적인 결정이었고 겨우 하룻밤이 지난 일일 뿐인데 누가 그 사실을 알고 데려오라는 건지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카시야는 궁금증이 일었다.
"그래. 그 툴라라는 사람 얼굴이나 구경 좀 해보지. 앞장서라."
카시야로부터도 목숨을 부지했고, 툴라의 명령도 따르게 된 남자는 카시야의 마음이 바뀔 새라 서둘러 앞장을 섰다. 힐끔힐끔 뒤를 돌아보긴 했지만 잔머리를 굴릴만한 인사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가 걸음을 멈춘 곳은 뒷골목이면서도 묘하게 행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 거리였다. 뒷골목의 주요 도로라고 해도 좋을 만큼 도로 폭이 넓은 곳이었는데도 썰렁했다. 그는 카시야가 제 뒤에 있는 것을 확인한 뒤 어느 건물의 출입구의 노커를 쳐서 그들의 도착을 알렸다.
끼이이익, 하고 문이 열리자 그는 안쪽의 남자에게 뭐라고 소곤거린 뒤 곧바로 길 저편으로 달아나버렸다. 그리고 건물의 안쪽에 있던 젊은 남자가 카시야를 향해 문을 열어주며 살짝 허리를 굽혔다.
"기다리고 계십니다. 들어가시지요."